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 올가 비르투스 #03
* * *
나를 위협하는 상태창을 보자, 나는 확실하게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물론 그걸 입으로 내뱉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올가의 눈빛에서는 간절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올가의 이런 눈빛은..지하 감옥에서 나보고 같이 도망치자고 했을 때 이후로 처음인가.‘
지금이라도 도망치자고, 살아서 도망친다면 동료들 모두가 나를 도울 거라는 올가의 말에. 그때의 나는..
“─나는 도망칠 수 없어. 미안해 올가.”
단호하게 그럴 수 없다고 말하던 그때처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어째서 도망치지 않는 건가요. 아르틴?”
어느새 울먹이는 올가의 목소리가 내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때도 올가는 창살을 붙잡고 울었었지.
“그때도, 지금도. 왜 매번 아르틴이 고통을 겪는 선택지만 하냐고요! 그런 건...! 바보 같잖아요..”
올가는 내 옷을 움켜쥐고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누군가 본다면 자신도 모르게 그 눈물을 닦아주고 싶을 정도로 애절하고 비통하게.
하지만 나는 내 선택을 바꿀 수 없었다.
“...나를 사랑해주는 모두를 버리고 도망칠 수는 없어. 아니, 모두를 데리고 간다고 해도. 도망칠 수는 없어.”
“...왜죠? 어차피, 어차피 용사는 카이엔인데..! 당신은 용사도 뭣도 아닌..평범한 사람 이잖아요!”
그 말이 맞다. 나는, 아르틴 루드비히는 1학기를 넘기지 못하고 죽는 조연에 불과한 존재다.
그리고 나는, 현실의 양희민은 이 세계를 좋아하던 단 1명의 독자일 뿐이다. 어쩌다 강제로 이 세계에 빙의한 사람일 뿐.
그러니 내게 이 세계를 지키라고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말했잖아? 이건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네, 또 몇 번이나 죽어야 할지 모르는 일이에요. 그러니, 아르틴이 할 필요는..”
“그런 힘든 일을, 파트너에게 혼자 맡길 수는 없잖아.”
카이엔, 그 망할 게이 녀석. 그 거지 같은 주인공 녀석에게 좋은 감정이라고는 별로 남아있지도 않았다.
매번 내 연애 사업을 방해해오는 녀석, 쓸 데도 없는 고구마 이벤트를 주워오는 녀석, 내가 무슨 부탁을 해도 알겠다고 말하며 도와주던 답답한 녀석.
“...그 고독한 녀석에게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손을 내민 건, 바로 나였어.”
녀석과의 첫 만남은 지극히 이해타산적인 접근이었다.
1회차의 세계가 멸망한 후, 나는 이 세계를 지킬 수 있는 카이엔 녀석에게 다가갔다.
처음의 이유는 단순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녀석에게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해놓고, 세계를 구한다는 고통스럽고 힘든 일을 친구에게 전부 맡기는 건, 너무 비겁하잖아.”
나는 알고 있다. 유일하게 친구라고 알고 있던 이에게 이용당하다 배신당하고 버려지는 그 감정을.
“..그래서는, 너를 성녀로만 보던 다른 사람들과 내가 다를 게 뭐가 있겠어?”
“...!”
그래, 나는 내가 생각해도 좀 고지식한 편이다.
3회차 때 나를 구하러 왔던 올가와 같이 도망치지 않았던 이유도 내가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고지식했으니까.
──20살도 안 된 소녀가, 연애편지를 쓰는 것은 절대 죄가 될 수 없다. 그런데도 그것을 나쁘다고 말하며 타락이라고 주장하는 종교재판소의 놈들이, 너무나도 역겨워 나는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 남았다. 올가 또한 너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종교재판소 놈들에게, 그리고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으니까.
결국 녀석들은 내게서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화형시키기는 했지만──
나는 그 때의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가 당하기 싫은 짓을 카이엔 녀석에게 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현실의 양희민은 스스로를 혐오하고 깎아내렸으며 끝없이 부정했다. 그 결과 내게는 친구도 연인도 가족도 없었다. 오로지 5000자의 소설만이 내 삶의 낙이 되어줬지.
나는, 여기서 만큼은 그렇게 살 수 없었다.
“난 도망치지 않을 거야 올가. 당당히 마왕을 토벌하고, 내 여인들과 친구들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꼭 만들겠어.”
...그리고 앞서 한 맹세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번 회차에는 꼭 카이엔 녀석에게 한 방 먹여주겠다고.
‘시골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면, 녀석을 한 방 때려 줄 기회는 영영 오지 않겠지.’
친구를 배신하는 것과 친구새끼가 혐오스러운 짓을 하니 한 방 먹여주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건 친구니까 오히려 해줘야 하는 일이지.
“...그렇군요. 아르틴은, 서방님은 역시 강한 사람이군요. 저 같은 여자는...닿지 못할 정도로.”
뚝.
손등 위로 뜨거운 액체가 떨어져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내 이야기를 들은 올가는 소리 없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울고 있었다.
힐끔, 내 시야의 한켠에 아직 남아있던 상태창이 눈에 들어왔다.
‘올가의 부탁을 거절하고 그녀의 사랑을 거부하세요. 라.’
나는 올가의 부탁을 거절했다. 그럼에도 퀘스트 완료가 뜨지 않는 것은 그녀의 사랑을 완전히 거부하라는 상태창의 소리 없는 강요겠지.
“올가.”
나는 천천히 올가를 불렀지만, 올가는 흐느끼느라 내 말을 듣지 못한 것인지 대답하지 않았다.
“올가. 고개를 들어줘.”
“...미안해요, 제가 너무 이기적이었죠? 금방, 금방 눈물을 그칠 테..”
다시 한 번 부르자, 올가는 손끝으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자꾸 뭐가 그리도 미안한 것일까. 자꾸만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는 올가의 입술이 나는 너무도 괘씸하게 느껴졌다.
“...흐읍?!”
그래서 나는 그 괘씸한 입술을 혼내주기 위해 입술을 맞췄다.
“으읍..읍...!”
내 돌발 행동에 올가는 놀란 듯 무어라 말하려고 했으나, 나는 올가의 목을 끌어안고 입맞춤을 이어나갔다.
올가의 손이 가볍게 내 가슴을 톡톡 두드렸으나, 날 밀쳐낼 정도로 강하지는 않았다.
버둥거리던 올가의 움직임은 점점 소극적으로 변하더니, 이내 천천히 눈을 감고 내 입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띠링! 띠링! 띠링!
상태창은 지금 뭐하는 짓이냐는 듯 시야를 가리며 계속해서 떠올랐고, 퀘스트 실패시 강제 회귀라는 항목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상태창이 귀찮아 눈을 감고 입맞춤을 이어나갔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상태창의 알림음도 들리지 않게 되자, 방안에는 나와 올가의 숨소리와 입을 맞추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쪼옥. 그 고요함이 마음에 들어 만족한 내가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자, 올가는 새빨개진 얼굴로 눈도 뜨지 못하고 내 옷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우으으...”
분한 건지 기쁜 건지 모를 목소리로 부르르 떠는 그 모습은, 원작에서 보던 철의 여인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역시, 내 앞에서 입맞춤을 나눈 여인은, 역시 위대한 성녀가 아니라 단순히 사랑에 빠진 소녀인 거다.
“..제 첫 키스였어요 서방님.”
“알아.”
“..서방님이 제 첫사랑이라고요.”
“그것도 알아.”
“...서방님은 바보에요. 욕심 많은 바보.”
“그건 아주 잘 알지.”
올가는 빨개진 얼굴을 숨기려는 듯,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애교를 부리듯이 나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특히 마지막의 바보라는 말에는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강제 회귀라.’
곧 있으면 퀘스트 실패 알림창이 뜰 것이다.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고통스럽게 죽을까? 아니면 눈을 감았다 뜨면 아카데미의 첫 날로 돌아갈까?
어느 쪽이든, 기억의 삭제에 특전의 삭제까지, 나는 이 결정에 후회할 지도 모른다.
나를 처음 보는 것처럼 인사하는 아그네스나 바이올렛, 고백한 적 없다는 듯 반갑슴다! 라고 외치는 샤오메이를 보면 울컥해서 난 몰래 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 좆까라 해, 상태창도, 원작의 전개도, 시스템도.’
현실의 양희민으로 살면서 나는 사회에 굴복했다. 나 같은 고아에게 차별과 폭언 같은 것들은 당연한 일이었고, 나 하나만 참으면 모든 것이 조용히 흘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르틴으로 살면서, 몇 번이고 저 건방진 렉스턴의 폭거도 참거나 피했다.
원작의 전개를 최대한 지키고자 나 혼자 죽어라고 구른 적도 있었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부조리를 막을지언정 끊어내진 못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결심했잖아. 이제부터는 그렇게 살지 않기로.’
더 이상 폭거와 부조리에 굴복하지 않기로 나는 각오하고 맹세했다.
사랑하는 이들, 좋아하는 친구들과 처음부터 다시 관계를 쌓는 것은, 분명 내게는 죽을 만큼 무섭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내가 죽음보다 더욱 두려워하는 것은.. 무기력한 태도로 거대한 의지에 순응하고, 잃는 것이 두려워 눈앞의 부조리에 굴복하는 것이다.
현실의 양희민은 그렇게 살았지만, 지금의 나는─
─절대 다시는 그런 것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친구들과 추억을 쌓아갈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전부 다시 내게 반하도록 만들 자신도 있다.
어렵고 죽을 만치 힘들겠지만... 불가능 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올가, 너는 성녀가 아니어도 좋아. 여신의 대리인 같은 거창한 칭호 따위는 없어도 돼.”
나는 올가의 가녀린 어깨를 내 팔로 감싸 안았다. 특히나 여리여리한 그녀의 몸은, 아직 근육질이 되기 전인 내 몸에도 한번에 포옥 안길 정도로 가녀린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르틴은 아그네스 황녀님과 연인 관계잖아요? 분명 아그네스님은 절 좋아하지 않을 텐데..”
“괜찮아, 그냥 한번 혼나고 말지. 넌 그런 걱정 하지 말고 그냥 나를 따라오면 돼.”
나는 내 품에 안겨서 중얼거리는 올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천장을 바라봤다.
상태창을 내리는 존재가 누구 인지는 모르나, 아마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겠지.
‘나는 내 연인도 친구도 버리지 않아, 그리고 너희의 좆같은 강압적인 명령도 받아들이지 않을 거고.’
나는 올가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쭉 천장을 향해 뻗어──
──보이지 않는 존재를 향해, 이 세계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나는 더 이상 당하고 굴복하지 않아. 나는 겁쟁이 양희민이 아니니까.’
상태창, 네가 이걸 빌미로 무슨 고난과 시련을 내려도 나는 상관없다.
나는 내게 좆같이 구는 존재들을 모두 박살내는──
──블러드 펀치니까.
‘마왕이든 시스템이든 다 덤비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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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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