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 마리안느는 웃고 있다
* * *
파란 머리의 천사, 사르디엘을 찾는 퀘스트를 받은 나와 카이엔은 교단을 나왔다.
‘올가를 못 보고 가는 건 아쉽네..’
시간이 있었다면 올가를 보고 갔겠지만, 천마와 약속한 훈련 시간이 이제 10분도 남지 않은 상황. 만약 수업에 늦으면 또 어떤 진상 짓을 할지 상상도 하기 싫어서 움직이기로 했다.
“저.. 파트너? 이제 천마님한테 수업 받으러 가는 거야?”
“그래야지, 양갱 때문에 기세등등하게 기다리고 있겠지만..그래도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그럼,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응? 왜? 네가 굳이 천마 밑에서 고생 할 필요가 있어?”
갑작스러운 카이엔의 말에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떼쟁이 밑에서 교육을 받고 싶다니?
카이엔은 그런 나를 보고 뭔가 변명하듯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도 1학년 시험은 그냥 봐도 충분하고..클레어도 요즘은 조르바 펠카스 따라다니니까, 내가 굳이 챙겨줄 필요도 없으니까. 그, 그리고 장미관에서도 내가 좀 더 강했으면 네가 위험할 일도 없었고.”
“..그냥 나랑 같이 있고 싶다. 이런 건 아니지 파트너?”
움찔! 카이엔의 몸이 크게 떨렸다. 맞네 이새끼.
“파, 파트너잖아 우리는? 어떤 힘든 훈련도 같이 해나가는 그런 거니까! 응?”
어쩐지 기특한 소리를 한다고 했더니, 저 방황하는 눈동자를 봐서는 아마 나랑 살을 부대끼며 훈련을 하고 싶다는 사심이 90% 이상일게 분명하다.
“됐어, 그냥 클레어랑 같이 수업 들으러 가. 난 아직도 내 침대에 숨어든 널 생각하면 명치에 주먹 꽂고 싶거든?”
“하, 하지만..오늘 클레어랑 조르바가 기초 교양으로 귀족의 춤과 예절 들으러 간다고 했단 말야.”
“...”
“내가 다른 사람하고 정답게 춤추는 게 상상이 돼 아르틴..?”
그렇게 말하니 또 그럴 듯 했다. 원작에서는 분명 히로인과 멋지게 춤추면서 약혼자에게서 구해주는 장면이 있었던 것 같지만..
‘애가..그 주인공하고 같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소설 속에서 보여주던 멋진 모습의 대부분을, 내가 아는 카이엔이 한다고 생각하면 도저히 상상이 되질 않았다. 클레어라도 있었으면 괜찮았겠지만, 클레어는 지금 조르바랑..
“..휴, 또 이상한 눈빛을 하거나 이상하게 몸 밀착시키면 가만 안 둔다?”
“응! 알았어! 약속할 게 파트너!”
결국 나는 마음이 물러지고 말았다. 카이엔의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인 클레어를 뺏은 것도 어찌보면 내 탓이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카이엔, 너 정말 나랑 클레어 빼고는 친구 없어?”
분명 원작에서는 제국의 재상 가문 출신의 안경 낀 히로인이나, 대수림에서 찾아온 유일한 순혈 엘프 선배, 아니면 대마법사의 제자가 될 동기 같이 친한 사람이 조금 있긴 했는데..
회귀 내내 이 새끼가 날 스토킹 하는 건 봤어도 다른 여자애들이랑 친하게 지내는 건 본적이 없네.
“..그게 무슨 소리야 파트너? 파트너가 있는 데 친구가 왜 필요해?”
이런 씨발, 스토킹 하느라 동료랑 친구 이벤트를 전부 포기하고 다니는 건가? 그럼 친구 없는 건 내 탓이 아닌 거 아닌가?
“카이엔.”
“응?”
“3m 정도 떨어져서 걷자.”
“...왜?!”
“그냥 기분이 별로 안 좋아졌어.”
나는 더 이상 길게 대화하기 싫어서, 천마가 기다리고 있을 야외 훈련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가, 같이 가 파트너!”
싫어 새끼야. 저리 꺼져. 라는 말이 목 까지 나왔는데 입 밖으로는 차마 나오질 않더라.
*
그래도 달린 덕에 우리는 간신히 시간에 맞춰서 야외 훈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할 수 있긴 했는데...
“...파트너? 저거 혹시, 고문도구야?”
“아니 설마..훈련을 하는 데 고문 도구를 왜 가져다 놓겠어?”
“그럼 훈련장에 불상은 왜 있는 건데..?”
“...”
훈련장에 도착한 나는 카이엔의 질문에 섣불리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실제로 내가 봐도 이건 훈련장의 꼬라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달리기 코스에 뿌려진 각종 장애물과, 전신을 구속할 것 같은 구속복에, 이유는 모르겠지만 철냄비에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기름에 거대한 돌로 만든 불상까지.
이건 아무리 봐도 양갱을 먹은 나를 고문하다 죽여버리겠다는 천마의 의지가 뚜렷하게 느껴졌다.
“하! 하! 하! 드디어 나타났구나, 감히 스승의 유일한 낙을 탐낸 이 망할 제자 녀석아!”
그 순간, 하늘에서 천마가 흩날리는 벚꽃 잎을 바람과 함께 두르며 허공을 밞고 사뿐히 내 앞에 착지했다.
아마 공화연방에 전해지는 속세를 초월한 도사의 이미지를 연출하려고 허공답보까지 한 것 같지만...
양갱에 대한 원한 탓인지 이글거리는 눈빛과 풍겨오는 살기 비슷한 분노에 존경심은 쥐뿔도 생기지 않는다.
“천마님, 이게 다 뭡니까?”
“이게 다 뭐냐고? 네가 좀 독한 수련을 좋아한다고 들어서 아주 특별한 훈련을 준비했다만?”
“저건 고문기구 아닙니까?”
“아니, 그냥 조금 많이 아픈 수련 도구일 뿐이다만?”
내가 가시 박힌 구속구를 가리키자 천마는 뻔뻔한 표정으로 수련도구라고 주장하는 게 꿀밤이 마려웠다. 아쉬운 점은 유니코르랑 다르게 꿀밤을 못 때린다는 점일까.
“그나저나, 네 친구인 용사는 여기 왜 왔느냐?”
“아, 이 녀석도 천마님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습니다. 그렇지 카이엔?”
“...그렇습니다.”
이 새끼, 훈련장 꼬라지를 보고 순간 대답을 고민했다!
“호오..그래? 그렇단 말이지?”
“..뭡니까 그 웃음은?”
천마는 그런 카이엔을 보고 기분 나쁜 비릿한 미소를 짓더니, 나와 카이엔을 번갈아가며 바라보기 시작했다.
“원래는 도혈지옥 수련 코스를 잔뜩 준비했는데,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도혈지옥? 그거 수련 맞습니까?”
“수련 맞다! 절정의 고수들을 이걸로 굴려주면 일주일도 안 지나서 큰 깨달음을 얻는 아주 획기적인 수련 방법이거늘!”
“그래서 끓는 기름은 도대체 어디다 쓰는 데요?”
내가 지금도 펄펄 끊는 기름을 손으로 가리키자, 천마는 슬쩍 내 눈을 피했다. 시발 저거 어디다 쓰는 건데?
“그, 그런 사소한 것은 됐다, 이거나 받거라.”
“..이건 또 뭡니까?”
천마가 무언가를 던져줘 낚아채 펼쳐보니, 웬 붉은 천을 던져준 것이 아닌가.
“그럼 두 사람 다, 상의를 벗고 그 붉은 천을 서로의 손목과 발목에 감도록 하거라.”
“네?”
“못 들었느냐? 상의를 벗고 붉은 천을 서로의 손과 발에 감으라고 했다만.”
이게 도대체 무슨 수련법이야, 서로 옷을 벗고 몸을 묶는 수련이라니?
하지만 단호해 보이는 천마의 말에, 일단 나와 카이엔은 주섬주섬 상의를 벗고 서로의 손목과 발목을 천 끝으로 묶어 이었다.
“어허! 내가 언제 그렇게 묶으라고 했느냐!”
“...그럼 어떻게 묶으라는 말입니까?”
“서로의 몸이 달라붙게! 꽉 묶어라!”
“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지금 스승의 말을 거부하는 것이냐? 내기의 내용 대로면, 스승이 수업 때 시키는 것은 뭐든지 한다. 였을텐데?”
큭, 내기의 조건 중 그런 좆같은 조건도 있었지.
“..일단 시키는 대로 하자 파트너.”
“..파트너라고 부르고 싶은데, 너 지금 얼굴에 홍조 올라온 거 보이거든?”
“어, 어쩔 수 없잖아? 천마님이 하라고 하시니까!”
이 노골적인 새끼는 나랑 신체접촉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건지, 붉은 천을 서로가 밀착하게 꽉 묶기 시작했다.
‘아 시발, 내가 카이엔하고 이렇게 밀착 해야해..?’
카이엔의 살결과 근육이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상태가 되자, 나는 속에서 터져 나오는 욕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어떠냐? 지금 기분이?]
“...?”
그때 내 머릿속을 울리는 여성의 목소리, 카이엔의 홍조 띈 얼굴에서 시선을 떼자 대놓고 입꼬리를 귀까지 올린 채 나를 비웃는 천마가 눈에 들어왔다.
[샤오메이에게 들었다. 네가 카이엔이라는 녀석과 그리도 사이가 안 좋다면서? 남자면서 너를 사모하는 것을 그리도 티낸다고 했던가?]
“..설마?”
[그럼...너를 좋아하는 남.자.와 오붓하게 훈련을 받을 준비는 되었느냐?]
이 년, 설마 양갱을 먹었다고 나를 카이엔을 이용해서..?
[양갱을 먹은 대가는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 증손녀 사위? 땀투성이가 되어 끈적거리는 살결의 촉감을 좋아하길 기도해주마.]
나는 그 순간, 천마가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모두가 못 말린다는 말이 왜 그런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천마라는 여자, 자신의 감정에 너무 충실한데 선까지 씨게 넘는다.
“자, 그럼 우선 가볍게 운동장을 전속력으로 100바퀴만 뛰거라! 땀으로 온몸이 잔뜩 젖을 때 까지 굴려주마!”
이..개 같은 년..! 나는 표정으로 천마에게 욕을 하면서 이를 악물고 뛰기 시작했다.
옆을 보니, 카이엔 새끼는 행복해 보이더라. 씨발.
*
다시 정정한다. 천마는 단순히 나를 게이와 노닥거리게 할 생각이 아니었다.
“허억..! 허억..!”
“조, 조금만 더 버텨봐 파트너어..!!”
“어허, 불상이 흔들리지 않느냐. 나 때는 스승님이 잠에서 깨면 대나무 봉으로 개패듯이 맞았거늘!”
처음에는 단순히 땀을 내며 불쾌함을 유발하던 훈련은, 어느새 진짜 지옥을 우리에게 맛보여주고 있었다.
지금도 나랑 카이엔은 둘이서 힘과 자세만을 이용해서 천마가 올라탄 돌불상을 들어 올린 채 견디는 훈련을 받고 있다.
“마나 쓰다 걸려도 혼날 테니, 절대 쓰면 안 된다. 신성력도 당연하고, 오로지 힘과 자세! 알겠느냐?”
“끄으으윽...!”
나는 힘을 내느라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얼마 전 잠재능력이 각성의 영역에 도달해서 겨우 버티는 거지 사람이 견딜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좆같았던 카이엔과의 합동 수련도, 지금은 카이엔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실제로 지금도 중량의 70%는 카이엔 녀석이 부담하고 있었으니까.
“흠, 5분 지났구나, 자 2시간 채웠으니 5분 쉬고 다시 시작 하겠노라!”
──콰앙! 천마가 가볍게 내려와 손끝으로 불상을 가볍게 밀자, 거대한 돌불상이 마치 깃털처럼 튕겨져 바닥에 착지했다.
덕분에 나와 카이엔은 녹초가 되어서 운동장 바닥에 쓰러지듯이 드러눕고 말았다.
“쯧쯧, 이래서 마왕은 어찌 해치우겠다는 거냐? 겨우 2시간 수련으로 이리 녹초가 되다니. 본녀는 그늘에 가서 쉬다 오마.”
“...씨발년...”
“극찬 고맙구나 제자여, 다음 수련의 난이도에 참고하마.”
나는 껄껄 웃으면서 떨어져가는 천마를 보고 이를 까득 물었다. 어지간한 힘든 수련은 익숙한 나도 이가 갈리는 수련이라니.
“카이엔..너 괜찮냐?”
“...으응..파트너..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나는 괜찮아..”
“십새끼..기특한 소리나 하고 자빠졌어..”
훈련 내내 부족한 내 몫까지 다하느라, 카이엔은 정말로 전신에서 땀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불쾌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미안한 감정까지 생긴다.
“파트너..미안한데 나 잠깐만..눈 좀 붙여도 될까..?”
“야..! 여기서 눈 붙이면 탈수로 죽어..! 정신 차려 카이엔..!”
카이엔의 힘없는 목소리에, 내가 놀라서 소리쳤지만 카이엔의 대답을 들려오지 않았다.
나라도 일어나서 도와야 하는데,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자리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도리어 내 정신도 점점 희미해져갔다.
‘아..이러다 회귀하겠네..’
이 순간이 이번 회차의 마지막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훈련하다 죽는 건 아니겠지..?
──촤악!
“푸하! 차가워!?”
“어푸..!?”
그때, 우리에게 쏟아진 차가운 물벼락에 나와 카이엔은 간신히 기절하지 않고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괜찮아 아르틴? 상태가 말이 아니네..저 할망구가 제대로 교육하는 거 맞아?”
물을 뿌려준 고마운 사람은 그것도 모자라 우리에게 차가운 물을 입가에 흘려주더니, 내게는 특별히 무릎베개까지 해주며 걱정 어린 목소리로 내 상태를 살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얼굴을 확인한 나는 굉장히 미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는데.
“..마, 마리안느 누님..?”
샤오메이나 바이올렛, 아그네스일줄 알았던 우리를 구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마리안느 누님이었다.
“왜 그래 아르틴? 물이 더 필요해?”
“아, 아니 그게 아니라..여기는 왜..?”
아니, 지금 마리안느 누님이 여기에 왜 있는 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님 설마 화장하셨어요?”
“으, 으응?! 알아봤어? 아르틴 너도 참 눈썰미 좋네!”
내 질문에, 도리어 마리안느 누님은 얼굴을 붉히며 내 반응을 살피려는 듯 나를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그, 그래서 어때? 좀 별로인가?”
“..아뇨 예쁘긴 한데..”
“예, 예뻐? 그렇지? 내가 안 꾸며서 그렇지 노력하면 아그네스에도 안 밀린다니까? 흐헷!”
...도대체 뭐지? 이 상황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