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127화 (127/266)

〈 127화 〉 면회

* * *

짹! 짹짹!

창가에 들려오는 아침의 새소리가 참으로 단아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빽빽 소리를 지르며 깨워주는 유니코르가 없어서 일까?

─샤아아아!

아니면, 욕실에서 들려오는 저 물소리가 너무 깊게 신경 쓰여서 일까.

‘..어제, 내가 꾼 꿈은..도대체 뭐지?’

아니, 시발 당연히 정신을 차리기 힘든 게 맞았다.

어제 밤 꾼 꿈의 내용은 그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 꿈에서 나온 여자는 분명 카이엔이 확실했다.

‘카르엔이라니..카이엔 이름에서 적당히 한 글자만 바꾼 여자이름 이잖아..’

내 상상력은 이렇게 빈곤했던가? 아니 그보다 왜 하필 많고 많은 여자 중 카이엔의 여자 모습이지?

겨우 하루, 섹스를 안 한지 하루 지났다고 해서 그런 꿈을 꿀 정도로 성욕이 쌓이는 건가?

‘...아, 안 지렸지?’

나는 혹시나 싶어 이불을 들춰 힐끔 들여다봤지만, 가운이나 이불에서 정사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몽정은 안한 것 같네..다행이다.’

카이엔의 TS 버전을 대상으로 몽정을 했다면, 나는 이 순간 벽에 머리를 박고 자살을 시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좋아하는 여자들과 그냥 순애도 아니고, 무려 하렘 순애를 이뤘는데..! BL드리프트라니! 머리가 깨져도 마땅한 일이잖아?

“...젠장 정신을 못 차리겠네, 머리가 왜 이렇게 어지럽지?”

피곤한 것일까? 아니, 어제 밤에는 일부러 일찍 잠들었으니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푹 자고 상쾌하고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피곤에 지친 듯이 몸이 무겁고 머리가 몽롱했으며 눈앞의 초점이 흐릿했다.

‘자다 일어나서 꿈꾸는 것도 아니고 정신 차려야지, 오늘 할 공부가 산더미인데.’

나는 양 뺨을 착착 때린 후,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라도 하면 좀 정신을 차리겠지. 오늘은 냉수로 전투샤워다.

─끼익!

그때, 문이 열리며 허리에 수건을 두른 인형이 욕실에서 나왔다.

그 순간 나는 움찔했다. 여전히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 탓일까. 그 욕실에서 나오는 게 카이엔이 아니라 카르엔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기 때문이다.

“─일어났어 아르틴? 잠은 푹 잘 잤고?”

하지만 이변은 없었고, 화장실에서 걸어 나온 것은 카르엔이 아니라 카이엔이였다.

방금 막 샤워를 마친 건지, 허리에 수건을 두른 채 조각상 같은 남성적인 몸을 과시하며 나온 녀석은 물기로 젖은 긴 머리를 여분의 수건으로 말리며, 나를 반갑게 쳐다봤다.

‘..아니, 나 왜 이렇게 이 녀석에 대해서 깊이 관찰 하지?’

전과 같았으면 역겹게 나를 바라보며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정도로 생각이 들었을 텐데,

“세수 좀 하고 씻으려고. 막 깨어나서 그런지 머리가 몽롱해서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고.”

아우 씨, 더 이상한 생각이 들기 전에 세수를 해야했다. 진짜 정신 차려야지.

“머리가 몽롱해? 어디 아파? 열이 있는 건 아니고?”

내가 녀석을 지나치고 욕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카이엔은 갑자기 걱정어린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 눈빛에는, 단순히 친구를 걱정하는 눈이 아니라 아련함이 담겨 있었다. 또 그새를 못 참고 녀석이 동성애자 티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

그런데 뭐가 이상하다. 평소라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샘솟아, 머릿속으로 127번쯤 죽이고 나서야 분이 풀릴 텐데?

‘왜,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나를 여성향 로맨스 판타지의 영애 주인공처럼 대하는 녀석을 보고도, 나는 아무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거부감이 없어졌다고 하는 표현이 좀 더 옳을 것이다.

“....말도 안 돼.”

“뭐가? 정말 몸이 안 좋은거야 아르틴?”

“이건 말도 안 돼!!! 이건 꿈이야!!!”

이건 꿈이다. 내가 BL에 거부감이 없어지다니, 그것도 꿈 한번으로 없어지다니!

─쾅!!!

나는 그런 현실을 부정하며 벽에 머리를 세게 박았다.

“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아르틴?!”

“이거 놔! 이건 꿈이야! 꿈에서 깨야 해!”

쾅! 쾅!

만류하는 카이엔을 밀치며, 벽에 연거푸 머리를 박은 나는 5번 정도 머리를 전력으로 박고 나서야 겨우 정신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꿈에서 깨면..악몽은 끝나겠지..?’

희미해지는 정신 속에서 그런 상상을 했다. 눈을 뜨면 연인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나쁜 꿈을 꾸었냐고 묻는 거야..그리고, 나는 괜찮다고 웃으면서 답하는, 그런 상상...

*

“괜찮으십니까?”

눈을 뜨자, 나는 내 얼굴을 코앞에서 들여다보던 금발머리 미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따악!!!!”

“깜짝이야! 진짜로 무슨 일이십니까 아르틴님?”

나는 황급히 놀라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봤다. 우리가 머물던 숙소의 방 그대로였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르틴님? 방금 그 괴상한 비명은 뭐고 말입니까?”

“어.. 토마스 사제님? 무슨 일이 있었죠..?”

어디까지가 꿈이지? 어디까지가 현실이지? 사실 나는 여태 3회차에서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침에 갑자기 벽에 머리를 박으며 자해를 하셔서, 놀란 카이엔님이 저를 불렀습니다. 일단 상처는 치료 했는데..도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시발, 머리를 박은 것 까지가 현실이었다고? 카르엔은 비현실이고, 카이엔의 게이질에 거부감이 사라진 건 현실이라고?

“아니..그..스트레스가 심해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스트레스..그러고 보니, 스트레스성 탈모가 있으실 정도로 평상시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용사의 동반자라는 중책에 스트레스가 심하신 것 같군요.”

대충 둘러댄 내 설명이 대충 먹혔는지, 토마스 사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상처는 흉터가 남지 않을 테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유지해서는 안 됩니다. 뭔가 스스로 평소에 즐기시는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으십니까?”

“어...그냥 제 여자들하고 데이트 하는 게 가장 스트레스 해소에 좋던데요.”

문제는 여기는 내 여인들이 출입하지 못하는 상황. 내가 데이트를 할 여지는 없었다.

‘..역시, 몰래 나가서 시르카랑 놀고 와야 하나?’

아직도 묘하게 아른 거리는, 카이..아니 시발! 카르엔하고 했던 허벅지 플레이 감촉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몰래 나가야겠다. 이러다 진짜 미치겠네.

“어쩔 수 없군요. 점심 식사 후에 말씀 드리려고 했지만, 스트레스가 심하시니 미리 말씀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응? 어떤 거 말인가요?”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토마스 사제는 보기 드문 들뜬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아르틴님에게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제가 만든 시험의 구슬을 전해 들으셨죠?”

“..그, 누가 성공할지 모르겠는 미친 난이도의 미덕을 강요하는 구슬 말입니까?”

“미친 난이도라니요, 저는 제가 생각하기에 딱 필요한 수준만을 넣었습니다. 아무튼...”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토마스 사제는 뜸을 들였다. 도대체 뭐 길래 그러지?

“..후후! 아카데미에도 이 시대의 모범이 될 정결한 여인이 있더군요! 기뻐하십시오. 오후에 두 명의 여인이 면회를 올 예정입니다!”

“..면회? 면회요? 그 구슬의 시험을 뚫고?”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내 여인 중에 토마스 사제의 그 미친 시험을 통과할 사람이, 두 명이나 있었다고?

“네, 그래서 저도 기쁜 마음으로 허가했습니다! 오후에 점심을 먹은 후 1시부터 4시까지 면회가 가능할 것 같군요!”

토마스 사제는 나보다도 더 기쁜 표정으로 외쳤다.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면, 자신도 통과할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는 거 아닌가?

아니, 아무래도 좋아. 누가 찾아오는 거지?

‘한 사람은 바이올렛일 테고...다른 한 사람은?’

...진짜 누구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바이올렛 말고는 내 하렘에 남은 처녀가 없을 텐데..?

“저기, 혹시 죄송하지만 면회객이 누구랑 누구인지 들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마녀임에도 칠대죄악을 전혀 범하지 않으신 바이올렛님과, 왕족의 모범을 보이신 마리안느 왕녀님입니다!”

“아하, 그렇군요...네? 누구요?”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누가 면회를 온다고?

“바이올렛님과 마리안느 왕녀님입니다. 혹시 면회객에 문제가 있으신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마리안느 스승님이..? 여기에 온다고?”

이 시점에서 마리안느가 여길 왜 온단 말인가? 게다가 구슬은 어떻게 통과했단 말인가?

아니, 생각해보니 구슬은 통과할 여지가 있었다.

탐욕을 부리는 사람도 아니고, 오만하게 사람을 가리는 사람도 아니고, 남을 시기하거나 질투할 사람도 아니고,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도 아니고, 남의 재물을 탐하거나..남자에게 처녀를 내어줄 만한 사람도 아니니까.

구슬이 요구하는 조건들을 충족할 만한 사람인 것은 확실했다.

그래도 여전히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성욕에 미친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직도 기억이 선명했으니까.

‘...죽이러 오는 건 아니겠지?’

나는 조금 공포심에 떨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화난 스승님은 마왕보다 무서운 존재였으니까.

**

“듣고 있나요 카이엔님? 지금 긴급상황이란 말이에요.”

아르틴이 갑작스러운 전개에 당황할 무렵, 카이엔은 올가와 마주 앉아 성녀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고 있었다.

“..아, 음. 무슨 이야기 중이었지?”

성녀가 10분 동안 뭐라고 떠드는 것을 듣기는 했으나, 카이엔은 그런 이야기에 집중할 요건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어제 밤에는 너무 격렬했지..상태창에서 경고할 정도로 나간 건 좀 심했나? 아르틴은 어제 밤 꿈을 기억하는 것 같던데..크게 다치진 않았겠지?’

16년의 짝사랑이 보답 받은 것 같은 전날 밤의 황홀한 추억을 되새김질만해도, 얼굴에 홍조가 피어오르는 것을 참고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바이올렛 그 마녀가 제가 준비한 시험을 뚫고 아르틴을 유혹하러 온다고요. 어제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저희의 거래는 기억 하시죠?”

정신을 차린 카이엔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성녀는 그제서야 좀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와 카이엔을 바라봤다.

“첫날밤 하루를 당신에게 내어주는 대신, 앞으로 저에게 전력으로 협조하기로 했잖아요? 저는 약속을 지켰으니, 오늘 부터는 카이엔님이 나서서 아르틴의 하렘을 방해해야...”

“..저기, 약속 말인데.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움찔!

올가는 한 순간 미간을 찡그릴 뻔 했으나, 평상시 대중과 능구렁이 같은 사제들과 귀족을 상대로 갈고 닦은 포커페이스로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이미 보상을 받아놓고, 또 무슨 부탁을 한단 말인가?

“..무슨 부탁인가요? 일단 들어나 보도록 할게요.”

“..그, 염치없는 말이지만. 오늘 밤도 아르틴하고 보내고 싶은데..”

꾸득! 가죽 소파의 손잡이가 뭉개지도록 올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약속과는 다르지 않나요? 약속한 시간은 분명 어제 단 하루였을 텐데..?”

“그..게..사실은, 아르틴이 약효가 제대로 들지 않았는지 자꾸 잠에서 깨는 바람에..”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며 카이엔이 하루를 더 요구하자, 올가는 성경의 말씀을 속으로 되새기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이 망할 게이새끼가...!’

그렇지 않으면, 무표정한 얼굴로 뻔뻔하게 나서는 저 망할 동성애자의 얼굴에 앞에 담긴 뜨거운 차를 부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