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158화 (158/266)

〈 158화 〉 세니아 리브스 #03

* * *

자신이 아르틴이 된 후, 양희민은 거의 1달 가까이 자신의 방에 틀어박혔다.

낯선 몸, 낯선 세계, 낯선 사람들. 소설 속 주인공들이 겪을 때는 우습거나 부럽기만 하던 상황이, 현실이 되자 우습지도 부럽지도 않았다.

멸망이 확정된 세계에 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가 되었다. 자신은 양희민인데, 주변 사람들은 자신을 아르틴이라고 부른다.

혼자서 죽어가듯 사회의 구석 언저리 반지하방에서 살아가던 자신에게, 룸메이트가 생겼고 형식적으로 나마 귀족가문이라는 이름표가 생겼다.

하지만 그 상황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5년 후 이 세계는 멸망하고, 자신은 사람은커녕 동물도 죽여본 적 없고 제대로 된 운동도 해본 적 없는 사회의 쓰레기 같은 존재였으니까.

‘설정과 전개를 떠올려야해, 나 같은 새끼가 이런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방법뿐이야..!’

1달 간 방에 틀어박힌 양희민은 샤오메이에게 어색하게 부탁하여 3권의 빈 공책을 구했다. 그리고 그 안에 자신이 기억하는 소설의 모든 내용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강박증처럼 자신이 떠오르는 모든 내용을 적은 양희민은, 그 노트를 보고 결심했다. 자신은 이 세계를 구하는 게 무리라고.

‘한 손으로 사람을 죽이는 아인종에, 드래곤, 리치에 타락한 검성까지..나 같은 녀석은 1초도 버티지 못할 거야..!’

객관적인 자기 판단이 끝나자 행동은 빠를 수밖에 없었다.

3권의 책을 가득 채운 다음 날 양희민은 자퇴를 하기 위해 담임선생님인 세니아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뭐, 상담 자체는 얼마 안 걸리겠지, 선생님도 나 같은 학생을 받기 싫었을 테니까.’

아무런 수업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먼저 말을 거는 조르바와 샤오메이를 제외한 다른 학생들과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룸메이트조차도 하루에 5마디 이상 나눈 적은 없었으니,

공기와 같은 존재, 그게 지금의 희민을 가리키기에 딱 좋은 말이니 선생님도 내심 사라지는 것을 좋아하리라.

그렇게 생각했을 터였지만...

“선생님은 무척 기뻐! 매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서 무슨 일인가 걱정했는데, 아르틴이 드디어 선생님에게 마음을 열어준 거잖니?”

단 둘이 앉은 상담실에서, 세니아가 밝은 표정으로 조잘거리자 아르틴은 조금 당황했다.

자신이 만난 대부분의 선생들은 단 둘이 만나면, 귀찮다는 티를 팍팍 풍기며 관심도 주지 않았으니까.

‘..아니지, 자퇴를 예상해서 이렇게 기뻐 할 지도 모르고.’

허나 냉소적인 성격은 또 다른 납득이 가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과연, 자신이 선생님을 찾아올 일은 자퇴밖에 없을 테니 이렇게 기뻐하는 건가.

“..저 자퇴하려고 합니다. 루드비히 영지로 돌아가려고요.”

양희민은 비릿하게 웃으며 운을 띄웠다. 루드비히 영지로 가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카데미에서 벌어질 사고들에 휘말리기 싫었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에 있는 세니아 리브스도 1달 후면 죽는 NPC가 아닌가? 자신은 그런 일에 휘말리기 싫었다. 바퀴벌레처럼 살아도 끝까지 살아남고 싶었으니까.

“가, 갑자기? 무슨 일 있니? 어디 아파? 아니면 학교 진도를 못 다라 가겠니?”

“아뇨..그냥, 아카데미는 제 체질에 안 맞는 것 같아서요..”

상투적으로 하는 가식적인 놀람에, 양희민은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을 얼마나 봤다고 저렇게 걱정하는 척을 하는 걸까?

‘자, 빨리 서류 내밀고 사인한 후 서로 헤어지자. 1달 짜리 NPC야.’

애초에 1달 후면 죽을 NPC를 설득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까웠다.

아마 몇 번 밀당을 주고받으면 졌다는 듯이 자퇴 서류를 내밀고는 사인하고 끝나겠지.

‘현실에서는 차마 못 써봤는데,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자퇴해보네.’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하던 아르틴에게, 낯선 감촉이 느껴졌다.

“혹시 누가 괴롭히니? 입학 첫 날부터 렉스턴이 널 괴롭혔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사실인거야?”

“..서, 선생님?”

“아니면 한 달간 적응하느라 공부를 못 따라가서 그래? 그런 거라면 선생님이 도와줄게! 그러니까 자퇴는 다시 생각해보면 안 될까?”

자신의 손을 양손으로 꼭 잡고 애달프게 바라보는 세니아를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아주 변변찮았다.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아, 아뇨, 공부도 공부지만 검술 무술이니 그런 건 못할 것 같아서..”

“그럼 마법을 하면 되지! 혹시 싸우기 싫은 거니? 그럼 연금술이나 천문학, 행정 같은 길도 있어! 진로 상담부터 하는 게 좋을까?”

“아, 아뇨. 그냥 자퇴하고 싶을 뿐인데요.”

“그럼 신학은 어떠니? 아니면 선생님처럼 교사가 될 수도 있어!”

“아뇨, 자퇴를..”

아무리 자퇴의 의사를 내비춰도, 열의를 가지고 진심으로 자신을 설득하려고 하는 세니아를 보며 양희민은 점점 그녀의 페이스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처음 만나는 유형의 사람, 처음 듣는 말과 처음 겪는 상황에서, 양희민은 역설적으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저, 그. 다, 다음에 올게요!”

결국 첫 날의 상담이 1시간 넘게 길어지자, 양희민은 상담실 문을 박차고 도망쳤다.

방으로 돌아온 희민은 어떻게 세니아 선생님을 설득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결국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 날, 희민은 아침 조회에 나가는 대신 새벽 배를 타고 아카데미를 빠져나왔다.

‘...그래, 이거면 된 거야. NPC들에게 심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지.’

멀어지는 아카데미에서 도망치듯 나온 기억, 그것이 1회차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세니아에 대한 기억이었다.

*

1회차의 지옥이 끝난 후, 아카데미에 돌아온 희민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이 진짜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이 노력하지 않으면 멸망이 반복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민은 노력을 배우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을 찾아가 닥치는 대로 배우고, 자신이 찾을 수 있는 기연을 최대한 찾으며 죽지 않기 위해 몸부림 쳤다.

허나, 수많은 교수들과 선생님들을 찾아간 희민이 유일하게 찾아가지 않은 인물이 있었다.

“안녕 아르틴! 오늘도 날씨가 참..”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써야 할 과제가 있어서요.”

“아르틴! 오늘 점심은 맛있게 먹었..”

“죄송해요! 지금 바로 검술 훈련을 하러 가야 해서요.”

세니아 선생님은 이번 회차에도 끊임없이 아르틴에게 다가왔지만, 희민은 세니아 선생님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었다.

‘...중간고사 때 죽을 사람이야. 아직 내 힘으로는 선생님을 지켜낼 수가 없어.’

1회차 당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겪었던 희민에게는 나쁜 버릇이 들었다. 전개상 죽을 사람들에 대해 친해지기를 거부하고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친해진 사람이 죽는 경험을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느껴본 아르틴에게, 그 충격의 고통은 너무나도 무거웠다.

1회차의 후반부로 갈수록 희민의 정신은 피폐하고 메말라갔으니, 그런 경험을 두 번 다시 하기는 싫었던 것이다.

‘..2주, 2주밖에 남지 않았어.’

그렇지만 시간이 다가올수록, 희민의 머릿속에는 중간고사에 벌어질 끔찍한 비극으로 가득차고 있었다.

자신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민 선생님, 얼굴을 익힌 학생들, 그런 이들이 사고로 전부 죽는 끔찍한 비극. 희민은 체념하고자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

아르틴은 스스로 세니아 선생님을 구해보려고도 했다고 가볍게 말했지만, 3번의 기회에서 아르틴은 전력을 다해 세니아 선생님의 목숨을 구하려고 노력했다.

5년 마다 만나는 자신이 죽게 만든 인물에 대한 죄책감을 이겨내기 위해서, 뼈를 깎는 노력과 끊임없는 관심을 줘가며 세니아 선생님의 삶을 구해보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4회차에서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세니아 선생님이 죽고 말았을 때, 절망에 빠졌던 아르틴은 가장 최악의 선택을 했다.

‘..나는 세니아 선생님과 친해진 적도 없어, 구하기도 힘들었고, 어쩔 수 없잖아, 너무 빨리 죽어버리고 마는 걸.’

자신의 정신에서 세니아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조금씩 도려내기 시작했다. 구하고자 했던 노력도, 감사한 마음도, 그렇지 않고는 못 버틸 정도로 힘들었으니까.

그리 생각하며 다짐했다. 다음 회차에는 세니아 선생님을 챙기지 않겠다고.

‘..어차피 죽을 거..어쩔 수 없잖아?’

그러나 아르틴이 몰랐던 것은, 4년 후 벌어진 5번째 회귀에서 조차 세니아 선생님과 엮이리라는 점이었다.

­“부, 붉은 머리 소년! 꼼짝 말고 손들어! 저항하지 말고 얌전히 투항하는 거야!”­

언제나처럼 세니아 선생님은, 아르틴이 원하지 않음에도 자신에게 다가와 인생의 한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버렸다. 내가 지우고 도려내고 죽였던, 떠올리기 싫었던 과거들이.

“...그거 알아요? 선생님은 정말 언제나 변함없이 좋은 사람이라는 거?”

선생님은 몇 번을 만나도 좋은 사람이었다. 마치 새하얀 눈밭과도 같아, 나는 그 눈밭을 밞는 것을 무의식중에 거부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습게도 선생님은 언제나 내게 다가왔고, 늘 말도 안 되는 해프닝이 벌어져 나와 선생님은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선생님의 죽음을 운명이라 표현한 것처럼, 이것도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응, 나도 아르틴 좋아해! 나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잖아?”

“..좋은 사람이라고 했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는 안 했는데.”

“헉! 아르틴은 선생님을 싫어하는 거니..?”

그 말에 나는 조금 고민에 빠졌다.

내가 단순히 선생님의 육체에 이끌려 선생님을 받아들이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우문이네, 병신 같은 생각이야.’

그럴 리가 없지. 만약 세니아 선생님이 정말 싫었다면 이번 회차에서 선생님과의 관계를 잘라냈을 테니까.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면, 그렇게 선생님을 구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지도 않았을 테고.

그냥 좋은 사람으로 생각했다면, 이렇게 무의식까지 찾아와서 그 마음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을 거다.

“..그 대답은 현실에서 할게요. 선생님.”

하지만 선생님의 무의식에게 할 대답은 아니었다.

포옹을 풀자 아쉬워하는 무의식 속의 선생님을 뒤로 한 채, 나는 손을 흔들며 무의식 밖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시르카. 현실에 가면 몸을 숨겨 줄래?”

“후후, 멋지게 고백이라도 하시려고요 주인님?”

“..시끄러워, 마음을 이야기 하는데 누가 옆에 있으면 부끄럽잖아.”

“네에~오늘치 보답은 나중에 제대로 받을 거예요?”

어찌 보면 시르카 덕인가, 덕분에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으니 보답을 해야겠지.

“중간고사가 끝나면 하루 종일 데이트 해줄게, 그러면 괜찮지?”

“후후♡ 몽마를 반하게 한 댓가는 톡톡히 치르셔야 할 거라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르카의 볼에 가볍게 입맞춤을 해줬다.

시르카는 내 기습 키스를 예상 못했는지 얼굴을 붉게 물들였는데,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가자, 현실로.”

*

“...?”

“...??”

이게 시발 무슨 일이지?

“선생님? 지금 뭐하시는..”

“저..그, 그게...내,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알지 아르틴..?”

내가 눈을 뜨자 본 풍경은, 침대에 누워있던 내 위에 주섬주섬 올라타던 세니아 선생님의 모습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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