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 마녀 & 사역마
* * *
바이올렛은 모두에게 친절하고 상냥한 편이다.
어린 시절 외로움을 많이 타기는 했지만 주변에 좋은 마녀들과 가족들이 있었고, 타고난 천성 탓에 누구를 진심으로 미워하거나 싫어해 본적도 없었다.
아무리 누군가와 싸우거나 다퉈도, 일주일도 지나기 전에 화해를 하는 것이 당연한, 그런 여자였다.
하지만, 올가 비르투스 그녀만큼은 달랐다. 그녀와 다정하게 커피를 마시며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물론, 자신과 올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대부분은 올가에게서 비롯된 것이긴 했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올가가 묘하게 자신을 미워하고 질투하고 있다는 것은 바이올렛 본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감정은 일방적이었다.
올가가 아니더라도 바이올렛을 질투하는 여인들은 많았고, 올가랑 굳이 친해져야 할 이유도 없기에 바이올렛은 그녀의 부정적인 감정을 굳이 해소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방적인 관계는 어느 날 갑자기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아르틴 루드비히, 바이올렛이 좋아하는 그 남자에 올가 비르투스가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바이올렛도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과 비슷한 척 연기를 하지만, 실제로는 속이 검다 못해 짓궂기까지 한 저 여인을 아르틴이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이올렛의 생각과는 다르게, 올가 비르투스는 서서히 아르틴의 옆자리를 꿰차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편지를 보내고, 가까이 있을 때는 성녀라는 위치로 교묘하게 카이엔과 아르틴을 자신의 곁에 두며..바이올렛이 아르틴의 연인이 되지 못하게 방해했다.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바이올렛은 진심으로 그녀를 경쟁자로 여기며, 아르틴을 쟁취하기 위해 수면 아래에서 치열하게 경쟁했다.
비극적이게도, 그 경쟁에 승리자는 없었다.
아르틴은 죽음을 맞이했고, 올가는 비통에 빠져 폐인이 되었으며, 바이올렛은 복수를 위해 자신을 불태우며 인류의 멸망을 가속시켰다.
──그리고 마왕이 깨어나며 세계에 종말을 고하는 그 순간, 복수를 끝내고 정신을 차린 바이올렛은 허무감에 들었다.
자신이 바란 것은 이런 엔딩이 아니었으니까. 차라리 올가가 아르틴과 결혼 했다면, 슬퍼서 엉엉 울었겠지만 아르틴 만큼은 행복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올가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 괘씸하기는 했지만, 아르틴이 죽을 때 자신이 흘릴 눈물조차 대신 흘리며 폐인이 된 그녀를 나무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 눈을 감으며 바이올렛은 생각했다. 만약 다시 한 번 기회가 있다면, 그 때는 정말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할 텐데.
자신이 조금만 양보했더라면, 아르틴이 죽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데.
자신이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구하고자 했다면, 아르틴이 죽지 않았을 텐데.
자신이 조금만 더 능력이 있었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로 남았을 텐데.
그러나 슬프게도, 사후 세계가 있는 이 세계에서도 해피엔딩은 맞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아르틴의 영혼은 지옥에서도 천국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죽어서라도 아르틴을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뼈저리게 슬펐다.
..바이올렛의 마지막은, 후회와 절망과 슬픔으로 마무리되었다.
***
그리고 5회차의 세계를 누군가 봤다면, 분명히 이렇게 평했을 것이다.
‘근데 시발 이게 되네?‘
그렇다. 여신의 기적인지 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바이올렛은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다.
물론 전생의 죽기 직전의 기억 탓에 자신감을 잃고 방황하기도 했으나, 아르틴의 격려와 구원으로 바이올렛은 적절한 자신감도 얻었다.
그래서 바이올렛은 욕심을 내기로 했다. 아그네스가 타인의 시간을 빌려 자신의 시간을 늘리는 것을 보고, 작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후후, 개인과외의 마지막 날. 다른 애들한테 시간을 빌려서 아르틴과 하루 종일 데이트 하는 거야. 그리고..’
바이올렛은 특별한 날을 위해 아껴온, 자신의 처녀성을 아르틴을 위한 선물로 주기로 결심했다. 다른 여인들과는 다르게, 기념할만한 날에 단 둘이 서로를 사랑하며 나누는 첫날 밤.
계획은 완벽했다. 다른 여인들은 제 나름대로 숨기려고 했지만 바이올렛에 대한 측은지심을 감추지 못했고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지도 못했다. 아르틴도 거절하지 않았으니, 이제 일요일만 찾아오면 된다.
‘으음..저번에 헤카테 언니랑 메데이아 언니가 보내준 속옷이 과감하긴 한데...’
그래, 개인 과외가 진행되던 중 세 여인이 모인 그 날에도 바이올렛은 수다를 떨면서 동시에 자신의 데이트에 대한 계획에 몰두하고 있었다.
...올가의 편지를 받기 전까지는.
*
‘다른 여자는 몰라도..올가를 함부로 하렘에 들이면 안 돼.’
다른 여인들이 두고 보며 조심하자고 헤어졌을 때, 바이올렛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녀의 본성을 겪은 건 3회차에서도 오직 자신뿐 이었으니까.
자신의 경고로 그녀가 위험하다는 사실은 다들 인지하고 있었으나, 올가라는 여자가 얼마나 독하고 계획적인지는 체감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올가라면 분명..우리의 뒷조사를 끝낸 후 일거야. 승산이 확실하니까 저런 도전장을 보내 온 거지.”
무슨 계획일까? 아르틴을 북부 교단으로 납치? 아니면 아르틴과 하렘의 문란한 성생활을 고발하고 교정의 명목으로 잡을지도 모른다.
뭐가 되었든 간에, 올가가 무슨 흉계를 꾸며도 자신은 대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아르틴, 데이트는 다음에 하고, 오늘은 같이 책을 볼까?”
“응? 괜찮겟어 바이올렛?”
“응..물론이지, 아르틴이 이번 주는 무척 피곤했으니까. 나랑 같이 있으면서 피로를 풀면 좋겠어!”
우선 가장 먼저 한 일은 데이트를 취소하고 순결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네? 저 보고 스승님의 동향을 살피고 지켜봐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응, 부탁할게 알‘미라즈. 아르틴에게 꼭 필요한 일이거든..”
“아니 뭐, 사역마니까 그 정도는 해드릴 수 있습니다. 맡겨만 두세요!”
한 동안 공부와 성적을 핑계로 거리를 두고, 알‘미라즈를 시켜 대리로 감시하며 자신은 순박한 바이올렛 퍼플크로우를 최대한 연기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여태껏 하는 그대로 연기하면 됐으니까.
낚시와 비슷하지만, 다른 것은 자신은 떡밥을 뿌릴 필요도 없이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바, 바이올렛 양! 큰일 났습니다! 스, 스승님이! 올가라는 성녀한테!”
...이미 아르틴이라는 거대한 미끼가 눈앞에 아른 거리고 있었고, 성녀는 확실하게 물었다.
“침착하고, 자세히 말해볼래 알‘미라즈?”
*
메피스토의 명을 받은 알‘미라즈는 당연스럽게도 바이올렛을 가장 먼저 찾아갔다.
앞서 이런 일을 예견한 것 같은 바이올렛이라면 무언가 대책을 세우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흐음..메피스토가 그랬다고? 성녀가 매일 밤 몰래 아르틴과 몰래 만난다고?”
“네, 맞습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스승님을 망칠 거라면서..!”
바이올렛은 그날 아침조회 시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올가의 계획의 큰 그림을 조금이나마 유추할 수 있었다.
처녀를 외치는 사제, 카이엔과 아르틴을 불러서 면담을 나누고, 아무도 모르게 아르틴과 접촉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자세한 그림은 알 수 없었지만, 별 문제는 없었다. 중요한 곳에서 도발을 걸면, 그 여인은 분명 무너지게 되어있다.
‘...그 날의 그 표정, 기억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올가도 꽤나 안달이 난 상태일 테니까.’
감히 아르틴을 독점하겠다고 나선 건방진 성녀에게 한방 먹일 방법들이, 맹렬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패도 갖춰져 있었고, 상대는 분명 방심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올가가 분명 장미관 사건을 아르틴에게 언급했다고 했지?”
“네, 메피스토님에게 똑똑히 들었습니다. 장미관 사건으로 아르틴을 떠올렸다고.”
이건 거짓말이다. 그녀가 편지를 보내온 시간을 생각 한다면, 계획은 그 전부터 진행됐을 터.
아마 권능 도둑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마왕군의 간자가 아카데미에 침입한 일은 북부 교단에서도 신경 쓰일 화제고, 분명히 성녀인 올가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장미관의 보고서를 봤다면...’
자신이 무력하고 자신감 없이 이끌리던 장미관 사건의 보고서를 보고, 올가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도리어 아르틴이 약혼자를 선언한 아그네스가 올가에게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여겨질 것이 분명했다.
“...알‘미라즈, 내게 계획이 있거든?”
“계획? 무, 무슨 계획 말씀이십니까?”
“알‘미라즈는 그냥 내가 말하는 대로 몇 가지 일을 해주면 돼.”
상관없다. 자신이 약하게 보일수록, 올가는 방심할 것이고..가장 맛있는 부분을 자신이 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바이올렛은 알‘미라즈에게 어떤 상황에 대비해 몇 가지 일을 수행해줄 것을 부탁해 놨다. 하렘을 뒤에서 조종하여 아르틴을 구해내기 위한 일들을.
**
[그러니까, 정말로 저것이 반푼이 마녀가 떠올린 계책이란 말이냐?]
“..네 맞습니다. 메피스토님.”
바이올렛을 아르틴과 올가가 있는 곳으로 보낸 직후, 감시 마법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알‘미라즈와 메피스토는 조금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로? 반푼이 마녀가 맞단 말이냐?]
“예, 제가 바이올렛 양의 지시대로 행동하면서 작전을 실행했으니까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알‘미라즈는 소름이 돋았다.
이번 작전을 수행하면서 순진하고 상냥하게만 보였던 바이올렛의 진면목을 곁에서 똑똑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올렛은 아르틴이 교단에 입성했을 때, 당황하거나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대신 유니코르와 샤오메이, 아그네스가 가져온 정보를 토대로 자신의 계획을 완성시켰다.
아그네스는 알‘미라즈가 바이올렛의 검수를 받아 전달해준 정보를 듣고, 조금 안달이 난 상태였다. 성녀가 언제 아르틴을 덮치거나 납치할지 모른다고 과장을 섞어놨기 때문이다.
“그럼 면회는 바이올렛 혼자만 가능할 텐데... 바이올렛 혼자서 성녀 올가를 견제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저, 황녀님? 제게 좋은 생각이 있는데..”
“어머, 뭔가요 알‘미라즈?”
“직접 만나는 게 안 된다면, 편지는 어떨까요?”
바이올렛 양이 말한 대로, 하렘의 일원들이 연애편지를 쓰도록 유도했다.
“제 지옥 마법과 시르카의 마족의 마법을 더하면, 교단의 결계에 틈을 만들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누군가 시선을 끌어줘야 하는데, 바이올렛 양 혼자서 가능 할까요?”
“그렇네요... 조력자가 필요 할 테니, 제가 한번 찾아볼게요.”
바이올렛 양이 말한 대로, 자신과 바이올렛 양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 줄 조언자를 구해달라고 요청도 했다.
실제로, 올가는 처음에는 바이올렛은 견제했지만, 이야기가 흐를수록 말없이 결계의 틈을 만드는 자신과 아그네스 황녀의 친구인 마리안느 왕녀를 더욱 신경쓰기 시작했다.
“말한 대로 스승님과 연결 시켜서 마법을 설치해 놨습니다! 이제 적당한 때에 숙소에 침투하기만 하면..”
“어머, 무슨 적절한 때를 기다려? 미리 준비하고 있어도 돼. 알‘미라즈.”
“..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마법의 설치가 끝난 직후, 면회 장에서 나온 바이올렛과 알‘미라즈는 본인들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바이올렛은 태평하게 자신의 속옷을 고르고 있었다.
“올가의 표정 못 봤어? 생각보다 충동적인 구석이 있으니까..아마 늦어도 오늘 밤에는 아르틴에게 손을 뻗으려고 할 걸?”
“..네? 그 반응을 설마 유도한 겁니까? 그럼 지금 당장 스승님을 구해야 하지 않나요?!”
알‘미라즈는 벌벌 떨면서 면회장을 나가던 올가를 떠올리며 아직도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바이올렛은 그 말에 미소만 지으며, 새하얀 레이스 속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저기, 전에 내가 왜 아직 처녀를 유지한다고 말했는지 기억나. 알‘미라즈?”
“네? 그건..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참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맞아. 그리고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 될 것 같아.”
바이올렛은 속옷 위에 노출이 심한 고딕 드레스를 챙겨 입으며,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봤다.
심지어 어떤 식으로 등장하면 좋을지 포즈까지 취하며, 느긋한 모습을 보여줬다.
“경쟁자의 첫 경험을 볼품없는 절정으로 장식한 후, 그 경쟁자 앞에서 로맨틱하고 다정한 아르틴과의 첫경험..어떨 것 같아?”
“....네? 그게 무슨?”
“엄청 분한 표정을 지을 것 같지 않아? 그래도 독점을 하려고 했으니 그 정도 벌은 받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바이올렛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방 안에 있던 수정구를 건드리자, 마침 아르틴은 정신을 잃고 올가의 품에 안겨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바이올렛은 다리를 꼬며 앉아, 차분하게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도 아르틴을 배려해서 도전장까지 보냈으니, 아르틴이 원한다면 하렘에는 껴줘야지. 안 그래? 만약 정말 몰래 아르틴을 납치하다가 걸렸으면 좀 더 큰 벌을 주려고 했겠지만 말야.”
“...다, 당신..”
──그때 바이올렛이 짓던 표정을 떠올리며, 다시 수정구 속의 바이올렛을 보자 알‘미라즈는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다.
“...저, 저는 잘 모르겠지만, 저 여자는 반푼이가 아닙니다. 그냥 못되게 굴 필요가 없으니 상냥한 사람으로 사는 거죠.”
[...]
메피스토는 오랜 지옥의 격언이 떠올랐다.
‘가장 최초의 악마도, 타락하기 전에는 천국의 대천사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