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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124화 (124/266)

〈 124화 〉 백일몽

* * *

가만히 침대에 드러누워 있으니,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 대답은 알고 있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이렇게 둘이 자는 건 오랜만이네. 그렇지 아르틴?”

그때, 방금 막 씻고 나온 카이엔이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침대에 앉아 나를 봤다.

“아...”

좆같다. 저 녀석도 좆같고, 애들하고 떨어져서 자야하는 상황도 좆같다.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러분, 용사님들이 묵는 숙소에는 오직 선별된 인원들만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시간 전, 카이엔과 아르틴이 묵기로 되어 있는 북부교단의 숙소 앞에서 토마스는 불만을 표출한 여인들을 달래고 있었다.

“..네, 머물 수 있는 사람이 한정 되는 건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만나거나 밖으로 나오지도 못할 이유는 뭔가요?”

“맞아요! 오라버니를 만나고 싶다고요!”

“본좌는 아르틴과의 계약자! 이렇게 떼어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불만을 제기하러 온 사람은 아그네스, 샤오메이, 유니코르 세 사람이었다.

하렘의 대다수가 사람이 아니거나, 시온처럼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 세 여인이 대표로 찾아와 숙소 앞을 지키던 토마스 사제에게 따지기로 한 것이다.

“신실하신 아그네스 황녀님이라면 아시겠지만, 용사로 임명 받는 과정은 아주 중요합니다. 자신의 죄를 씻어내고, 세속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기쁨을 가지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함부로 세속의 사람들과 접촉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요, 용사인 카이엔이 그런 제약을 받는 것은 알겠어요. 하지만 아르틴은 왜 같이 끌려간 건가요?”

사실, 세 사람의 불만은 아르틴 뿐이었다.

카이엔이 기숙사에 머물게 된 것으로 곤란해 하는 것은 클레어 뿐, 허나 3일간 자신들이 잘 돌봐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아르틴은? 용사도 아닌데 왜 교단에 끌려간단 말인가.

“그건, 용사 후보인 카이엔님께서 아르틴님을 동반자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동반자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군요.”

“여신님께서 계시를 내려주셨습니다. 용사의 모험을 도와줄 사람, 그 중에서도 용사의 부재시 용사를 대리할 권한을 지니는 사람을 뽑기로 말입니다.”

“무슨..! 그런 중책이라면 아르틴의 의사도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토마스의 설명에, 여인들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세 사람은 전원 아르틴이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건 아르틴의 계약자인 본녀도 허용할 수 없노라! 그런 위험한 일을 맡기다니!”

“마리안느 왕녀나 리처드 황태자, 아니면 다른 재능있는 학생들도 있는데 왜 굳이 오라버니가 그런 일을 맡아야 하는 거죠?”

샤오메이는 이를 갈았고, 유니코르는 분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땅을 발로 짓이기며 화를 식혔다.

몇 번이나 세계를 구하려다 죽은 아르틴에게 또 다시 용사의 동반자 같은 중책을 맡기다니? 세 사람은 카이엔이 또 자신들을 방해하기 위해 아르틴을 강제로 끌어들였다고 판단했다.

“오해가 있으신 모양이지만, 저희는 강제로 아르틴님을 데려온 것이 아닙니다. 이는 전부 아르틴님께서 동의하신 일입니다.”

“네? 아르틴이 말인가요?”

토마스가 당여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세 여인은 기세가 움츠러 들 수밖에 없었다. 아르틴이 동의 하다니? 카이엔과 가장 떨어지고 싶어 하던 것은, 이번 회차는 쉬고 싶다고 말하던 것은 아르틴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부인이 이 건물에 오래 머무는 것이 안 될 뿐, 면회가 불가능 한 것은 아닙니다.”

“정말요? 면회가 가능하단거죠? 저는 오라버니에게 직접 어떻게 된 물어봐야겠어요!”

“네, 물론입니다. 단, 한 가지 조건만 통과 한다면 말이죠.”

토마스 사제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품안에서 작은 하얀 구슬을 하나 꺼냈다.

“이건..?”

“교단에서 준비한 아티팩트입니다. 용사님과 동반자님을 죄로 물들이지 않을 만한, 고결하고 선한 이를 가리는 구슬이지요.”

“흥! 그런 것쯤은 가볍게 통과할 수 있다고요!”

샤오메이는 그 구슬을 향해 다가가 당차게 구슬위에 손을 올렸다. 자신은 죄를 지은 적도, 나쁜 짓을 한 적도 없으니까!

삐이익─!!

그러나 샤오메이의 기대와는 다르게, 구슬은 붉게 빛나며 불길한 소리를 내었다.

“이건..?”

“이런,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샤오메이양은 탈락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만 교단 내부로는 들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잠시만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이..!”

납득할 수 없는 과정에 샤오메이가 불만을 표출하는 순간, 아그네스는 그 광경을 보며 알아채고 말았다. 이것은 자신들에게 도전장을 보낸 성녀 올가가 준비한 트랩이라는 것을.

“...잠시만요, 토마스 사제님. 고결하고 선한이라고 한다면..구체적으로 어떤 이를 말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그네스의 질문에, 분노한 샤오메이에게 곤란한 표정을 짓던 토마스는 잘 됐다는 표정으로 구슬을 들어 올리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 좋은 질문입니다! 이건 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뒤, 천사님에게 직접 축성을 받은 미덕을 가리는 구슬입니다! 그 사람의 영혼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입니다!”

“영혼의 무게..?”

“예! 탐욕을 부리지 않은 자! 타인을 질투하고 시기하지 않은 자! 색욕으로 순결이 더럽혀지지 않은 자! 타인을 조롱하고 놀리지 않은 자! 분노로 무고한 이를 다치게 하지 않은 자! 나태로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은 자! 자신의 오만으로 타인을 얕잡아보지 않은 자! 칠대죄를 어긴 적 없는 올곧은 이를 가려내는 구슬인 것 입니다!”

토마스가 구슬의 설명을 이어갈수록, 세 사람의 표정이 다시금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탐욕을 부려, 남들 모르게 아르틴을 덮쳐 독점하려고 했던 샤오메이.

무언가 이상한 성취향에 눈을 떠, 얼마 전에도 야외에서 데이트를 하였던 아그네스.

탈모였던 아르틴을 조롱하고 놀렸으며, 자신을 고귀한 신수라고 칭하며 본좌라는 호칭을 쓰는 유니코르.

“물론, 아주 사소한 잘못은 넘어갑니다만..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처녀성, 그렇기에 순결하지 않은 이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출입을 금하기로 했습니다.”

토마스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유니코르와 샤오메이마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은 일찍이 올가가 토마스 사제에게 귀띔한 일이었다.

“자, 얼마든지 재시험하셔도 좋습니다. 면회를 하고 싶으신 분이 계신가요?”

아그네스는 확신했다.

남부교단의 신수라고 할지라도, 무신의 딸이라고 할지라도, 북부교단의 가장 큰 후원자인 제국의 황족인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저 남자는 구슬이 허락하지 않는 한 들여보낼 생각이 없다는 것을.

‘..겨우 3일로 우리에게서 이겼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올가.’

아그네스는 분함에 주먹을 꽉 쥐면서도, 샤오메이와 유니코르를 데리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면회조건이 그렇게 빡셀 줄이야..숙소에 들어오기 전에 물어볼걸 그랬나.’

나는 욕탕에 몸을 푹 담그며, 토마스 사제가 전해준 정문에서 있던 일을 곱씹으며 혀를 찼다.

아니, 토마스 사제의 강경함은 이해는 할 수 있다. 3회차 당시 나를 불태웠던 놈들이나 마왕군의 간자가 또 다시 움직이기라도 하면 곤란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에휴, 카이엔 혼자 마왕 잡으라고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미 결정한 거 너무 신경 쓰지 말자. 내가 결정한 동반자니까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 한다.

사기 계약을 당한 것도 아니고, 그저 3일 이곳에서 지내면 그만이니까.

“..아, 그래도 3일이나 애들을 못 보는 건 조금 그렇네.”

이 3일의 생활에 있어서 내 가장 큰 고민은 내 연인들을 못 본다는 것뿐이었다.

카이엔..하고 3일을 지내는 것도 꺼림직 한건 사실이다. 하지만 카이엔과 단 둘이 밤을 지새우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회차 때는 죽어라 구르면서 너무 추운 나머지 카이엔하고 부둥켜안고 잔적도 있었고, 3회차 때는 마왕군하고 목숨 걸고 싸우면서 야전에서 한 텐트 쓴 적도 많았기 때문이다.

카이엔 녀석이 나를 음습하게 쳐다보거나 연애를 방해한 적은 있어도, 나를 강제로 덮치려고 한 적은 없다. 그러니, 안심해도 좋을 터.

그렇지만 내게 3일이나 사랑하는 여인들을 못 보는 것은 이제 막 신혼생활을 하는 신혼부부에게 지방으로 출장을 가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

‘시르카를 부르면..분명 들키겠지? 다른 곳도 아니고 북부교단에서 VVIP를 위해 마련한 숙소인데.’

아마 시르카를 소환이라도 하는 순간, 나는 또 다시 악마와 계약한 타락자라면서 십자가에 매달려서 불탈지도 모르는 일이다. 타죽는 일은 두 번은 못할 짓이라 관두기로 결심했다.

“잘 씻었어? 여기 물 기분 좋던데.”

“..그래, 뭐 기숙사보단 낫더라.”

내가 가운 차림으로 머리를 말리며 나오자, 카이엔은 단추를 잠그지 않은 와이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제발 앞에 단추 좀 여미면 안 되냐? 가슴근육 과시하고 다니는 건 조르바나 했으면 좋겠는데.”

“아, 미안..늘 혼자 자다보니 신경을 못 썼네.”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내가 나오길 기다린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던데, 설마 저게 나를 유혹하는 거였다면 녀석의 대가리를 내려찍을 자신이 있었다.

“뭐 읽냐? 북구 교단 성경? 너는 그게 뭐가 재밌다고 매 회차 들여다보는 거야?”

“..나는 아르틴에 관한 기억 말고는 희미하니까, 성경에 대한 기억도 별로 안 나거든. 성검을 제대로 쓰려면 신성력이 강해야 하잖아? 도움이 될 까 싶어서.”

“흐음..그래 뭐, 가만히 있는 것 보단 성경이라도 읽는 게 편하긴 하겠지. 내일부터 속성교육 들어간다고 하던데.”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자기 전 먹는 영약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자, 물.”

“으? 그므으”

가루형 영약의 쓴맛에 내가 미간을 찡그리자, 카이엔은 답지 않게 물을 건네주는 센스를 발휘했다.

으, 너무 쓴데 사탕이라도 하나 꺼내 먹어야지.

“그럼 이제 뭐 할까 아르틴? 아직 이른 밤인데?”

“소풍 온 것도 아니고..나는 내일 새벽부터 공부해야 하니까 오늘은 일찍 잘거야.”

눈을 초롱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카이엔과 밤새 대화라도 나누는 이벤트는 사양이다.

나는 카이엔이 가르침을 받는 낮에 시험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침대는 엄청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골드 클래스 기숙사 침대 급인데...

*

“...아르틴?”

“...”

“...자는 거야?”

“....드르렁.”

아르틴이 침대에 누운 지 10분, 카이엔은 아르틴에게 다가가 곤히 잠든 것을 확인했다.

“..후후, 자는 구나. 올가의 말 대로네.”

카이엔은 힐끔, 창문 주변에 놓여진 향초를 바라봤다.

­“저를 도와주세요 카이엔, 아르틴의 하렘이 저렇게 아르틴을 망치게 둘 셈인가요?”

“...내가 왜 너를 도와야 하는데? 내가 보기엔 너도 아르틴을 노리는 또 다른 암컷일 뿐이야.”

“그야, 3박 4일의 밤 동안 아르틴과 함께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아르틴은 남자를 좋아하지 않아. 겨우 그런 걸로 내가 타협할 거라고...?”­

저 은은한 향초와 비슷한 향수를 카이엔이 뿌리고 나온 탓에 아르틴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이는 올가가 미리 준비한 몽유향이였다.

몽유향, 어느 연금술사가 만들어낸 이 향은 서큐버스의 권능을 흉내 내기 위해 만든 제작되었으며, 이 향에 취한 사람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한다.

­“단 하루, 첫날밤을 위해 빌려드리겠습니다. 선만 지켜 주세요. 순결은 용사인 당신에게도 중요한 덕목이니까요. 그 외의 것은...눈감아 드릴게요.”­

올가가 제시한 것은, 3박 4일간 밤마다 무방비하게 잠든 아르틴과..행복한 하룻밤이었다.

물론 다른 여성, 혹은 남성이었다면 이런 제안을 하지 않았겠지만, 연적이자 방해물로써 카이엔을 경멸할 뿐, 용사로써의 카이엔에 대한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는 올가는 카이엔이 아르틴을 강제로 덮치지 않을거란 확신이 있었다.

아마, 해봤자 손을 잡고나 품에 껴안는 정도일터, 그런 기분 나쁜 꿈을 꾼 아르틴은, 3일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여성인 자신에게 더욱 친밀감을 느끼게 될 것이었다.

여인들은 배제하고, 카이엔으로 견제하고, 자신이 아르틴의 모든 불안을 품는다. 올가의 계획은 그대로 진행됐다면 분명 아르틴의 성격상 먹혀들었을 것이다.

“...전부, 꿈으로 여긴단 말이지?”

카이엔은 아르틴이 잠든 침대에 걸터앉아, 그 볼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허나, 그 손은 평상시의 듬직하고 커다란, 검을 휘두르기에 적합한 손이 아니었다.

순간, 카이엔의 눈앞에 창이 하나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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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용사의 비밀

당신은 여신에게 선택받은 이 세계를 구할 용사입니다.

해당 상태창은 그런 당신을 위해 주어진 권능, 허나 이를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됩니다.

당신의 정체를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용사의 권능은 회수되고 말 것입니다.

퀘스트 조건 : 누구에게도 자신의 과거와 상태창을 들키지 말 고 마왕을 처치할 것.

퀘스트 실패시 패널티 : 용사의 자격 소멸, 상태창의 회수.

퀘스트 완료시 보상 : 여신의 권능으로 들어줄 수 있는 원하는 소원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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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퀘스트를 잊지 말라는 시스템의 경고와 같은 창. 허나 카이엔은 말 없이 상태창을 꺼버린 후 아르틴을 바라봤다.

“...그러면, 무슨 짓을 해도 들키지 않는 거지?”

언제나 24시간, 카이엔을 단단히 감싸던 전대 드래곤 로드의 권능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아르틴이 싫어하던 탄탄한 가슴 근육은 아름다운 여성의 굴곡을 갖췄고, 아름다우면서도 남성적인 매력을 자랑하던 얼굴은 점점 여인의 미색으로 변해갔다.

“그러면..나도조금은 제 멋대로 굴어도 되는 거겠지? 아르틴?”

이 세계의 선택받은 용사, 카르엔의 청초한 이목구비에 장난기 어린 색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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