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 올가 비르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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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 비르투스가 살아온 삶에 온기 따위는 없었다.
올가는 태어날 때부터 여신의 신탁에 의해 출생을 예언받은 선택받은 존재였다.
그녀가 태어난 날, 교단의 성기사단 절반이 제국의 어느 시골 마을에 도착했다.
태어나 평생을 살면서 귀족은커녕 기사나 집사도 만나기 힘든 시골의 농부들에게 있어서 새하얀 백색의 갑옷으로 무장한, 위대한 여신을 섬기는 성기사단의 행진은 놀라운 구경이었다.
당연히 막 출산을 끝낸 올가의 부모에게 있어서, 성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도착한 제국의 대주교는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할 위대한 존재였고, 그러한 존재가 말하는 신탁은 이해할 수 없지만 감히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올가의 부모들은 막 태어난 올가를 금화 여섯 닢을 받고 대주교와 성직자들에게 넘겼다. 금화 한 닢은 가난한 농민들의 한달 생활비에 준하는 비용이었으니, 금화 여섯 닢은 거룩한 여신의 말씀을 제쳐두고서도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이었으리라.
그렇게 올가는 태어날 때부터 교단의 손에 맡겨 길러지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인 올가는 초대 성녀의 이름을 계승한 것이었으며, 비르투스라는 성은 고대에 역품천사를 고귀하게 부르는 명칭이었으니, 그녀는 오로지 성녀가 되기 위해 교육받으며 자랐다.
그러한 교육의 덕일까, 아니면 여신이 점지한 성녀라서일까, 올가는 6살 때 이미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을 깨닫고 아주 일찍 철이 들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올가로 보지 않았다. 비르투스라는 성은 그녀가 오로지 교황청에 속한 도구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성일 뿐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녀는 오직 ‘성녀’였다.
모든 이가 그녀를 부를 때 성녀님을 붙였으며, 대부분의 경우는 이름이나 성까지 무시하고 오직 성녀라고 칭하며 그녀를 찬송하고, 그녀를 경배하였다.
하지만 그녀를 돌보던 수녀나 사제들에게도, 그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성기사들도, 그녀의 내면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혹여나 그녀가 그 또래의 아이와 같은 행동을 보이면, 며칠에 거쳐서 걱정어린 말과 교육으로 그녀의 ‘왜곡’을 바로 잡고자 했다.
8살이 되던 해에, 올가는 그런 주변의 어른들을 만족시키는 ‘착한 아이’를 연기하는 법을 완전히 습득하였다.
올가라는 개인의 선호와 성격을 전부 죽이고, 오로지 착하고 신실한 성녀를 연기하자, 그제서야 모든 어른들은 그녀를 칭찬하고 인정하기 시작했다.
‘...따분하네.’
어른들의 태도는 너무 알기 쉬웠다. 그들은 올가에게 바라는 것을 그대로 내비추고, 때로는 그들의 어둠을 올가에게 감추지도 않았다.
그녀를 통해 재물을 착복하고, 그녀를 이용해 마음에 드는 여자를 자신의 부하로 만들어 탐하고, 그녀를 통해 타인의 부정을 고발하여 자신의 직위를 쟁취하는 이들을 보며 올가가 느낀 감정은 하나였다. 지루함.
그 감정은 10살이 되던 해에, 올가가 여신의 계시를 처음 받게 된 이후에도 이어졌다.
신은 죽어가고 있다고 당돌하게 말한 미래의 누군가하고는 다르게, 여신은 실제로 존재했으며, 신도들을 보살폈고, 천사들을 보내 영웅들을 축복하고 마왕군의 사악한 계략을 막고 있음이 분명했다.
여신의 말을 직접 듣고 전할 수 있는 올가가 그것을 보고 주변에 알리자, 모든 여신의 신도가 기뻐하고 찬송했다. 마지막 성녀 이후로 수 십년, 여신은 여전히 인류를 돌보고 있던 것이다.
허나, 올가는 그런 여신에게 경외감이 들지 않았다.
이유? 간단했다. 여신의 계시는 늘 쓸데없이 장황하고 복잡했으며, 예언은 어떻게 끼워 맞춰도 될 정도로 난해했고, 여신의 권능은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았다.
여신이 그녀에게 내려 준 여신의 대리자이자 성녀로서의 권능조차, 수많은 필멸자보다 강할 뿐 초월자의 대리인으로서 얻은 힘이냐면, 그저 구색 맞추기라는 생각이 들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올가는 문뜩 모든 게 허무해졌다. 자신이라는 존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매일 지독할 정도로 청빈하고 절제된 삶을 살면서, 자신의 인격이 가지는 개인으로써의 가치관과 성향은 부정해야 한다. 그러고도 제단에 올라 진심으로 믿지도 않은 여신을 찬양하며, 귀족과 돈 많은 부르주아들에게 가식적인 미소를 뿌릴 뿐이다.
우스운 것은, 여신은 올가의 여신에 대한 불신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 주제에, 그녀가 지겨운 삶에 죽음을 바랄 때 마다 타인에게 천사를 통해 계시를 내렸다.
계시를 받은 누군가가 와서 그녀를 보듬고 껴안으며, 눈물을 흘리며 삶에서 오는 기쁨과 세상의 아름다운을 논할 때 마다, 올가는 속으로 이런 신파극에 조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은 지루했고, 대중은 어리석었으며, 지식인들은 오만하다.
이 세상은 멸망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올가는 진심으로 그리 여기기 시작했다.
*
“여신은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여신을 죽이는 건 바로 우리 인류다.”
그 사내는 여신의 계시와도 같이 어느 날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마왕군에 맞서 싸우는 아카데미의 유능한 인재들을 독려하라는 명을 받아, 아카데미에 찾아간 올가의 앞에서 당돌하게 여신은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 아르틴에게 올가가 처음 느낀 감상은, ‘이 새끼는 미친새끼가 아닐까?’ 였다.
당대 용사로 여신에게 인정받은 카이엔의 친구이자, 개개인이 역대 아카데미 인재 중에서도 기라성 같은 재능을 뽐낸다는 당대의 아카데미에서 가장 무능한 남자. 그런 주제에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불경한 존재가 바로 아르틴이었기 때문이다.
별로 신경은 쓰지 않았다. 여신의 대리인인 자신에게 시선을 받기 위해, 충격적이거나 말도 안 되는 사상을 주장하거나 행동을 보이는 이들은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무관심조차 아르틴이라는 남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가장 재능이 비천함에도 수많은 인재들을 수족처럼 이끌며, 용사인 카이엔조차 자신의 말을 따르는 하수인처럼 부리고 있었다.
교단의 인물들 중 일부는 그런 아르틴을 용사와 떨어트려 마왕군의 전선으로 보내버리거나, 심지어 흑기사를 보내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미 아카데미에서 마왕군의 계략을 몇 번이고 막아낸 아르틴을 지켜보자는 의견이 더 많았기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시점에서 올가는 조금씩, 아르틴에게 동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르틴이라는 남자는 자신의 길을 위해 살고자 했으나, 그가 생명을 부지한 것은 그저 높으신 분들에게 있어서 쓸모가 있기 때문에, 용사 카이엔을 보좌할 도구로써 간택 받은 것에 불과했다.
‘어리석고 불쌍한 인물, 당신이라는 존재가 타인에게 어떤 존재로 비춰지는 지조차 모르고 있는 걸까요.’
동질감을 느낀 올가가 다음으로 느낀 감정은 연민이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타인의 깊은 속내를 읽는 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아르틴이라는 남자는, 자신이 어떤 취급을 당하는 지도 모르고 열심히 노력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가는 그런 아르틴을 위해 자그마한 축복을 걸어주기 시작했다. 어차피 발버둥을 칠 것이라면, 최소한 흔적이라도 세상에 남기고 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으니까.
*
“──위험해! 올가!”
올가가 아카데미를 떠나기로 한 날, 마왕군은 그녀를 죽이기 위해 마왕의 권속인 심해의 제독 암모서스를 보냈다.
그녀를 수호하는 교단의 성기사들과 아카데미를 수호하는 경비인력은 최선을 다해 분투하였으나, 리치 하몬과 몽마여왕 릴리트의 지원이 합해지자 그녀를 지키던 사람들은 무력하게 쓰러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암모서스의 군세가 자신이 타고 있는 배의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올가가 느낀 감정은 공포가 아니라 해방이었다. 지금 이 순간 언데드의 눈먼 칼에 맞아 죽는다면, 그녀의 지겨운 17년의 삶은 마침내 마침표를 찍을 수 있으리라.
“바보같이..! 왜! 왜 몸을 던져 막은 건가요!”
허나 난전 속에서 유령선원의 칼은 자신을 대신해 몸을 날린 아르틴이라는 남자를 베었다.
죽어가는 그를 본 용사와 마녀의 각성으로 전투는 승리로 끝났으나, 성녀의 기적으로도 아르틴이라는 남자는 몇 주간의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그녀도 전력을 다해 살리고자 했으나 운에 맡겨야 할 정도로 깊고 치명적인 상처였다.
“미안, 위태롭게 보여서... 구해주고 싶었거든.”
자신의 물음에, 병실에 누워있던 남자는 그렇게 대답하며 나지막이 웃을 뿐이었다. 그 눈에 담긴 것은 여신의 대리인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도, 성녀를 대신해 희생하고자 하는 신앙심도 아니었다.
“그래도,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올가.”
남자는 늘 그렇듯이 무척이나 무례하게도 이름으로 자신을 불렀다.
올가는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
“..으음..여기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천천히 눈을 뜨자, 나는 부드러운 무언가를 머리에 베고 누운 상태였다.
“어머, 일어나셨나요 서방님?”
“올가..? 내가 언제 잠든 거야..? 잠든 건 맞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내가 일어나려고 하자, 올가는 다정하게 나를 다시 무릎에 눕힌 후 내 부들거리는 손을 잡아주었다.
그 손의 온기가 참으로 따스해서, 머리에 닿는 무릎의 촉감이 부드러워서 나는 자연스럽게 힘을 빼고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서방님, 힘드시지 않으신가요?”
“..뭐가아?”
“모든 거요. 죽음을 반복하는 것. 마왕과 계속해서 싸워나가는 것, 자신을 음흉하게 바라보는 남자를 도우며, 불세출의 천재들의 보폭을 맞춰 뛰는 법을 몸에 강제로 새기는 것.”
“...무슨 소리인지 어려워.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나는 올가가 내뱉는 말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어째서인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두통이 더욱 심해지기만 했다.
올가는 지끈거리는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자애로운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아르틴, 더는 노력하지 않아도 되요. 저랑 함께 평온한 삶을 누리도록 해요.”
“...평온한 삶?”
“네, 마왕 같은 건 용사인 카이엔에게 모두 맡기고... 저와 이곳을 벗어나요.”
무릎베개를 한 나는 올가의 커다란 가슴 탓에 올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묘하게 촉촉하게 젖은 것은 느껴졌다.
“매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노력으로, 저 가치 없는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지 말아요. 왕국이나 군도.. 아니면 사막을 넘어서 술탄국도 좋아요. 우리를 알아볼 사람이 없는 곳으로 떠나는 거에요.”
“...떠나? 아카데미를?”
“네, 매일 아침 평온한 아침을 맞이하고, 하루하루를 힘껏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거예요.”
내 손을 잡은 올가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왜 인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녀는 무척 슬퍼보였다.
“저희는 시골의 작은 집에서 가축을 기르며 지내는 거죠. 닭을 기르고, 농사도 짓고, 때로는 사냥도 하고...”
“매일 아침 암탉의 울음소리로 눈을 뜨면, 잠든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깰 때 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당신이 눈을 뜨면, 입맞춤을 하며 어제 밤도 잘 잤냐고 기쁜 목소리로 묻고 싶어요.”
“올가, 그건...”
3회차, 올가와 주고받았던 ‘연습’용 연애편지에 적혀있던 내용이었다.
“서방님이 닭에게 모이를 주는 동안, 저는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거죠. 식사 준비가 끝나면 서방님에게 달려가 식사하라고 말하며 목을 꼭 끌어안고 싶어요. 텁텁한 빵과 계란 요리가 전부여도, 서방님과 식사하면 행복할 것 같으니까요.”
그녀와 내가 나눈 편지 중 하나에는, 서로가 이루고 싶은 버킷 리스트가 적혀 있었다.
나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면회를 받아보고 싶다고 했고, 둘 만의 비밀을 간직하며 로맨스 소설과 같은 만남을 즐기고 싶다고도 했었지, 다정하게 연인과 사랑을 속삭이고 싶다고도 했고, 그리고...
“서방님이 밭일을 하러 나가면, 저는 집을 청소하고 서방님을 위해 요리를 준비하는 거죠. 겨울을 대비해 식재료들을 손질하고, 헤진 서방님의 옷을 꿰매다가 손가락을 찔려 다치기도 하고..”
내 버킷 리스트는 연인과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내용이 주였다. 하지만 올가의 내용은 좀 더 달랐다.
“..내가 집에 더워서 잠시 쉬고 있으면, 올가가 새참을 들고 나타나서, 내 땀을 닦아주면서 새참을 먹여주고?”
“후후후, 역시 서방님은 기억해주시는 군요? 맞아요. 식사가 끝나면, 아르틴과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오늘 저녁은 뭐가 좋을지, 어제 밤에는 무슨 꿈을 꿨는지, 어느 나무에 어떤 열매가 열렸는지, 병아리의 이름을 뭘 로 지어줄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하게 보내고 싶어요.”
올가는 평온한 삶을 원했다. 소박하고, 힘들고, 척박하고, 볼품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기에 사랑하는 이와 모든 것을 공유하는, 매 순간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그런 삶을 꿈꿨다.
“..그 때는 그냥 책에서 본 그럴 듯한 대사라고 말했지만.. 미안해요 서방님, 그거 거짓말이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올가의 호흡이 천천히 떨렸다.
그녀의 호흡이 점점 격해질수록 손으로 느껴지는 박동도 빨라졌지만, 올가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밤에는 별을 보며 서로의 숨결과 온기를 나눌 거예요. 내년에는 무슨 작물을 심을지 고민하기도 하고, 겨울을 나기 위해서 사냥을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전전긍긍하기도 하고..”
“올가..”
“...그런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요 아르틴. 매 순간 위험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삶이 아니라,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위해 고통만 가득한 삶을 반복하는 대신 사랑하는 사람과 끝없이 행복한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삶이.”
내가 아는 올가는 위대한 성녀가 아니었다.
내 눈앞에 있는 여자는 거창한 여신의 대리인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이제, 저와 함께 해요 아르틴. 두 번 다시는 고통을 느끼지 말아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내가 마주한 얼굴은 원작에서 말하던 철의 여인, 인류의 희망이라 불리던 영웅이 아니었다.
그저 연약하게, 눈물어린 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평범한 삶을 꿈꾸는 한 소녀였다.
“...당신이 꼭 그런 삶을 짊어질 필요는 없어요. 아르틴.”
문뜩, 나는 이 표정의 올가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바이올렛의 기억의 일부 중, 불타 죽는 나를 보는 올가의 표정이..이렇게 슬퍼보였다.
─띠링!
그 때, 내 눈앞에 창이 하나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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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퀘스트 : 올가의 부탁을 거절하고 그녀의 사랑을 거부하세요.
퀘스트 실패 시 : 강제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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