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면회 #02
* * *
‘휴우..진정하자, 교단의 늙은이들에 비하면 별거 아니잖아?’
올가는 깊게 숨을 내쉬고는 아르틴의 환한 미소를 떠올리며 자애로운 미소를 유지했다.
“아르틴에게 통하는 약을 1개 더 준비해 달라,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아시는 거죠?”
“...알고 있어.”
카이엔이 모를 리가 없었다. 유니콘의 계약자가 된 아르틴은 간단한 약품이나 독쯤은 저항할 수 있는 강한 내성을 지니게 된다.
그런 유니콘의 계약자가 통하는 약은 대부분, 계약자를 해칠 수 있을 정도의 극독 뿐.
몽유향은 그런 수많은 약물이나 독 중에서 몇 안 되는, 계약자를 해치지 않고 무력화 시킬 수 있는 독에 포함되는 귀한 물건이다.
카이엔은 이 사실을 무척 잘 알고 있었다.
2회차 당시 언더시티를 돌아다닐 때, 유니코르와 꼭 붙어 다니는 아르틴과 곁잠을 자고 싶은 욕망이 넘쳐흐른 나머지 뒷골목의 정보길드를 이용해 조사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쓴 적은 없었다. 정말로, 쓰려고 마음먹기는 했지만, 그 전에 자신과 아르틴이 독으로 암살당해 죽었기 때문이다.
“몽유향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부패한 돼지들을 처리..아니, 아르틴을 죽게 만든 추기경들을 처형하면서 압류한 게 20개가 넘으니까요.”
“그럼 1개 정도만 더 써도..”
“제가 걱정하는 건 몽유향이 부족할 지가 아니에요, 카이엔님이 과연..절제하고 만족할 수 있을지를 걱정하고 있는 거랍니다.”
거짓말이었다.
올가에게 중요한 것은 카이엔에게 자신의 족쇄를 채워 수족으로 삼는 일, 절제와 만족을 말한 것은 카이엔이 욕심을 냈다는 흔하지 않은 상황을 자신이 주도하기 위해서였다.
“그건..정말 잘할 수 있어. 어제 밤에도 별 일 없었다고.”
거짓말이었다.
지금도 카이엔은 오늘은 어디까지 플레이가 가능한지 시험하고 싶어 머릿속이 핑크빛으로 물든 상황이었다.
“그럼 약속해주세요 카이엔, 몽유향을 쓰는 건 오늘을 마지막으로 하겠다고, 앞으로 다시 자리를 마련해 줄 수도 있고, 3일 연속으로 몽유향을 쓰는 것은 아르틴의 몸에도 좋지 않을 거예요.”
카이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아르틴의 아침 상태는 자신이 봐도 꽤 좋지 않았으니까.
물론, 오늘도 쓰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16년 묵은 집착은 단 하룻밤의 일탈로 해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선을 넘으면 안 돼요. 전에도 말했듯이 용사가 될 몸은 여신님의 미덕을 지켜야 하니까. 순결은 가장 중요한 항목이라고요.”
움찔!
“...카이엔?”
“물론이지. 절대 선을 넘지 않을 거야. 3일 후에 용사로 임명받아야 하잖아?”
그 말에 카이엔은 조금 찔리는 구석이 있었지만. 삽입을 안 했으니 처녀라고 행복회로를 돌리며 다급하게 대답했다.
“...좋아요, 그럼 이제 면회에 대해서 논의를 하면 좋겠네요. 당장 오늘 오후 1시부터 바이올렛과 마리안느 왕녀가 온다고 하거든요.”
카이엔의 대답이 뭔가 부자연스러웠지만, 올가는 그제서야 중요한 화제로 넘어갈 수 있음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와 대화하는 것은 불유쾌한 일이다.
게다가 올가는 이런 불필요한 과정들에 질린 상태였다. 이단들을 처리할 때는 어땠는가?
아그네스? 바이올렛? 샤오메이? 걸리적거리는 하렘원들은 이단들에게 그랬듯이 납치하거나, 정치적으로 몰아붙이거나, 독살, 암살까지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올가는 그러지 않았다. 이유? 간단했다.
일단 아르틴이 아끼는 것을 망가트리는 것은, 아르틴에게 크나큰 상처로 남을뿐더러 아르틴이 자신을 적대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올가의 목적은 아르틴을 자신의 서방님으로 만드는 것이지, 펫이나 노예 따위의 수집품으로 삼는 것이 아니기에, 아르틴과 적대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게다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여인들도 기억이 돌아온 상황. 이 상황에서 올가가 납치와 협박이라도 한다면? 그리고 또 다시 새로운 삶이 시작한다면?
‘..괜찮아. 오늘부터 천천히 아르틴을 내 품안에 녹여버리면 그만이야. 만약 먹히지 않는다면 최후의 수단도 준비되어 있고.’
허나 올가는 여전히 승리를 확신한 듯 자신감이 넘쳤다.
자신이 준비한 비밀무기는 확실히 아르틴이 자신을 ‘책임’지게 만들 수 있는 물건. 상황이 좋게 흘러가든 나쁘게 흘러가든 이것을 쓴다면 최후의 승자는 자신이 되리라 확신했다.
“앞으로 1시까지, 면회의 대응책을 단단히 준비 할 테니 협력해주세요. 카이엔.”
토마스의 그 음습한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 나온 것을 예상 외였지만, 시험을 통과한 그 건방지고 방해만 되는 바이올렛만 치우면 자신의 승리다.
‘마리안느 왕녀는..잘 모르겠어, 내 기억에는 아르틴과 그렇게 친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이전에 받은 보고에 따르면, 아그네스 황녀의 부탁을 받아 아르틴을 지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번 접촉도 아그네스가 부탁에서 이루어 진 걸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저 암사자도 결국 암컷이라는 말이겠군요.’
올가는 비릿한 미소를 짓고는, 카이엔에게 다른 여인들의 정보를 들으며 홍차가 담긴 잔을 들어 올렸다.
바이올렛과 그 하렘들이 무슨 철저한 준비를 했더라도 자신은 승리할 것이며, 이는 승리의 축배다.
*
“저..바이올렛님?”
“네! 무슨 일이신가요 토마스 사제님?”
“지금 면회를 하러 오신 것 맞습니까..?”
“네! 맞아요!”
1시가 되기 10분 전, 북부교단의 숙소에 도착한 바이올렛은 싱글벙글 웃으며 토마스가 들여보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토마스는 그런 바이올렛을 보며 웃기가 힘들었다.
“일단 이 양손 가득 드신 어마어마한 크기의 짐은 무엇인가요..?”
“이건 아그네스가 아르틴에게 전해달라고 한 물건들이다. 물건의 반입이 금지되었다는 말은 없었을 텐데 사제?”
바이올렛이 대답하기 전에 나서서 토마스를 마주 본 것은 마리안느 왕녀였다.
그 당당한 풍채에서 느껴지는 위압감과 카리스마는, 마주보는 이로 하여금 주눅들 게 하는 아우라가 있었다.
“내부에 모든 물건을 반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에게 건내 주시면 반입 가능한 물품들을 분류해서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 황녀랑 왕녀의 비밀 물건을 감히 훔쳐 볼 생각인가?”
“그것이 제가 맡은 의무인 만큼 고귀하신 위대한 혈통의 후예들께서 충분히 이해해주실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허나, 토마스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시험을 통과하자 올가에게 알리지도 않고 면회일정을 밀어붙인 광기의 원칙주의자답게, 마족조차도 겁에 질리게 만드는 마리안느 앞에서 당당하게 요구를 내세울 수 있었다.
“게다가, 짐 검사도 짐 검사지만...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이올렛님?”
“네, 무슨 일인가요 토마스 사제님?”
“바이올렛님의 왼쪽 편에 계신 여인은, 도대체 누구 십니까?”
토마스는 마리안느가 서있는 자리의 반대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자리에 서있던 술탄국의 무희 복장을 입은 여인은, 최대한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억누르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바이올렛님의 패밀리어, 알‘미라즈라고 합ㄴ..”
“여신님의 신도들의 숙소에 면회를 오면서, 악마를 데려오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바이올렛님!”
“앗..들켰나요? 애 그래도 착한 아이인데..어떻게 같이 들어가면 안 될까요 사제님?”
하지만 억누른다고 해서 가장 격이 높은 사제 중 한명인 천사박사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용사가 머무는 숙소에 악마라니, 토마스는 경악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구슬의 시련을 통과한 마녀가 아니라면 마왕의 간자라고 의심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지 않은가?
“면회를 올 때 시종이나 짐꾼을 데려와서는 안 된다는 말도 없었잖아?”
“면회객도 고르는 마당에, 일반 시종이나 짐꾼도 함부로 들여보낼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애초에 저 것은 인간도 아니고 악마지 않습니까!”
“바이올렛이 착하다고 하잖아. 마녀가 자기 사역마를 데리고 다니는 게 문제는 아니잖아?”
“여기서는 문제입니다! 아무리 착해도 악마나 마족은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어머! 어떻게 그런 차별적인 말을 하세요! 저희 알‘미라즈가 얼마나 착한 악마인데!”
바이올렛의 말에 토마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악마가 얼마나 나쁜 존재인지 강론하는 사이, 뻔뻔한 태도로 바이올렛을 변호하던 마리안느는 경직된 표정의 알‘미라즈와 눈을 마주쳤다.
사실 마리안느 자신이 생각해도 악마를 면회장에 들여보내 달라는 요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왜 그 부탁을 들어준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 마리안느는 요즘 상태가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르틴과 대련을 한 그날 이후부터, 이상한 자각몽에 시달리거나 겪은 적 없는 과거의 기억들이 스쳐지나갈 때 마다 아련한 감정에 물들어 맥아리가 없어지고 있었다.
얼마나 자신의 상태가 심각했으면, 남동생 녀석이 개인적으로 찾아와 요즘 무슨 일 있냐고 물어 봤을까. 심지어 자신도 자각하고 있었으니 큰 문제였다.
그래서 아그네스가 자신을 찾아와 계획을 설명하며 도와달라고 했을 때, 마리안느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틴을 만나서 이야기하면 뭔가 실마리를 잡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돕는다고 하기는 했는데..’
아그네스가 부탁한 계획은 간단했다. 어떻게든 면회장 안까지만 알‘미라즈를 들여보낼 것, 그리고 바이올렛의 옆에서 바이올렛을 대신해 큰 목소리를 내줄 것.
‘게다가 정작 바이올렛은 작전의 내용을 모른다니..제대로 된 계획이 맞나 이거?’
마리안느 본인이 신실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녀 또한 북부교단을 믿는 사람으로서 저 악마를 교단의 건물에 들이는 게 맞는지 의구심이 들고 있었다.
무척 아끼는 친구이자 후배면서, 동시에 신앙심이 깊기로 유명한 아그네스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에 끼지도 않았을 거다.
“안 됩니다! 악마는 절대 안에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나쁜 말을 하시는 건가요! 그건 악마에 대한 차별적인 대우에요!
여전히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토마스가 막고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자신이 열지도 않았는데 문이 갑자기 왜 열린단 말인가? 혹시 악마가 수작을 부린 것인가?
황급히 고개를 돌린 토마스는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올가 성녀님! 아르틴님! 카이엔님!”
“..이게 무슨 소란인가요? 토마스 사제님?”
저벅. 저벅. 자애로운 표정의 성녀가 문에서 걸어 나오자, 마리안느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성녀가 아카데미에 있다는 말이 정말 사실이라니?
“..올가 성녀님?”
게다가, 바이올렛의 표정이 방금 전의 상냥한 표정과는 다르게,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무표정하게 변하는 것도 마리안느의 놀람에 한 몫을 더했다. 성녀를 부르는 목소리는 서리가 얼 것처럼 차가웠다.
“어머, 바이올렛님, 오랜만이군요. 라고 인사드려야 할까요?”
“그러네요..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요. 너무 반가워서 표정 조절이 잘 안되는 거 있죠?”
‘...뭐, 뭐지?’
반갑게 알‘미라즈와 바이올렛에게 손을 흔들던 아르틴은, 두 사람의 분위기를 옆에서 보면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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