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 올가 비르투스 #04
* * *
아.. 머리가 어지럽다.
소주 3병을 들이 붓고 혼자 집에서 넷플릭스 보다 자던 크리스마스의 기억이 떠오르는 두통이 느껴졌다.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머리가 자주 어지러운 건지 모르겠다. 무슨 병이라도 있나?
“방은 왜 이렇게 어두워..? 카이엔? 샤오메이?”
눈을 떠보니 처음 보는 낯선 침실이었다. 내가 잠든 곳이 어디였더라? 교단의 숙소? 실버 기숙사? 브론즈 기숙사? 떠올리려 보려고 했지만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도 은은한 촛불의 불빛만 보이는 걸로 봐서는 내 침실인가...?
─꾸득.
“..어라? 뭐야 이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한 나는, 내 손목이 무언가에 의해 묶여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을 인지하고 다시 내 몸을 살펴보니, 내 사지는 부드러운 고급 천으로 침대에 묶여 큰 대大자로 묶여있는 상태였다.
시발 이게 뭐야?
“뭐, 뭐야 이거. 꿈 인가? 여긴 어디야?!”
몽마의 습격인가? 아니면 이단의 납치인가? 그것도 아니면 나는 사실 권능 도둑에게 납치된 직후 정신을 잃었던 걸까?
생각하기도 싫은 좆같은 상상들이 내 머릿속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침착하자, 마지막으로 가졌던 기억이..”
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 시키고, 잠들기 직전 마지막으로 무슨 일을 했었는지 떠올렸다.
“난 도망치지 않을 거야 올가. 당당히 마왕을 토벌하고, 내 여인들과 친구들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꼭 만들겠어.”
...그래, 올가 앞에서 그렇게 목소리에 힘주고 말하고, 올가와 키스를 나눴고...
‘상태창, 상태창에 퀘스트가 취소되고 보상이 지급 됐지.’
안내문도 뭔가 구구절절이 적혀있었다. 오류로 인해서 잘못된 퀘스트가 내려졌고, 보상을 지급한다는 내용이었지.
..상태창도 오류가 날 수 있나?
‘그래, 상태창을 가만히 읽다가, 갑자기 목 뒤로 따끔한 느낌이 나더니 정신을 잃었어.’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더욱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올가와 단 둘이 있는 상황에서, 도대체, 누가, 어째서 자신을 납치한단 말인가!
‘설마 나와 울고 웃으면서 사랑을 공유하고, 서로 연인이 되기로 약속한 올가가 나를 마취시키고 납치해서 침대에 꽁꽁 묶었다고?’
역시 내가 상상하고도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상냥하고 자애로운 올가가 뭔가 아쉬워서, 사랑을 받아 준 나를 강제로 납치한단 말인가? 그런 상상은 머릿속에서 당장 지워버리기로 했다.
─벌컥!
“어머, 일어나셨네요,..서.방.님♡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둠이 짙어서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와 말투는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오, 올가?”
애미 시발, 이 전개가 맞아? 정말로 올가가 나를 납치 했다고?
허나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탐정 소설에서 말했듯이, 모든 가능성이 사라지고 남은 딱 한가지의 가능성을 우리는 진실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내 눈앞에 남은 가능성은 단 하나, 올가가 이단에 매수되거나 세뇌되어 자신도 모르게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 분명했다.
“올가,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거 당장 풀...오우...”
나는 이단에게 세뇌 당했을 올가를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해서 목소리에 최대한 힘을 주고 외치다가 그만 말을 멈추고 말았다.
“후후, 역시 서방님은 이런 걸 좋아하는군요?”
내 기억 속의 올가는, 언제나 교단의 상징인 순백의 수녀복을 입은 아름답고 순결한 여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올가는, 내 기억 속의 올가랑은 전혀 다른 복장이었다.
마치 현실의 성인용품점에서나 팔법한, 몸매가 전부 드러나다 못해 가슴도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검은 란제리에, 빵빵한 허벅지를 어필하는 가터벨트까지.
거기에 아래쪽을 가린 팬티는 천이 너무 얇아서 엉덩이는 그대로 드러나고, 핑크빛 음부도 집중하면 살짝 보일 정도였다.
“어때요? 남자는커녕 여자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속옷 인데..?”
“오, 올가..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올가는 그런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마치 패션쇼의 속옷 모델처럼 자신의 몸매를 과시하듯 살랑이는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거, 검은색 란제리가 유행인가?’
아그네스도 그렇고, 다들 어디서 저런 검은색 란제리를 챙겨 입고 오는지 모르겠지만, 올가가 입은 검은색 란제리는 배덕감이 최고조로 느껴졌다.
특히 머리의 베일은 벗지 않은 것이, 성녀인 그녀가 타락한 느낌을 실감나게 체감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었다.
아니 시발, 이게 아니지.
“올가? 진정하고, 너는 지금 세뇌 당한거야. 교단 내에 있는 검은 태양 교단이라는 이단 녀석들이..!”
“검은 태양? 아..서방님을 불태운 녀석들 말인가요?”
내 만류에도, 올가는 천천히 내 침대위로 걸어 올라와, 내 몸 위에 천천히 걸터앉았다.
얇은 이불 너머로 느껴지는 올가의 살결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말은..이불 아래 내 몸이 알몸 차림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녀석들이 있기는 했었죠... 후후, 하지만 지금은 관계없어요. 서방님♡”
“관계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올가? 이게 다 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올가의 눈빛이 너무 익숙했다.
샤오메이가, 알‘미라즈가 보여줬던 그 눈빛, 먹이를 노리는 그 강렬한 포식자의 눈빛이 올가의 눈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이건 꿈이야, 내가 올가에게 나쁜 마음을 꿔서 꾸는 꿈...!”
내 기억 속의 올가는 이럴 리가 없었다.
바이올렛처럼 청초하고, 상냥하고, 감성적이고, 사소한 기쁨에도 행복한 미소를 짓던 순수한 아이였는데..!
“저도, 이럴 생각은 없었어요 서방님, 정말로. 만약 서방님이 거절했다고 해도 그냥 보내줄 생각이었답니다.”
올가는 내 배위에 부드러운 엉덩이로 걸터앉아, 내 가슴 근육에 손가락을 그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시온이나 어울릴 법한, 비릿한 미소에 나는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서방님이 저를 사랑해준다고 하셨을 때..저도, 욕심이 나기 시작했거든요.”
“..욕심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올가?”
“간단한 소리에요~제가 무슨 짓을 해도..제가 무슨 수를 써도, 서방님에게는 이제 아그네스 그 망할 여자가 1순위잖아요?”
아그네스보고 망할 여자라니? 올가가 욕을 한다고? 나는 도저히 믿기 힘든 현실에 눈을 꾹 감았다.
‘이건 악몽이야, 이건 말도 안 되는 악몽이야!’
“..후후, 서방님이 충격이 크셨나봐요? 그야, 착한 소녀 올가만 보다가..이런 모습을 보면, 놀라긴 하시겠죠.”
쪽. 부드러운 촉감이 입술에 느껴졌다.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올가는 가볍게 입술만을 맞추고 떼어내더니, 내 입술의 촉감에 흥분한 듯 몸을 부르르 떨며 황홀경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으으..하지만 서방님이 말했잖아요? 착한 아이로 남을 필요 없다고.. 나쁜 올가로 있어도 괜찮다고 말해주셨잖아요?”
내가 그랬나? 그랬던가? 언제 그랬지? 아니 그보다, 이 모습이 진짜 올가였다고?
“그, 그럼 여태까지 내가 본 네 모습은..?”
“어머, 적어도 진심이었어요? 서방님 앞에서 만큼은 착하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으니, 그 마음이 만든 제 모습도 모두 진실 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죠.”
톡 톡, 이불위로 내 가슴을 두드린 올가는 자신의 상체를 내 근육을 손끝으로 훑으며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응, 이번에는 그 년이 선을 넘었어요. 아그네스 그 망할 년이, 제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연애편지를 보란 듯이 써서 보냈잖아요?”
“오, 올가, 눈이 무서워. 초점이 점점 흐려지고 있잖아? 일단 진정하자?”
올가랑 성관게를 맺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지금 올가의 상태가 마치 폭주하던 샤오메이를 보는 것 같이 위태로운 상태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올가를 달래려는 시도는 먹히지 않았는지, 올가는 여전히 흥분한 표정으로 침대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 그게 뭐야 올가? 설마, 나를 독점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서 죽이려는..?!”
“그럴 리가, 제가 어떻게 서방님을 고통스럽게 하겠어요? 그런 못돼 쳐먹은 짓을 할 정도로 나쁜 여자는 아니랍니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나쁘고 퇴폐적으로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올가는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주사 바늘을 꺼내더니, 자신의 팔에 주입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팔? 올가가 그걸 왜 주사해?
“그, 그 약물 뭐야? 왜 갑자기 너한테 주사해? 올가?”
“후후, 걱정도 참 많으시길, 안심해요. 마약같은 위험한 약물은 아니니까요.”
다, 다행이다. 마약은 아니구나. 묘하게 풀린 눈동자를 보고 설마 마약인가 걱정했지.
“이건 그냥 단순히 오늘을 위해 준비한 배란제인걸요. 서방님도 참!”
“그렇구나..배란제? 무슨 배란제?”
“무슨 배란제라니..당연히, 서방님의 아이를 임신하기 위한 배란제 아니겠어요..♡”
올가는 부끄러운 것을 묻는 다는 듯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지만, 나는 현기증이 오기 시작했다.
임신이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저도 알아요. 네. 그 망할 암캐들 사이에서 서방님을 독점하는 것은 무리라는 사실을요. 그렇다고 서방님을 납치하고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오...올가..?”
“그래서, 생각했어요. 처음 사랑을 고백했다고 정실 자리를 차지한 그 망할 여자에게 한방 먹일 방법을. 후후, 원래는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책임지게 하려고 최후의 수단으로 준비했지만요.”
현기증과 두통이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암캐들? 독점? 납치? 임신? 배란제?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
‘설마 올가가 나한테 임신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단 말야..?’
..물론 내 성격상, 내 아이를 임신한 여자를 절대 버릴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 착하고 순진무구한 올가가 그런 짓을 생각해 내다니..?
“서방님의 첫 아이를 임신하는 건 바로 저에요. 그렇게 되면 그 암캐들이 받을 사랑은, 전부 서방님과 제 아이에게 쏠리겠죠? 물론 제가 받을 사랑도 줄어들겠지만..후후, 제까짓 게 아무리 정실을 주장하면 뭐하겠어요?”
“올가, 이건 아니야, 우린 서로 순애 사랑을..”
“아무리 황녀라고 해도, 성녀를 임신시킨 여신의 반려자를 정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거죠. 제가 정실이 되고, 아그네스 그 망할 년은..첩은 좀 불쌍하고 서방님도 싫어할 테니, 처로는 받아 주도록 할까요?”
틀렸다. 올가는 이미 내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이미 올가의 눈에서는 시온에게서 보이던 광기가 번뜩이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신경 쓰지 않겠지..!
“자, 한 5번 정도 사정을 받아들이고 나면 포박을 풀어드릴게요. 그때는, 네. 서방님이 말씀하신 순애의 아이 만들기를 잔뜩 즐겨요♡”
“나, 나는 마왕을 해치워야 해 올가, 육아에 들일 시간은..!”
그래도 내가 끝까지 저항하자, 올가는 비릿하게 웃으며 내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풍만하고 자애로운 성녀의 가슴이 내 가슴팍에 눌리며, 향수를 뿌린 건지 검은 장미향이 코를 부드럽게 찔렀다.
“육아는 걱정 말아요, 교단에 입이 무거운 시녀와 유모들이 아주 많거든요. 그래도 아이 이름은 직접 지어주셔야 해요?”
아. 이건 글렀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할까?’
말을 최대한 하면서 손과 발에 묶인 천을 풀려고 했지만, 뭔가 특수한 아티팩트나 성물인지 팔과 다리에 힘은 들어가지 않았다.
거기에 애석하게도 내 마음과는 다르게, 리틀 아르틴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드는지 기운을 뽐내며 우람한 자태를 이불에 거대한 24인용 텐트를 치며 드러내고 있었다.
“자 봐요, 서방님도 싫지만은 않은 것 같네요?”
애써 모른 척 하는 나와 달리, 올가는 내 리틀 아르틴의 반응에 만족한 듯 웃으며, 천천히 내 이불을 들춰내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아빠가 될 시간이에요, 서방님♡”
아빠라니, 내가 아빠가 된다니? 일부러 연인들하고 피임하려고 피임 마법도 공부했는데, 이렇게 아빠가 된다니!
아직 아빠가 될 수는 없었다. 아니, 언젠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누가, 누가 도와줘..!!”
나는 겁탈을 당하는 성인 만화의 히로인처럼, 눈을 꼭 감고 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후후, 그렇게 튕겨도 도와줄 사람은 없답니다? 지하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고, 카이엔도 토마스 사제님이 돌보고 있을 테니까요.”
그런 내 외침마저 생각했다는 듯, 올가는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며 내 골반까지 내려간 이불을 확 들췄다.
틀렸다. 이제는 올가를 임신시킬 수밖에 없어..!
“지랄은 거기까지야! 올가 비르투스!”
그때, 갑자기 방안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이 목소리는? 누구죠!? 감히 누가 저를 보고 지랄이라는 속된 표현을!”
“누구긴, 서방님 지키러 온 마누라지!”
그때 올가의 등 뒤편에서 보라색 빛이 번쩍이더니, 내 몸 위에 올라탄 올가를 향해 당당하게 외치며 위풍당당하게 팔짱을 낀 포즈를 취했다.
“...바, 바이올렛?”
그 모습의 정체는, 평소보다 망토가 좀 더 크고 넓게 펄럭이는 마녀 복장을 하고 나타난 바이올렛이었다.
“바이올렛...! 당신은 또 나를 방해하는 군요..!!”
쿠르릉!!
그때 건물이 흔들리며 굉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연히 지진이 일어난 건가 싶었지만, 올가의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모습을 봐서는 지진을 일으킨 것은 올가인 듯 했다.
‘..여, 역시 꿈이 아닐까?’
알몸의 나를 두고 기싸움을 하는 올가와 바이올렛이라는 비현실적인 광경을 보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순간이 꿈이길 바라며, 속으로 제발 꿈이면 깨기를 간절히 기도했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