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대련 #02
* * *
채앵! 채앵!
두 명의 남학생이 치열하게 칼을 주고받고 있었다.
“오오오..! 이게 기사 가문의 수준인가?”
“놀라워요, 1학년에 벌써 저 정도의 검술을 구사하다니..!”
대련은 어지간하면 동등한 수준에서 치러져야 하기 마련, 그렇기에 기사 가문 출신의 남학생들의 대련은 주변 학생들에게 감탄사가 나올 만큼 치열하고 비등한 수준이었다.
“흐 흐흠, 확실히 기본기가 있군요. 나쁘지 아, 않은 것 같군요. 조, 조교군.”
“네, 양쪽 다 이번 실습 점수는 A를 줘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교수님.”
우르단 헬릭 교수님과 조교도 두 학생의 검술 대련을 보며 꽤나 흡족해 보였다.
확실히, 1학년 치고 저 정도의 실력이라면 코볼트나 일반적인 도적들은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암.”
그렇지만, 나한테는 너무 지루해서 하품이 나오고 있었다. 어쩌겠는가, 지루한 건 지루한 것을.
‘매번 회귀때 마다 이게 곤욕이라니까..’
아카데미 생활 약 21년차인 내게 1학년 수준의 수업들은 대체로 지루하다. 아무리 잘해봐야 천재급이나 주연 등장인물이 아니고 서야 만족하기 힘든 수준이니까.
“어머, 졸려요 오라버니? 제가 무릎 베개라도 해줄 까요?”
“아니..수업 태도 점수 벌려고 나온 건데, 네 무릎에 베고 누워 있으면 교수님도 안 좋게 보시겠지.”
나는 내 하품을 보고 무릎을 두드리는 샤오메이의 볼을 쓰다듬어 주고는, 한숨을 내쉬며 남학생들의 시합으로 눈을 돌렸다.
‘아, 또 교수님하고 눈 마주쳤다.’
──지난 번 학장과의 상담 후, 교수님들이 내게 엄청난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은 알았다.
실제로 장미관 사건으로 며칠 쉬고 나니까, 어느 교수는 오랜만에 수업에 나타난 나에게 대학원생, 아니면 조교라도 해볼 생각이 없냐고 강력하게 어필 할 정도였다.
본래라면 그런 상황이 끔찍하게 귀찮아서 시험만 치루고 말았겠지만, 수업을 열심히 들어야 할 몇 가지 이유가 생긴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황태자가 만족하는 수준의 점수를 내려면, 성실점수나 교수의 평가 점수도 중요할 테고..’
혹시 모른다. 그 알량한 몇 점의 추가 점수가 황태자의 트집 잡을 구석을 막아줄 수 있을지도. 실제로 학생회장인 황태자라면 교수들의 개인 평가도 듣기 쉬울 테니 말이다.
게다가..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세니아 선생님을 위해서라도 수업은 열심히 들어야 했다.
하지만 역시 좆밥 싸움도 치열해야 재밌지, 좆밥 훈련은 영 재미가 없으니 지루한건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딴 짓 하자니 헬릭 교수님이 나를 신경 쓰시는 게 눈에 보이니 죽을 맛인 상황이다.
“자~다음 학생은, 클레어 플라위버!”
“아, 네! 제, 제 차례네요! 잘 할 수 있을까요?”
“걱정 하지 말아요, 클레어 양이 초보니 다들 살살 해줄 거예요!”
“네에..! 그래도 최선을 다 해 볼게요!”
기합이 들어간 클레어는, 양 주먹을 꼭 쥐며 대련장으로 나갔다.
“꼭 병아리 같네, 그치?”
“네 맞아요. 병아리. 처음에는 그 카이엔을 따라다녀서 걱정 했는데, 너무 귀여운 것 있죠?”
“오, 상대는 제국 출신의 기사가문이네. 상대가 될까?”
물론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이제 막 검을 휘둘러보기 시작한 클레어는 자신의 상대인 여학생에게 교수님의 시범처럼 열심히 검을 휘둘렀지만, 옆에서 보기에는 그저 엉성한 초보자의 검술 그 자체.
“일부러 기사 가문 출신하고 맞춰준 걸 거야. 완전 초보자끼리 대련을 하면 사고가 날 수 있으니까 맞춰주는 거지.”
실제로 여학생은 클레어에게 적극적으로 반격하지 않고, 수비를 유지하며 클레어가 마음껏 검을 휘두를 수 있게 도와주다 적당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검을 쳐내 무력화 시켰다.
“음, 깔끔한 수비 실력. 훌륭했습니다 레나 학생. 클레어 학생도 처음 검을 잡은 것 치고는 정석에 기반한 자세가 나쁘지 않았어요.”
“가, 감사합니다!”
클레어는 조교의 칭찬에 숨을 헐떡이면서도 활짝 웃더니, 우리를 향해 쪼르르 달려왔고, 샤오메이는 그런 클레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칭찬해줬다.
“저 칭찬 받았어요 샤오메이 양!”
“네네, 잘했어요 클레어 양. 좀 더 연습하면 실력이 훨씬 더 늘어날 거예요.”
‘..클레어가 샤오메이보다 1살 더 많지 않나?’
뭐, 정신연령으로 치면 샤오메이가 더 많을 테니 상관없나.
“다음은 조르바 학생!”
“이런, 내 차례네~살살 하고 올게.”
“..일부러 지시면 안 됨다 도련님! 아셨죠!”
옆에서 다른 여학생들에게 추파를 던지던 조르바가 일어나자, 샤오메이는 다급하게 외쳤다.
채앵!
“끝! 조르바 학생은 검을 좀 더 단단하게 쥐세요!”
“죄송합니다~굳은살이 없으니 꽉 쥐기 힘들군요.”
하지만, 그런 샤오메이의 바람을 뒤로 한 채 조르바는 단 세 합 만에 검을 놓치고 패배했다. 그리고 나와 샤오메이는 조르바가 검을 일부로 놓치던 장면을 확실히 봤다.
“하아...도련님 진짜아..!”
“진정해 샤오메이, 조르바가 성실하게 검술 수련을 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러려니 하자고.”
“하하, 미안 미안~져버렸네~”
명목상 조르바의 가정교사기도 한 샤오메이는 그런 조르바의 모습에 한 없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조르바는 그런 샤오메이의 속도 모르고 너무나도 익숙한 표정으로 돌아와 능글맞게 웃었지만 말이다.
“역시 금태양은 멸해야 할 족속이 맞는 것 같구나, 아르틴의 친우만 아니었다면 한 대 발로 차줬을 것이다!”
“유니코르, 제가 허락할 테니 지금이라도 한 대 차주면 안 될까요?”
“어이쿠, 여기 계속 있으면 정말 한 대 맞겠는 걸.”
나랑은 다르게 편안한 자세로 드러누워 검술을 지켜보던 유니코르와 옆에 서서 노려보는 샤오메이의 등쌀에, 조르바는 자기 좋다는 여자들의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본좌는 이 수업이 많이 지루하구나...처녀인 아이들이 땀 흘리는 모습이 없었다면 진작 돌아갔을 것 같다.”
“..저, 저기, 유니코르님. 왜 절 그렇게 뚫어져라...”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흡족해하는 유니코르의 눈빛에, 클레어가 조금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며 샤오메이의 뒤로 숨었다.
‘분명 바이콘이 된 것 같은데, 처녀를 좋아하고 금태양을 싫어하는 걸 보면 근본이 유니콘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유니코르가 나를 따라다닐 필요는 없었지만, 독한 영약을 섭취하는 중이라 약해진 나를 호위해야 한다는 아그네스의 말에 유니코르는 지루한 수업을 따라 듣고 있는 중이다.
실제로 방금도 유니코르가 신성력을 잔뜩 불어넣어준 덕에 구속구를 차고 1시간 수련해도 지치지 않을 수 있었고 말이다.
“조금만 참아 유니코르, 이번 수업 끝나면 카페에 가서 당근 케이크 사줄 게, 알았지?”
“음! 당근 케이크도 좋지만 허그...아니, 알겠노라. 당근 주스도 함께다!”
유니코르는 당당하게 허그를 요구하려다가, 클레어의 눈치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순결의 상징인 유니콘이 남자에게 허그를 요구하는 것은 좀 그렇긴 하지.
“자, 다음 학생은..검은 초원의 오르보트!”
그때, 또 좆밥 싸움이 끝났나 생각할 때 쯤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재가 오르보트지? 단신으로 시비 거는 남학생 셋을 대련으로 쓰러트렸다고 하는..!”
“역시 오크라서 그런가? 피지컬부터 다르다!”
그랬다. 학생들 사이에서 걸어 나온 건, 키가 2m를 훌쩍 넘는 거구의 검은 피부 오크였다.
검은 초원의 오르보트, 샤오메이나 카이엔, 바이올렛 같은 슈퍼 루키들에 묻혔지만, 1학년 중 어지간한 학생들은 범접하기 힘든 재능을 가졌다고 알려진 유망주들 중 한명이다.
몇 없는 문명화 된 오크 부족 중 하나인 검은 초원 부족의 대족장의 아들로, 무력에 있어서 동세대 조연 캐릭터 중 둘째가라면 꽤 서러워하는 캐릭터..지만.
“와, 여태까지 나온 애들 중 가장 쓸 만한 녀석인데요? 저 정도면 다섯 합까지는 힘빼면 겨뤄볼 만 할 것 같아요!”
결국 샤오메이의 하위 호환. 게다가 남자 캐릭터라 늘 나타난 적의 전투력 측정기정도로 기억한다. 빙의한 후에는 별로 친해진 적도 없었고.
“자, 오르보트 군의 상대는...”
“오르보트! 결투할 상대 직접 고르고 싶다!”
“네? 그게 무슨..?”
오르보트는 훈련장 앞에 서더니, 다음 상대를 부르려는 조교의 말도 끊고 자신의 검을 빼들어 누군가를 겨눴다.
“...어? 나?”
“아르틴 루드비히! 당당한 전사의 심장을 걸고, 오르보트와 결투하자!”
근데 녀석이 칼끝으로 겨눈 것은 나였다.
단 한 번의 접점도 없던 녀석에게 지목을 당한 나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요, 결투 상대는 저희가 지목해드리는 겁니다!”
“오르보트, 강자랑 싸운다! 강자를 꺾고, 강자의 것을 취한다!”
“아니, 그렇게 말해도 곤란합니다..!”
아무리 문명화되어도 오크는 오크인가? 아니다. 내가 아는 몇몇 오크들은 저러지 않았다. 그냥 저 녀석이 앞뒤 없는 뇌근인 것이다.
‘보니까 헬릭 교수님도 곤란한 것 같고..’
어쩔 수 없나.
“샤오메이, 다녀 올 게”
“어머, 상대해주시게요 오라버니?”
“이런 막무가내인 녀석을 진정시켜주면, 점수 따기 좋잖아? 어차피 1번은 대련해야 하고.”
실제로 심지가 그리 강하지 않으신 헬릭 교수님은 곤란한 표정을 짓는 상황. 교수의 점수를 따기 최적의 상황을 놓칠 수는 없었다.
“역시! 앞으로 나오는 군! 아르틴 널 꺾고 너의 것을 취하겠다!”
“이, 이런..괜찮겠습니까, 아르틴 학생?”
“괜찮습니다. 어차피 한 번 대련은 해야 하니까요.”
내가 괜찮다고 설명하자, 조교는 조금 차분해진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 오르보트 녀석은 기세등등한 얼굴로 콧김을 내뿜으며 나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런데 하나만 묻자, 나의 것을 취하겠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결투의 승자가 패배자의 것을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르보트! 강자인 것을 증명해 아그네스 황녀님의 약혼자 된다!”
“..뭐? 아그네스의 약혼자?”
렉스턴 사건이나 권능 도둑 관련으로 덤빈 줄 알았는데, 뜻밖의 이름이 나오자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아그네스 황녀님뿐만 아니다! 무신의 딸! 유니콘! 마녀! 전부 오르보트가 취한다! 그리고 아르틴과 카이엔도 취한다!”
“이런 십새끼가 지금 무...뭐? 날 취해? 그리고 누구?”
이 새끼가 좆같은 NTR충이라는 것을 알고,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던 찰나, 나는 조금 이상한 말을 들었다.
나? 그리고 뭐? 카이엔?
“그래! 오르보트! 아르틴에게 반한 여자들과 아르틴에게 반한 남자들 동시에 취한다! 오르보트! 양쪽 다 가능이다!”
이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라고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내 눈앞에 시스템의 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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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가 퀘스트 : 결투에서 멋지게 승리하세요!
칭호 : 반전 매력의 보유자에 이끌린 남자가 당신에게 도전했습니다!
모두의 앞에서 당신과 당신의 여인 모두를 강탈하겠다고 선언한 도전자!
결투에서 승리해서 모두의 앞에서 황녀의 약혼자임을 증명하세요!
퀘스트 완료 조건 : 검은 초원의 오르보트를 당당하게 꺾을 것.
퀘스트 보상 : 소량의 황태자의 인정게이지, 소량의 상점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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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반전 매력의 보유자
당신을 여성으로 인식하고, 그걸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몇몇 남성들은 당신에게 기본적인 호감을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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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보트! 지금 항복 한다면 아르틴을 첫 번째 첩으로...”
“너는 두 발로 걸어서 나갈 생각은 하지마라. 오르보트.”
오랜만에 더러운 시스템의 공격에, 나는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NTR도 모자라, 똥꼬충에 나를 암컷으로 본다고?
‘죽여 버린다. 무조건 실수로 죽여 버린다.’
나는 장미관에서도 내보이지 않았던 살기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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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시각, 아르틴이 있는 야외 훈련장을 향해 황급히 달려가는 한 남자가 있었다.
‘느낌이 이상해..! 아르틴에게 접근하는 건방진 녀석이 생긴 게 분명해..!!’
──카이엔, 아르틴 스토킹 16년차의 직감에, 아르틴의 정조의 위험이 감지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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