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대련
* * *
그 후로 2일이 지났다.
“오라버니, 요즘 저희에게 숨기는 것 없나요?”
“벌써 2일 내내 그 소리만 하네, 나는 정말 숨기는 것 없다니까?”
지난 2일간의 변화라고 한다면, 키가 살짝 조금 더 큰 거랑 샤오메이의 의심이 많아 졌다는 것 정도 일까.
내가 자습시간에 자리를 비운 이후부터 묘하게 나를 보는 시선이 예리해졌다.
‘..사실 매일 밤 올가랑 몰래 만나고 있지만.’
애들이 자거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이후, 취침시간을 쪼개서 매일 1시간 정도 올가랑 대화를 나누거나 수다를 떨곤 한다.
“하지만 요 근래 오라버니 표정이 묘하게 밝으면서도 긴장한 표정이어서 말이죠..?”
“쓸 때 없는 소리는, 너랑 알‘미라즈가 자꾸 나만 뚫어져라 쳐다보니까 그렇지.”
문제는 샤오메이 말고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알‘미라즈까지 요 근래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감시하기 시작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스승님! 그냥 편하게 볼 일 보시면 됩니다!”
처음에는 좋아해서 애정결핍으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점점 날이 갈수록 동공이 떨리고 식은땀을 흘리는 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저리 말하며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혹시 메피스토가 갈구기라도 했나?’
어쩌면 가능성이 있다. 나를 친구거리면서 쫓아다니는 그 관심종자 녀석이라면 내 하렘의 일원이 된 알‘미라즈를 질투할지도 모르는 일.
아무튼 그 탓에 매번 시르카에게 수면 마법까지 부탁해 샤오메이랑 알‘미라즈를 푹 재우고 나서야 올가를 몰래 만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참고로 누군가 물어보면 불륜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정말 만나서 차를 마시고 수다 떨고..그게 전부다.
하렘 애들 앞에서 더 이상 다른 여자에게 눈 돌아가지 않겠다고 맹세는 열심히 지키고 있다! 비밀로 만나는 건 올가를 위해서일 뿐.
“거, 거기까지! 다들 집합! 10분 휴식 후 거, 검술 훈련을 하, 하겠습니다!”
그때, 우르반 헬릭 교수님이 외침이 들려왔다.
“아, 오늘도 기초체력운동 끝났나 봐요.”
“그래? 벌써 1시간이 지났다고?”
전신에 구속구를 두르고 샤오메이를 업은 채로 전력 질주를 돌던 나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고작 1시간으로 기초체력운동을 끝내다니, 마리안느 스승님하구 구르거나 샤오메이랑 구를 때는 상상도 못하던 일인데!
“흐아아악, 무울, 물 좀..!”
“악! 또 뜨거운 물이야! 시원한 물은 없어?”
하지만 다른 1학년 녀석들은 고작 우르단 헬릭 교수님의 신입생을 위한 1시간 기초체력운동이 끝나자마자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는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나마 기사가문 출신 애들이 간신히 다른 애들에게 물주전자를 가져다주며 챙기고 있으니 통탄할 따름.
나약하구나 신입생들이여, 너무 나약해!
“흐어억..샤오메이, 물, 물좀..”
“후에엥..주, 죽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나약한 무리에 속해있는, 조르바와 클레어가 다 죽어가는 얼굴로 비틀거리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도련님, 맨날 저랑 훈련하기 싫다고 빼먹더니 겨우 이정도로 쩔쩔매는 검까?”
“아카데미 커리큘럼이면 굉장히 순한 맛인데 말야, 못해도 3시간은 굴려야 체력이 빡세게 붙지.”
“두..둘다...닥쳐...”
샤오메이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챙겨온 물통을 내밀자, 조르바는 평상시에는 절대 내뱉지 않는 험한 말을 내뱉으며 물통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매일을 여자 만난다고 땡땡이 치고, 오늘도 땡땡이 치려고 하는 걸 샤오메이가 강제로 잡아온 탓에 죽어라 구르고 있다.
“저, 정말 이런 게 아그네스나 샤오메이님처럼...멋진 여성이 되는데 도움이 되나요오..?”
“물론이죠, 아그네스 황녀님도, 마리안느 왕녀님도 전부 강한 여성이잖아요? 클레어양도 멋진 여성이 되기 위해서는 체력을 길러야 할 필요가 있어요!”
반면, 요 며칠 카이엔이 자리를 비운 사이 우리에게 맡겨진 클레어는..참 묘한 캐릭터였다.
원래는 그냥 상냥하고 순수한, 귀족에 대한 동경이 있지만 카이엔에게 어슬렁거리는 인성 나쁜 귀족들을 보면서 현실을 깨닫는 아이였는데..
그런 놈들은 내가 미리 얼추 손 보고 어그로 끌어서 쓴맛을 덜 본 탓인지, 내 정처들에 대한 동경을 품고는 졸졸 따라다니며 멋진 신여성이 되겠다고 따라하는 모습이 귀엽긴 했다.
‘정령사니까 굳이 체력훈련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사실 바이올렛도 검술과 체력 수업은 빼먹고 있는 마당에, 정령사인 클레어가 이런 수업에 들을 이유는 없었다.
그저 체력훈련을 좋아하는 샤오메이가 권장한 탓에 듣게 됐고, 혹여나 이상한 놈팽이가 꼬일까봐 걱정한 내가 묵인한 탓에 구르고 있을 뿐.
..뭐, 체력운동 하면 좋지! 나중에 아카데미 나가면 그게 다 힘이다! 힘내라 클레어!
“후우..카이엔은 그래서 언제 돌아오는 거냐 아르틴? 클레어 양만 내버려두고 말야.”
“뭐, 교단에서 성검을 받기 위한 과정이 있다니까, 그 동안은 우리가 클레어 챙겨야지.”
본래라면 카이엔은 몇 달 후 있을 성검의 선택에서 용사로 간택되지만, 이번 회차에서는 올가가 힘을 쓴 덕에 지금 용사의 자격검증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것도 올가에게 귀띔을 받은 덕에 안 사실이다. 난 한 번도 성검 얻은 적이 없으니 그 과정도 잘 모르고.
“꺄하! 아르틴! 달리기 수업은 참 좋구나! 본좌도 오랜만에 전력으로 달리니 참으로 상쾌하다!”
“어디까지 뛰어 갔다 온 거야? 하도 안 보여서 숙소에 돌아간 줄 알았잖아.”
“그냥 앞을 향해 30분 정도 뛰고 다시 뒤돌아서 전력으로 뛰었노라!”
저 멀리서 뒤늦게 보이지 않는 곳까지 전력 질주하던 유니코르까지 도착하고 나서야, 현재 우리 패거리 멤버들이 다모였다.
역시 근본은 말이라서 그런가, 유니코르는 달리기를 참 좋아했다. 원피스 차림으로도 달리기 속도는 우리 중 최고가 아닐까?
“교수님께서 5분만 더 쉬고 검술 훈련을 할 테니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들 앞에서 훈련용 검을 가져가주세요!”
“아아아악! 정신 나갈 거 같아!”
“그래도 5분이 어디냐..난 5분 동안 잘래.”
조교의 말에 울부짖는 학생들을 보며, 나는 절로 혀를 차며 꼰대의 심장에 불이 붙었다.
“쯧쯧, 15분이나 쉬면 혜자 아닌가? 나는 지금도 몸이 덜 풀려서 찌뿌둥한데 말이야.”
“혜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침마다 제가 공부하는 대신 오라버니랑 훈련하면 몸은 풀리지 않을 까요?”
“시도는 좋았어 샤오메이, 중간고사가 교과서 7단원까지 인데 이제 3단원 공부 시작했으면서 훈련은 무슨.”
“힝...”
요즘 새벽 훈련은 사실상 나 혼자 하거나, 가끔 아그네스가 봐줄 뿐, 하드한 맛이 적어서 훈련을 하는 맛이 영 안난다.
영약을 섭취하는 중이라 신체를 과하게 굴리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역시 내 몸은 마리안느 스승님이 짜주던 지옥수련에 좀 더 익숙해져 있는 탓이 더 컸다.
‘그러고 보니, 요즘 마리안느 스승님을 못 만났네.’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몸을 부대낀 수련 이후로, 마리안느 스승님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심지어 학생회에 리처드 황태자 만나러 갔을 때도 자리를 비웠던데, 아마 나를 피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한 번 찾아가서 사과를 드려야겠어..수련을 도와줬는데 그렇게 야한 짓을 하다니.’
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는 정말 성욕에 미쳤을 때라서 정신이 나갔던 것 같다니까.
“너무 서운해 하지 마세요 오라버니, 안 그래도 본가인 태산 도장에서 오기로 한 사범님이 내일 도착한다고 하니까요?”
어라, 그런 걸로 한숨 쉰 게 아닌데. 샤오메이는 내가 수련이 아쉬워서 라고 생각한 건지 나를 꼭 끌어안아 토닥이기 시작했다.
뭉클! 커다라고 탄력있는 샤오메이의 가슴이 내 가슴을 짓눌렀다.
음, 확실히 힘이 나는 걸.
“치사하구나..! 밖에서는 아그네스의 약혼자로 알려져 있으니 자제하기로 하지 않았나!”
그때 유니코르도 은근 슬쩍 내 옆으로 와 팔짱을 꼈다. 양팔에 푹신한 감각이 너무 좋다.
나는 인지제어 마법을 몰래 시전해 5분 남짓의 짧은 시간이지만 이 행복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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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컥! 묵직한 검을 카이엔은 받아들었다.
“지금부터 앞으로 일주일 간, 카이엔 군은 저와 실전 훈련을 실시할겁니다.”
단 둘뿐인 특별 훈련실, 카이엔의 맞은편에 선 세르게이 첼레프스키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 일주일 간, 성검에 어울리는 용사의 실력을 얻게 되고 나서야, 카이엔 군은 성검의 시험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아카데미의 비밀 시설 중 하나인 특별 훈련실은, 본래는 규격외의 특수한 천재들을 시험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었다.
거인과의 결전이나 마왕군 간부와의 싸움을 대비하는 훈련까지 고려해 만들어진 탓에, 그 견고한 내구도와 마공학 장치들로 작동되는 다양한 환경과 조건으로 일부 천재나 교수들이 애용하는 시설이다.
허나 지금은 북부 교단 교황청의 부탁에 의해, 일주일 간의 모든 일정이 카이엔을 위해 취소 된 상태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설치된 관전용 패닉룸에서, 올가 비르투스는 토마스와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괜찮을까요. 성녀님? 세르게이 경은 교단의 성기사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분..게다가, 실전에 있어서는 백기사보다 뛰어나다는 흑기사 중에서는 늘 선두로 꼽히시는 분인데..”
토마스 사제의 말에, 올가는 괜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잔에 담긴 포도주를 부드럽게 음미하며 두 사람을 내려다 봤다.
“괜찮아요, 본디 용사라면 이런 작위적인 시련쯤은 가볍게 돌파하기 마련 아니겠나요?”
사실, 올가는 카이엔이 용사인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성검의 시험을 바로 치루게 한 후 성검을 넘기는 것이 옳을 터.
허나, 저 건방지게도 정실을 주장하는 아르틴의 하렘 녀석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카이엔이 올가 자신의 말에 따라 움직여 줄 필요가 있었다.
즉, 이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밤낮으로 교단의 말을 새겨, 카이엔이 올가의 말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 올가가 준비한 시간이었다.
‘카이엔 당신이 강한 것은 알고 있어요..하지만, 그건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전. 지금의 당신은 그냥 신체 능력이 좋은 용사 후보생에 불과할 터.’
올가의 전생에 대한 기억은 아르틴과 만난 기억 뿐. 카이엔에 대한 자세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카이엔이 두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 성검을 뽑은 이후부터라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다.
‘자, 첫날에는 좀 엄하게 가르치라고 했으니, 세르게이 경이 제대로 손봐주면 자신감이 꺾이겠죠.’
물론 이 일이 단순히 올가의 계획만을 위한 일은 아니었다.
요 며칠 아르틴과 대화를 나눠본 결과, 아르틴은 마왕군이 걸어오는 싸움을 막을지언정 피할 생각은 없었다.
‘당신이 강해진다면, 서방님이 겪을 위험은 줄어들 테니...그만큼 서방님은 더 오래 제 곁에서 있을 수 있겠죠?’
카이엔에 대해서는 용사로서 세계를 구할 수 있도록 아낌없는 지원을 할 예정이었다.
그 시간에 자신은 아르틴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며, 자신의 곁에서 절대 떨어질 수 없게 만들 뿐.
*
“..진심으로 해도 될까요?”
그때, 묵묵히 세르게이의 설명을 듣고 있던 카이엔이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저도 최대한 다치지 않게 하겠지만, 승패 자체는 봐주지 않을 테니까요.”
어쩌면 오만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수십년을 교단을 위해 봉사하며 수많은 교단의 적들을 베어 넘긴 세르게이는 흑기사 중 최고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허나, 세르게이는 그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내보이지 않았다.
오만과 자신감은 한없이 가까운 감정, 어린 용사 후보생이 그 정도 자신을 내비추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무력화, 무장해제, 제압, 뭘 해도 좋으니, 전력으로 하시길.”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세르게이의 검에서 신성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첫 날은 엄하게 하라는 성녀님의 말이 있기는 했지만 상대는 학생, 세르게이는 철저하게 가르치는 교수의 입장으로써 임하기로 생각했다.
‘조금 힘든 수업이 되겠지만, 정말 당신이 용사라면 참길.’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카이엔이 롱소드를 한손으로 쥐며,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시작한 건가요?”
“예, 앞으로 계속 첫수는 양보하겠습니다. 마음껏 펼치시길.”
그 말에 카이엔은 다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검의 끝을 향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순간, 카이엔은 더없이 진지한 상태였다.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은 오직 하나 뿐이었기에.
‘...빨리 끝내고 아르틴 만나러 가야지.’
꽈드득!
카이엔이 쥔 검의 철 손잡이가 살짝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
──채앵!!
달그락.
바람이 지나갔다. 그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그 자리의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이 지나간 길 뒤로 세르게이 첼레프스키의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안타깝게도 올가가 알지 못했다. 카이엔은 2회차부터 4회차의 아르틴이 아카데미를 떠나기 직전 까지 아르틴과 끝없이 붙어있었다는 사실을.
심지어, 아르틴이 떠난 후에도 카이엔은 그 맹목적인 집념으로 아르틴을 매순간 기억하고 떠올리며, 마왕성으로 떠난 아르틴을 뒤따라가기 위해 수련을 거듭했다는 사실을.
2차례의 보고서에 적혀 있던, 카이엔이 무력화됐다는 사실 탓에 그저 자신처럼 아르틴에 대한 사랑이 깃든 기억만이 남아 있을 거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카이엔, 16년차 용사의 실력이었다.
“계속 할까요? 아니면 가도 될 까요?”
담담하게, 검은 머리의 미청년이 손목을 움켜쥐고 놀란 성기사를 보며 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