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 면회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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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의 내용을 확인한 나는 한동안 뇌가 정지하고 말았다.
‘..뭐지? 도망치거나 자살하라고?’
내가 충격 받은 표정으로 편지를 들여다보자, 바이올렛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며 손을 잡았다.
“아르틴 왜 그래? 편지에 문제라도 있어?”
“어...음.. 직접 한번 볼래?”
“그래도 돼? 어떤 내용이길래 그렇게 놀란 거야?”
“나도 봐도 돼? 아르틴이 이렇게 허망한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위에 편지를 내려놨다.
“..이게 뭐야? 죽으라고? 샤오메이란 녀석 네 친한 동생 아니었냐? 이건 괴롭히는 녀석한테나 보내는 편지잖아?”
편지를 읽은 마리안느 누님은 죽으라는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거친 목소리로 불만을 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보통 사람은 도망치거나 죽으라는 말을 들으면 욕설이나 모욕으로 받아들일 테니까.
“마리안느 누님 진정하세요. 이건 뭔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의미라니.. 뭔가 암호 같은 거라는 말이야? 아니면 너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나?”
“음..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아마 그렇지 않을 까요?”
조금 침착하게 생각해보면, 나랑 헤어지기 싫다며 허리를 끌어안고 늘어지던 샤오메이가 갑자기 내가 싫어져서 죽으라고 명령했을 리는 없다.
‘샤오메이는 내 회귀를 알고 있어. 그럼 이 편지의 내용은 도망치거나 회귀하라는 소리인데..’
의아한 점은 왜 갑자기 회귀를 하라고 한 걸까? 이곳에 입소한 것? 아니면 카이엔과 단 둘이 있는 것? 뭐지?
“..으음,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부터 샤오메이의 상태가 이상하긴 했어.”
그때, 편지를 읽더니 말없이 팔짱을 끼고 생각에 빠져있던 바이올렛이 중얼거렸다.
“오늘 아침부터 이상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우리가 다 같이 모인 시간이 11시 쯤 이었는데, 다들 아쉬워하거나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서 잘 몰랐지만.. 샤오메이가 특히 유난이었거든.”
“유난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바이올렛은 오늘 아침, 연금술 동아리에서 모여서 있었던 일을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 모였을 때, 샤오메이가 가장 늦게 도착했는데, 뭔가 엄청 다급한 표정이었어. 숨도 헐떡였고. 그래서 괜찮냐고 물었더니 늦잠을 자서 황급히 달려오느라 그랬다고 했길래 그런 줄 알았거든..”
“..샤오메이가 숨을 헐떡였다고? 늦잠을 자?”
이야기의 시작부터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전 회차에서 조르바나 나를 매일 새벽마다 깨우면서 운동하자고 조르던 녀석이다.
늦잠을 자서 뛰었다고 숨이 차? 샤오메이는 천리를 달리는 적토마를 타고 도망치는 빌런을 경공술로 쫓아 반나절을 달려서 잡은 적도 있는 녀석이다.
“아무튼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샤오메이가 편지만 주고는 자신은 오라버니 생각나서 오래 못 있겠다면서 얼마 안 있다가 바로 서둘러서 나갔거든.”
“...그건 그냥 이상하거나 유난이 아니라 수상한 거 아니야?”
갑자기 달려 들어와서, 자세한 내용도 없는 편지를 주고 얼마 안 있다가 도망치듯이 사라지다니.
그건 그냥 다음날 야반도주하는 사람 같은 행동 아닌가?
“우리도 처음에는 당연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조르바가..그..으음...”
“조르바가? 조르바가 뭐라고 했는데?”
“...샤오메이가 그 날일 때는 가끔 저런다고 그래서, 우리는 그런가보다 했지..”
그 말에 나는 왜 바이올렛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는지 이해했다.
확실히, 조르바는 나 다음...아니, 어쩌면 나보다도 샤오메이를 잘 아는 녀석이니까.
그 녀석이 그런가보다 하면 다들 납득했을 것이다.
‘조르바가 샤오메이의 수상한 행동을 숨겨 줬다면, 조르바도 뭔가 알고 있다는 건가?’
혹시나 해서 나는 조르바가 쓴 편지도 한번 찾아봤다. 그 녀석이라면 뭔가 자세히 적어놓지 않았을까?
“찾았다. 어디 보자..”
나의 친구 아르틴, 부탁이 있어서 이렇게 오랜만에 편지를 쓰는구나.
요즘 북부 교단의 고급 미사보가 귀족 여인들 사이에서 인기라고 한다.
교단의 관계자에게 말해서 몇 개 챙겨 온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구나.
아니, 넉넉하게 10장정도 부탁하마. 네 친구 조르바가
“이런 십새끼가!”
─화륵!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서 조르바의 편지가 불타 흩날렸다.
“일단 오늘 무슨 일인지 묻는 편지를 써볼 테니까. 바이올렛이 전해주면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줄래?”
“아, 알았어. 그나저나 방금 태운 편지는 뭐야..?”
“쓰레기야. 신경 안 써도 돼.”
그 보다 두 가지 사건이 내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샤오메이도 샤오메이지만, 갑자기 도망치듯 면회실을 빠져나간 올가도 계속해서 신경 쓰이고..
“저기,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괜히 진지해서 못 물어보고 있었거든?”
“..응? 무슨 일인가요 누님?”
“너랑 샤오메이, 그리고 바이올렛. 정확하게 무슨 관계인거야? 그리고 너 북부 교단의 성녀랑도 엄청 친한 것 같던데.”
“쿨럭! 쿨럭! 무, 무슨 소리입니까. 무슨 관계냐니요?”
질문을 들으며 홍차로 목을 축이던 나는 갑작스러운 돌직구에 사례가 들려 기침을 했다.
“아그네스를 보고 황녀님이나 양, 님을 붙이는 게 아니라 이름만 부르는 것도 수상한데..바이올렛하고 계속 은근슬쩍 스킨쉽 하는 것도 그렇고, 올가 성녀님의 저 반응도 그렇고. 나 모르게 뭘 하고 있는 거냐?”
“...어, 아니 그게..별거 아닌데요. 그게..”
나는 말을 더듬었다. 마리안느 누님에게 하렘을 들켜도 될까?
그럴 것 같진 않다. 마리안느 누님은 학생회의 일원, 리처드 황태자의 귀에 정식 약혼도 하기 전에 하렘을 차렸다는 소리가 들리면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을까?
“그, 그냥 친해서 그래요! 장미관 사건을 해결 하면서 저희가 얼마나 친해졌는지 아세요? 왕녀님도 참!”
“..마, 맞아요! 친구죠 친구. 같은 1학년이라서 빨리 친해졌거든요. 샤오메이랑은 여동생이랑 오빠 같은 사이라니까요?”
바이올렛이 나를 도와주자, 나는 그에 편승해 적당히 둘러대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흐음..그래? 그냥 친구라 이거지..?”
“물론이죠! 애초에 면회를 온 것도 아그네스 황녀님이 부탁해서 온 걸요? 올가 성녀랑은..”
“..페, 펜팔! 펜팔 친구에요! 어릴 적에 조르바 덕에 만난 적이 있거든요!”
“..호오, 성녀님이랑? 조르바 펠카스 덕에?”
나는 조르바의 이름을 팔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조르바 녀석이 발이 엄청 넓잖아요? 그 녀석을 따라 샤오메이랑 같이 북부에 갔다가 예배를 드릴 때, 잠깐 만난 걸 계기로 친해져서 편지를 주고받았죠.”
“호오, 그래? 무슨 내용?”
“음, 아카..데미에 가면 뭘 할지, 같은 거나 일반적인 삶이나. 그런 것에 대해서요. 책에 대해 이야기도 나누고, 신앙에 대해서도 토론하고..”
그런 말이 있다. 매력적인 거짓말은 90%의 진실에 10%의 거짓을 섞으라는 말.
나는 실제로 올가와 주고받았던 편지의 내용을 일부를 줄줄이 읊으며 내 말이 진실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게 3회차의 일이긴 하지만 거짓은 아니잖아?
“이상형에 대한 이야기나, 어떤 데이트를 해보고 싶냐 같은 거나, 어떤 결혼 생활을 해보고 싶다 같은 것도..”
“...나 몰래 그 여..성녀님이랑 그런 이야기 까지 편지로 주고받은 거야? 아르틴?”
그런데, 설명을 하던 도중 옆에서 들린 바이올렛의 목소리가 묘하게 차가웠다.
내가 천천히 바이올렛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바이올렛의 눈빛에는 아까 올가를 쳐다 볼 때와 같은 차가움이 섞여 있었다.
“바이올렛? 너 까지 왜 그래..?”
“글쎄, 듣다보니 나도 그 편지 내용들이 궁금해 져서, 계속 설명해줄래?”
“아니, 뭐 이 정도면 설명이 되지 않았을까..?”
그 상냥한 바이올렛의 차가운 목소리에,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손을 얌전히 무릎에 모았다.
힐끔 마리안느 누님을 쳐다보자, 이 상황이 재밌는지 팔짱을 낀 채로 씨익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좀 더 제대로 설명해줬으면 하는데. 아그네스랑 리처드 학생회장한테 설명해야 할 지도 모르니까 말야?”
이상하다. 아침 전까지 줄곧 기다렸던 면회시간이 전혀 즐겁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알‘미라즈를 힐끔 쳐다봤지만, 알’미라즈는 나를 보더니 쓱 시선을 돌렸다.
알‘미라즈, 너 마저?
“자, 계속 설명해줘, 응? 또 무슨 편지를 썼는데? 이상형은 누굴 적었어?”
“그러네, 이상형이 누군지는 꼭 듣고 싶은 걸, 편지에 뭐라고 적었어?”
현실에서 양희민으로 26년, 이 세계에서 아르틴으로 21년간 살면서 쌓아올린 직감이 나를 향해 날카롭게 경고하고 있었다.
장미관 보다 지금이 더욱 큰 위기라는 사실을.
문뜩 샤오메이가 쓴 편지의 문구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오라버니, 거기서 나오면 최대한 멀리 도망치세요! 아니면 차라리 회귀하세요!
나는 진심으로 지금 회귀가 마려웠다.
**
면회실에서 뛰쳐나온 올가는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성녀님? 무슨 일이십니까? 안색이..”
“비켜요! 제 방에 아무도 들이지 마세요!”
─쾅!!
자신을 걱정하는 눈으로 보는 한 성직자도 매섭게 내친 후, 올가는 방안에 무릎을 꿇고는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우엑! 우에엑! 허억..! 허억...!”
숨이 가쁘게 차오르며 가슴이 답답하고 욱신거린다.
올가는 황급히 신성력을 끌어올려 흉통이 느껴지는 가슴을 향해 발산했지만, 흉통만 줄어들 뿐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과 과호흡은 멈추지 않았다.
팔을 뻗어 아무거나 더듬거리던 올가는, 자신이 늘 머리에 쓰는 베일을 둥글게 말아 입을 가리고 나서야 간신히 과호흡 증상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후욱..! 후욱..! 아그네스..!!! 이 망할 암퇘지년이..!!!”
공황장애 증상이 멈추자, 올가는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모습을 추스를 수 있었다.
안색은 파랗다 못해 하얗게 질린 상태였으며, 공황장애로 인해 흐르는 눈물자국이 얼굴에 남아있었다.
거칠게 베일을 벗겨낸 탓에 정성껏 관리한 머리카락은 산발이 돼 있었으며, 손은 여전히 방금 전 느낀 공포를 기억하고 부르르 떨리는 상태였다.
방금 자신을 마주친 사제도 자신의 이런 모습을 봤을 까? 봤다면 세르게이 경에게 부탁해 입막음을 해야 할 지도 모른다.
“후우...후우...약이 여기 어딘가에 있었을 텐데..”
아르틴에게 이런 추태를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올가는 자신의 서랍 가장 아래, 열쇠로 잠긴 칸을 거칠게 열었다.
그 안에서 자신이 아무도 모르게 복용중인 공황장애용 알약이 들은 통을 꺼내, 손에 대충 부은 후 입에 우겨 넣었다.
서랍 안 약통 옆에 놓여있던 포도주를 들이켜 약들을 삼키고 나서야, 올가는 손의 떨림이 멈춘 것을 확인했다.
곧 이어 약효가 돌아 조금 몽롱한 상태가 되자, 올가는 의자에 주저앉아 그 몽롱함을 즐겼다.
신성력으로 해독을 하면 즉시 과잉복용한 약의 부작용이 사라질 테지만, 지금 올가에게는 이런 약효라도 필요한 상태였다.
“...아직은 안 돼, 아르틴을 위해서는 이 정도는 참아야 해. 나는 완벽한 성녀가 되어야 하니까..”
히죽, 웃으며 올가는 다시 거울을 바라봤다.
매끄러운 거울 안의 자신은, 산산조각 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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