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올가 비르투스 #02
* * *
“보셨습니까? 일 처리는 이렇게 하는 겁니다.”
천계의 지상대책본부의 사무실. 컴퓨터가 꺼질 일이 없는 이곳에서 하얀 머리의 천사가 방금 자신이 입력한 것을 보여주며 으스대는 표정을 지었다.
“역품천사 아크라엘님! 이런 건 매뉴얼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특정 인물을 저격해서 멀어지는 퀘스트라니요? 게다가 이 패널티 뿐인 퀘스트는 성립할 수도 없습니다!”
“흥, 그래서 여러분이 여태 계속 실패한 겁니다! 그저 패배자인 마왕을 토벌하는 것에 벌써 5회차? 전부 그 느슨한 태도 때문 입니다!”
사르디엘이 이전의 직권남용이 들켜 좌천된 이후, 새롭게 아르틴의 상태창을 관리하게 된 인물은 역품천사 아크라엘이었다.
‘처음에는 효율성과 감정을 배제한 일처리를 추구한다고 해서 좋아 했는데..!’
오만한 표정으로 아르틴의 행동을 유도하는 아크라엘의 행동에, 제타엘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상태창에 관한 수많은 매뉴얼이 적혀있지만, 그 중에서도 어겨선 안 될 법칙 중 하나를 당당하게 어기고 있었으니까.
“마, 만약 정말로 퀘스트를 거부하면? 강제로 회귀시킬 셈입니까? 그건 환생자의 자유의지를 짓밟는 행위 입니다!”
사르디엘이 좋은 상관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그녀는 카르엔과 아르틴의 인생에 몰입하고, 그들을 진심으로 응원하며, 울고 웃던 인물이었다.
그런 태도가 가끔 사적인 감정을 담아 정해진 규칙을 어기긴 했으나, 옆에서 만류하던 제타엘도 속으로는 그런 사르디엘의 행동에 가끔은 통쾌한 기분을 받을 수 있었다.
“알게 뭡니까? 고작 한두명의 자유의지 때문에 모든 여신님의 신도들이 고통 받아야 한다는 소리라도 됩니까? 오히려 여태까지 저렇게 자유롭게 풀어둔 것이 바로 여신님의 자비로 여겨도 모자를 판인데 말이죠.”
하지만 새로 온 이 역품천사는 달랐다. 그 생애를 끝없이 관찰하며 이입해 온 사르디엘과 제타엘과는 다르게, 이 남자는 이들을 그저 게임의 말로 여기고 있었다.
“애초에 카이엔은 그렇다 쳐도, 아르틴이라는 남자는 매우 불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회귀를 5번 해야 겨우 튜토리얼을 끝낸 다니? 그렇게 해서 언제 마왕을 토벌하겠습니까?”
“그렇다 해도, 그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면 저희는 그 과정을 보며 시련을 내리고 적절한 보상을 주는 시스템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통제하는 건 여신님도 바라지 않을 겁니다!”
“토옹제? 이건 인도입니다! 저 어리석은 필멸자를 이끄는 가르침! 계시!”
─촤락!
어디선가 꺼낸 지휘봉을 펼친 아크라엘은 제타엘의 이마를 봉으로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아야! 뭐 하시는 겁니까!”
“그야 무능한 부하를 벌주는 거지요. 지금 제 전임자와 당신이 실수한 탓에, 인과율이 얼마나 뒤틀린 지는 아십니까?”
“그, 그건...!”
“지금 당장 강제로 회귀시키고 기억을 잃게 만들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제가 정말 강제로 회귀를 하고 싶어서 이러겠냐~ 이 말입니다! 전부 당신이랑 무능한 전임자의 뒤치다꺼리 아닙니까!”
제타엘은 분함에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대답할 말은 없었다. 실제로 사르디엘이 몇 번 매뉴얼을 벗어난 탓에 지금의 인과율은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으니까.
“아르틴이라는 인간이 성녀와 놀아나지 않으면 세계가 멸망하기라도 합니까? 앞으로는 철저히 통제하여 마왕을 토벌시킬 예정입니다. 이미 여자도 많으니 마왕 죽이고 나서 알아서 부귀영화나 누리면 될 것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시끄럽습니다! 만약 아르틴이 거절하려고 한다면 카이엔을 써서라도 막을 테니, 상태창을 준비해 두십시오. 저는 전부 여신님을 위해! 거국적인 뜻을 이루려는 것 입니다!”
제타엘에게 반론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제타엘은 지휘봉을 내려놓고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는 아크라엘의 뒤통수를 내려찍고 싶었지만, 일반 하급 천사인 자신이 아무리 강하게 내려쳐도 아크라엘은 기절하지 않을 것이고, 사르디엘처럼 당해주지 않고 역으로 자신을 무참히 박살낼 것이 확실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야. 당장 바로 잡지 않으면..!’
허나 성녀와 아르틴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제타엘로서는 가만히 두고만 있을 수 없었다. 어떠한 방법이 없을까?
‘...그래, 내가 안 된다면...’
제타엘은 아크라엘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자리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런 제타엘을 힐끔 바라본 아크라엘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콧방귀를 끼었다.
“거 보십시오, 어차피 제 말대로 할 거면서, 뭘 그렇게 반항하고 그러십니까? 하급 천사면 하급 천사답게 상관의 말을...”
시끄럽기는, 제타엘은 천사로 태어나 처음으로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속으로나마 내뱉으며 상태창이 아니라 천계메신저로 연락을 보내기 시작했다.
지금의 상황과 아크라엘의 독선을 그대로 담은 그 문자는 천계 감사팀으로 향하지 않았다. 몸집이 커다란 감사팀이 움직이려면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 테고, 그 때면 이미 늦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 천사라면, 누구보다 빠르게, 그리고 누구보다 거세게 반응하여 아르틴과 카이엔, 그리고 성녀를 도와줄 것이 분명했다.
‘제발, 잠자거나 술먹고 있지만 말아주세요..!’
*
띠링─!
“...헤윽, 뭐야?”
어두컴컴한 방 안, 속옷만 입은 채로 하계의 만화를 보다가 꾸벅꾸벅 졸던 파란 머리의 천사가 알림 소리에 눈을 떴다.
“어, 문자 왔네? 내가 문자 올 곳이 있던가..? 카드 값은 냈는데?”
침대에서 일어나기 귀찮아 팔을 쭈욱 뻗어, 간신히 손끝으로 핸드폰을 낚아챈 그녀는 해냈다는 표정으로 화면을 킨 후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뭐야 이 십새끼는?”
우득!
순간의 분노로 휴대폰이 단번에 박살났지만, 그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감히 누구를 마음대로 조종하고 건드려? 내가 어떻게 키운 내 애들인데!!”
천사가 박수를 치자, 정직처리 당한 후로 입지 않았던 새하얀 정장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평범한 인간처럼 보이던 그녀의 등 뒤로, 4장의 날개가 화려하게 빛을 뿜으며 권능을 되찾기 시작했다.
“용서 못해..!! 절대로 용서 못해...!!!”
역품천사 사르디엘의 비공식적인 복귀였다.
**
‘이게 도대체 무슨..?’
퀘스트 내용을 보고난 직후, 완전히 멈춘 머리가 강제로 나마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건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올가의 제안을 거절해? 사랑을 거부하라고?’
올가가 나를 사랑한다..라는 감정을 지금 느꼈기에 혼란스러웠지만, 퀘스트창의 내용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워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퀘스트 창이 주던 퀘스트의 방향은 마치 내가 하렘을 이끌기를 바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나보고 하렘이 가능하겠냐는 듯 도발하기도 하고, 우스운 칭호 따위를 보수로 주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퀘스트는 철저히 내 성장과 여인들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퀘스트 창은.. 기존의 퀘스트창과 어조도 다를뿐더러,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다면 강제로 나를 회귀시켜 버리겠다고 말하고 있다. 회귀의 뜻을 생각한다면 죽이겠다는 말과 같은 소리다.
‘...왜? 다른 여인들은 다 괜찮아 해놓고, 왜 올가만?’
올가가 여신의 대리인이라 불리는 성녀여서? 그녀가 원작에서는 마왕성으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목숨을 잃고 희생하는 존재여서? 세계는 끝까지 그녀가 고독하게 남아 희생하기를 요구해서?
‘...그건..’
나는 천천히 올가를 바라봤다.
올가의 눈에는 평상시의 여유로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시시각각 파르르 떨리며 불안감에 가득 찬 눈빛은, 내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불안해하는 올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미안해요, 당신에게는 완벽한 모습만 보이려고 했는데, 그래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약한 모습이 드러나고 말았어요...”
올가는 비탄에 빠진 표정으로 눈을 꾹 감고는, 이내 고개를 떨며 내게 미안하다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올가가 나에게 뭐가 미안한 걸까. 그녀가 내게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사랑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제 감정을 숨기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아요...”
어쩌면 이건 꿈이 아닐까, 어젯밤의 꿈처럼 몽롱한 감정이 계속되고 있었다. 올가가 울다니, 그녀는 타인을 위해 울어줄지언정,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며 운 적은 단 한 번도 없던 그런 여자였다.
“..그래도, 제 진심이에요. 제발, 저랑 같이 멀리 떠나요 아르틴..이미 저랑 당신은...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잖아요...”
“...”
내 손을, 어깨를 꽉 붙잡은 올가의 손에도, 나는 섣부르게 대답할 수 없었다.
상태창은 그녀를 거부하고 거리를 두지 않으면 나를 죽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강제 회귀, 이번 회차처럼 다시 시작하면 그만일까?
‘아니.’
갑자기 이런 강력한 패널티로 나를 통제하려고 하는 것을 봐서는, 아마 앞으로도 이런 방식으로 나를 통제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나는 올가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번 생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있나?
‘...아니.’
올가는 내게 모든 것을 버리고 단 둘이 새로 시작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 그게 가능한 일일까?
올가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아그네스와 연애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어쩌면 바이올렛이나 샤오메이와도 연애중이라는 것도 알지도 모르는 일이다.
올가라는 단 한명의 여자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내게는 되어 있나?
‘...아니야.’
그렇지 않았다.
나를 위해 1회차부터 아카데미를 포기하고 따라와 주며 가장 먼저 내 기억을 찾아 준 샤오메이.
2회차부터 늘 함께해 온 내 가장 친한 친구이자, 내 사소한 모든 것조차 사랑해주는 바이올렛.
나와 최초로 연애를 시작해, 마왕성으로 가겠다는 미친 연인을 지지해주고, 응원해주고, 세계가 멸망하는 그 날까지 나를 기다려준 내 연인, 아그네스.
자신의 정체성을 포함한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나와 함께 할 것을 맹세한 유니코르.
거기에 시온도, 알‘미라즈도, 시르카도, 전부 포기하는 것은 내겐.. 너무 힘든 선택이었다.
‘...’
거절한다면, 올가를 거절한다면, 올가의 사랑을 거부한다면...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을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잃지 않는 다고?’
나는 그 순간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아주 잠깐이나마 그런 생각을 떠올린 내가 너무나도 혐오스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기억하고 있다.
종교 재판소의 지하 감옥에 갇힌 나를 구하기 위해, 교황의 반대를 무릅쓰고 홀로 찾아왔던 슬픈 표정의 올가를.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나를 바라보면 늘 밝게 웃는 그녀의 모습을.
내게 연애편지를 쓰는 연습을 해보고 싶다고 말하며 착각하지 말라고 말하던 풋풋한 모습을.
처음으로 내게 마음을 열었을 때, 어색한 웃음만을 짓던 그녀의 얼굴에 진짜 웃음이 지어지던 모습을.
“나는...”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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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의 내용이 변경되었습니다.
퀘스트 : 올가의 부탁을 거절하고 그녀의 사랑을 거부하세요.
퀘스트 실패 시 : 강제 회귀, 기억의 소거, 특전의 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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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입을 열려고 하자, 또 다시 퀘스트의 내용이 변경되었다.
마치, 허튼 수작은 생각 하지 말라고 말 하는 듯이 말이다.
‘..기억의 소거, 특전의 제거..’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던 때로 돌아가야 한다. 모두와의 인간관계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건 수십 가지의 고문 끝에 불에 타죽는 것보다도 내가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내게 지금 이 순간은 너무 소중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그 상태창을 보자 마음을 확실히 정할 수 있었다.
“나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