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120화 (120/266)

〈 120화 〉 외전 1.아그네스와의 데이트 #02

* * *

아그네스가 준비해 온 소설 낭독이 맥없이 끊긴 직후,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다.

“우으...”

시무룩한 아그네스의 표정으로 보아 정말 기대했던 것 같아, 나도 이 상황이 조금 안타깝게 느껴졌다.

‘...보통은 준비하는 소설은 다 미리 읽어볼 텐데 말야.’

아마 아그네스는 정말 자신이 재밌게 읽는 작품을 나와 같이 즐기고 싶었을 것이다.

서브컬쳐를 좋아하는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타인과 공유하는 거니까.

다만, 그런 걸 준비하는 건...

그냥, 아그네스 특유의 묘하게 덜렁이는 천성 탓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좀 귀엽네.’

회귀 후 만난 아이들은 뭔가 전보다 어른스러운,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다.

형님 거리는 것을 멈추고 오라버니라고 사근사근 부르는 샤오메이가 가장 눈에 띄는 변화라면..

아그네스는 가장 무겁게 다가오는 변화다.

내 앞에서 만큼은 자연스럽고 편하게 여고생 같은 모습을 보여주던 아그네스가 언제나 정실로써 책임감 있게 움직이는 모습은, 영 불편했으니까.

“너무 기죽지마 아그네스, 아직 시간은 많잖아?”

“그렇지만...제 실수로 분위기가 망가진 걸요..”

나는 축 처진 아그네스를 달래기 위해, 품에 가볍게 끌어안아 토닥였다.

“나는 아그네스가 그런 로맨틱한 데이트를 준비해 줘서 고마운 걸?”

“...정말, 부녀자 요소나 그런 것도 없고, 오순도순 연애하는 거라 가져온 거였단 말이에요.”

5분 정도 아그네스는 껴안고 토닥이자, 아그네스는 내게 포옥 안겨서 불평하기 시작했다.

이건 아그네스의 마음의 응어리가 풀린다는 증거기도 했다.

이제 아그네스 달래기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볼까?

“그러고 보니 아침을 안 먹어서 출출한데..”

“그래요? 진작 말해주시지, 간식도 준비해왔거든요!”

내가 슬그머니 말을 돌리자, 아그네스는 내 가슴 품에서 고개를 떼어내더니 피크닉 바구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짠, 아르틴을 위해 직전 만든 샌드위치 랍니다?”

“우와...”

아그네스가 바구니에서 꺼낸 샌드위치는 내가 보기에도 꽤나 놀라운 퀄리티였다.

“고급 햄, 허브와 계란, 토마토와 양상추, 제국의 치즈랑 시르트 열매까지, 맛있어 보이지 않아요?”

“정말 이걸 아그네스가 만들었다고? 아그네스, 원래 요리는 잘 못했잖아..?”

나는 반듯하게 잘린 데다가 데코레이션 까지 완벽한 샌드위치를 보며 감탄했다.

전생에 처음으로 아그네스가 만들어 줬던 샌드위치는...솔직히 칭찬이 힘들었다.

“이번에는 별모양으로 안 잘랐네?”

“..그, 그건 그때가 처음으로 만드는 거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샌드위치가 그렇게 약할 줄 알았나요!”

설마 샌드위치를 별모양으로 자르겠다며, 식칼에 오러 소드를 펼쳐서 도마랑 테이블도 별모양으로 자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고, 아르틴이 떠난 후에..많이 연습했단 말이에요. 아르틴이 오면 손수 만든 음식을 먹여주고 싶어서.”

“...아.”

그 말에 나는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결국 나는 돌아오지 못 했으니까. 역시 많이 기다렸구나.

“피, 아르틴이 계속 그런 표정 지으니까, 다들 아르틴 앞에선 그런 이야기 안하려고 하는 거 알아요?”

“..티, 티났어?”

“아르틴은 자신이 감정 잘 숨기는 줄 알죠? 진지할 때는 몰라도 평상시에는 엄~청 티난다고요?”

나는 할 말이 없어서 볼을 긁적였다.

결국 돌아오겠다고 약속해놓고 지키지 못한 것도, 먼저 찾아온 것도 아그네스 였으니까.

물론 내 스스로의 변명거리 정도는 있었다.

..먼저 아그네스를 찾아갔을 때, 나를 못 알아보면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바이올렛이 나를 피했을 때는 멘탈이 우수수 박살나기도 했었고.

“너무 우울한 표정 짓지 말아요. 아르틴, 저는 슬프기 보다는 오히려 행복한 걸요?”

아그네스는 내게 보란 듯이 활짝 웃으며, 샌드위치를 하나 집어 들더니 내게 내밀었다.

“여신님이 내려주신 기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르틴과 이렇게 다시 만나서 요리를 해줄 수 있다는 게, 저는 그 어떤 기적보다도 감사하고 행복해요.”

“...아그네스.”

나는 내가 죽은 후, 당연히 세계가 그 순간 끝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들은 바로는 달랐다. 내가 죽은 후에도 이 세계는 마왕이 부활하는 순간까지 남아있는다고 한다. 그 후에는 아마 이 세계의 종말이 오는 것 같다.

그럼, 내가 4회차에서 죽은 시점은 마왕 부활의 약 1년 전쯤. 3년차 시점에서 마왕성을 향해 출발했으니 아그네스는 나를 위해 2년을 기다렸다는 뜻이다.

그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

“..아르틴?”

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입을 꽉 다물고 아그네스를 끌어안았다.

아그네스는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부드럽게 껴안으며 내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 다정하게 웃으면서 나를 달래주고 있겠지.

그런 아그네스에게 우는 모습은 보기 싫었다. 그래서 그냥, 말없이 계속 꼬옥 끌어안았다.

*

“자, 아~ 하세요?”

“..아~”

조금 진정 된 후 나와 아그네스는 소설 낭독에서 생긴 어색한 분위기가 사라진, 알콩달콩한 분위기로 샌드위치를 서로에게 먹여줬다.

으음, 한입 크게 베어 먹으니 확실히 맛까지 좋았다. 처음 만들어준 샌드위치는 구정물 비린내가 났는데, 이건 모든 재료가 조화롭게 섞여 있었다.

“어때요? 맛있나요 아르틴?”

“으음, 확실히 끝내준다. 맛있긴 한데...”

“네? 왜 그러세요? 혹시 너무 많이 먹여드렸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시르트 열매는 정력에 좋은 열매 아니야...?”

뜬금 없이 들어간 이 새큼한 시르트라는 열매, 내 기억에는 샌드위치에 자주 넣는 재료가 아니었다.

보통 어디에 쓰이는 재료냐면..전생으로 치면 복분자 같은 역할인데..?

“...저, 그게 아르틴이 요즘 데이트 하고 다른 여자들 챙기느라 바쁘니까, 기력이 좀 허할까봐..”

아니, 진짜로 정력 때문에 넣은 거라고?

“..내, 내가 요즘 기력이 예전 같지 않아? 그 정도야?”

“아, 아뇨! 아르틴은 엄청 대단한데! 걱정이 돼서! 요리할 때 마침 제 호위가 챙겨 오기도 했고...”

아그네스는 손사래를 치더니, 얼굴을 붉히며 손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호위에게 도대체 평소에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아, 아무튼! 샌드위치 다 드시면 이번에는 이 책이에요!”

“..어라, 책을 또 준비 한 거야?”

아그네스는 바구니에서 또 다른 책을 꺼냈다. 아까 전의 책보다 표지에 장미 그림이 5배는 많은 화려한 책이었다.

“그.. 요즘 아르틴 때문에 바빠서 책은 전혀 못 읽었다고요? 그러니까 아르틴이 챙겨줘야 해요. 알았죠?”

“하하, 알겠어. 빨리 먹고 우리 아그네스 위해서 열심히 읽어 줄게.”

묘하게 당황한 아그네스의 표정에, 나는 알았다고 차분히 달래준 후 아그네스가 직접 만들었다는 오렌지 주스와 샌드위치를 잔뜩 음미했다.

음, 주스도 엄청 달달한 게 설탕을 때려 부은 이 맛, 카페에서는 맛보기 힘든 맛이라 최고였다.

“자, 그럼 책을 읽어 줄까?”

“...네, 네! 저도 마음의 준비 됐어요!”

내가 다 먹고 여유롭게 책을 읽으려고 하자, 아그네스는 왠지 아까보다 더 긴장한 얼굴로 무릎까지 꿇은 공손한 자세로 내 옆에 기대어 앉았다.

“..왜 그래? 갑자기 긴장을 하고? 마음의 준비?”

“아, 아르틴도 곧 알게 될 거에요..”

나도 곧 안다고..? 뭔가 또 준비한 특별한 이벤트라도 있나?

‘...너무 긴장해서 나한테 실수로 말한건가? 모르는 척 해줘야지.’

나는 피식 웃으면서 책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제국의 변경백, 오도르 후작의 기사 아르게일은 미색으로 유명한 방탕아였다. 그런 기사를 모시게 된 하녀 유리아는 긴장감으로 어젯밤의 잠을 설치고 말았다..?”

..내가 이상한가? 묘하게 도입부가 이상한데?

“...아르게일은 밤에 침소에 찾아온 유리아의 손목을 낚아채며 속삭였다. ”내가 무슨 의미로 널 부른 건지 알 텐데 유리아?“..준비한 책 이거 맞아 아그네스?”

나는 점점 책을 읽으며 의구심을 느꼈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얼굴을 붉힌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보고 계속 읽으라는 듯 빤히 바라봤다.

“..하녀가 저항하자, 아르게일은 하녀의 턱을 움켜쥐더니...부드럽게 입술을 맞췄다?”

이건..아무리 봐도 야설 아니야?

“아그네스 이건...”

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그네스를 바라보자, 아그네스는 얼굴이 완전히 붉어진 상태로 눈을 꼬옥 감고 있었다.

이거 설마..

‘...아까 그렇게 화를 냈던게 설마.’

로맨스 소설 다음에는, 성인용 로맨스 소설로 넘어가려고 준비했던 건가?

그런데 분위기가 깨져 버려서 그렇게 속상해 했던 거고?

“...!”

아그네스는 내가 잠시 말이 없자 눈을 살짝 떴다가, 내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알자 다시 질끈 감으며 몸을 움찔거렸다.

‘...이걸 참아? 그럼 나는 고자새끼지.’

나는 그런 아그네스를 끌어안으며, 달콤하게 입술을 겹쳤다.

“후읍...츄웁...아르티인...”

아그네스는 마음의 준비를 끝냈다는 말이 사실인지, 내가 키스를 하자 내 입술과 혀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며 내 목을 끌어안았다.

밖이긴 하지만 어떻겠는가, 나는 책을 내던지고 아그네스에게 더더욱 정열적으로 키스하기 시작했다.

“츄우웁..아르티인..책이..”

“그런건 이제 상관 없어, 아그네스도 이쪽을 더 기대 했잖아?”

“....”

아그네스는 말없이 내 와이셔츠를 꽉 움켜쥐었다.

나는 그걸 허락의 의미로 받아 들이며, 아그네스를 천천히 돗자리에 눕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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