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대련 #03
* * *
“..죄송합니다. 성녀님. 명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카이엔이 특별 훈련실을 뛰쳐나간 직후, 세르게이가 절뚝거리며 다가오자, 성녀의 곁에 서있던 토마스는 황급히 달려나가 세르게이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세르게이 경? 지금 당장 치료를 해드리겠습니다!”
현재 토마스가 보기에 세르게이의 몸은 타박상에 의해 성치 않은 상태였다.
첫 대련의 패배 이후, 세르게이는 성녀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몇 번이고 카이엔에게 도전했으나, 도리어 카이엔의 손대중에 의해 전신에 타박상만 늘어난 상태였다.
“제 부덕입니다. 고작 이제 17살인 소년에게 이렇게 완벽하게 패배할 줄은 몰랐습니다.”
허나 세르게이는 토마스의 부축을 거절한 뒤 올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여신의 대리인인 성녀의 말을 수행하지 못한 것은, 신앙심이 깊은 세르게이에게 있어서는 죽음보다 더한 수치였기 때문이다.
“일어나세요, 세르게이 경. 너무 자책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잘못을 따지자면 제 잘못입니다. 과연 용사, 제 예측을 뛰어넘는 강함을 지녔더군요.”
설마 지금 시점에서도 그렇게 강할 줄이야, 올가는 속으로 혀를 찼으나,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세르게이를 천천히 일으켰다.
“거기에, 여신님이 안배하신 용사와 여신님의 부군을 맞이할 계획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답니다.”
“아까, 카이엔 군에게 말씀하신 그것 말입니까? 그게 과연 큰 의미가 있을지..”
올가의 말에 따라 세르게이가 치료를 받아들이자, 토마스는 세르게이의 몸을 치료하면서도 걱정 어린 표정으로 올가를 바라봤다.
토마스가 생각하기에는 여신님께서 안배하신 대계에 있어서 좀 더 능동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나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토마스 사제님. 힘으로 억누르기 힘든 개는 먹이로 달래는 법이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올가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명분을 잡은 카이엔이 얼마나 막무가내로 밀어 붙이는 지, 그 진절머리 나는 녀석이라면 분명 자신의 무대로 아르틴을 데려와 주리라.
“저희는 다음 계획을 준비하러 가도록 하죠.”
고개를 숙이는 세르게이와 토마스를 데리고, 올가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특별 훈련실을 천천히 빠져나왔다.
*
뻐억─!
수차례 울려 퍼진 묵직한 타격음이 다시 한 번 울리자, 대련을 지켜보던 제국의 기사 가문 출신인 레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레나, 저거 벌써 12번째 아니야..?”
“처음에는 그냥 자연스러운 건줄 알았는데..일부러 저러는 거지?”
주변의 견식이 적은 학생들도 이변을 알아차린 것인지, 자신에게 물어왔지만 레나는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괜히 내가 이상한 말 했다가 나쁜 소문이라도 퍼지기라도 하면...’
레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당장 보이는 아르틴의 집요함에 겁을 먹은 탓이다.
뻐억─!
“크아아악! 아르틴! 제대로 승부해라!”
“아가리 닥치고 덤벼, 껌둥이 오크 새끼야.”
덩치 차이로만 본다면, 두 합도 가지 못하고 아르틴 루드비히가 오르보트에 의해 박살이 났어야 할 것 이다.
실제로 레나는 아르틴의 소문을 익히 들었고, 가끔 검술 수업에서 보여준 아르틴의 놀라운 실력도 눈으로 봤었다.
허나, 그걸 감안 하더라도 저 오르보트의 피지컬은 오크가 아니라 트롤이나 오우거 같은 거인급 아인종에 비견해야 할 수준이었다.
아무리 검술 실력이 좋아도, 진검이 아닌 훈련용 목검을 이용한 승부, 거기에 두 사람의 무기의 리치를 생각한다면 아르틴이 패배를 점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뻐억─!
“크아아악!!”
또 다시 타격음이 울려 퍼지자 오르보트의 거구가 뒤로 물러났다.
벌써 14번째, 아르틴이 오르보트의 맹렬한 강검을 흘려낸 직후, 빈틈을 노리고 휘두르는 대신 정확하게 넓적다리뼈에 꽂힌 로우킥에 오르보트의 자세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방금 봤어? 대검 수준인 오르보트의 검을 한손으로 막아내고 또 로우킥 찬 거?”
“와, 저 두꺼운 왼쪽 다리가 퉁퉁 부어오른 거 봐..! 부러지진 않았을까?”
당연히 금이 갔겠지 멍청아, 레나는 속으로 침음성을 삼켰다.
‘휘둘러서 무게가 실리기 직전에 안쪽으로 파고들어, 원심력과 무게를 역으로 분산시키다니..’
제정신인 검사라면 아르틴과 같은 판단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선, 오르보트가 휘두르는 대검의 속도나 풋워크 움직임이 어지간한 동년배들의 최고속도를 뛰어넘는 것이 문제였다.
원리를 알아도 타이밍이 틀리다면 나무 대검에 의해 갈비뼈가 박살나고 말 터. 그 공포를 이겨내면서 제대로 된 타이밍을 잡을 수 있는 실력은 일류 결투사 정도나 되어야 한다.
게다가, 오크를 상대로 안으로 파고 든다? 어지간히 주먹질에 자신이 있더라도 저 짱돌만한 주먹을 평범한 인간이 맞는다면 마력 없이는 한 방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르틴은 겁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거리를 좁힌 직후 이루어진 몸싸움에서 매번 우위를 점하며, 거리를 벌리는 오르보트의 다리에 로우킥을 먹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며 질린 표정을 짓는 것은 학생들 뿐만이 아니었다.
“교수님, 검술 대련인데 저래도 되는 건가요?”
두 사람의 대련을 바라보며, 승부가 나는 즉시 두 사람을 말리려던 조교는 고민하는 표정에 빠졌다.
뻐억─!
“크아아악!! 또 다리만 차다니! 오르보트를 놀리는 것이냐 아르틴!!”
사실상 승부는 진작 난 상황. 아르틴의 압도적인 승리나 다름없었다.
오르보트의 강검을 수비일변도의 안정적인 대응으로 받아 쳐내며, 몇 번이고 목을 베어낼 틈을 가져간 아르틴의 실력은 두고 볼 것도 없이 훌륭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르틴은 승리를 취하지 않았다. 대신 오르보트의 공격에서 빈틈이 보일 때 마다 집요한 타격으로 자세를 무너트린 직후 물러날 뿐.
지금 이 상황은 명백했다. 오르보트는 투지를 잃지 않았고, 아르틴은 대련을 끝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대련의 시작 전 벌어진 오르보트의 모욕에서 비롯된 것을 알기에 섣불리 말릴 수도 없는 것이다.
“으으음..부, 분명 자세를 무너트리기 위, 위해. 밀치거나 타격을 가하는, 것, 것도. 검술의 일부입니다. 소, 속행해도 되겠군요.”
게다가 상황을 판단할 우르단 헬릭 교수는 대련을 중단할 의사가 없어보였다. 마왕군과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며 거친 것을 많이 본 교수가 보기에 저 정도의 대련은 충분히 속행해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네..아으! 알겠습니다.”
뻐억─!
중간에 끼인 조교는 또 다시 울리는 근육을 걷어차는 소리에 움찔 거릴 뿐이었다.
*
“크아아악!! 이 망할 녀석! 비겁하다! 제대로 검을 휘둘러라!! 계집같이 생겨서 계집같이 구는 것이냐!”
“뭐래 십새가, 계속 해야지? 아니면 포기 할 거야?”
오르보트는 분노로 울부짖었지만, 아르틴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오르보트를 비웃었다.
‘젠장, 아르틴 루드비히, 체구는 작은 데 미친 듯이 강하다..!’
이 대련은 겉으로 보기에는 침착하게 운영하는 아르틴에 의해 오르보트가 끌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허나, 그 표현은 오르보트가 듣는 다면 무척이나 억울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아르틴은 무척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오르보트가 도발하는 족족 걸려들어 심리전에서 패배한 후 빈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빈틈이 많으면 뭐하냐! 귀신 같이 빨라서 따라 잡기도 힘든데!’
하지만 매번 오르보트가 빈틈을 노릴 적마다, 아르틴은 귀신같은 속도로 공격을 차단하고 호랑이처럼 다가와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주먹으로 복부를 후려갈긴다.
“커흑! 이 비겁한! 또 안 보이게 때리다니!”
게다가 섣부르게 물러나면 다리를 걷어차는 탓에, 오르보트는 아드레날린으로 자각하고 있지 못했지만 다리의 3군데나 금이 간 탓에 풋워크가 망가진 상태였다.
답답하다. 차라리 호쾌하게 한 방에 나가 떨어졌다면 오르보트는 만족한 미소로 아르틴을 인정했겠지만, 눈앞의 미소년은 깔끔한 패배를 용납하지 않았다.
공격도, 방어도, 거리를 벌리거나 좁히는 것조차 전부 아르틴에게 통제받는 부자유란,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두 다리로 걸어 다닌 오르보트에게는 너무나도 낯선 처음 겪는 감각이었다.
아르틴은 말하지 않았지만, 오르보트는 아르틴의 의도를 이해했다. 자신에게 패배를 인정하고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끝없이 괴롭히겠다는 뜻 일터.
긍지 높은 검은 초원의 전사 오르보트는 이를 납득할 수 없었다. 스스로 패배를 선언할 바에는 끝까지 싸우다 죽는 것이 초원의 법도였으니까.
“...크아아아아아아!!!”
오르보트가 다시 한 번 크게 대검을 휘두르자, 아르틴은 익숙한 움직임으로 대검을 쳐내려고 했다. 허나 오르보트의 노림수는 단순히 계속 실패해온 공격을 다시 시도하는 게 아니었다.
“오, 오르보트가 검을 던졌어!”
오르보트의 대검이 허공을 가르자 레나가 경악하며 외쳤다. 검술 대련 중에 투검술이라니? 심지어 저 대검에는 마나가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콰직!!
아르틴의 목검이 오르보트의 대검을 막아냈지만, 담긴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 사이, 오르보트는 아르틴에게 맨손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박살을 내주마! 아르틴!!”
검술 대련에서 검을 놓치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나, 오르보트의 머리는 이미 눈앞의 아르틴을 때려눕히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이미 전신에 마나까지 끌어올린 오르보트의 주먹이 휘둘러지자, 앞으로 벌어질 잔인한 장면을 상상한 학생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뻐억─!
‘어, 어떻게 해! 루드비히가 쓰러졌나봐!’
‘저 묵직한 소리..주, 죽진 않았겠지?’
묵직한 타격음이 울린 직후, 고요한 적막에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커어어억.”
허나, 그 적막을 깬 것은 오르보트의 신음소리였다.
쿵─!
“..어라? 오르보트가 쓰러졌다?”
학생들이 눈을 뜨자 본 광경은, 얼굴이 완전히 뭉개진 채 대자로 뻗은 오르보트였다.
조교나 교수님, 혹은 아르틴 본인이 오르보트를 때려 눕혔나? 허나 학생들이 보기에 세 사람은 움직인 기색이 전혀 없었다.
“..후, 누구 마음대로 기절시킨 거야? 맨손으로 덤벼서 오히려 버릇을 고치려고 했는데.”
그때, 아르틴이 학생들의 뒤편을 향해 짜증어린 소리를 내뱉자, 학생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저런 멍청이랑 어울려 줄 필요 없어 아르틴, 요즘 영약 먹어서 몸 관리도 해야 하잖아?”
“저런 녀석은 무리의 축에도 끼지 못해, 참견하기는.”
누구나 기억하는 검은 머리의 미청년은, 짜증어린 아르틴과 대조적으로 다행이라는 아련한 눈빛으로 아르틴을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카이엔~!”
오직 클레어만 새롭게 나타난 남학생의 모습을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
오르보트를 돌의 정령이 쏘아낸 투석으로 제압한 카이엔은 별 경고 없이 해프닝으로 넘어갔다.
“오, 오르보트 군은 평가에서 감점을 줘, 줘야겠군요. 맨손으로 덤벼들다니 말입니다.”
오히려 실려나간 오르보트를 보며, 우르단 헬릭 교수는 엄격한 표정으로 패널티를 선언했다.
당연한 일이다. 제 분에 못 이겨서 마나까지 끌어올리며 맨손으로 덤빈 녀석은, 대련을 위험하게 만들었을 뿐 더러 교수의 지도를 무시한 셈이니 말이다.
“흠흠! 누구 덕분에 오라버니가 박투술이 크게 늘어난 것 같지 않나요?”
“그래, 우리 샤오메이 덕분이지. 확실히 무술도 배워두니 쓸모가 있더라.”
나는 장하다는 듯 샤오메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지만, 속은 편치 않았다.
오르보트 녀석이 내게 덤벼드는 것은 예상한 바였다. 아니, 오히려 그쪽을 유도한 건 나였다.
대부분의 오크들은 승부욕이 강하고, 투쟁심은 더더욱 강하다.
오르보트는 그런 의미에서 찍어 낸 듯한 오크 전사의 표본, 항복할 수는 없으니 도박수를 내지를 거라고 예상했고, 실제로 덤벼드는 순간 마나를 끌어올려 돌려차기를 꽂아 턱을 박살 내려고 했것만...
“일주일은 걸린다더니, 왜 벌써 나온 거야?”
“내가 생각보다 강해서, 육체적인 수련은 의미가 없다고 하더라고.”
그런 내 계획을 방해한 카이엔은 싱글거리며 나를 보며 웃고만 있었다.
뭐가 좋다고 아까부터 자꾸 이렇게 실실 웃는 거야?
“잘난 척 하려고 온 거야? 그러면 타이밍이 나빴다고 밖에 말 못하겠는데.”
“그럴 리가, 나는 아르틴을 데리러 온 거라고?”
“..데리러 와? 어디로 데려 가려고?”
카이엔은 그런 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품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교단에서 3일 뒤에 약소하게 나를 용사로 임명하기로 했어. 나는 3일간 합숙하면서 정신 교육을 받기로 했고.”
“..그런데? 이 서류에 왜 내 이름이 적혀 있지?”
서류의 내용은 간단했다. 3일 간 합숙을 위해 북부 교단에서 준비한 숙소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것.
문제는 카이엔 실버소드라는 이름 옆에 아르틴 루드비히라는 이름이 떡하니 적혀있었다.
“그야, 아르틴 너도 나랑 같이 교육을 받아야 하니까.”
카이엔이 눈웃음을 지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클레어가 헉!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내가? 왜?”
당연히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용사는 카이엔이지 내가 아니잖아?
그러자, 카이엔은 나만 들을 수 있는 전음으로 작게 속삭였다.
[올가 이드리스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뭐?”
녀석은 이번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의 상황이 즐겁다는 듯 그 무뚝뚝한 녀석이 눈웃음을 지으며 기뻐할 뿐.
“3일 간 잘 부탁해. 아르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