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 숫사자는 언제나 시험을 받는다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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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에르멘가르트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 해보고 싶다.
현재 이 세계의 인류를 수호하는 가장 큰 방패인 제국의 황태자. 원작 소설 속에서도 마왕군의 계략에 의해 끝끝내 죽기 전 까지는, 용사로 인정받은 카이엔을 제치고 인류의 미래라고 불리우는 최강의 인재였다.
검으로는 당대 제일이라고 칭해지는 삼검성의 직계 제자이자, 동시에 1년 전인 21살, 이미 삼검성과 대등하다고 인정받은 최강후보 중 하나.
거기에 마법으로는 단신으로 10년 전 리치 하몬의 재앙의 저주를 소멸시켰다는 대마법사 가우나브의 수제자이자, 대마법사의 기준이 되는 7써클에 도달하기 직전이라는 위대한 천재.
그 뿐만 아니라, 흥미가 생긴 각 분야마다 놀라운 업적을 세웠으며, 죽기 직전에는 제국의 행정체계를 1단계 진화시키려고 했던 천재 중의 천재.
그 미친 재능 탓에 작품을 읽는 내내 작가의 자캐딸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던 메리 수 캐릭터이자, 유일하게 카이엔의 라이벌이라고 칭해지던 인물.
물론 얼굴도 카이엔 급으로 디테일하게 잘생겼다고 묘사됐고, 인품도 좋아, 흥미가 생기면 그 사람을 시험해 보는 나쁜 버릇을 제외하고는 단점이 없다고 묘사됐었지만...
‘이게 단점이 없는 거라고?’
그 거창한 수식어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은발 머리의 미남은 지금 부모를 죽인 원수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자, 자리에 앉게 아르틴 루드비히.”
“아, 네 알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고상한 말투와는 다르게 이를 꽉 다문 목소리에서는 나를 죽이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것 같은 분노가 느껴졌다.
“일단 이야기에 앞서.. 아르틴 루드비히.. 아르틴 군이라고 불러도 괜찮을까?”
..내가 기억하는 4회차의 황태자랑은 역시 조금 달랐다.
4회차 당시, 2학년 중간고사 쯤에 처음 인사하러 갔을 때는 좀 더 서슴없이 부드럽게 대해줬던 것 같은데. 인사도 안녕 아르틴군~? 하고 능글맞게 했던 것 같고.
하지만 지금 보는 모습은..역시 기억속의 황태자랑은 거리가 멀다.
“아, 네. 편하신 대로 부르셔도 됩니다...만.”
크흠, 저 살기어린 눈빛에 계속 압도되고 말았지만, 황태자와의 면담은 단순하게 이끌려 다니면 안 된다.
황태자 리처드의 고유 캐릭터성은 늘 흥미일변도의 남자.
아무리 예의 바르거나, 강하거나, 재능이 있어도 자신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전부 내주지 않는다.
원작에서는 자신을 극단적으로 희생해가면서 사람을 돕는 카이엔에게 흥미를 가졌었고, 전 회차의 나는...
‘목표가 뭐냐는 말에, 마왕을 죽이는 것이라고 하니까 결국 허락해 줬었지.’
아무튼, 중요한 건. 이 황태자와 면담할 때는 절대 얕잡아 보이거나 재미 없는 사람으로 보여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저는 황태자 전하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음..? 아아, 과연. 내가 아르틴 군을 편하게 부르는 만큼, 아르틴 군도 편하게 불러도 좋아.”
“편하게 부르다니요, 어찌 황태자 전하를...”
내가 한 번 거절하며 예를 갖추자, 황태자는 그제서야 분노를 겉으로 내보이지 않을 만큼의 여유를 차렸는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걱정 말게, 자네를 책망할 사람은 없으니 자네 편할대로 불러도 좋아.”
여기서 아마 리처드 황태자가 원하는 호칭은..리처드님, 혹은 선배님 정도겠지. 하지만 나는 얕잡아 보여서는 안 된다. 상남자 아르틴의 매력을 보여 줄 차례.
“그럼, 형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콰직!
리처드 황태자의 등 뒤에 있던 유리창이 완전히 금이 가, 박살나기 직전이 되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건 조금 너무 격식이 부족하지 않나 싶어. 아무래도 처음 만난 사이잖아, 아르틴 군?”
“그럼 처남?”
쾅!!!
와우 씨발, 리처드가 내려친 책상이 그대로 반으로 갈라져 무너져 내렸다.
“...선배님 정도로 하지, 그 정도가 적당할 것 같군.”
리처드의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는 게, 나라는 존재를 확실히 각인 시켜준 것은 분명했다. 어떤 미친놈이 황태자보고 약혼 허락 받으러 와서 처남이라고 부르겠는가.
“알겠습니다. 리처드 선배님.”
리처드의 태도에 여유가 사라지는 것을 본 나는 만족한 미소를 숨기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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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대화는 단조롭게 이어졌다. 황태자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시시콜콜한 질문들을 해왔다.
루드비히 가문에 대한 질문이나 제국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 지에 대한 역사관, 황실에 관련된 질문과 이야기들.
뭐, 사실 그 이야기들의 숨은 뜻은 왕국의 보잘 것 없는 남작가의 후계자도 아닌 나와, 제국의 황녀인 아그네스와 얼마나 높은 격차가 있는 지에 대해서 우회적으로 비꼬는 것이었지만.
“..생각보다 제국의 역사나 황실에 대해 잘 알고 있네.”
“아그네스에게 직접 배웠습니다. 제 스스로 미리 공부하기도 했고요.”
아그네스가 가르쳐줬다는 말에, 리처드는 눈썹이 움찔거리더니 적어도 지식의 부족함으로 흠을 잡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듯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아르틴 군이 아그네스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이 놀랐어, 서로 알다시피..렉스턴 와이즈 군 사건이나, 위가르도 위센과 있었던 일이 좀 떠들썩했잖아?”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과의 결투를 대대적으로 크게 벌린 것도 황태자가 재미있을 것 같다며 규모를 벌린 거였지.
“알다시피, 귀족사회에서 무력의 행사는.. 고운 눈으로 보는 시선이 많지가 않아. 그리고 욱하는 성질이 남녀 관계에서는 좋지 않기도 하고..오라버니인 나로서는 염려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네가 벌인 사건에 대해서 어떤 변명을 할 것이냐는 황태자의 시선. 당연하게 나올 예상범위 내의 질문이었기에 안심하며 대답했다.
“렉스턴의 경우는, 아시다시피 렉스턴 녀석은 가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오랫동안 저를 업신여기며 명예를 실추시켰습니다. 한 사내이자 귀족으로서 마땅히 자신의 명예를 위해 행동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해도, 입학 첫날부터 무력으로 해결하는 것은 좋은 해결책은 아니지. 거기에 리가르도 위센의 건은 학생회실 내부에서 벌어진 일이잖아? 우리에게 중재를 맡길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말에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리가르도를 두들겨 팼을 때 가장 기뻐했을 사람이 바로 황태자 아닌가?
“저는 제 연인을 창녀라고 모독하는 녀석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그네스는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그에 대해서는 나도 동의하고 있어. 위센은 선을 넘었지.”
“그리고, 이번 장미관 사건의 주동자가 렉스턴이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으시다면, 렉스턴 와이즈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도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대해서는 과연 황태자도 할 말이 없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 트집을 잡고 싶다는 이유로 마왕군의 간부를 소환하려던 녀석을 옹호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제가 아그네스를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저희는 서로 사랑하고 있으며 약혼 이후의 일 까지도 상의하는 관계라는 점입니다.”
내가 갑자기 치고 들어오자, 리처드 황태자는 입꼬리를 움찔 거리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만나도 1달도 못 만났을 두 사람이, 갑자기 약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오라버니의 입장도 생각해 주면 좋겠어. 아르틴 군.”
...아.
‘왜 전 회차랑 반응이 전혀 다른가 했더니...’
생각해보면 나랑 아그네스는 3회차의 5년을 알고 지냈고, 4회차의 3년을 더 알고 지냈고, 2년을 공식적으로 연애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그건 나랑 아그네스의 관계일 뿐.
황태자 입장에선 결투할 때만 해도 처음 만난다고 말하던 두 사람이, 1달도 안 지나서 약혼을 한다며 나서니, 당연히 물려받을 가문도 없는 왠 한량이 여자 한 번 잘 만나서 출세하려는 걸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렇게 만나자고 말하는 건, 권능 도둑하고 장미관 사건 때문에 단순한 시정잡배로 판단하지는 않았다는 거겠지..’
과연, 그렇게 생각하니 분노나 살기어린 모습이나, 그러면서도 침착하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행동이 전부 설명됐다.
“그렇지만, 사실입니다. 저는 단순히 순간의 감정에 이끌려 아그네스와 약혼을 운운하는 게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선 것도, 아그네스의 소중한 가족인 황태자님께 인사드리고 아르틴이라는 남자를 보여드리고자 자리에 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것은 하나였다. 단순히 간보며 인정받는 것을 넘어, 아르틴 루드비히라는 존재가 어떤 가치의 남자인지 황태자에게 증명하는 것.
“물론 가문만 보면 아그네스에게 전혀 못 미치는 별 볼일 없는 사내로 보일 수 있습니다만, 아그네스에게 익히 듣기를 황태자님은 아그네스를 진정으로 사랑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분이 가문의 높고 낮은 만으로 아그네스의 반려자로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당한 태도로 거침없이 말하며, 리처드 황태자의 눈을 마주봤다.
아그네스를 닮은 그 눈에는, 전 회차에서 보였던 거랑은 조금 달랐지만 확실히 나라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그러니, 제가 황태자님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보이도록 하겠습니다.”
그거야 말로, 이번 만남의 성공을 알리는 징조와도 같았다.
***
그 이후 대화는 생각보다 스무스 하게 끝났다.
역시 위센을 두들겨 팬 것이나, 장미관 사건과 권능 도둑으로 사건으로 벌어둔 명성이 도움이 된 걸까.
“좋아, 그럼 적어도 아그네스에게 어울리는 인재라는 것을 증명해줬으면 좋겠어.”
“증명이라면? 어떻게 말입니까?”
“간단해, 아르틴 군 네가 요즘 재능으로 교수님들에게 독보적인 사랑을 받는다며? 그 재능을 증명해줬으면 좋겠어”
문제는 황태자가 낸 과제의 난이도가 만만치 않다는 점일까.
‘이번 중간고사에서 자신의 성적과 대등한 성적을 내보이라니’
적어도 나랑 비슷한 급은 돼야 아그네스를 내어줄 수 있다는 걸까? 작품 내내 천재라고 불리는 리처드에 걸맞는 재능을 가진 사람은, 이 세계관을 통틀어서 카이엔 밖에 없을 텐데 말이다.
‘아그네스를 노처녀로 죽이겠다는 게 아니면, 역시 나를 테스트해보겠다는 거겠지.’
실제로 전 회차에서는 저런 이상한 과제는 내지 않았으니, 만난지 1달 만에 아그네스를 홀린 남자의 실력을 보고싶다는 거겠지.
아무튼 그런 이유로, 요즘 나는 온갖 수업에 열심히 들어가며, 저녁과 밤에도 부족한 디테일을 채우느라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후...황태자랑 비슷한 성적이라, 얼마나 맞을 수 있을까?”
“오라버니 정도면 쉬운 일 아니에요? 1학년 수석은 따놓으신 분이.”
“말이 그렇게 쉽지가 않아, 이번 1학년들 중 가장 높은 성적이 아니라, 역대 최고 성적을 갱신한 황태자 급으로 성적을 내라는 거니까.”
미리 말해두지만, 20년간 온갖 실전형으로 지식을 터득한 나는 만전의 상태에서는 황태자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4회차의 마왕성 백도어 당시에는 실제로 가장 강했을 당시의 카이엔과 대등한 수준이거나 그 이상으로 강해졌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실전형은 실전일 뿐, 이론에 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필기의 이론에서는 내가 아직 모르는 디테일이 너무 많아..그래도 1학년 수준이면 어떻게 메꿔 볼 수는 있겠지만.’
끄응,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코코아를 음미하며 스트레스를 다스렸다.
“아무튼, 나는 오늘도 밤 늦게까지 공부할 예정이니까. 샤오메이도 그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합격선만 만들자. 알겠지?”
후후, 하고 웃던 나는 문뜩 샤오메이와 시르카가 내가 다과를 즐기며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깨달았다.
“...왜? 갑자기 가만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오라버니, 요즘 근육도 붙고 키도 커서 그런가.. 엄청 섹시해진 거 알아요?”
“안경을 껴도 남자다운 모습이 참 먹음직스럽지 않나요?”
먹음직스럽다니, 사람에게 붙을 묘사가 아닌 것 같았지만, 시르카나 샤오메이의 눈이 묘하게 욕망으로 이글거리고 있어서 뭐라 말하기가 어려웠다.
“오라버니, 평소에도 안경 끼고 다니시면 안 돼요? 지적인 남자 같아서 섹시해 보이는데.”
“아니, 이건 눈의 피로랑 시력 감퇴를 막아주느라 쓰는 거지, 실기 훈련할 때는 불필요 하니까...”
문뜩, 샤오메이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시르카랑은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 녀석, 공부하기 싫어서 말 돌리는 거구나.’
한숨을 쉬며 내가 공부나 하자고 말하려고 할 때, 시르카가 내 가슴을 조금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시, 시르카?”
“영약을 요즘 드셔서 그런가, 근골도 제대로 붙었고..탄탄한게...참...”
여자의 가슴을 주무른 적은 있어도, 여자애한테 가슴이 주물러진 적은 없던 나로서는 당혹스러운 감각이었다.
“어디, 저도..우와, 정말로! 일주일 전보다 눈에 띄게 근육이 붙었는데요? 영약이 너무 사기 아니에요?”
“애들아, 이제 그만하고 공부...”
“스읍...주인님 냄새...”
이런, 시르카의 눈이 조금 하트가 되기 시작했다. 설마 여기서 몽마의 발정에 시동이 걸린다고?
“잠, 잠깐...”
이거 설마, 하고 샤오메이를 힐끔 보자, 샤오메이는 나를 덮칠 때 보여줬던 음습하고도 어른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팔짱을 끼기 시작했다.
언제 닿아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샤오메이의 가슴이 내 팔에 맞닿는게 느껴졌다.
“오라버니, 너무 공부만 하면 머리가 오히려 굳는 다고요? 잠깐은 휴식을 취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하고 말하려던 찰나, 반대쪽 팔을 시르카가 끌어안으며, 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춰오기 시작했다.
“저, 오늘 유니코르님 훈련시켜 준다고 마기도 잔뜩 썼는데...주인님이 가득 채워줘야 할 것 같은데...♡”
공부해야 하는 데..공부...공..부...아직...해야 할 공부가....
“딱, 1번씩 만이다?”
나는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두 요부의 청을 들어주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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