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면회 #03
* * *
“좋아, 기운 내서 팍팍 가볼까!”
토마스가 알려준 1시의 면회소식에 나는 제 컨디션을 되찾았다.
“마법과 신학에 대해서 가르쳐 달라하셨습니까? 물론 도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을 가르치는 것도 제 임무니까요.”
마침 옆에 있던 것도 토마스 사제, 신학은 물론이고 과학이나 마법, 연금술에 있어서도 손에 꼽히는 독보적인 천재인 만큼 도움도 요청했다.
덕분에 부족하던 이론적인 부분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제 바이올렛과 다정하게 앉아 하하호호 즐거워하며, 맞은편에 앉은 마리안느 스승님에게 사과하면 됐을 터였다.
“여기서 올가 성녀님을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편지라도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저도 놀랐답니다. 설마 바이올렛 양이 면회를 오실 줄은 몰랐거든요!”
“..아르틴, 저 두 사람은 원래 사이가 안 좋은 거냐?”
작게 속삭이며 질문하는 마리안느 누님에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 없어서 어깨만 으쓱였다.
‘...뭐지?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나?’
내 기억 속에서 올가랑 바이올렛은 이렇게 사이가 안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물론 바이올렛의 기억을 떠돌면서 올가의 모습을 몇 번 본적은 있었다.
하지만 왜곡된 기억들이 꽤 많아서, 올가와 싸우는 바이올렛 같은 모습들은 별 신경 안 쓰고 지나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기억을 제대로 살펴볼 걸 그랬나?
“아하하, 바이올렛하고 누님, 그리고 알‘미라즈 까지 다들 면회에 와줘서 고마워요. 올가도 알’미라즈를 들여보내 달라는 내 부탁들 들어줘서 고마워.”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맞은편에 앉은 올가와 바이올렛을 바라보며 운을 띄웠다.
“무슨 소리야 아르틴, 당연히 와야지! 다른 애들도 오고 싶었는데, 못 와서 엄청 아쉬워했거든!”
“크흠, 나도 뭐 아그네스가 부탁하기도 했고.. 전에 누님으로 부르라고 했으니 말이다.”
바이올렛이 올가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방금 전 차가운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평상시의 상냥한 얼굴로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마리안느 누님도 분위기를 풀기 위해 호응해주자, 경직된 분위기가 풀리는 게 느껴졌다.
그래, 이게 면회지. 난 군대 때도 면회 오는 사람이 없어서 이런 면회는 늘 동경했단 말야.
“후후, 별거 아닌걸요. 아르틴의 부탁이라면 저는 뭐든지 들어줄 수 있답니다?”
“역시 올가야. 늘 믿음직해서 의지하게 된다니까?”
올가도 개인적인 자리가 아닌 만큼 서방님이라는 호칭은 쓰지 않았지만, 목소리와 눈빛은 단둘이 있을 때처럼 상냥함이 느껴졌다.
역시 내가 잘못 느낀 건가?
“아르틴의 다른 친구분들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서 참 아쉬워요. 바이올렛님은 혼자나마 시험을 통과해서 참 다행이죠?”
“...뭔가 말에 뼈가 들은 것 같은데 올가 성녀님?”
“어머, 그럴 리가요! 저는 정말 안타까워서 그렇답니다.. 다른 친구분들도 통과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말이죠.”
아니, 착각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지금도 저렇게 서로를 매섭게 바라보는데 저걸 어떻게 못 알아채겠어.
‘이유라고 하면..역시 내가 죽고 난 후의 일이 문제일까?’
모두에게 자상한 바이올렛과 만인에게 상냥한 성녀 올가, 두 사람이 싸웠는데 모른다면 눈치 좋은 내가 못 알아 챌 리가 없다.
여기서는 내가 나서서 해결하는 게 좋겠지만..
“괜찮아요, 저도 놀랐는걸요! 북부교단의 교황청에 있으셔야 할 분이 어째서 아카데미에 있으신 건지!”
“후후, 말해드리고 싶지만 교단의 비밀이라 말하기가 좀 그렇네요. 그렇죠, 아르틴?”
“으..으음? 그렇지?”
“글쎄요, 성녀님이 움직이셔야 할 만큼 대단하고 숨기셔야 할 임무가 있다면.. 분명 대단한 일 이라고 생각 되는데, 학생회에는 알리는게 좋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아르틴?”
“어..그건 뭐 각자의 사정이 있으니까..?”
..지금 묻기는 무서우니까 조금 있다가 올가랑 대화 좀 해봐야겠다.
나는 점점 열기가 강해지는 올가와 바이올렛의 대화를 뒤로 하고, 내 옆에 앉은 마리안느 누님을 바라봤다.
마리안느는 두 사람의 기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보면서 구경하느라, 내가 쳐다보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왜 마리안느 누님이 내 옆에 앉아있는 걸까..’
면회실에 준비된 의자는 둘이서 앉는 소파 2개와 의자 1개.
나는 당연히 바이올렛과 앉을 줄 알았는데 누가 내 옆에 앉아야 할지 은근히 경쟁하던 두 사람은 결국 마리안느 누님을 내 옆에 앉히기로 합의를 봤다.
참고로 알‘미라즈는 바이올렛의 옆에 손을 꼼지락 거리며 긴장한 듯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아니면 성녀에게 깃든 가호와 이 건물에 쳐진 결계가 알’미라즈에게 고통스러운 걸지도 모르고.
결국 지금 편히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마리안느 누님 뿐인가.
“저, 누님. 저번에 있던 일은 제가 죄송했습니다.”
“..가, 갑자기 그 때 일을 꺼내는 거야? 대화에는 흐름이란 게 있잖아?”
나는 우선 단도직입적으로 저번에 있던 무례를 사과했다.
내 사과를 들은 마리안느 누님은 저번 일이 생각난듯 얼굴이 빨개졌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고개를 숙였다.
“저를 도와주시겠다고 아그네스에게 부탁받으셔서 도와주신 건데, 그 때는 제가 좀 제정신이 아니어서.. 큰 무례를 끼친 것 같습니다.”
누님은 분명 갑작스러운 사과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이것보다 더 좋은 사과법을 모른다.
은근 슬쩍 넘어가거나, 제대로 자리를 잡고 사과를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렇게 만난 이상 속에 쌓인 것은 푸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어..음.. 그래, 잘못한 걸 깨닫고 먼저 꺼내니까, 그걸로 더 화내지는 않으마.”
“정말입니까 누님?”
“나는 한 입으로 두 말은 안하는 성격이다. 그, 그리고 대련 중에 신체 접촉이 불가피 한 것도 사실이고 말야.”
그렇게 말하는 누님의 표정은 뭔가 기뻐 보였다.
“역시, 넌 내가 동생으로 삼을 만한 녀석이 맞아. 사과를 안 하려고 했으면 본때를 보여주려고 했는데 말야.”
“..본때요? 어떻게?”
“일단 손가락 10개를 전부 부러트리면 어지간한 병신도 정신을 차리더라고.”
“...”
나는 은근슬쩍 테이블 위에 올려놨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오늘 대화 끝날 때 까지 사과 안했으면 토마스 사제한테 치료 받을 뻔 했잖아.
“흠, 그래서 장미관에서 큰 일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몸은 좀 괜찮아?”
마리안느 누님은 내가 조금 겁먹은 것도 모르는지, 머쓱한 표정으로 볼을 긁었다.
내가 아는 누님이라면.. 단순히 쑥스러워서가 아니라, 뭔가 중요한 질문을 할 때 볼을 긁고는 했는데.
“일주일 넘게 푹 쉬어서 몸은 괜찮아요, 지금은 영약을 챙겨먹느라 약해지긴 했지만.”
“그거 다행이네, 그, 나랑 한 수련은 도움이 됐고?”
“...네. 확실히 도움이 됐어요. 누님에게 배운 덕에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으니까요.”
물론 이번 회차의 수련으로 살아난 것은 빈말이지만, 내 말의 전부가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누님이 4회차 당시에 가르쳐 준 전투술이 없었으면 진작 시르카나 살덩이 괴물에게 죽었을 테니 말이다.
“들어보니까 검술로 중급 마물까지 베었다고 들었는데, 왕국식 전투법이 대인전은 몰라도 마물을 상대할 때는 좋지?”
“네, 제국식 검술의 예리함도 좋지만, 왕국식 검술의 순간적인 파워가 아니면 재생하는 마물의 숨통을 끊는 건 쉽지 않으니까요.”
내 검술은 두 가지 검술의 장점을 골고루 가져다 쓰는 실전형 검술에 가깝지만, 마리안느 누님에게 검술을 배운 후로 마족과의 전투가 훨씬 편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잘 됐네. 응.”
“...?”
씨익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누님의 반응이 뭔가 이상했다.
내가 뭔가를 놓친 건가? 뭔가 찜찜한데.
“맞다, 아르틴에게 전해 줄 선물이 있는데! 짠! 직접 열어 볼래?”
“어머..짐은 전부 토마스 사제에게 검사 받는 중이 아니셨나요? 몰래 들여오신 거라면 곤란한데..”
“이건 시험을 받으면서 미리 허락을 받았거든요! 들어올 때도 보여줬고요!”
베 하고 올가에게 혀를 내민 바이올렛은 내게 커다란 봉투를 하나 건넸다.
뭐지? 안에 꽤 묵직하게 들어있는데?
“이건..편지네?”
“맞아! 애들이 3일간 못 보니까 편지를 주고받으면 어떨까 하고 아그네스 황녀님이 떠올렸거든! 좋지 않아? 연애편지 같잖아!”
봉투 안을 열어보자 여러 장의 편지가 편지봉투에 넣어져서 들어있었다.
과연, 직접 만나는 것은 힘들어도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상관없겠구나!
“연애편지라니.. 아그네스의 약혼자에게 그런 걸 써도 괜찮겠어?”
“어..? 아! 물론이죠! 아그네스 황녀님에게는 허락 받았어요! 진짜 연애편지도 아니잖아요?”
우리가 하렘을 이룬 사실을 아직 모르는 마리안느 누님이 불편한 듯 바라봤지만, 아그네스가 허락했다고 말하자 남의 영역에 크게 터치 안하는 성격 때문인지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잘 됐네, 공부하다가 쉴 때 읽고 답장하면 좋겠다. 이거 보니까 옛날 생각도 나고. 그치 올..가..?”
편지를 보고 있으니, 올가와 했던 연애편지를 쓰는 연습을 했던 일이 생각나 올가를 바라보자.. 올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올가? 괜찮아? 무슨 일이야?”
─타악!
올가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내가 손을 뻗자, 올가는 깜짝 놀라 내 손을 쳐내더니 손을 뻗은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알고는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아..아니...미안해요 아르틴, 제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반사적으로 그런거에요. 절대 아르틴을 쳐내려던 게..”
“아냐, 나는 괜찮아! 그보다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괜찮아 올가?”
올가는 평상시의 여유로운 표정이 아니었다, 눈까지 크게 뜬 채 당황과 경악감이 뒤섞인 표정으로 천천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최대한 괜찮아 보이려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 저는 잠시 급한 볼일이 생각나서 가봐야겠어요. 네 분이서 대화를 나누시겠어요?”
"올가? 잠깐만 기...”
나는 올가를 불러 세웠지만, 올가는 황급히 면회실을 빠져나갔다.
갑자기 벌어진 일련의 흐름에 나와 다른 두 사람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눈이 휘동그레진 상태였다.
“뭐지? 그냥 편지 아닌가? 무슨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그, 그러게요! 성녀가 귀신을 보고 놀란 것처럼 뛰어가다니! 참 이상하군요!”
“..알‘미라즈는 갑자기 왜 어색하게 소리쳐? 뭐 아는 거 있어?”
“ㄴ, 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저는 오늘 성녀를 처음 보는 걸요!”
하하하, 알‘미라즈가 어색하게 웃자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알’미라즈를 빤히 바라봤다.
“...설마..”
“응? 바이올렛도 뭐 아는 거 있어?”
“..아, 아니. 그냥 몸 상태가 안 좋은 게 아닐까? 원래 악마나 마녀랑 성직자는 상성이 안 좋잖아?”
뭐지? 어째서 인지 나랑 마리안느 누님만 빼고 이 상황을 알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올가의 뒤를 쫓아 가볼까 했지만, 바이올렛이 손목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상태가 좋지 않으면 잠깐 혼자 쉬는 게 편할 거야. 가만히 내버려두고 나중에 대화해 보는게 어때 아르틴?”
“..어, 그럴까? 바이올렛은 역시 섬세하구나.”
확실히.. 지금 당장 쫓아가는 것 보다는, 나중에 진정했을 때 이야기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저녁에 찾아가서 단 둘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올가에게도 좋겠지?
...
올가가 그렇게 나간 직후, 분위기는 매우 어색해졌다.
성녀의 돌발 행동에 명목상이나마 북부교단의 신자인 마리안느 누님은 물론이고 방금 전까지 올가랑 싸우던 바이올렛도, 걱정스러운 눈으로 올가가 나간 문을 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그, 그럼 편지라도 읽어 볼까? 다들 뭐라고 썼는지 궁금하네. 바이올렛도 썼어?”
“그..럴까? 나도 썼는데~ 찾아보면 있을 거야!”
그런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기 위해, 나는 아무 편지나 꺼내들어 펼쳤다.
“오, 이건 샤오메이가 쓴 거네? 뭐라고 썼는지 볼까?”
나는 편지 봉투의 낙인을 두드리면 봉투가 깔끔하게 열리는 마법으로 편지를 개봉했다.
예상 외로 샤오메이가 쓴 편지의 내용은 짧고 간략했다. 그런데 내용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오라버니, 거기서 나오면 최대한 멀리 도망치세요! 아니면 차라리 읽는 즉시 그 자리에서 죽으세요!
편지에는 샤오메이가 내게 자살을 권장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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