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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93화 (93/266)

〈 93화 〉 바이올렛의 무의식 #04

* * *

그리고 1달이 지났다.

우리는 아직 바이올렛의 무의식 내부를 헤매고 있었다. 물론 들어오기 전에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른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씨발 솔직히 이정도로 넓을 줄은 몰랐지.’

전에 들어가 본 인간의 무의식은 이렇게 넓지 않았다. 보통은 기껏해야 2~3일 돌면 끝이었는데, 바이올렛의 무의식 안은 말도 안 되게 넓고 방대했다.

왜 이렇게 무의식의 안이 방대한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하나 추측해보자면...아마 회귀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해봤다.

들어오기 전에는 그냥 15년의 경험이 더 있는 거니까 별 상관없겠지 라고 여겼지만, 생각해보면 바이올렛은 매 회차마다 조금씩 인격도 성격도 다를 수밖에 없다. 나와의 사이가 달랐고, 겪은 이야기들도 다 달랐으니까.

그런데 그런 인격이 겪은 각 경험을 머릿속에 저장하려면, 당연히 뇌에 과부하가 올 테고...그래서 다른 애들이 나를 보자마자 기억을 되찾은 게 아니라 서서히 되찾는 거였나?

아무튼, 너무 길어진 꿈을 헤매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도 무의식에 잡아먹히지 않는 거였다. 내가 사용한 강령술은 일종의 자각몽을 이용한 방법, 그렇기에 지금 이 상황이 꿈이라는 걸 잊으면 내 인격이 바이올렛의 무의식에 녹아 사라질 수도 있었다.

다행히, 내게는 이 순간을 꿈이라고 자각할 좋은 방법이 RC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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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긴급 상황! 히로인을 구출하라!

당신의 히로인 후보들이 악당에게 붙잡혔습니다!

숫사자는 자신의 여인의 위험을 좌시해서는 안 됩니다!

멋지게 붙잡힌 히로인 후보들을 구해내 보도록 합시다!

퀘스트 보상 : 구해낸 각 히로인 후보에 대한 호감도, 상점 포인트.

현재까지 공략한 여성 : 0/3명.

남은 퀘스트 완료 시간 : 00: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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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오늘은 2초 지났네.“

상태창의 퀘스트 창에 보이는 퀘스트 완료 시간. 저걸 24시간 내내 시야의 한쪽에 띄워 놨다. 내가 몽마 대책으로 열심히 익힌 RC는 상태창의 시스템 하나면 대체 가능한 기술이었던 것이다.

“오, 오오! 보세요 스승! 이번에는 제대로 마법의 화살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옆에서 내가 알려준 대로 마법을 연습하던 알‘미라즈가, 자신이 혼자 마력으로 마법의 화살을 만드는데 성공했는지 가슴이 벅찬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 어디 보자...괜찮네. 마법 술식도 맞게 그렸고, 여전히 마력을 좀 과하게 넣어서 술식이 아슬아슬하지만.”

“그래도 드디어 처음으로 혼자 성공한 것 아닌가요! 꺄악! 드디어 저도 싸울 수 있는 것 입니다!”

겨우 1써클 마법에도 저렇게 방방 뛰어다니며 기뻐하는 알‘미라즈의 모습을 보자,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점프할 때 마다 보기 좋게 흔들리는 가슴이 더더욱 내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래서 마리안느 스승이 내 스승님 해줬던 건가.’

1달이라는 시간은 무척이나 길었고, 특히 무의식을 향해 걸으며 알‘미라즈와 할 수 있는 건 별로 많지 않았다. 바이올렛을 구하겠다는 목표로 오기는 했으나, 바이올렛이 보여야 일단 구하든가 할 거 아닌가?

그래서 첫 일주일 동안은 너무 심심해서, 알‘미라즈에게 내가 겪었던 일들의 대부분을 썰로 풀어줬다. 처음에는 말이 너무 많아서 유니코르를 데려올 걸, 하고 후회했지만. 시간이 남아 도니까 역시 말 많고 반응 좋은 후임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고아인데 전산 오류로 군입대 했을 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 나는, 알‘미라즈와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안 친해지면 솔직히 존나 지루한데 어쩌겠는가, 싫어도 친해져야지.

­“저...아르틴님, 그럼 혹시 저한테도 마법을 가르쳐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던 중 2주차쯤 됐을 때였나, 알‘미라즈가 쭈뼛거리며 긴장한 얼굴로 물어왔었다. 내가 갑자기 왜 마법을 배우려는 건지 이유를 묻자, 녀석의 대답은 꽤나 기특했다.

­“이, 인간인 아르틴님도 그렇게 노력해서 강해졌는데! 저도 강해지고 싶습니다! 바이올렛 양과 아르틴님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2주라는 시간은 알‘미라즈에게도 꽤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 근거 없는 자신감과 자의식만 넘치던 악마가, 내적친밀감이 MAX를 찍은 건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상담을 해왔으니까.

그리고 그 이야기가 남일 같지 않았다. 늘 또래 애들보다 뒤떨어져 친구도 많지 않았고, 그럼에도 남들의 기대는 충족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 언제나 혼자 연습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현실의 양희민의 기억과 우르반 헬릭 교수님에게 검을 배우던 아르틴의 기억을 자극했다.

그래서 가르쳤다. 어차피 바이올렛을 찾기 전에 남는 것은 시간밖에 없었고, 이 녀석이 강해지면 바이올렛에게도, 나아가 나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오늘 드디어 그 결실이 열매를 맺은 것 이다.

“정말 놀랍습니다 스승님! 지옥에서 내로라하는 상급 악마들에게 가르침을 받아도 늘지 않던 마법이! 스승님에게 배우니까 1달도 안 지났는데 가능해 졌습니다!”

“악마는 태생적으로 권능과 마법을 쓸 줄 아니까. 걷는 법도 모르는 애한테 뛰는 법부터 가르치는데 될 리가 없지.”

깡총거리며 주변을 뛰어다니던 녀석이 다가와서 호들갑을 떨자, 나는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해줬다. 실제로 알‘미라즈의 재능은 딱 평균정도였다. 마법에 재능은 있지만 배우지 않은 인간 평균.

문제는 이 녀석이 악마라는 거였다. 악마가 마법을 못 쓴다는 건 물고기가 아가미 호흡을 못하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지만, 녀석의 경우는 타고난 마력이 너무 강력했던 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1이면 충분할 마력을 10이고 100이고 때려 박아대니 마법이 될 리가 없다. 그래서 이 3주 내내 나는 녀석에게 힘조절 하는 법을 가르쳐줬다.

“앞으로도 마법을 사용한 그 감각을 잘 기억해둬. 넌 타고난 마력량은 많으니까, 마법 술식들만 너한테 맞게 개량해서 사용하면 금방 강해질 수 있을 거야.”

“헤흥, 늘 퉁명스럽게 말하시면서 사실은 엄청 상냥하시네요. 스승님!”

“내가 퉁명스럽게 말한 건 네 끔찍한 마법 실력을 좋게 만들기 위한 채찍질이었단다.”

알‘미라즈가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자, 머리를 쓰다듬는 걸 멈추고 대신 검지로 이마를 뒤로 쓰윽 밀었다. 녀석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이마를 쓰다듬으며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매번 말은 그렇게 하면서, 제가 잘 때 마다 저를 위해서 마법을 개량해 주신 걸 모를 것 같아요?”

아니? 그걸 들켰다고? 나는 얼굴이 조금 화끈거려서 고개를 돌렸다. 맨날 꿈속에서도 코까지 골아 가면서 잘 자길래 모르는 줄 알았는데...

“역시 스승님은 본인이 말하시던 츤데레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내가 츤데레면 바이올렛에게 먼저 고백해서 사귀자고 했겠니?”

“그럼 왜 저에게 쌀쌀맞은 척 하면서 이렇게 열심히 도와주십니까?”

그 말에 나는 주변의 아른거리는 바이올렛의 무의식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무의식의 꽤 깊은 곳 까지 들어왔는지, 조금 시선을 집중하면 바이올렛의 수많은 기억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기억들은...나에 대한 기억들뿐이었다. 나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작은 기억이나, 나는 알지 못했던 내 모습들 까지 세세하게 기록된 기억들.

“...나는 깜짝 놀랐어. 바이올렛이 나를 늘 도와주고, 동기를 부여해준 건 알았지만 이정도로 많은 도움을 받아 왔다는 걸, 여기서 보고 깨달았거든.”

“응?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나는 어리둥절해 하는 알‘미라즈의 눈앞에, 바이올렛의 기억들을 펼쳐보였다.

“내가 2회차 때, 유니코르한테 신성 마법을 배우기 전까지 늘 붕대를 감아주고 날 도와줬던 것도.”

“내가 3회차 때, 마법에 능숙해질 수 있게 자신의 시간을 투자해가며 도와줬던 것도.”

“내가 4회차 때, 마리안느 스승에게 전투술을 배울 때 열심히 도와줬던 것도.”

전부 바이올렛이었다. 나는 내 자각보다 더 많은 도움을 받아오고 있었고...그렇기에 지금의 아르틴 루드비히가 될 수 있었던 거다.

“내가 아파서 앓아 누울 때면 늘 가장 먼저 와서 스프를 끓여준 것도 바이올렛이었어. 호박스프가 늘 참 맛있었는데.”

“...스승님.”

“그래서, 널 도와주는 거야. 내가 도움 받은 만큼 남에게 베풀어야 제대로 된 놈이지. 전에도 말했듯이 널 도와주면 바이올렛을 도와주는 거기도 하고.”

참나, 내가 또 무슨 이야기를 구구절절이 늘어놓는지 모르겠다. 한 달 째 꿈속을 떠돌아다니고 있으니까 나쁜 버릇이 들어버린 것 같네.

“과연. 그렇군요. 스승님.”

그때, 녀석은 뭔가를 이해했다는 듯이 나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저 근거 없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볼 때 마다 헛소리를 내뱉던데.

“그건 즉, 다른 여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저에게 사랑에 빠진 거군ㅇ...꺄항?!”

“헛소리 할 때 마다 한 대라고 내가 말 했지.”

찰싹──!!

경쾌한 엉덩이를 후려치는 손바닥 소리가 울려 퍼지자, 알‘미라즈는 야릇한 신음소리를 내더니 자신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나를 째려봤다.

“이런 건 인간 세상에서는 성추행 아닙니까...! 부도덕합니다 스승님!”

“악마한테 부도덕하다는 소리는 칭찬 아니야?”

저번에도 말했듯이, 예절을 가르치는데 있어서는 적당한 물리력을 동반하는 게 최고다. 특히나 알‘미라즈처럼 상습적으로 헛소리를 하는 경우에는 매가 약이지.

‘..그런데 요즘은 묘하게 반응이 다르단 말야.’

전에는 깜짝 놀라거나 아파서 햐긋?! 하고 소리를 지르는 느낌이었는데, 요즘은 묘하게 헛소리를 하면서 반사적으로 내 쪽을 향해 엉덩이를 내미는 것 같ㅇ...아니 착각이겠지? 설마.

“됐고 잠이나 자라. 내일도 내내 걸어야 하니까.”

“흥! 안 그래도 잘 겁니다!”

녀석이 심술이 난 표정으로 등을 돌리고 누워 잠들자, 조금 적막이 흐르기 시작했다. 사실 잠은 꼭 자지 않아도 된다. 그냥 꿈속인 만큼 오래 걷는다고 피곤한 것도 아니고, 자지 않는다고 피곤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잠을 자는 건, 일종의 정신 건강을 위한 루틴이었다. 나는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알‘미라즈는 한 4일 잠도 안자고 걷자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게 눈에 보였으니까.

‘...바이올렛 추억이나 좀 더 보다가 알’미라즈 깨면 출발할까.’

나는 알‘미라즈의 옆에 드러누워, 텅 빈 하늘에 나와 바이올렛의 추억을 펼쳤다.

‘이번에는...2회차 때, 같이 던전에 들어갔다가 낙오됐을 때잖아.’

저때는 유니코르랑도 떨어져서, 바이올렛이랑 분위기 참 좋았는데. 저 때 고백을 했으면...아니, 동정인 내가 그렇게 쉽게 고백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결국 루시한테도 고백도 못하다 죽었는데...바이올렛은 그 이후에 어떻게 했으려나. 슬퍼했겠지.’

요즘 매일같이 바이올렛의 추억을 보면서 마음을 달래고 있다. 그래서 일까, 날이 가면 갈수록 더더욱 바이올렛이 보고 싶다.

‘..이번 생에는, 아니 이번 생 이후로는 진짜 잘 해줘야지.’

바이올렛의 기억 속에서 바이올렛은, 늘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 슬픈 표정뿐이었다.

언더월드로 향할 때, 종교재판소로 향할 때, 마왕성으로 향할 때. 그때 마다 결국 바이올렛은 같이 하지 못하고, 내가 죽은 후의 세계에서 무슨 풍경을 봤을까.

...네가 보던 풍경은 분명 슬픔으로 가득 찼을 것 같아. 네가 나보다 먼저 죽었다면, 내 세계가 무너질 듯이 슬플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꼭 널 구해줄게 바이올렛.’

나는 알'미라즈가 깨어날 때 까지, 기억 속에서 환하게 웃는 바이올렛을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나도 모르겠다. 웃고 있을까, 슬퍼하고 있을까.

**

바이올렛은, 눈을 감고 기대어 누워있었다.

얼마 전 까지 느끼던 고통도, 슬픔도 이제는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이 꿈꿔왔던 것을, 이곳에서는 현실로 이룰 수 있었으니까.

“자, 좀 더 어깨에 기대도 좋아. 바이올렛.”

“이대로 쭉 같이 있자. 그거면 충분하잖아.”

“...사랑해, 바이올렛.”

그녀의 곁에는 아르틴이 있었다. 마치 인형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며, 초점이 흐린 눈으로 바이올렛만을 바라보는, 만들어진 아르틴이.

끝없는 악몽 속에서, 바이올렛은 스스로 만들어 낸 무의식의 고치에 둘러싸인 채로 잠에 들었다.

“이제 우리는 영원히 함께야. 바이올렛.”

이 고치 안에는 악몽도 비극도 없었다. 오직 자신과 아르틴의 행복한 시간만이 남아 끝없이 이어졌다.

자신이 만들어낸 아르틴이 내뱉는 감정이 없는 속삭임이, 지금의 바이올렛에게는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이자 유일한 구원이 되었다.

살짝 잠에서 깼던 바이올렛은 아르틴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다시 곤히 잠들었다. 마치 왕자님을 기다리는 잠든 공주처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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