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몽중진담
* * *
‘아 씨발, 뒤통수 아파.‘
머리가 진짜 깨질 듯이 아프다.
눈을 뜬 나는 머리가 또 몽롱하고 뒤통수가 욱씬거리는 게 느껴졌다.
문제는 이 느낌만 벌써 몇 번째인지 기억도 안 나는데, 도대체 오늘 무슨 날이지? 나처럼 올곧게 살아온 남자가 어디 있다고 하루에 몇 번 씩 정신을 잃는단 말인가.
‘회귀한 건 아닌가..? 아니, 마지막의 그건 뭐였지?’
뒤통수를 무언가로 얻어맞은 기억은 확실히 난다. 암살자에게 납치라도 된 걸까?
설마 또 납치된 후 고문 풀세트가 준비되어있다면, 그 전에 자살 하는 걸 심각하게 고려해볼만하다.
“이, 일어났어? 아르틴?”
뭐야, 내 품안에서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꼭 어디서 들어본 것만 같은...
‘응? 바이올렛은 지하 숙소에서 자고 있을 텐데?’
내가 천천히 고개를 내리자, 내 품안에는..꽤 늘씬한 미인이 꼭 안겨서 내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 이름이 분명..카르엔..?”
“아르틴도 참 짓궂어, 갑자기 모르는 척 장난치는 거야?”
내가 더듬더듬 이름을 떠올리자, 얼굴이 고조된 카르엔은 무슨 장난을 치냐며 볼을 빵빵하게 불렸다.
‘..뭐지? 또 꿈인가? 머리가 아프긴 한데..’
이게 만약 꿈이라면 저번보다 현실감이 훨씬 넘치는 꿈이다. 저번처럼 몽롱한 기운도 별로 없는데..뒤통수를 얻어맞고 잠에 들어서 그런가?
‘..꿈이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카이엔을 닮은 이 여자애가 눈앞에 있는 이상 꿈일 수밖에 없다. 설마 카이엔이 TS마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면..?
‘..설마?’
나는 흠칫 놀라 카르엔을 바라봤지만, 카르엔은 내 시선이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듯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르틴?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짓고?”
“...아니, 이거 정말 꿈 맞아? 너 정말 카르엔이야?”
“..그게 무슨 장난이야! 재미없어 아르틴~ 그보다..”
내가 의심을 시작하자, 카르엔은 고혹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내 어깨를 팔로 끌어안으려고 했다.
“...아, 아르틴?”
“이상해, 뭔가. 머리도 아픈데, 이건 꿈이 아닌 것 같아..”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자주 정신을 잃는 거야 올가가 손을 썼다지만, 숙소에 들어와서 잠이나 자려고 했는데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근데 눈을 떠보니 카르엔이 있어?
“마치, 이 숙소에서 기다리던 누군가가 나를 습격한 건데..지금 시점에서 카이엔 녀석을 습격해서 제압하거나 암살 가능한 암살자가 왔다고? 말도 안 돼.”
나는 합리적으로 결과를 도출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실력의 암살자가 나를 노렸다는 것 보다 더욱 합리적인 결론을.
“카이엔 네가 TS마법으로 나를 유혹하려..크헥!?”
*
“...아르틴도 참, 이상할 떄는 눈치가 빠르단 말야?”
또 다시 뒤통수를 얻어맞아 정신을 잃은 아르틴을 내려다보며 카르엔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작 눈치채줬으면 하는 부분은 모르면서, 왜 이상한 곳으로는 유난히 감이 좋은 걸까. 이것도 회귀의 영향인가?
“상태창을 보니 아직 들키진 않았어, 괜찮아. 다시 시작 하면 돼. 이번에는 좀 더 진하게 중독 시켜야겠지만..”
카르엔은 아직 반 정도 남은 몽유향을 바라본 후, 아르틴의 코에 가져다 댄 후 직접 흡입시키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만났는지는 몰라도 다른 암캐들의 향기를 풀풀 풍기며 들어온 아르틴이 괘씸하긴 하였지만, 그것을 오히려 자신의 명분으로 삼았다.
더러워진 아르틴의 육체를 자신의 온기로 깨끗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용사와 용사의 동반자의 관계가 아닐까? 동반자라는 단어가 배우자 같은 느낌도 나고 말이다.
“절대, 내 개인의 욕심이 아니야 아르틴. 나는..내가 카이엔인걸 들키면 용사가 아니게 되는 걸? 그러니까...”
너와 내가 세상을 구하는 거야. 카르엔은 중얼거리며 아르틴을 다시 침대에 반듯이 눕힌 후 품안에 파고들어 안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어떤 설정으로 아르틴을 잠에서 깨워야 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면서 말이다.
*
“...으윽, 머리가..어지러워..”
뭐지, 방금 뭔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여기는..어디지..?”
흐릿한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자, 비단결 같은 검은 머리가 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건..올가인가?
“어머, 벌써 깬 거야 아르틴? 좀 더 자지.”
“너...는..카르엔..?”
“후후, 아직 잠이 덜 깼나 보네? 가슴 만질래?”
“무슨..네가 왜..가슴...?”
뭔가 이상했다. 왜 이런 일이 하루에 몇 번씩 반복되는 기분일까?
하지만, 카르엔이 양팔을 벌리고 실크 속옷에 가려진 풍만한 가슴을 보여주자, 그런 의혹은 어지러운 통증과 같이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가슴은 못 참지.
“푸우..우움.”
“꺄앗..아르틴도 참, 어디 가지 않으니까 어리광 부려도 좋아~”
나는 강렬한 두통을 잊기 위해 카르엔의 가슴골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 카르엔은 분명 꿈이었지. 그러니까 이것도 꿈 일거야. 부드럽다.
“후후후. 그래, 잔뜩 응석 부려도 좋아. 헤헤..”
“...? 아, 알았어...”
내가 그렇게 가슴을 만끽하고 있으니 카르엔이 조금 기분 나쁘게 웃기 시작했지만, 시온도 내가 야한 짓을 하면 저런 반응이니 그거려니 했다.
말캉말캉 부드러운 촉감, 거기에 은은하게 풍기는 꽃향기 같은 체취에 한손으로도 쥐어지지 않을 커다란 크기, 가슴 베개로 최고인 가슴이 있는데 뭐가 문제겠는가.
“저기..아르틴?”
“응? 왜 불러..?”
그렇게 카르엔의 가슴 베개를 하고 있으니 고통도 사라져서 꾸벅꾸벅 다시 졸기 시작했을 때, 녀석이 뭔가 말을 더듬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아르틴은..날 어떻게 생각해?”
*
카르엔의 예상대로, 다시 의심하기 시작한 아르틴에게 가슴베개를 해주자 아르틴은 의심을 포기하고 가슴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물론 상태창이 경고하듯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만두라는 메시지는 나오지 않았다. 그야 자신이 가슴베개를 해주지 않으면 아르틴이 다시 의심할 테니 상태창에게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어리광 부리는 아르틴...아기 같아..’
품에 안겨서 얼굴을 부비적 거리는 아르틴이라니, 카이엔일 때는 상상도 못할 호사에 카르엔은 본인도 모르게 음습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만약 카이엔이라면 이 정도의 음습함을 드러낼 일은 없을 것이다. 본 모습인 카르엔으로 돌아왔기에 표출하는 이 음습함이야 말로 카르엔의 진짜 모습중 하나인 것이다.
‘...아르틴은 여자면 다 좋은 걸까? 여자를 마구 늘려대는 모습을 보면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동시에 불안감은 있었다. 아르틴에게 자신은 처음 보는 여자일 텐데, 뭘 알고서 이렇게 가슴골에 얼굴을 묻고 행복해 한단 말인가.
‘...정신이 몽롱한 상태니까, 뭘 물어봐도 솔직하게 대답해 주지 않을까?’
아기 같은 아르틴의 모습을 보자, 카르엔은 조금 용기가 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민감한 질문으로 의심하기 시작해도 이 상태라면 키, 키스를 진하게 해주면 분명 의심을 버릴 것 같았으니까.
“저, 저기...아르틴?”
“응? 왜 불러..?”
아르틴이 순수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카르엔은 작은 죄책감이 생겼다. 심신미약인 상대에게 이런 짓을 해도 되는 걸까?
“...아르틴은..날 어떻게 생각해?”
하지만 21년 만에 잡은 기회, 카르엔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나 카르엔과 카이엔의 차이를 알고 의심하진 않을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너는..음습하지, 응. 변태 같아. 맨날 나를 보면서 입맛을 다시잖아.”
“...내, 내가 언제?! 나는 그런 적 없어!”
대답은 사실이었다. 카이엔인 시절에도 카르엔은 아르틴을 몇 번이고 자신의 연애대상으로 상상하며, 오래된 짝사랑 특유의 음습한 시선을 보낸 적이 있다.
다만 카르엔 본인은 그것을 애정 어린 진실된 눈빛 따위로 치부하며 진심이 닿기를 바랬을 뿐이다.
“아니, 그랬어.. 아그네스를 훔쳐보는 리가르도 새끼 같이 나를 봤어.”
허나 아르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손을 카르엔의 커다란 가슴에 얹고는 조물거리며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바보 같고.. 멍청하고.. 답답하고.. 시키는 건 절대로 안하고.. 짜증나고.. 맨날 분위기 좋으면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방해하러 오고..”
“..그, 그만 말해도 좋아 아르틴, 너무 그렇게 적나라하게 말할 건...”
아르틴의 입에서 자신의 험담이 나올 때 마다 카르엔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눈물이 핑 돌기 시작했다.
늘 아무리 방해해도 파트너라고 말하며 웃어줬기에 조금의 호감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르틴의 마음 속에서 카이엔이란 존재는 그저 용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린 건가?
“..그, 그럼 왜 용사의 대행자가 되기로 결심한 거야? 아르틴도, 내가 용사니까 붙어 있는 거야?”
울컥하는 마음에 카르엔은 아르틴을 찌릿 노려보며 따지듯 물었다. 혼자 있던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서, 파트너라고 불러준 아르틴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가슴 아팠다.
“그런 멍청이가, 나 같아서 내버려 둘 수가 없는 걸...”
“..뭐어?”
그런데, 아르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 뜻밖의 대답이었다.
“맨날 남들 도와주느라 호구 잡히고.. 그래도 묵묵하게 남들을 도와주고.. 자신에게 이익도 하나 없는데 남을 도와주는 그 모습이 좋았단 말야.”
“...”
“나는 그래서.. 네가 해피엔딩을 맞이했으면 좋겠어.. 너는 바보 같이 착한 녀석이니까..”
바보 같이 착하다고 말할 때 쯤의 아르틴의 목소리는, 완전히 잠에 잠긴 상태였다. 아니면 몽유향에 너무 깊게 취한 부작용일지도 몰랐다.
“아르틴, 너는 그럼 나를 진심으로 파트너로 생각해 준거야?”
“..그래도 가끔 정말 피터질 때 까지 때리고 싶긴 한데에.. 하암.. 그래도 혼자 짊어지긴 너무 힘든 일이니까..”
꾸벅, 꾸벅, 눈을 껌뻑이며 하품을 하는 모습을 보니, 카르엔은 본래 가지고 있던 남들보다 민감한 양심이 쿡쿡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르틴은 이렇게 자신을 생각해주는데, 자신이란 사람은..아르틴의 뒤통수를 무려 3번이나 기절할 정도로 내려찍지 않았는가. 심지어 그것은 아르틴의 몸에서 풍기는 다른 암캐 냄새에 대한 화풀이기도 했다.
“..아르틴, 첫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진심으로 말한게 역시 맞았어.”
“후움...”
카르엔은 반쯤 감긴 아르틴의 눈을 감겨준 후, 천천히 등을 토닥이며 자신의 품안에서 잠들 수 있게 해줬다. 새근거리는 아르틴의 숨소리가 들리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카이엔, 나와 같이 마왕을 해치우자. 너도, 나도, 이 좆같은 세계에서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어.”
문뜩, 카이엔은 자신과 처음 만난 직후 아르틴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상태창 때문에 정체를 숨기고 남자로 살며, 혹시나 누가 여성인 것을 알아챌까봐 누구와도 깊게 친해지지 못하고 고독하게 살던 삶.
그런 카르엔의 삶에 대뜸 침범한 것도 모자라, 자신을 멋대로 파트너라 부르며 따라다니기 시작한 아르틴이 그 당시에는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골탕을 먹여도, 거리를 벌려도, 너는 언제나 내 곁에 다가와줬지.’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이 아르틴이라는 남자를 진심으로 친구로 여기게 된 것은?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것은? 이제는 너무 머나먼 기억일 지도 모른다.
허나 확실한 것은 있다.
“내 해피엔딩에는, 꼭 네가 곁에 남아줬으면 좋겠어. 아르틴...”
그 날, 용사의 책무를 끝내는 그 날이 온 다면, 그때는 너에게 내 모습을 밝히고 싶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화를 낼지도 모르고, 허탈해 할지도 모르지. 허나 확실한 것은, 너는 절대 나를 미워하진 않을 거야.
‘나보고 바보 같다고 하면서, 나보다도 늘 바보같이 다른 사람을 챙기는 건, 바로 너잖아?’
어쩌면 그래서 너와 내가 어울릴 지도 몰라, 카르엔은 그렇게 생각하며 잠든 아르틴의 손을 꼭 잡고 눈을 감았다.
제대로 된 야한 짓도, 하다못해 입맞춤도 하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카르엔에게는 아르틴의 진심을 들을 수 있던 이 시간이 21년 중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이 되었으니까.
“잘자, 아르틴.그리고..사랑해.”
카르엔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늘 밤은 행복한 꿈을 꿀 수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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