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vs몽마군주 릴리트#02
* * *
촤아아악──!!
나는 무너져가는 고치를 칼로 찢어낸 후, 바이올렛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밖이라고 해봤자 아직 무의식의 안이었지만.
내가 고치 안에서 걸어 나오자 밖에서 도망치는 꿈아귀들의 퇴로를 막은 후 뒤처리를 하던 알‘미라즈가 몽마와 아귀들의 시체를 헤집으며 황급히 달려왔다.
“스승! 바이올렛 양의 상태는 어때?”
“괜찮아, 멀쩡해. 다행히 늦지 않았나봐.”
나는 몽마들의 피로 물든 손을 마법으로 깔끔하게 씻어낸 후, 내 품안에서 기절하듯이 눈을 감고 있는 바이올렛의 볼을 어루만졌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아직 자고 있는 거 아니야..? 의식이 없어 보이는데?”
“아니, 몽마의 권능은 확실하게 끊어냈어. 지금은 그냥 정신적인 피로로 지쳐 잠든거고.”
내가 릴리트의 파편의 목을 썰고 고치를 열고 들어가자, 바이올렛은 나를 보며 눈물을 흘리며 환하게 웃어줬다. 그 직후 정신을 잃고 쓰러지긴 했지만, 몽마의 정신 공격을 몇 달, 혹은 그 이상을 견뎌냈을 테니 자연스러운 일일터.
“..열심히 견뎌내 줬어, 힘들었을 텐데.”
바이올렛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자,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만해도 몽마들의 정신공격에 대해 내성이 생기기 전까지는 정말 죽을만큼 힘들었다.
나는 바이올렛의 머릿결을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마족과 마물들의 피로 물들지 않은 깨끗한 바닥에 천천히 바이올렛을 눕혔다.
“...저, 스승님?”
“응? 왜?”
“저도 이번 싸움 많이 힘들었고 견뎌냈는데...“
그렇구나. 말 놓은 후로 잘 쓰지도 않는 존댓말을 왜 쓰나 했더니.
내가 그 말을 듣고 알‘미라즈의 머리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자. 알’미라즈는 뭔가 잔뜩 기대한 얼굴로 눈을 감으며 내게 머리를 살며시 가져다 댔다.
꽁!
“아팟!? 왜 때리는 거야!”
“몽마들은 전부 내가 썰고 권능도 내가 부셨는데, 마나통 때문에 전신이 아픈 스승님한테 마력도 팔팔한 녀석이 앙탈부리는 게 괘씸해서 그런다.”
알‘미라즈는 그 말에 입을 삐쭉 내밀며 너무해..라고 중얼거리며 이마를 손으로 문질렀다.
하지만 내 몸은 정말로 마나통으로 반쯤 죽어가는 상황이었다. 꿈아귀들과 몽마와의 싸움은 생각보다 치열했다. 릴리트의 권능과의 1:1 전투는 나라도 오우거의 피를 준비하지 않았따면 어려웠을 터. 마나는커녕 젖먹던 힘까지 다 끌어내 싸웠다.
거기에 유니코르랑 계약한 후로 마나통을 느낀적이 없던 터라, 솔직히 죽을 맛에 가까웠다. 바이올렛의 앞에서는 멋지게 보이고 싶어서 티를 내지 않았을 뿐.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허리를 쭉 펴 스트레칭을 조진 후, 여전히 연결 된 손목의 마나끈을 바라봤다.
“그럼 우리는 돌아가자. 이제 바이올렛은 이대로 두면 곧 깨어날 거야.”
“어라? 직접 데리고 가는 것 아니었어 스승님?”
“지금 직접 데려가면 무의식과 현실의 괴리가 커져. 바이올렛이 직접 적응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줘야해. 게다가 바깥에서도 싸우고 있는 것 같으니 도와주러 가야지.”
전문적인 용어를 쓰면 1시간 정도 걸리며 복잡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내가 간단하게 설명하자 알‘미라즈는 일단 얼추 알아 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괜찮을까? 이대로 혼자 두고 가는 게 조금 걸리는데..”
“괜찮아. 그 릴리트의 권능도 잘 견뎌내 줬잖아. 혼자서 깨어날 수 있을 거야.”
그 악독한 몽마의 괴롭힘도 견뎌낸, 멋지고, 강하고, 굳센 여자니까. 나는 바이올렛을 믿고 있었다. 언젠가 그 날개를 활짝 펴고, 자신감 넘치는 바이올렛으로 돌아올 거라고.
“돌아가자. 내 손 잡아 알‘미라즈.”
“아앗! 아, 알았어 스승님!”
녀석이 얼굴을 붉히며 손을 잡아오는 모습을 보자, 조금 앞날이 막막하기는 했다. 이제는 악마도 꼬시냐고 유니코르한테 혼나면 어쩌지?
‘..어떻게든 되겠지?’
아직 호감도 100이라는 상태창도 안 떴고, 깊게 생각해서 하렘을 어떻게 해먹겠어.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자.
...나는 반쯤 포기하는 마음으로, 현실로 돌아가는 마법을 영창했다.
**
“이게 뭐야 씨발.”
현실로 돌아온 내가 침대에서 눈을 뜨자 본 풍경은, 마치 전쟁터처럼 참혹한 광경 그 자체였다.
“키야아아아악!!!”
“감히 어딜!! 본좌에게 닿을 것 같으냐!!”
유니코르는 방문을 지키고 서서 미친 듯이 몰려오는 중급 마물들의 머리통을 날리거나 사지를 찢어내고 있었다.
“이 건방진 악마가 치트키를 또 써요!? 어디 이것도 해제할 수 있는지 볼까!!”
거기에 어째서인지 아까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시르카가, 수십 개의 마법진에서 마족의 마법을 난사하고 있었다.
“후후, 잠은 잘 잤느냐 아르틴? 조금 시끄러워서 깼느냐?”
“...바이올렛? 아니, 메피스토지?”
“아직은 짐이다. 그나저나 그대가 만들어 준 이 지팡이는 참 편리하구나, 드래곤 하트가 무려 2개라니.”
바이올렛메피스토는 내가 바이올렛을 위해 만들어 준 듀얼코어 드래곤 하트 지팡이를 휘둘러, 시르카가 만들어낸 모든 마법을 제거하는 것도 모자라 유니코르의 빈틈을 노리는 마물을 한 순간에 가루로 만들었다.
“시르카는 왜 저기 있어? 게다가 아까보다도 훨씬 강하잖아..?”
“짐이 바이올렛에게 깃든 것처럼, 저 마족도 자신의 권속에게 깃든 것 같더구나. 그래도 저 되다만 바이콘의 입담에 이성을 잃었지만 말이다.”
유니코르는 또 무슨 입딜을 넣은 걸까, 내가 어질어질 거리는 머리에 미간을 찡그리자 메피스토가 지팡이를 내게 넘겼다.
“...이건?”
“바이올렛이 곧 깨어날 테니, 짐은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짐도 그대와 쭉 같이 있고 싶지만..계약이 그러니 어쩔 수 없구나. 이미 한계까지 힘을 쓰기도 했고.”
메피스토는 아쉽다는 얼굴로, 이제 막 잠에서 깨서 정신을 못 차리는 알‘미라즈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확실히 메피스토는 바이올렛과의 계약에서 쓸 수 있는 권능과 마력을 한계까지 전부 사용한 건지, 존재감이 많이 약해진 것이 느껴졌다.
“...고마워, 다음에 보게 되면 이 보답은 할게.”
“당연하지, 그대와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고 할지라도. 악마와의 관계에는 언제나 대가가 필요한 법이다.”
보통 악마라면 여기까지 해줄 의무는 없다는 걸 알기에 내가 고마움을 표하자, 메피스토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당당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럼...다음에는, 좀 더 로맨틱한 만남을 기대 하마, 아르틴.”
“로맨틱은 무슨...다음에도 장난치면 정말로 꿀밤을 때릴 줄 알아.”
내가 으름장을 놓자, 그것마저도 메피스토는 즐거운 대화였는지 미소를 지으며, 이내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 동시에 보라색으로 물들었던 바이올렛의 머리카락이 다시 핑크색으로 되돌아 가기 시작했다.
“반려자여! 지금 중요한 장면인 것은 알겠지만 본좌가 너무 힘들구나! 빨리 도와주지 않겠느냐?!”
“..뭐, 좋아. 할 일 해야지. 알‘미라즈!”
“응! 스승님!”
내가 지팡이를 들고 침대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오자, 시르카릴리트는 그 모습을 보더니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꺄하하! 드디어 그 망할 악마가 지옥의 구렁텅이로 돌아갔군요! 그런 지팡이 하나 들었다고 변변찮은 토끼 악마랑 되다만 바이콘으로 절 막을 수 있을 것 같나요?”
그 말을 확실히 타당했다. 각성도 못 한 잡캐에, 계약자가 잠든 악마, 릴리트가 보기에 제대로 된 전투원은 유니코르 하나 뿐이겠지.
“릴리트 너, 보기보다 멍청하구나?”
“...뭐? 멍청? 지금 저보고 백치미도 아니고 멍청하다고..?!”
“자기가 설치해 둔 권능이 무력화 됐는데 눈치도 못 챈 년을 그러면 뭐라고 불러야 할까?”
“...뭐라고요? 제 권능을..?”
한 번 떠봤는데, 확실히 릴리트는 자신의 악몽의 권능을 내가 깨트렸다는 사실도 모를 만큼 전투에 집중하고 있었던 듯하다. 본신의 1%의 힘도 못 내는 메피스토가 그 만큼 위협적이었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권능을 한 명이 파훼하면 전부 다 깨지도록 만들어두는 얼간이가 어딨냐?”
“.그야 당연히 파훼할 사람이 있을리...정말 제가 발동시켜둔 권능이 사라졌잖아요?!”
“우리는 그런 걸 백치미가 아니라 빡대가리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그래서 뭐! 지금 이 상황이 변하기라도 할 것 같나요?”
촤르르르륵!
시르카의 등 뒤로 거대한 마법진이 5개가 생성되었다. 내가 보기에는 저 마법진은 한 개 한 개가 전부 7써클 이상의 마법에 준하는 대마법으로 파악했다.
“그 강력한 대악마가 없는 한 당신들 네 사람은 이 자리에서 제게 죽을 목숨인데!”
“그것도 틀렸어, 멍청한 년아.”
“뭐라고요?!”
“넷이 아니라, 다섯이거든.”
당당한 내 미소에 릴리트는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지만, 녀석은 아직도 알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왜 지금 이빨을 까고 있겠어? 시간 벌려고 지.”
...내가 바이올렛을 구출하기 위해 몽마의 권능을 깨트리는 순간, 내가 현실의 시간을 파악하기 위해 늘 시야 한쪽에 켜놨던 퀘스트 창이 변화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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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긴급 상황! 히로인을 구출하라!
당신의 히로인 후보들이 악당에게 붙잡혔습니다!
숫사자는 자신의 여인의 위험을 좌시해서는 안 됩니다!
멋지게 붙잡힌 히로인 후보들을 구해내 보도록 합시다!
퀘스트 보상 : 구해낸 각 히로인 후보에 대한 호감도, 상점 포인트.
현재까지 공략한 여성 : 1/3명.
남은 퀘스트 완료 시간 : 00:3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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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시르카와 싸우고 있었을 때, 바이올렛은 릴리트에게 아직 당하기 전. 그 말은, 마지막으로 붙잡힌 3번째 히로인은 나를 구출하기 위해 들어온 사람 중 하나라는 것.
“유니코르, 뒤로 물러나.”
그리고 내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지금 이쪽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기척이, 내게는 확실히 느껴졌으니까.
“우리 파티의 전위가 왔으니까.”
“그게 무슨 개ㅅ...”
유니코르가 내 말을 듣고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며 시르카릴리트의 표정이 의아함으로 물드는 순간.
마귀들로 가득 찬 복도의 반대편 끝에서부터, 간지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사검 ─ 돌풍?風
──콰아아앙!!!
응집한 마나를 터트리며, 복도 전체를 순식간에 가로지른 남자의 검이, 수많은 마물들과 릴리트시르카의 몸, 그녀가 영창한 마법까지 단번에 베어내었다.
“꺄아아아악?!”
마물들을 주검으로 만든 무시무시한 칼바람은, 우리의 앞에서 마치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멈춰 섰다. 녀석은 늘 그랬듯이, 치트키와 템빨을 여러 개 갖춘 나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했다.
“역시, 파트너야. 내가 올 거란걸 미리 알고 있었구나.”
“...카, 카이엔?! 그대가 도와주러 온 것이냐!”
여태까지 홀로 마물을 앞에서 상대하던 유니코르의 표정이 급격히 환하게 밝아졌다. 카이엔 녀석도 나를 향해 나긋한 미소를 지으며 반가움을 표시하고 잇었다.
──하지만 내 표정은 실시간으로 굳어가고 있었다.
‘왜 샤오메이가 아니라 카이엔이 거기서 나와?’
내가 생각한 3번째 히로인은, 용사 카이엔이 아니라 내 연인이자 1학년 최고의 무력인 샤오메이였으니까.
‘....잠깐만, 히로인?’
나는 상태창을 다시 확인했다. 3번째? 히로인이라고? 저 새끼가?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면 부끄러운데. 파트너.”
카이엔이 나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이런 씨발.”
나도 모르게 욕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이 좆같은 상태창이 나를 BL드리프트의 화신으로 만들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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