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 교단의 암거미
* * *
면회가 끝난 후, 나는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숙소로 걸어 돌아갔다.
“중간에 엄청 큰일 날 뻔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면회가 끝나니 좀 섭섭하네.”
마리안느 누님과 바이올렛이 번갈아가면서 집요하게 올가에 대해 물었을 때는 간담이 서늘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종교재판소의 이단 심문관들의 고문도 버텨낸 몸이다.
이상형에 대한 것 같은 위험한 질문들을 외모 대신 상냥한 성격 같은 것으로 둘러대며 말을 돌려 위험은 몇 번이고 빠져나왔다.
‘절대 말 못하지, 편지에 적을 이상형이 잘 생각 안 나서 가장 좋아하던 캐릭터인 아그네스를 묘사해서 적은 걸 알면 샤오메이랑 바이올렛이 엄청 슬퍼할 텐데.’
지뢰밭을 피해낸 나 자신이 스스로 기특해졌다.
그런 자잘한 위험을 넘기고, 즐거운 3시간을 보내고, 토마스 사제가 가져다 준 검사를 통과한 선물로 양손도 무겁다.
‘이걸로 버킷 리스트는 하나 달성했네.’
군대에서는 선후임의 가족들이 먹을 걸 가득 챙겨오는 것을 구경하거나, 여자친구가 보낸 편지를 받고 기뻐하는 동기를 보며 나도 언젠가 면회나 편지를 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군대를 제대한 이후에 내가 받을 수 있는 면회는 교도소 면회뿐이라서 현실에서는 포기한 꿈이었지만.
‘편지에 직접 만든 도시락에 간식까지! 이거 다 먹을 수 있으려나?’
행복한 고민에 미소가 절로 만개한다. 후후.
─드르륵!
“아..아르틴 왔어?”
숙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카이엔이 테이블에 앉아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저 녀석, 단 음식 별로 안 좋아하지 않나?
“뭐냐? 갑자기 웬 케이크? 평소에는 단 음식 입에 대지도 않는 녀석이.”
“그게, 나도 클레어가 면회 왔었거든.”
아, 과연. 클레어가 주고 간 케이크인가.
어쩐지 바이올렛이 면회 왔는데 방해하러 안 와서 의아했는데, 클레어에게 묶여 있어서 안 보였구나.
“나를 위해 준비해 줬는데, 먹지 않는 것도 예의는 아니니까 먹어 치우려고..”
카이엔은 그렇게 말하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다시 묵묵히 케이크를 퍼먹기 시작했다.
“..도와 줘?”
“아니, 괜찮아. 나를 위해 준비한 건데 나눠주면 좀 그러니까.. 아르틴은 면회 어땠어?”
나는 대답 대신 양손 가득한 짐을 보여준 후 카이엔의 맞은편에 앉아 짐을 풀기 시작했다.
‘..어라, 나 방금 자연스럽게 애랑 마주보고 앉은 건가?’
문뜩 이상한 생각이 들자, 다시 머리를 벽에 쳐박기 전에 나는 황급히 바이올렛이 전달해 준 가방을 열었다.
가방의 안에는 역시나 애들이 준비해준 먹거리나 개인 물품으로 가득했다. 아니, 너무 많았다.
“..내일 아침까지는 이것만 먹어도 되겠네.”
“..도와줄까?”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 양보 못 하지. 내 버킷 리스트의 결과물을 남에게 줄 수는 없는 법.
아그네스가 싼 샌드위치를 입에 넣고는 오물거리며, 한 손으로는 아그네스가 써준 편지를 들고 읽기 시작했다.
“헤헤, 아그네스도 참... 뭐 한달 동안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닌데..”
편지의 내용은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아그네스의 로맨틱한 편지였다.
아름다우면서도 깔끔한 아그네스의 필체로 적힌 꿀이 뚝뚝 떨어지는 내용에 나는 만족감이 차올랐다.
“...그렇게 좋아? 지금 표정 엄청 바보 같은데.”
“..당연히 좋지. 왜, 또 편지 읽는 거 방해할 거냐?”
문뜩 케이크를 퍼먹으면서 나를 가볍게 째릿 노려보는 카이엔의 시선에, 나는 편지를 내 몸으로 가렸다.
4회차 당시에 아그네스와 편지를 주고받을 때 마다 읽는 것을 방해하던 카이엔의 악랄함은 아직도 똑똑히 기억난다.
‘마시던 커피를 편지에 쏟으려고 했을 때는 저 새끼가 악마라고 생각했지..’
황급히 팔로 막은 덕에 편지는 젖지 않았고, 아이스커피라서 화상도 안 입었지만 그 때는 진심으로 카이엔을 두들겨 패고 싶었다.
이번에도 그런다면? 샤오메이에게 배운 촌경으로 앞니를 3개 정도 박살낸 후 토마스에게 치료받게 만들어 줄 자신이 있다.
“무슨.. 내가 애도 아니고 그런 짓을 왜 하겠어?”
“..? 네가 웬일이냐? 평소 같았으면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어떻게든 방해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르틴은 날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평소라면 나한테 박고 싶어 하는 똥게이라고 생각할 텐데, 진짜 이상하게도 녀석에 대해서 그런 나쁜 감정이 들지 않았다.
‘내가 진짜 미쳤나? 나중에 토마스 사제한테 정신 상담이라도 좀 받아봐야 하나?’
여신도 동성애를 금지하고 있으니, 토마스 사제라면 나를 올바른 이성애자의 길로 이끌어 주겠지..?
그리고 내 반응만큼이나 카이엔의 반응도 이상했는데, 평상시의 그 부들거리는 반응은 온데간데없이 나를 가볍게 째려만 볼 뿐 그 이상으로 뭔가를 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걱정 하지 마, 나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로 했으니까. 그런 치졸한 짓은 안 할 거야.”
“..정말이지? 너도 어른이 됐구나 카이엔?”
나는 뒤로 숨겨놨던 편지를 다시 꺼내며, 카이엔의 눈치를 힐끔 보며 다시 읽기 시작했다.
“..나는 커피라도 타 올까.”
“커피?! 역시, 방해 하려는 거냐!”
“무, 무슨 소리야. 케이크가 너무 달아서 커피라도 마시려고 한 거야... 진정해 아르틴.”
...진짜인가? 가짜인가? 케이크 때문에 메슥거리는 표정을 보면 진짜 같기는 한데..
‘방심하지 말아야지. 언제 방해할지 몰라.’
그 후로 나는 약 30분 간 연인들이 준비한 음식을 챙겨 먹으며 편지를 읽었다.
편지를 읽으며 카이엔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녀석은 정말로 나를 힐끔 힐끔 쳐다만 볼 뿐, 커피를 편지에 쏟을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녀석은 내 의심이 우스워 질 정도로 케이크에 집중하며, 가끔은 나를 보며 눈웃음을 짓기도 할 정도로 여유로웠다.
..뭐지? 왜 갑자기 하루 밤새에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린 거지?
──덜컥.
“자, 다들 잘 쉬고 계십니까? 이제 슬슬 저녁 스케줄을 진행 할 시간입니다!”
카이엔에 대한 의심이 역으로 깊어질 때 쯤, 토마스 사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본래는 식사를 잔뜩 준비하려고 했습니다만.. 면회객 분들이 챙겨준 음식으로 이미 배가 가득 차신 것 같군요!”
“..하하, 뭐. 그렇지.”
카이엔은 토마스 사제의 말에 쓰게 웃었다.
토마스 사제는 그런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활짝 웃으며 품에서 수첩을 꺼내 스케줄을 부르기 시작했다.
“카이엔님은 계획대로 저를 따라오셔서 신학에 대한 강의를 들으시면 되고.. 아르틴님은 일정이 바뀌셨습니다.”
“엥? 제 일정이요?”
본래 내 저녁 일정은 세르게이 선생님과의 실전 교습. 체력 훈련이었을 텐데?
“네, 용사님의 대변인으로서 1:1 면담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세르게이 경께서 급한 용무로 잠시 자리를 비우셔서 내일 할 면담을 미리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토마스 사제는 일정이 바뀌어서 죄송하다고 연신 사과를 하며, 나와 카이엔을 데리고 어디론가 데려가기 시작했다.
“카이엔님은 여기서 절 따라오시고, 아르틴님은 쭉 가시다가 붉은 문이 있는 방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네, 조금 이따가 저녁 스케줄 끝나고 봐.”
카이엔은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 지, 싱긋 웃으며 나에게 손을 흔들고 토마스 사제를 따라 걸어갔다.
‘...뭔가 나 모르게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갑자기 자살을 권유하는 샤오메이, 면회실에서 뛰쳐나간 올가, 여자에 대한 질투가 줄어든 카이엔과 카이엔을 혐오하지 않는 나.
뭔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변해가는 것만 같아서, 조금 기분이 나빠진 나는 서둘러서 붉은 문을 향해 걸어갔다.
복도를 따라 걷자, 꽤 커다란 붉은 문이 보였다.
똑똑똑.
“용사의 대리인 후보, 아르틴 루드비히 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노크 후, 내 소개를 하며 문을 열었다.
“어머, 어서와요 서방님! 마침 기다리고 있었어요!”
“..올가? 면담 상대가 너였어?”
방 안에는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올가였다.
아까 면회실을 황급히 나갈 때랑은 다르게, 혈색이 좋아진 건지 불그스름한 얼굴을 한 올가는 나를 보며 무언가를 홀짝이고 있었다.
‘...이 냄새는, 포도주? 올가가 면회 전에 포도주를 마신다고?’
내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올가는 맞은 편 자리에 놓인 잔에 포도주를 따라주며 싱긋 웃음을 지었다.
“저희가 서로 딱딱하게 면담할 사이는 아니잖아요? 여신님께서도 적당한 음주는 눈감아 주신 답니다.”
“어..그렇지, 우리가 뭐 어색한 사이는 아니지.”
나는 문을 닫고 포도주 잔이 놓인 올가의 맞은편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올가는 마치 아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니 오히려 즐거운 듯 술을 홀짝이며 나를 향해 고혹적인 눈웃음을 지었다.
“올가, 아까는..무슨 일이야? 안색이 많이 안 좋던데.”
“아.. 별거 아니에요. 그냥 어제 의식을 준비하느라 밤을 샜더니 무리를 좀 했나 봐요.”
“무리라니? 괜찮아? 의식의 준비가 그렇게 힘든 거야?”
여신의 성녀인 올가라면 잠재능력은 아무리 못 해도 각성 그 이상.
아직도 각성하지 못한 나랑은 다르게 초인의 반열에 들 만한 신체 능력일 텐데, 그런 올가가 힘들어 할 정도라면 분명 고된 일이 틀림없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잠깐 눈을 붙였더니 혈색이 돌아왔잖아요?”
올가는 보란 듯이 볼을 톡톡 두드렸지만, 나는 솔직히 취해서 얼굴이 붉어진 건지 아니면 정말 혈색이 돌아온 건지 알 기 힘들었다.
“그보다~ 저는 서방님하고 가볍게 술 한잔 하면서 이야기 하고 싶어요.”
“..정말 괜찮은거야? 조금 취한 것 같은데.”
“후후, 정말 취했으면 신성력으로 해독하면 그만인걸 알잖아요? 아니면 저를 혼자서 술주정 부리는 여인으로 만들 셈인가요?”
서방님은 짓궂군요! 라고 말한 올가는 뺨을 부풀리며 나를 빤히 바라봤다.
확실히 올가라면 알콜중독자의 썩은 간도 단번에 치료할 수 있을 테니, 내 과한 걱정일지도 모른다.
“알았어 알았어, 건배할 테니 대신 한 병만 먹고 바로 해독하는 거다?”
“후후, 역시 서방님은 유도리가 있어서 좋다니까요. 교단의 꼰대들하고는 달라요.”
올가가 기분 좋은 얼굴로 잔을 들어 올리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잔을 들어올려 올가에게 짠하고 부딪혔다.
‘그러고 보니, 술은 이번 회차에서는 처음이네.’
나는 술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편이지만, 영약의 섭취도 있고 애들하고 시간 보내는 것도 바빠서 술을 안 먹은지 꽤 지난 것 같다.
지난 회차에서도 1년을 성벽너머 마왕의 영토를 돌아다녔으니, 근 2년만인 셈.
‘후후, 올가가 준비한 포도주면 엄청 고급이겠지? 올가 덕에 호강을 다하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잔을 들이켜 포도주를 음미했다.
확실히 올가가 준비한 포도주는 고급인 듯, 입안에 퍼지는 풍미가 싸구려 와인이나 포도주하고는 전혀 달랐다.
“와, 이거 진짜 좋은 술인데? 어느 술──”
어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뭐지? 포도주의 뒷맛이 조금 너무 쓴...
*
털썩.
아르틴이 쓰러지자, 올가는 방금 전 까지 술기운으로 고조된 표정이 어디 갔냐는 듯 차가운 눈으로 아르틴을 바라봤다.
“후후, 서방님도 참. 그렇게 부주의하게 남이 주는 술을 들이키면 못 쓴다고요?”
화악.
올가의 몸을 빛이 감싸자, 올가의 몸에 감돌던 술기운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사냥감을 노리는 여인이었다.
“후후..아그네스가 그 년이 나쁜 거예요? 저를 그렇게 도발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올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의 잠금쇠를 걸었다.
저녁 스케줄은 약 3시간, 그 동안 이를 방해할 인물들은 없었다.
“그럼..우리 서방님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