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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116화 (116/266)

〈 116화 〉 성녀는 웃고있다

* * *

올가라니! 나는 정말 예상치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너무 반가워서 그만 껴안고 말았다.

올가 비르투스, 북부 교단에서 50년 만에 나타난 이 시대의 성녀이자, 유일하게 여신의 계시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교황보다도 여신과 가깝다고 전해지는 존재.

동시에 원작에서는 주인공 카이엔의 메인 히로인 중 한 명이며...3회차 당시, 내 절친한 친구이자 나를 열렬히 도와준 최고의 동료 중 한 명이었다.

“후후..서방님도 참, 밖에서 이렇게 끌어안으면 불경죄로 잡혀갈지도 모른다고요?”

“아! 미, 미안! 너무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아차, 3회차에 편지 하나 때문에 고문까지 당해놓고, 나도 모르게 방심했네.

“그렇다고 바로 긴장하시기는,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지금은 저희 둘 뿐이잖아요?”

내가 깜짝 놀라 긴장한 얼굴로 포옹을 풀자, 올가는 도리어 자신은 괜찮다며 나를 향해 웃어준 후,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여전히 사제복을 입은 단아한 차림에, 비단결 같은 검은 긴 머리는 찰랑이는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그리고, 저도 너무 반가운 나머지 서방님을 뒤에서 몰래 끌어안았으니~서방님 표현대로면 1:1 동점이죠? 후후.”

“하하, 그 표현까지 기억하고 있었구나?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라서 정말 깜짝 놀랐네.”

다정하게 웃으며 나를 배려하는 화법, 둘이 있을 때면 부르던 장난삼아 부르던 서방님이라는 애칭까지.

‘혹시나 했는데 정말 3회차의 올가가 맞구나..’

나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애들도 나를 떠올렸는데 그 친했던 올가가 나를 못 알아챈다면 정말 슬플 것 같았으니까.

“어머, 서방님이 저를 찾아오지 않으니, 제가 직접 찾아오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그건...교단에도 전해졌겠지만, 내가 이곳에서 좀 바빴어야지. 하하.”

그 말에 왠지 내가 찾아오지 않아서 서운함이 담긴 것 같아,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올가는 1회차의 샤오메이나 4회차의 마리안느 스승님처럼, 내게 아주 많은 도움을 줬던 사람이다.

카이엔 녀석을 보좌하던 시절이라, 많은 귀족이나 성직자들을 만나 설득할 필요가 있었던 나를 대신해서 온화하게 설득해, 하룻밤 사이에 태도를 돌변하게 하거나,

2회차에서 유니코르와 다니면서 익힌 내 야매 성법을 매일 밤마다 남들 몰래 가르쳐줘, 흑마법을 익히고 악마와 계약한 뒤에도 그 깐깐한 이단심문관들의 눈을 피하게 도와준 것도 올가였다. 솔직히 나열하자면 받은 도움이 끝이 없다시피 할 정도.

게다가 원래 빙의될 때부터 친했던 샤오메이나, 조르바의 도움을 받아 친해진 마리안느 스승과는 다르게 내가 개인적으로 만나 친해진 스스로 사귄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어라? 그런데 올가는 나랑 만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내 기억을 떠올린 거지?’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올가는 내가 뭐라고 말도 꺼내기 전에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내 손등 위로 손을 포갰다.

“저도 깜짝 놀랐답니다. 설마 서방님이 1학기 첫 달부터 무려 마왕군의 간부의 의식을 막고 많은 사람들을 구해낼 줄은 몰랐으니까요. 교황청에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서방님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거든요.”

“아, 역시 장미관 사건으로 나를 떠올린 거였어? 여태 만난 애들은 나를 직접 만나고 나서 기억을 되찾았거든! 되게 신기하네!”

“어머, 저 말고도 기억을 되찾으신 분이라면...역시, 용사인 카이엔님이나 조르바씨, 샤오메이 양 같은?”

“아~조르바는 말고, 카이엔하고 샤오메이만. 그 외에는 아그네스나 바이올렛, 유니콘인 유니코르 정도?”

올가는 자신 외에도 기억을 되찾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 한지, 입을 가리며 엄청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역시 순수한 탓에 그런 것은 아직 생각도 못했던 걸까.

“아, 지금 바로 가서 인사할래? 바이올렛이나 아그네스랑은 꽤 친했잖아?”

“어머, 저도 그러면 정말 좋을 것 같긴 한데..그러기는 조금 힘들 것 같아요.”

“어라?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올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생각에 빠진 건지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조금 머뭇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말하기 조금 힘든 사정이 있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할 쯤, 올가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으로 눈을 뜨며 내 눈을 마주보았다.

“아니, 서방님이라면 말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대신,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로 해주시겠어요?”

“...물론이지, 무슨 일이 길래 그래?”

올가는 늘 눈을 뜨지 않는다. 성녀인 자신이 누군가를 직접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성녀의 시선을 받은 질투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올가가 눈을 뜨고 저렇게 결연한 표정을 짓는 것은, 분명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는 뜻,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올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실은...”

**

이야기가 전부 끝난 후, 아르틴은 올가의 사연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타인에게 자신과 만난 것을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받아냈으니 이번 만남은 올가의 바람대로 진행됐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죄송해요 서방님, 저도 다른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하고 싶지만..오히려 주변 친구분들에게 거짓말을 부탁드려야 하다니..”

“걱정 하지 마! 그런 일이면 내가 얼마든지 도와줘야지. 앞으로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좋아!”

“역시, 서방님은 너무 친절하신 것 같아요.”

띠리리리링~♬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오늘의 만남은 여기까지로 하는 게 좋겠어요, 서방님.”

후훗, 하고 딱 좋게 달아오른 분위기가 만들어 질 때 1교시 준비를 알리는 아카데미의 종소리가 울리자, 올가와 아르틴은 서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좀 더 대화해도 괜찮지 않아? 1교시 수업에는 어느 정도 여유 있고..”

“안 돼요. 제 정체가 들킬 수도 있지만..서방님이 수업에 늦어서 불이익을 받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나긋하게 웃으면서도 엄하게 말하는 올가의 태도에, 아르틴은 짐짓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또 만나자. 그 때는 살롱이라도 빌려서 느긋하게 티타임이라도 가지자!”

“후후, 기대할게요. 그럼 다음에 뵈요, 아르틴님.”

덜컥!

...문이 닫혔다.

“...아그네스 황녀님이 아니라 ‘아그네스‘라.”

올가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아르틴과의 행복했던 시간을 되짚기 시작했다. 허나 그 표정에는 조금 전까지 깃들어있던 상냥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역시, 제가 교단의 쥐새끼들을 정리하는 동안, 그 한 여인을 중심으로 서방님에게 교태라도 떨고 있나 보군요.”

하지만 그게 아그네스 황녀라니, 지난 생에 제국을 구해주고 자신을 황태녀로 만들어 준 것에 아양이라도 떨려던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모르는 새로운 삶이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것이 확실했다.

“유니콘인 유니코르가 단순히 계약체가 아니라, 기억을 되찾은 존재라면...저와 지낼 때는 그런 망아지랑 계약한 적은 없으니, 최소 2번 이상은 생을 반복하는 중이라는 소리..”

톡, 톡, 자신의 팔을 검지손가락으로 두드리던 올가는 문뜩, 자신의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아르틴님은 물론 천박하고도 더럽고 추잡한 다른 남성과는 다른, 고귀하고 상냥하며 둘도 없는 유일한 구원자지만, 가끔은 그 귀여운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힐끗 힐긋 쳐다보던 사람이다.

간혹 자신이 모르는 척 스킨쉽을 하거나, 포옹이라도 하면 가슴이 닿을 때 마다 움찔하던 그런 순수함을 가졌던 사람, 하지만...

‘...반응이 없었지, 뒤에서 백허그를 할 때도, 다시 저를 꽉 안아 줄 때도.’

뿌득!

암캐들이 꼬이는 것은 예상했던 일이고, 아카데미 내부에 존재하는 자신의 눈과 귀로 아르틴님의 곁에 있던 암캐들을 미리 확인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자신이 아닌 다른 암컷이 아르틴님을 물들이는 것은 올가에게 있어서는 참기 힘든 사실이었다.

‘..진정하자, 아르틴님의 반응으로 봐서는 아직 저에 대한 호감은 확실..아니, 오히려 오랜만에 만났다는 사실에 더욱 흥분하고 계셔.’

오랜만, 1달을 가지고 오랜만이라고 할 것은 아니니 그 생이 끝나고도 새로운 삶을 겪었거나..혹은 아기 때부터 다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아련함이라는 감정은 자신에게는 강점일 터.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올가는 아르틴과 시간을 길게 보내는 대신 자신이 아카데미에 찾아온 적당히 만든 이유를 설명하자마자 종이 울리도록 시간을 분배했고, 종이 울리는 즉시 아르틴을 돌려보냈다.

준비한 이유는 간단했다. 정신을 차린 올가가 교단 내에 즐비해있던 이단들을 고발했지만, 그들 중 일부가 교단 밖으로 도망쳤고 아마 아카데미로 향했을 것이다.

토마스 사제와 자신, 그리고 세르게이 경은 그들을 쫓아 이곳에 온 비밀임무를 지닌 존재들, 모습을 들켜서는 안 된다...같은 적당히 지어낸 이유. 언뜻 보기에는 짜임새가 부족했다.

애초에 교단이 성녀를 그런 존재들을 쫓는 데에 보낼 리가 있는가? 아마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아르틴도 분명 의심했을 영역. 하지만..

올가가 쌓아올리고 아르틴이 품은 서로의 신뢰도는 그런 허술한 알리바이에도 납득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올가가 가진, 아르틴의 암캐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강점이었다.

‘..뭐, 전부 거짓말도 아니었지만요.’

실제로 그들의 수장이었던 대주교 보리스와 몇몇 부하들은 교단을 떠났다. 장벽을 넘었으니 죽었을 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마왕의 부하가 되어 이 곳 아카데미를 노릴 수도 있을 터.

“만약 그렇게 된다면...제가 아르틴님을 지켜드려야..아니, 지킴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하지만 거기까지 전부 올가의 예상 범위 내였다. 이제 비밀 임무라는 명목 하에 아르틴과 밤늦게 단둘이 꾸준히 만나는 것도 가능할 터. 올가는 모든 변수와 상수를 자신과 아르틴의 사랑을 위해 쓰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뭐, 그깟 암캐들이 조금 먼저 손댔지만, 참도록 할까요. 마지막에 저 올가의 곁에 돌아오기만 한다면, 모든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겨드릴 수 있으니까요...”

올가는 그녀를 아는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사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가진 유일한 욕망을 위해서라면, 그녀는 세상을 불태울 준비도 되어있었으니까.

──하지만, 올가는 몰랐다.

그녀가 파악한 샤오메이, 바이올렛, 아그네스, 그리고 유니코르 말고도 훨씬 많은 여인들이 아르틴의 곁에 있다는 사실을.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눈과 귀는 교단에 깊이 심취한 학생이나 임직원들,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다.

하물며 은밀하게 아르틴을 호위하는 시온이나 바이올렛의 사역마인 알‘미라즈, 심지어 장미관 사건에서 아르틴과 싸웠던 몽마 시르카가 아르틴에게 테이밍 되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후후후후, 카이엔이 서방님에게 붙어서 감시할 수 있도록 힘을 좀 더 실어 줘볼까요? 음침하니 기분 나쁜 동성애자지만, 그런 쪽으로는 확실했으니까요.”

치타는 웃고 있었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웅크린 채 달리기를 준비하는 사이, 누군가는 이미 결승점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기다리세요..서방님, 둘 만의 행복을 위해..”

하지만 어쩌면 상관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녀는 하렘에 속한 그 누구보다도 어두운 술수에 능했으며, 세상의 모든 더러움을 자신이 씻어낼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대로, 마지막에 아르틴이 자신의 곁에만 있다면 그녀는 무슨 일도 감내할 수 있었다.

***

콰앙!

그리고 지옥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메피스토는, 이를 까득 물었다.

“저 사람을 글러먹게 하는 계집이...또 허튼 수작을!”

──메피스토가 바이올렛의 몸에서 사라지기 직전, 그녀는 아르틴에게 자신의 마력을 스며들게 하여, 이제 알‘미라즈를 거치지 않아도 아르틴의 사생활을 24시간 내내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내 메피스토의 모든 시간은 아르틴의 생활을 보는 데에 할애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것은 모든 시간을 퍼부어도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물론, 아르틴이 꿈속에서 겪는 일들도 보았으며, 알‘미라즈가 실시간으로 아르틴의 암컷이 되는 것 까지 지켜보았다.

그래서 마침내, 자신을 제치고 먼저 아르틴의 품에 안겼을 때, 메피스토는...분노하지 않았다.

색욕은 지옥에서 으뜸가는 미덕 중 하나이기도 했으며, 아르틴처럼 멋지고 매력있는 남자에게 날파리 몇 마리가 꼬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메피스토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가는, 올가는 달랐다.

“그 총명하고 멋지던 아르틴이 저 여자 손만 닿으면 점점 글러먹게 되던 것을 생각하면...!”

올가 비르투스는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성녀를 연기해왔다. 그리고 그런 자애로운 성품에 놀아난 아르틴은 매번 올가의 곁에 오랜 시간을 보낼 때 마다 점점 그녀에게 의지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물론 그것은 전부 올가의 수작질이라는 것을 메피스토가 알고, 바이올렛과 아르틴에게 직접 경고하기도 했지만...

아르틴은 메피스토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아무리 몇번을 설득해도 코웃음 칠뿐.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평상시에도 매우 질 나쁜 장난을 치는 메피스토의 말은, 그저 성녀와 자신을 이간질 하려는 악마의 속삭임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그 무덤덤하고 감정이 없던 메피스토에게, 성녀 올가 비르투스는 유일하게 적대심을 보이는 경쟁상대 같은 존재였다.

자신에게는 없는, 깊다 못해 맹목적인 신뢰감을 보이는 저 여인. 그럼에도 속이 검기로는 악마도 혀를 찰 저 망할 여인.

“밖에 누가 있느냐.”

메피스토의 작지만 존재감으로 가득 찬 목소리에, 그 즉시 대기 중이던 한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상급 임프 로터스가 부름에 명받았습니다!”

“가서 짐이 알‘미라즈를 호출했음을 알리도록 해라. 서두르도록.”

“...!”

서두르라니, 그 느긋하고 목적 없이 떠도는 구름 같던 군주님께서 의욕을 보이셨다.

게다가 이제껏 보인 적 없던 자신의 군주이 감정적인 목소리를 문 뒤에서 듣고 있던 상급임프는, 자신이 맡은 임무가 엄청난 중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즉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로터스가 황급히 날개를 펴고 알현실을 빠져나가자, 메피스토는 그제서야 좀 안도한 얼굴로, 허나 여전히 걱정 어린 표정으로 수정구가 비추는 아르틴을 바라봤다.

“짐이 그대를 직접 도울 수 없으니..바이올렛과 알‘미라즈를 쓰는 수밖에.”

──이는 지옥의 대군주와, 북부교단의 일인자인 성녀가 한 남자를 두고 싸우는 암투의 시작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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