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숫사자는 언제나 시험을 받는다
* * *
타다다닥!
수풀을 해치며 다급하게 뛰어가는 한 여학생, 그리고 그 뒤를 도축업자 복장을 하고 있는 한 거한이 뒤쫓고 있다.
“헤헤! 이 근처는 우리 형제의 영역이라고! 도망쳐봤자 손바닥 안이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누가! 꺄악!”
휘리릭!
주변을 향해 소리치며 달리던 한 여학생은, 결국 발밑에 깔린 올가미 함정을 알아차리지 못해 도축장의 돼지처럼 나무에 거꾸로 매달리고 말았다.
“흐하하! 거봐! 내가 뭐랬어? 우리 챠우 형제에게서 벗어나는 건 무리라니까!”
남자가 여학생을 향해 다가가자, 거대한 풍채와 쫙 찢어진 눈매가 돋보이는 남자의 모습이 달빛에 드러났다. 물론 달빛이 없더라도 온 몸에 짐승의 피로 스며있는 피냄새는 감출 수 없었지만.
[동생! 그 쪽으로 간 계집은 잡았나?]
“응! 형님! 살이 적당히 오르고 토실토실한 게, 우리가 발견한 인육요리 비법서 재료로 최고인 것 같아!”
그 말에 여학생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여학생의 공포에 질린 모습에 아카데미의 쌍둥이 도축업자 중 동생인 챠우 진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저는 맛없어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맛이 없기는! 살이 이렇게 포동포동하게 올랐는데! 비법서에도 보기 좋은 애들보다 먹음직한 애들을 쓰라고 했거든!”
“제발! 누가 좀 살려주세요!!!”
챠우 진이 입맛을 다시자, 여학생은 다시 주변에 울부짖듯이 외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시간에 이 주변에 오는 아카데미의 사람은 없다.
“다들 이런 누추하고 더러운 곳은 오기 싫다는 거지. 응? 너희 학생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게 누구 덕인데! 계속 시끄럽게 굴면 이 발목을 먼저 잘라주마!”
본래 넉살좋고 실력이 좋던 쌍둥이 형제는, 아카데미의 귀족들의 차별어린 시선과 고독한 대우에 점점 삐뚤어져 갔다. 사실 모든 학생들이 무시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들의 뒤틀린 성미는 점점 모든 말을 곡해해서 들으며 살의를 키워온 것이다.
“영광인 줄 알아! 너와 네 친구가 우리 형제의 첫 인육 요리 대상 이란 걸!”
일단은 피를 빼놓는 것이 힘도 빼고 잡내 제거에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챠우 진은 구멍을 뚫는 송곳을 꺼냈다.
“꺄아아악! 살려, 살려줘!!!”
“움직이면 더 아프니까, 가만히 있어!”
여학생의 가벼운 발버둥에, 챠우 진은 여학생의 다리를 꽉 붙잡았다. 이제 이 송곳을..!!
──푸우욱!
“...어, 어라?”
아직 송곳은 찌르지도 않았는데?
어디선가 들리는 고기 찌르는 소리와, 점점 배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에, 챠우 진은 천천히 자신의 자랑인 풍채 있는 배를 내려다 봤다.
“씨발, 드디어 방심하네, 백정새끼 주제에 눈썰미가 좋아서 되도 않는 연기만 계속 했잖아.”
휘릭휘릭, 가슴골에서 꺼낸 단검을 배에 박아 넣은 여학생은 욕을 내뱉으며 단검을 몇 번 회전시켜 남자의 내장을 헤집기 시작했다.
“우..우아아아아악!! 이, 이 망할 년이!!!”
남자가 놀라서 뒤로 물러나며 허리에 찬 도축용 칼을 휘둘렀지만, 방금 전 까지는 달리기도 느려 터졌던 여학생은 놀랄 정도로 유연하게 몸을 휘며 칼을 피하고는, 단도를 던져 발을 묶은 올가미를 잘라내 착지했다.
[동생? 무슨 일인가? 동생? 동..으아아악!!]
“형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
“무슨 일이긴, 인육 먹는 미친 새끼들 잡으려고 왔지.”
여학생이 경멸하는 눈으로 챠우 진을 바라보며 귀걸이를 건드리자, 어느새 여학생의 모습을 바꾼 폴리모프 마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너, 너는. 저번에 1학년 학생에게 패배한 그 시..”
“시끄러워 돼지 새끼.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 부르지 마.”
서걱! 챠우 진을 향해 다가간 시온이 손끝에서 피어낸 작은 오러로 목을 긋자, 챠우 진은 그대로 목에서 피를 뿜으며 절명하고 말았다.
“쓰읍, 손톱에 피가 튀었잖아! 도련님에게 잘 보이려고 네일아트까지 받았는데!”
시온은 욕짓거리를 내뱉으며, 귀걸이를 건드려 마법으로 연결된 통신망을 연결했다.
“동생 돼지새끼 처리 했어요, 그쪽은?”
[이쪽도 쌍둥이 형이 그 쪽이랑 연락할 때 불태워 죽였습니다!]
“그럼 처리는 끝났네요. 그 저주받은 비법서 회수하고 도련님에게 돌아가죠.”
[네! 제가 챙겨둘게요! 동생 시체는 그쪽이 처리해주세요!]
틱. 통신을 끊은 시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 도련님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 할 시간에 이런 빌어먹을 빌런이라는 놈들 때문에 시간을 써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련님께서 직접 내게 부탁하신 일..완벽히 처리한다면, 분명 직접 상을...”
히죽, 상을 받는 상상을 하자 시온은 혀를 낼름이며 입맛을 다셨다. 이번에는 어떤 상을 요구하면 될 까? 봉사? 밤에 끌어안고 자기? 그것도 아니면..데, 데이...트?
“후후후...사랑하는 도련님을 위해서는 열심히 해야겠지..?”
의욕이 난 시온은, 200kg가 넘는 죽은 챠우 진의 시체를 한 손으로 질질끌며, 시체와 녀석들이 설치한 함정을 처리하기 위해 숲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오라버니! 시온하고 알‘미라즈가 이번 빌런인 쌍둥이 인육도살자를 잡았다네요!”
특별과외가 끝난 지 4일, 장미관 사건에서 2주가 지난 늦은 밤.
새롭게 옮긴 내 실버 기숙사는 늦은 밤과 어울리지 않게 시끄러운 상태였다.
“샤오메이, 통신 엿듣지 말고 제대로 공부해. 곧 중간고사잖아.”
“으..오라버니도 참! 전부터 말했지만, 시험은 몸으로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충분하다니까요?”
“누누이 말했지만, 그런 식으로 느긋하게 굴다가 2학기에 기말고사 때 필기시험에 전부 과락해서 보충 받느라 못 움직인다고.”
“그래도! 운 좋게 제비뽑기에서 좋은 시간을 차지했는데! 오라버니랑 데이트는커녕 공부라니! 차라리 몸 쓰는 훈련을 하고 싶다고요!”
샤오메이는 내가 공부를 가르쳐 주는 이 상황이 불만인 듯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카데미의 시험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복합적인 능력치를 테스트한다. 시험에서 과락이 나면? 보충 수업이나 추가 시험 때문에 발목을 붙잡히게 된다. 아마 강한 동료들이 스토리에서 등장하지 않을 수 있게 작가가 안배한 장치겠지.
그런데 샤오메이의 실기 능력은 만점에 가깝지만 필기 능력은 궤멸적인 상황. 안 그래도 앞서 2번의 전투에서 샤오메이가 있었다면 더 편하게 빌런을 처치했을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정한 것이 지금의 포맷, 하렘의 여인들은 기본적으로 제비뽑기로 나랑 같이 보낼 시간을 정하고, 비어있는 시간은 내가 누구랑 보낼지 고른다.
추가적인 시간이사 상을 받고 싶다면, 지금 시온이나 알‘미라즈가 하는 것처럼 잡다한 빌런의 처리를 맡으면 된다. 시간 말고도 내가 이것저것 상을 주는 것으로 합의를 봤지.
“저번에 말했잖아? 바이올렛처럼 책상에 마주보고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그건 그냥 알콩달콩 놀고 싶던 거였죠! 제국의 역사니, 마수의 생태니, 마족을 퇴치하는 데 필요 없는 거잖아요?”
“마수의 생태 쪽은 필요하거든? 잔소리 말고 공부해. 2과목만 통과할 수 있으면 그때는 잔뜩 데이트 해줄 테니까. 유니코르도 오늘도 마기 다루는 법을 배우겠다고 시르카랑 하루 종일 훈련 했잖아?”
“으..전 힘쓰는 쪽이 더 편하다고요.”
샤오메이는 유니코르의 이야기에 마음이 찔렸는지, 입술을 삐쭉 내밀면서도 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좀 더 철없고 어리광 부리는 모습, 탈진한 나를 덮치던 샤오메이랑은 달랐지만, 이쪽이 오히려 내가 알던 샤오메이랑은 비슷해서 마음이 편해진다.
“주인님, 다과를 챙겨왔습니다. 옆에 놔드릴까요?”
“아, 고마워 시르카.”
그때, 메이드 복장의 차림을 한 시르카가 다과가 담긴 쟁반을 들고 부엌에서 나왔다.
“따뜻한 코코아랑 초코칩 쿠키가 주인님, 녹차랑 쌀과자가 샤오메이님 맞나요?”
“맞슴다~맨날 어린애라고 놀리면서, 오라버니야 말로 입맛이 어린애라니까.”
“코코아가 뭐 어때서? 달고 맛있는 데. 고마워 시르카.”
“천만에요, 공부하면서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신가요?”
지난 2주간 시르카는 점점 마음의 경계심을 풀 더니, 어느새 꽤 얌전하게 나를 주인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아, 아무리 그런 좋은 자지가 있다고 해도, 네 말을 그렇게 쉽게 따를 것 같아!? 나는 차기 몽마여왕 후보였던 긍지 높은 상급 마족이라고!”
한 때 저런 말을 하며 튕기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고분고분 해져서 상냥한 누님계 메이드 같은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이것도 봉인의 룬의 효과일까?
하지만 그 묘하게 큿! 죽여라!나 츤데레 같은 맛이 사라지니까 살짝 아쉬운 느낌도 있다.
‘다음에 플레이 할 때는 츤데레 플레이로 해달라고 할까...’
호륵, 마쉬멜로가 들어간 코코아를 마시자 입 안에 부드러운 달콤함이 가득히 풍겼다. 거기에 씁쓸한 다크 초콜릿 쿠키를 입에 넣자, 과한 단맛을 쿠키의 쓴맛이 억눌러 좋은 조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게 섹스지...’
행복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공부하며, 연인이 타준 달콤한 코코아를 음미하는 것. 이런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는다.
‘어쩌면 이 세계에 빙의한 건 불행이 아니라 로또 당첨 맞은 게 아닐까.’
현실에서 이런 생활을 누릴 수 있었을까? 아마 연애는 고사하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느라 지쳐서 치킨에 맥주가 가장 행복한 인생을 살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이 행복한 순간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샘솟기 시작했다.
“음, 공부 좀 더 열심히 할까.”
“네?! 이제 막 다과가 왔는데 쉬면서 하면 안 돼요?”
“미안, 황태자한테 인정받을 수준까지 성적을 내려면 남은 시간은 열심히 공부해야 할 것 같거든.”
“우으윽..그 망할 동생바보가 이상한 헛바람만 안 넣었어도!”
그렇다, 내가 지금 책상 앞에 앉아있는 건 샤오메이의 공부를 봐주기 위해서도 있지만, 황태자가 내게 내준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서도 있다.
‘그래도, 지식의 파편도 없는데 공부하는 건 역시 어렵네..’
저번 생에는 대학도 안 갔는데, 이번 생에서는 박사 과정에서나 쓰일 법한 논문을 들여다봐야 한다니, 참 얄궂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아, 황태자도 참, 약혼자에게 무리한 조건을 요구한다니까.’
***
“뭐..라고 아그네스?”
제비뽑기가 끝난 직후.
1등으로 제비에 당첨된 아그네스와 하루종일 데이트를 할 생각에 들떠있던 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말았다.
“오늘, 학생회장님..그러니까, 제 오라버니인 리처드 황태자께서 아르틴을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하셨어요.”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떨어지는 소리야. 황태자랑?
“그거 꼭 오늘 가야해? 오늘은 아그네스랑 데이트 하려고 했는데..”
“안 돼요. 다른 사람과 약속이 있는 날에 만나러 갈 수는 없잖아요?”
씹, 맞는 말이었다. 오늘 미루면 계속 미루고 싶은 사안이긴 하다.
“하지만 리처드 황태자랑 둘이서 만나서 인정받는 건 좀 거북한데..”
사실 리처드 황태자랑 단 둘이 대면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3회차의 기간 동안 여러번 대면하면서, 때로는 좋은 선후배 관계로, 때로는 좋은 거래 관계를 맺기도 했다.
문제는 저번 4회차 때, 아그네스와의 첫 연애를 허락받으러 간 리처드의 압박면접은 어지간한 귀족이나 종교재판관을 상대한 나에게도 껄끄러운 일이었다.
차라리 모르는 새끼라면 동료가 아니라면 적으로 대하면 편하지만, 아그네스의 가족을 적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또 엄청 꼽사리 주면서 별의 별 사소한 걸로 엄청 트집 잡을 텐데...’
내가 한숨을 내쉬자, 아그네스는 그런 내 머리를 자신의 가슴 품에 꼭 끌어안아줬다. 따뜻하고 말랑거려서 기분이 좋았다.
“오늘을 위해서 지난 일주일 동안 열심히 공부했잖아요? 게다가 저번 생에도 오라버니를 설득했으니, 전 아르틴이 이번 생에도 오라버니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아그네스...”
아그네스의 상냥함이 포근하게 전해진다. 그래, 까짓것 못할 게 뭐가 있겠어. 단신으로 마왕도 죽이러 갔었는데.
“좋아, 가서 빠르게 허락받고 남은 시간은 아그네스랑 뜨겁게 보내겠어!”
“어머, 아르틴도 참... 좋아요. 시간 남으면 가볍게 데이트라도 할까요?”
아그네스는 내 낯 뜨거운 발언에 부끄러워하면서도, 눈웃음을 지으며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그네스의 배웅을 받으며 당당하게 출발했다.
어깨는 펴고! 가슴도 펴고! 당당하게 아그네스 사랑합니다 하면 그만이지!
*
“그래...자네가, 내, 사랑하는, 동생의, 약혼자를 자칭한 아르틴 루드비히 군인가?”
내 생각에 내가 조금 오만했던 것 같다.
우직끈!
리처드 황태자의 감추지 못한 분노 탓에 황태자의 뒤에 있던 유리창에 금이 가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4회차랑 조금..아니, 많이 다르지 않나..?’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