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 마리안느는 웃고 있다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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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스러운 표정을 짓는 마리안느 누님을 보며, 나는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흐헷? 지금 누님이 흐헷이라고 웃은 거야? 나한테 예쁘다고 칭찬 들었다고?’
언제나 늠름하고, 믿음직하며, 멘토가 되어줬던 마리안느 누님의 푼수 같은 웃음이라니?
상상을 해보라고 해도 이상한데, 그것을 실제로 보니 내 뇌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부하가 걸린 상태가 됐다.
“..크흠! 뭘 그런 눈으로 쳐다봐! 뭐 문제 있어?”
마리안느 누님이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리 질렀지만, 얼굴을 붉힌 시점에서 이전의 패왕과도 같던 위풍당당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뇨..문제는 없는데..누님이 여기는 무슨 일로 왔어요?”
“흥! 내 수제자이자 동생이 저 괴팍한 할망구한테 어떻게 시달릴지 걱정이 돼서 와봤지!”
마리안느 누님이 당당하게 외치며 가슴을 끌어안은 탓에, 그 커다란 가슴이 더욱 풍만하게 돋보이기 시작했지만, 내 눈에는 그 가슴이 눈에 깊게 들어오지 않았다.
‘..립스틱, 누님이 립스틱을 발랐다고? 볼에도 터치를 한 것 같은데..?’
문제는 저 화장, 옅은 화장이긴 하지만 마리안느 누님이 화장을 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했다. 3회차 당시 자신이 여왕에 즉위할 때도 화장은커녕 화려한 장식 하나 없이 즉위식에 참석한 사람이 자신을 꾸민다?
‘게다가 아까, 분명 아그네스에도 밀리지 않는 다고 했지..?’
...이쯤 되면 내가 아니라 어지간히 눈치 없는 주인공도 알아챌 수 있다. 내 주변에서 사람들이 갑자기 평상시랑 다른 행동을 내 앞에서 하면서 내 시선을 신경 쓴다?
‘마리안느 누님도 기억을 찾기 시작한 거구나..!’
이건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감을 과하게 잃었던 바이올렛이나 갑자기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던 샤오메이를 볼 때와 같은 가시감이 확실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런데 화장은 왜 했지?’
기억을 되찾는 중이거나 완전히 되찾았다면, 나랑 만나서 반가운 건 알겠지만.. 그게 화장을 할 이유가 되진 않을 텐데?
“..표정이 왜 그래? 아직도 탈수 증상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 물 더 줄까?”
생각에 빠진 내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웃 거리는 누님, 그런 누님을 보자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응, 고마워요. 누님.”
나는 누님이 내민 물별을 받는 척 손을 뻗어, 누님의 손을 내 손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야, 야! 어딜 만져 인마! 내 손이 아니라 물병을 쥐어야지! 자! 제대로 잡아!”
“..죄송해요, 머리가 어지러워서 그만.”
“그래? 상태가 심각한가 보네.. 세니아 교수님에게 말해서 에너지 드링크라도 챙겨올까?”
누님은 내 말에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을 했지만, 나는 그 순간 보고 말았다.
...마리안느 누님이 내 손에 닿는 순간 보인 그 표정은, 분명 이성을 의식하는 여자의 표정에 가까웠다.
“지금 내 제자들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앗!”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는 그 순간, 마침 천마가 달려와 모두의 시선을 뺏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라니? 내 수제자랑 용사님이 탈수로 죽지 않게 도와주고 있지, 이 망할 할망구야.”
“내 훈련에 지금 간섭하는 것이냐? 각성한 녀석들은 고작 이 정도 탈수로 죽지도 않는다! 좀 굴러야 사람이 강해지는 것을!”
“하, 나도 어지간히 독하게 수련 시키지만, 그래도 사람이 탈진 증세가 오면 정신을 차리게는 하거든! 할망구처럼 불상 위에서 무거운 엉덩이를 씰룩이며 늘어져라 자는 게 아니라!”
“뭐, 뭐? 늘어져라 자다니! 그건 내가 불상 위에서 수련을 돌봐준 것이야! 게다가 무거운 엉덩이라니! 헛소리 마라!!! 내 엉덩이는 무겁지도 펑퍼짐하지도 않아!!”
“펑퍼짐 하다는 소리는 안했는데, 좀 찔리나 보네 천마 할머니?”
두 사람의 유치한 말싸움에, 나는 시선이 힐끗 두 사람의 엉덩이를 향했다.
‘..샤오메이의 골반이 누구에게 물려받은 건지 알겠네, 하지만 누님도 지진 않는 것 같은데..’
좀 더 날렵한 샤오메이라고 평가하면 맞을 것 같은 천마의 몸매, 확실히 일반 여자보다는 큰 엉덩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골반이 큰 것은 누님도 마찬가지이나, 마리안느 누님은 늘 단련한 탓인지 탄력진 몸매가 옷 위로도 드러나 펑퍼짐하다는 표현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였다.
“이익..! 서로 내기동안 방해하지 않기로 약조를 해놓고, 지금 내 수련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더냐!”
“방해라니, 나는 그냥 휴식시간에 와서 챙겨준 것 뿐이라고? 게다가 방해라고 하면, 할망구가 오전 내내 아르틴 따라다니면서 한 게 방해 아니야?”
움찔! 천마의 몸이 크게 떨리자, 마리안느 누님은 천마를 비웃으며 삿대질까지 더해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학생회에 얼마나 연락이 왔는지 알아? 할망구한테 말도 못해서 어떻게 좀 해결해 달라고 교수님이랑 학생들이 아우성이야!”
“그, 그건..! 부족한 수업을 청강하면서 보충해줬을 뿐이노라..!”
“그래? 그렇다면 자신의 수업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누구나 와서 보충해줘도 좋다는 거겠지?”
“그게 무슨 망발이더냐! 천마의 무공을 전수하는 데 감히 누가 이래라 저래라 훈수를 한단 말인가!”
“하, 수십 년은 지난 무공을 가지고 유세 떨기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마왕도 못 해치워서 여기서 애들을 괴롭혀?”
“..마, 말 다했느냐!!”
“아직 다 안했는데? 더 하면 노인 학대라고 신고 받을 것 같긴 하지만.”
점점 격해지는 싸움에, 두 사람의 목소리에는 마나와 내공이 담기며 점점 기싸움으로 변질되어 가기 시작했다.
“..아, 아르틴? 이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닐까?”
“냅둬 카이엔, 그 동안 우리는 쉴 수 있잖아.”
“..그럴까?”
나는 두 사람을 말리려는 카이엔을 만류했다.
솔직히 천마가 한 짓을 생각하면 저런 쓴 소리도 좀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이 들기도 했고.
“감히 천마인 본녀에게 이런 망언들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
“그럼 후기지수에게 한 소리 들었다고, 일국의 왕족을 때리기라도 할 거야?”
“이익...!!!”
10분 정도 지나자, 승기는 점점 마리안느 누님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온갖 떼를 쓰며 꼬장을 부리던 천마가 마리안느 누님에게 말재간으로 이길 명분도 없기는 했지만 말이다.
“...됐다! 훈련도 증손녀사위도 다 필요 없노라! 오늘 훈련은 여기서 끝이다!”
아, 도망쳤다. 그것도 울먹이는 목소리로 빼액 사자후를 터트린 천마는 저 말을 남기고 허공답보로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흥, 나이를 먹었으면 부끄러움을 알아야지!”
그런 천마의 뒷모습을 보고, 승리를 만끽하는 표정을 짓던 누님은 내게 손가락으로 V를 활짝 웃었다.
“괜찮을까? 아무리 그래도 울릴 필요까진 있나 싶긴 한데..”
“흥, 저런 노망난 할망구는 신경 쓰지 마, 지금도 이 꼴을 만들고 그냥 도망쳤잖아?”
주변의 야외훈련장은 방금 사자후로 난장판이 된 상태였다. 당장 폭풍이 지나간 후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로 말이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랑 마리안느 누님이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는 건 천마가 손대중은 확실히 했다는 거겠지만..
“너희들은 벤치에서 쉬고 있어, 일단 불상이나 장애물 같은 건 내가 치워 둘 테니까.”
“네? 그냥 저희도 같이 치울게요.”
“방금 전까지 헥헥거리던 녀석들이 무슨! 됐고 누님만 믿고 쉬어!”
그 말과 동시에, 마리안느 누님은 우리 둘을 각각 한 손으로 번쩍 들더니 그늘에 내려준 후 천마가 망가트린 야외훈련장을 치우기 시작했다.
우리 둘이 간신히 버티던 불상을 한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니, 그래도 얼굴을 붉히던 모습과는 다르게 내가 알던 누님의 터프한 모습은 그대로 인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저, 파트너?”
“응? 왜 카이엔?”
“..천마님이 그래도 진짜 우시는 것 같던데, 나중에 한 번 찾아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
“..우리가? 왜?”
갑자기 내 옆에 앉아있던 카이엔이 고구마 무브를 타려고 하자, 나는 이해가 되질 않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누님이 열심히 말싸움해줘서 간신히 그 꼬장을 벗어 났는데, 왜 제발로 호랑이굴로 기어 들어가?
“천마님이 안 그래도 샤오메이랑도 싸운 상태잖아? 가족들도 공화연방에 계시는 데 누가 달래줄 수 있겠어?”
“...그건 솔직히 자업자득이잖아? 그냥 섬으로 돌아가면 될 텐데.”
“그리고 우리도 명색이 천마님의 제자인데, 스승님이 울면서 사라졌으면 상태는 확인해야지.”
하지만 조금 설명을 듣다보니 카이엔의 말이 이해가 되긴 했다.
“게다가 저렇게 대놓고 삐졌는데 달래주러 안 가면, 분명 뒤끝 엄청 부릴 것 같은데..안 그래?”
“...확실히. 그 말은 설득력이 충분해.”
거기에 이어진 카이엔의 말에, 나는 완전히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양갱 좀 먹었다고 증손녀사위를 동성애자 녀석과 살을 부대끼며 훈련 받게 했던 양반이, 저 정도로 크게 삐지면 어떤 짓을 할지 예측이 안 된다.
“..그러고 보니 천을 아직 안 풀었네, 끈적거리니까 빨리 풀자.”
“앗...그, 그래야지..?”
“...”
이 새끼. 아직 손과 발이 서로 묶인 상태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안 풀려고 말 안하고 있었구만.
어림도 없지, 나는 녀석이 방해하기도 전에 매듭을 푸는 마법으로 천의 양쪽 매듭을 풀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아...”
카이엔이 매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니 조금 쌤통이라는 생각도 들고.
“됐고, 씻고 나서 누님에게 감사인사 드린 후에 천마님 보러 가자. 양갱이라도 하나 사가면 화가 풀리겠지.”
“그럴까..잠깐, 뭐?”
“왜, 이 꼴로 그냥 갈거야? 땀에 흙먼지 투성이인데?”
“아, 아니야. 가자 아르틴! 아니 파트너!”
나는 비틀거리는 카이엔 녀석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줬다.
...평소라면 손도 닿기 싫지만, 훈련 내내 부족한 나 때문에 고생했으니, 조금은 모르는 척 해주기로 하고 말이다.
*
“청소 끝나셨어요 누님?”
“오! 정리라면 방금 막 끝났지, 목욕은 잘 하고 왔어? 아까보다 훨씬 낫네!”
“감사합니다. 누님 덕에 시간이 남았으니 오늘은 부족한 공부나 좀 더 하려고요.”
“..그래? 잘 됐네. 혹시 모르는 게 있으면 이 누님에게 꼭 물어보고! 이 누님이 왕년에 학년 차석까지 했던 몸이라고!”
자연스럽게 자신과의 1:1 과외를 어필하는 누님을 보며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동시에 저번에 둘이서 대련을 하다가 생겼던 일들이 머릿속으로 지나가면서,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누님의 가슴으로 향하는 것을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참아야 했다.
“모르는 게 생기면 꼭 누님에게 물어 볼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야지! 그런데..실버소드 재는 왜 저러냐?”
“...”
나는 힐끔 카이엔을 바라봤다.
“...후욱...후욱...”
방금 같이 샤워하면서 내 몸을 미친 듯이 훔쳐보던 카이엔은,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렬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마리안느 누님이 보인 반응은 카이엔 녀석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말이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그럼 이만 가볼게요.”
“아, 응, 그래! 내일은 내 수업이니까 꼭 오고! 알겠지 아르틴?”
나는 손을 열렬히 흔들며 배웅하는 누님을 뒤로한 채, 정신이 나간 카이엔을 질질 끌고 천마님 계신 곳을 향했다.
...마리안느 누님은 어떻게 할지, 천마는 어떻게 달래줘야 할지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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