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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125화 (125/266)

〈 125화 〉 백일몽 #02

* * *

“하아..역시 아르틴의 볼은 부드럽고 따뜻해..”

무방비하게 잠든 아르틴을 앞에 두고 카이엔, 아니, 카르엔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르틴의 볼을 마음껏 주무르는 것 이었다.

마지막으로 아르틴의 볼을 만진 게 언제였던가, 생각해보니 3회차 시절의 망령제왕을 토벌하러 가기 전날 밤, 곤히 잠든 아르틴 몰래 손가락으로 콕콕 찔러 본 게 마지막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카르엔 본인도 아르틴이 카이엔인 자신을 싫어한다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한 번씩 몰래 손이라도 잡으려고 하면, 자신을 바라보는 아르틴의 혐오어린 눈빛에 매정하다고 느낀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용사가 아닌 나는 네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걸.”

카르엔은 눈치가 없는 것도 머리가 모자란 것도 아니었다.

아르틴이 왜 4회차에는 자신에게 소홀히 했는가, 아르틴이 5회차에는 왜 다시 자신을 찾았으며, 일행에 다시 끼워줬는가는 명확했기에 본인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었다.

“아르틴에게 필요한 것은 용사인 나잖아? 그럼 나는 아르틴을 위해 용사가 되어 줄 거야.”

조물조물, 볼을 주무르던 손을 뗀 카르엔은 아르틴이 덮고 있는 이불을 들췄다.

요 근래 근육이 꽤 조밀하게 붙은 아르틴의 나신이 가운 사이로 드러나자, 카르엔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나쁜 여자들, 그렇게 방해했는데, 아르틴을 더럽히다니..이렇게 착하고 친절한 아르틴을..”

카르엔은 여자들을 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인정했다.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남자는 자신이 지켜주지 않으면 누군가 채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다른 여자들이 그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어..미안해 아르틴, 네가 더럽혀지는 것을 막지 못한 나를 용서해 줄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카르엔은 자연스럽게 아르틴의 곁에 누운 후, 아르틴이 덮던 이불을 두 사람의 위에 덮었다.

‘아르틴의 향기...아르틴의 체온...! 여기가 천국인가 봐...!’

얼마나 서러운 나날이었던가.

용사로서의 책무를 이어나가기 위해 사랑하는 남자에게 정체를 숨겨야했다.

게다가, 아르틴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다른 여인들과는 다르게 자신은 일찍부터 아르틴에 대한 기억이 아주 조금이나마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매번 아르틴은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점점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볼 때 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정말로 못되게 굴지는 못하는 게 아르틴의 매력이긴 해..♡’

1회차의 실패 이후, 슬픔에 빠져있던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고,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고, 유일하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준 그 날부터.

카르엔은 수많은 시간을 망상으로 버티며 아르틴의 짝사랑을 이어나가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가장 먼저 고백해 연인이 된 아그네스도, 늘 곁에 꼭 붙어 다니는 샤오메이도 부럽지 않았다.

“아르틴도 차암, 그렇게 거칠게 끌어안으면 안 되는데..흐읏..”

잠든 아르틴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두른 카르엔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자신도 모르게 혼자 앙탈을 부리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혀를 찰 광경이었지만, 16년간 농익은 카르엔의 음습한 짝사랑에서 그런 사소한 문제는 이미 신경 쓸 것도 아니었다.

“..그래, 그 여자들이 더럽힌 아르틴의 몸을 내가 깨끗하게 해줘야겠지?”

..처음에는 아르틴에게 안겨서 체취와 체온을 만끽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했다.

하지만, 카르엔에게 이것은 도저히 놓칠 수 없는 기회와 마찬가지였다. 언제 또 아르틴이 이렇게 무방비한 상황을 조우할 수 있겠는가?

안 그래도 저 유니콘에 이어서 몽마와 계약까지 한 탓에, 이제는 가끔 몰래 밤에 훔쳐보는 것도 불가능한 만큼 카르엔은 지금 이 순간을 더 강렬하게 느끼고 싶었다.

카르엔은 아르틴이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을 확인한 직후, 아르틴의 가운을 확 재꼈다.

아르틴의 제법 단단해진 가슴이 튀어나오자 마른침을 삼킨 카르엔은, 와이셔츠로도 억눌리지 않은 자신의 커다란 가슴을 아르틴의 가슴에 문대기 시작했다.

“...후후, 자아. 아르틴? 아르틴이 좋아하는 가슴이야? 어때? 그 못된 년들 가슴보다 더 부드럽지?”

“흐으읏...으음...”

물컹! 물컹!

카르엔의 가슴이 짓눌려 뭉개질 때 마다, 아르틴의 입에서 가는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런 아르틴의 반응에 도리어 카르엔의 심장은 더욱 들뜨기 시작했다.

내가 아르틴을 흥분시켰다! 내가 아르틴을 지배할 수 있다!

“흐응..아르틴은 변태구나? 잠자면서도 가슴이라면 정신을 못 차리네..바보. 그러니까 다른 여자들에게 홀라당 넘어가지.”

사실 아르틴이 난교파티를 벌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카르엔은 큰 충격에 받았다.

아그네스, 샤오메이, 바이올렛, 이 세 사람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여인들은 근본도 없이 자리를 차지한 여인들이 아닌가?

카르엔 자신이 정실, 다른 여인들이 메인 히로인이라면 그 여자들은 가볍게 스쳐지나가는 서브 히로인이나 되면 다행인 여인들뿐이었다. 그런 여인들에게 넘어가다니.

“나도..여자인 걸 알릴 수 있다면, 아르틴 너에게 잔뜩 이것저것 해줄 수 있는데..”

조금 서글퍼졌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라는 이상한 패널티를 준 상태창이 밉기까지 했다.

이렇게 포근한 포옹도, 손을 마주 잡는 것도, 아르틴이 잠 들어야만 가능하다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생각해보니 억울해, 왜 나는 포옹으로 만족해야 해?”

카르엔은 손을 뻗어 아르틴의 얼굴을 자신에게로 이끌었다.

아무런 상처도 없는 아르틴의 고운 피부가 자신의 손 끝에 닿았다. 자연스럽게 볼을 쓰다듬는 손이 아르틴의 입술을 조금 어루만졌다.

“...키스, 키스 정도는..여신님도 눈감아 주지 않으실까? 용사라고 입맞춤을 하지 말란 법은 없잖아?”

선을 넘지 말라고 올가가 말하기는 했지만, 키스라면 분명 괜찮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근거는 없었다. 그저 카르엔이 아르틴에게 키스를 하고 욕망이 그런 확신을 만들어 낸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카르엔은 결심한 듯 눈을 질끈 감고, 아르틴을 향해 천천히 얼굴을 앞으로 내밀기 시작했다.

“아르틴..!”

생애 첫 키스, 아르틴이 처음인 것은 아쉽지만, 자신의 처음을 아르틴에게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카르엔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카..이엔...?”

“엣.”

허나,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카르엔이 황급히 눈을 뜨자, 몽롱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아르틴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

‘뭐야..이거, 꿈인가?’

언제 잠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자다가 눈을 떠보니 처음 보는 여자가 내 품에 안겨 있었다.

게다가 눈을 꽉 감고 내게 입맞춤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입술을 내민 모습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여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이상했다. 올가처럼 아름답게 찰랑이는 검은 긴 생머리가 인상적인 미인이다. 길고 가느다란 속눈썹으로 감싸인 검은 눈동자는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약간 퇴폐적인 어두움과 청초한 아름다운이 동시에 느껴지는 미색은 또 어떤가, 이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봤지만, 이런 미녀는 어디서도 본 적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여신상에 새겨진 여신의 얼굴이 비슷할까? 여신의 대리인인 올가가 그나마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카..이엔..?”

그런데, 무심코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생각해도 매우 이상한 말이었다.

카이엔 그 동성애자 자식이 도대체 왜 나온단 말인가? 그 녀석도 분명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미색을 다 우겨 넣은 듯 한 미남이긴 했지만, 남성적인 느낌이 분명히 강해 여자라고 착각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내 눈앞의 여자는 아무리 보고 있어도 서양적 미남인 카이엔과는 다른 동양적인 아름다운을 전부 집어넣은 것 같은 미녀였다. 그나마 입은 와이셔츠랑 동양의 미인치고는 커다란 가슴이 조금 언밸런스하다고 해야 할까.

‘...생각해보니 저 와이셔츠, 카이엔이 입고 있던 것 같은데에...?’

내 품안에 안겨있는 여인은 내게서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건지 꼬물거렸지만, 내게 꽉 안겨있던 탓에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내 눈만 힐끔힐끔 쳐다보기 시작했다.

‘왜..도망치려고 하지? 뭔가 나쁜 짓을 하다 걸린 것처럼?’

문뜩 불길한 상상이 들었다. 카이엔 녀석이 드디어 TS 빔이라도 맞고 나를 덮치려던 게 아닐까?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려던 나는, 몽롱한 감각과 함께 팔다리가 붕 뜨는 꿈속의 묘한 움직임에 팔다리를 휘적거리다가 침대에 도로 드러누웠다.

‘팔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이거 꿈인가..?‘

뭐, 꿈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늘 하던대로 마나를 일으켜 심장을 멈추면 그만.

진짜 멈추고도 안 죽으면 꿈, 멈추기 전에 고통이 느껴지면 현실일 것이 분명했다.

“자..잠깐 아르틴!”

내가 마나를 일으키자, 눈앞의 여인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하하, 소용없다 더러운 몽마 녀석. 꿈이라면 단번에 깨주마.‘

나는 여인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비웃고는, 심장에 마나를 모아 터트릴 준비를 끝마쳤다.

“안 돼! 가지마! 회귀하면 안 돼!”

물컹!

그때, 내 눈앞의 여인이 내 머리를 꽉 끌어안아, 자신의 가슴골에 내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말랑하고 부드럽게 감기는 감촉, 은은한 꽃향기가 내 코를 자극하자, 나는 나도 모르게 끌어올리던 마나를 풀고 말았다.

‘부..부드러워...그리고 말랑거려...’

“가면 안 돼 아르틴! 나 때문에 그렇게 죽으면..! 이제는 널 무슨 눈으로 보라는 거야..!”

여인은 뭔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내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안 그래도 어지러운 머리에, 가슴의 감촉이 더해지자 이제는 이게 음몽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으니까.

‘생각해보니..여기는 북부교단의 숙소니까..몽마가 찾아올 리는 없는데..’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침착함을 되찾은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아카데미 내부에서도 이 숙소의 보안은 매우 철저할 터. 그럼 내 눈앞의 존재는 몽마가 아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나는 천천히 가슴에서 고개를 떼어낸 후, 내 눈앞에서 울먹이는 여자를 바라봤다.

“너..설마..?”

“..아, 아르틴. 그 이상은 안 돼. 그 이상을 말하면...”

이 말투, 단아하고 청아한 목소리는 다를지언정, 이 말투를 들으니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상상한 카이엔의 여자 모습이냐...?”

그리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 동성애자의 여자 모습을 상상하다니? 그것도 내 품에 안겨있는 꿈이라니..?

‘내가 하루 섹스 안했다고 진짜 돌아버렸나..?’

내가 기분 나쁜 표정을 짓자, 눈앞의 여자는 묘한 표정을 하더니 갑자기 내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무슨 소리야 아르틴, 나는 쭉 여자였잖아! 게다가 카이엔이라니? 나는 카르엔인걸?”

아, 그런 설정의 꿈 인건가. 꿈속에서 나는 카이엔..이 아니라 카르엔과 한 침대를 쓰는 사이인가?

“뭔가 이상한 데, 내가 왜 다른 애도 아니고 카르엔과 한 침대를...흡?!”

내가 계속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자, 카르엔은 볼을 부풀리더니 내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촉촉한 입술을 내게 덮치며 짧게 입맞춤을 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내가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내 입술 사이로 그녀의 혀가 천천히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민트향이 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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