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96화 (96/266)

〈 96화 〉 고치 속의 번데기는 나비의 꿈을 꾼다

* * *

릴리트는 인간의 정신을 망가트리는 데에 있어서 최고의 전문가였다.

역대 검성들도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천외천이라 불리던 검사도, 복수심 하나로 악마와 계약해 과거 식탐의 권속을 죽인 계약자도, 마왕군을 한때 파멸로 몰아갔던 드워프들의 위대한 상왕도, 전부 그녀의 손에 의해 망가지고 말았다.

수많은 영웅들을 타락시키는 그 과정에서, 릴리트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알아냈고 그 방법은 앞서 말한 위대한 자들에게도 여지없이 효과적이었다.

처음에는 그들의 불행한 과거, 혹은 트라우마를 끝없이 자극한다. 생각보다 여기서 무너지는 이들은 많았다. 마왕이 있기 전부터 전쟁이 계속되던 세계인만큼, 모든 인간은 자신의 품에 상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외는 있기 마련, 유대니 정의니 의무 같은 알량한 가치를 내세우며 견디는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은 정신력이 강한 만큼 단순한 악몽으로는 에고를 정신세계에 가둬둘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정신력이 강한 이들을 붕괴시킬 수 있을까? 고민한 릴리트가 내놓은 답은 간단했다. 그들을 지지하는 그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부정적인 기억이 아니라, 행복한 기억과 감정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외부의 자극에 수비적인 자세 일변도를 유지하던 이들도 행복이라는 감정에서는 느슨해지기 마련, 친구와의 유대 따위나 사랑하는 사람을 등장시키면 더욱 좋다.

그 이후는 간단하다. 아주 서서히 좋았던 기억들을 왜곡시킨다. 추억 그 자체에 트라우마가 깃들 게 만들고, 신념에 의혹을 불어넣으며 사랑하는 사람의 부정적인 면을 끄집어낸다.

그렇게 자신을 지탱하던 기둥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하는 순간, 사람의 무의식은 어김없이 두 가지 행동 중 하나를 취한다.

무너진 정신채로 꿈에서 깨어나 광기에 물들거나, 혹은 무의식의 안에 커다란 방벽이나 고치를 만든 후 그 안으로 파고들어 꿈속의 꿈에 잠들게 된다. 그럼 자아가 잠든 현실에서는 영원히 폐인이 되는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바이올렛의 안 좋은 기억을 건드리고, 좋은 기억도 변질시키고, 그 끝에서 마지막 남은 아르틴이라는 남자에 대해 악의를 품게 하는 순간 바이올렛은 꿈속의 꿈에 영원히 잠들게 되리라.

“그래야 하는데...왜 안 되는 거냐고?!”

바이올렛의 무의식에 권능의 형태로 깃들어 있는 릴리트의 아주 작은 일부는, 고치 안의 바이올렛을 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인 고치안의 시간은 꿈의 시간보다 훨씬 느리게 흘러간다. 릴리트의 파편은 자신의 기준으로 벌써 1년 가까이 바이올렛의 정신을 망가트리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시도가 불가능했다. 모든 과정을 거쳐 고치를 만들게 하는데 까지는 성공했지만, 이 아르틴에 대한 남자에 대해 악의를 가지게 하려는 모든 시도가 수포로 돌아갔다.

“따돌림도 안 돼, 폭력을 써도 안 돼, 바람을 펴도 안 돼, 관심이 없게 만들어도 안 돼,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데?!”

바이올렛을 영원히 잠재우려면 꿈속의 꿈이 완벽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바이올렛의 바깥에 대한 모든 집착을 끊어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매번 일정 수준 이상의 정신적인 고통을 가할 때 마다, 바이올렛은 저항했다. 마치 이 남자와의 기억이 뭐라도 되는 냥 날뛰려고 할 때 마다, 결국 포기하고 아르틴의 환영으로 다시 다정하게 잠재우는 것을 반복해야 했다.

더욱 열 받는 사실은, 꿈속의 침입자인 아르틴 일행을 방해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해 아르틴과 알‘미라즈를 방치해야만 했다는 사실이었다.

“왜 제가 만든 환영이 한 눈만 팔면 제 말을 안 듣고 날뛰는 건가요!?”

바이올렛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환영들은, 전부 릴리트의 권능으로 변질되어 꿈의 주인을 고통스럽게 해야 한다. 아르틴의 환영만큼은 매 순간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바이올렛을 도우려고 하고 있다.

[너는 너무 걱정이 많아서 탈이라니까. 나를 믿는 만큼, 스스로를 믿어 봐.]

“또! 또! 당장 침입자를 배제하러 가야하는 데 왜 환영 따위가 방해인가요!!”

그 같잖은 줄다리기가 이어진지 바이올렛의 시간으로 1년, 이제는 정말 아르틴의 일행이 무의식의 고치 바로 앞까지 들이닥쳤다. 더 이상 꿈속에 잠들게 할 여유는 없었다.

“꺄악! 이젠 전부 귀찮아!! 회복에 시간이 걸리니 여태껏 힘을 아꼈지만, 이제는 파편인 제 모든 권능을 써서라도 정신을 붕괴시키겠어요!”

릴리트의 파편은 바이올렛의 정신이 붕괴되는 순간 무의식에 깃든 자신도 소멸하리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허나 높은 자존심은 자아의 죽음보다 실패를 허락하지 않았다.

꿈속에 들어온 자신의 부하들과 자신을 희생시킬 것을 각오한 릴리트의 파편이, 자신의 남은 모든 권능을 바이올렛에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분개하는 릴리트의 표정과는 별개로,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바이올렛의 표정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

바이올렛의 어린 시절은 고독한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유일한 친족인 할머니에게는 사랑 대신 기대만을 받았으며, 마녀 언니들도 근본적으로는 타인임을 너무도 일찍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바이올렛의 고독함을 달래줬던 것은, 기억도 나지 않는 아기일 때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직접 만들어 준 한편의 동화책이었다.

동화책 속 주인공의 이름은 바이올렛, 자신과 같은 이름을 지닌 핑크색 머리의 여자아이로, 무려 마법왕국의 공주님이었다! 바이올렛이 아주 어릴 적에는 동화속의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했지만, 유치가 다 빠질 나이가 되자 그러지 못했다.

동화책 속의 바이올렛은 만인에게 사랑받았다. 한 나라의 멋진 공주님이었으며, 백성들을 괴롭히는 못된 악당들을 직접 혼내주는 강한 마녀였다. 거기에다가 동화의 마지막에, 주인공 바이올렛은 키크고 잘생긴 멋진 왕자님과 결혼을 하는 행복한 아이였다.

...그에 반해 현실의 바이올렛은 조금 달랐다.

성녀 올가처럼 만인에게 사랑받는 인물이 아니었다, 황녀 아그네스처럼 한 나라의 멋진 공주님도 아니고, 천재 샤오메이처럼 멋지게 악당들을 물리치는 여인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바이올렛은 더더욱 노력했다. 할머니에게 인정받기 위해, 동화책 속의 멋진 바이올렛처럼 되기 위해 스스로를 다그치며 매순간 최선을 다해왔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은 마치 부질없다는 듯이, 기대에 비해 보잘 것 없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마녀라면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는 자신의 ‘색’을 각성하는 것으로 자신의 머리색이 변한다. 그중에서도 일곱 개의 대마녀의 혈통은 특별했다. 자신의 할머니인 발부르가 퍼플크로우는 머리의 절반이 보라색으로 물들지 않았는가.

바이올렛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직전까지 단 한 가닥의 머리카락도 보라색으로 물들이지 못했다. 바이올렛이 마녀들의 교육에서 벗어나 아카데미로 향한 것은, 실망한 할머니의 시선을 더 이상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매 회차마다 조르바의 친목에 대한 권유를 거부하지 않은 것은 바이올렛 스스로 너무 지쳐서, 쉬고 싶다는 생각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바이올렛은 지쳐있었다.

그렇게 모이게 된 친목회는, 점점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조르바가 데려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사람들 투성이 였으니까.

어머니가 그려준 동화책의 왕자님처럼 완벽한 카이엔, 1학년 최고의 천재라 평가받는 샤오메이, 아그네스 황녀님은 말할 것도 없으며 거인 살해자 마리안느 왕녀에 진짜 왕자님인 오지에 왕자까지.

친목회의 사람들은 그저 위대한 대마녀인 할머니의 손녀일 뿐인 자신이 곁에 있기에는 너무 대단하고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오직 단 한사람을 빼고.

아르틴 루드비히. 재능도 미천하고 키도 작으며, 다른 남성진에 비하면 멋지다기 보다는 귀엽다고 말하는 게 어울릴 유일한 범재.

자연스레 바이올렛은 아르틴에게 내적친밀감을 가지게 되었다. 전부 동화책 속에서 나온 사람들처럼 느껴졌지만, 오로지 아르틴만이 진짜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친해진 만큼 두 사람은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되었다. 앞서 꿈속에서 본 것처럼, 같이 공부를 하고, 같이 대화를 하고, 늘 노력의 대가로 다치거나 힘들어하는 아르틴을 바이올렛이 보살피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바이올렛의 안에 보석처럼 빛나는 추억으로 남았다.

...물론 아르틴이 사실 늘 좋은 모습만을 보여줬던 것도 아니다.

어떨 때는 자신이 놀랄 정도로 욱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며, 어떨 때는 알아듣기도 힘든 거친 말이나 이상한 단어로 혼란스럽게 만들었으며. 어떨 때는 유난히도 힘든 모습을 보여줬고, 어떨 때는 못난 모습을 보여주며 실수를 남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모습이 바이올렛에게는 싫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아르틴의 모습들을 보며, 같이 역경을 이겨낼 때 마다 도리어 아르틴이라는 작은 남자아이가, 자신의 마음속에서는 더더욱 크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자각은 못했지만, 바이올렛은 단순히 3회차에만 반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매 회차를 강렬히 기억하는 것은, 매 회차의 아르틴에게 자신의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은 왕자님, 동화책 속의 왕자님처럼 멋지지도 완벽하지도 않지만, 자신을 늘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아무리 힘들어도 곁에 있는 것만으로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나만의 왕자님.

*

릴리트의 파편이 전력을 다해 괴롭히기 시작하자, 바이올렛은 견디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악몽을 겪고 있었다.

“아아악─!! 바이올렛!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아르틴이 손톱을 뽑히고 손가락이 꺾이는 고문을 당하는 모습이, 고통스러워하는 아르틴의 비명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너 같은 못난 년을 손녀라고 키웠다니, 내 삶이 정말로 수치스럽구나.”

자신을 경멸하는 할머니의 눈빛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할머니는 그 말을 내뱉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우왓, 정말로 오라버니가 당신을 좋아해서 고백했다고 생각해요?”

“바이올렛, 당신은 정말 주제도 모르는 멍청한 여자군요.”

아그네스와 샤오메이의 독설은 가슴을 칼로 베는 것처럼 아팠다. 그녀들은 계속해서 자신을 비웃었다.

끔찍했다, 고통스러웠고, 자신의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이올렛의 정신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연약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바이올렛은 모든 것을 놓아버릴 것 같을 때 마다 아르틴이 떠올랐다. 아르틴은 실제로 죽음을 겪고도 다시 만날 때에는 자신들을 바라보며 웃고 격려하며 밝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것은 분명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 끔찍한 죽음들 속에서 아르틴은 자신들을 원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도, 아르틴처럼 되고 싶어.’

릴리트의 파편이 바이올렛을 괴롭히기 위해 아르틴을 떠오르게 할수록, 바이올렛은 아르틴이 얼마나 힘든 삶을 견뎠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 꿈속에서의 1년이라는 시간은, 바이올렛의 정신을 고통과 이해로 담금질 하는 과정이 된 것 이다.

‘동화책 속의 바이올렛처럼 당차고 멋진 여자아이가 되어서, 아르틴의 힘이 되주고 싶어,’

지옥 같은 악몽의 연속에서, 바이올렛이 바란 것은 다른 이들처럼 더 이상 상처받기 싫다는 좌절이 아니었다.

──그녀가 바란 것은, 릴리트가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은 희망을 꿈꾸는 것이었다.

“보고 싶어, 아르틴.”

──두근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 바이올렛을 감싸고 있던 고치가 맥동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적막이 찾아왔다.

──콰지직

나비가 되는 것을 겁내던 번데기가, 고치를 깨고 날개를 펼치고자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잠깐 기다려! 뭘 하는 거냐! 너 때문에 내가 죽었는데! 너는 뭘 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민폐야!”

­“겁먹지 마, 너는 누구보다도 강해질 수 있는걸? 내가 그럴 수 있게 도와줄게.”­

아르틴의 환영이 비난하는 소리가, 과거 아르틴의 응원하는 목소리에 묻혀 지워지기 시작했다.

“안 돼! 아직 안 끝났어! 감히 건방진 마녀나부랭이가 내 권능ㅇ...”

──서걱!

그때, 무언가 베이는 소리와 함께 고통스러운 여인의 단말마가 울려퍼졌다.

어둠이 찢어지며, 새하얀 빛이 그 찢어진 틈새로 비추기 시작했다. 그 빛이 너무 눈부셔서, 바이올렛은 자신의 눈을 가려야만 했다.

동시에 자신을 매도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빛의 틈새의 너머로 저릿한 피비린내가 코를 강하게 자극했다.

바이올렛은 이것도 악몽인가?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이 순간이 악몽이라기에는 자신을 향해 비추는 빛이 너무나도 따스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미녀는 잠이 많다지만, 너무 늦잠을 잤잖아 바보야.”

익숙한 목소리, 언제나 따스하게 인사를 건네던 목소리가 빛의 너머에서 들려왔다.

“──데리러 왔어, 바이올렛. 꿈에서 깰 시간이야.”

빛의 건너편에서,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바이올렛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손을 마주잡자, 따뜻한 손이 바이올렛을 어두운 무의식의 끝에서 끌어냈다.

“잘잤어?”

“....응.”

피와 상처로 뒤덮인 아르틴이 상냥하게 묻자, 바이올렛은 차오르는 눈물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나긴 악몽이 끝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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