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 천마와 달맞이관
* * *
샤오메이와의 즐거운 시간이 끝난 후, 나는 샤오메이에게 천마님이 사는 위치를 들을 수 있었다.
“증조모님이라면, 이유는 모르겠지만 남서쪽의 폐건물인 달맞이관을 숙소로 사용하신다고 하더라고요?
“달맞이관? 거기는 장미관처럼 버려진 건물이잖아? 천마님 성격에는 골드 클래스 기숙사에서 떵떵거리며 살 줄 알았는데?”
달맞이관, 장미관처럼 비밀결사 이벤트의 랜덤 스폰 장소 중 하나다.
아카데미에 존재하는 관리가 되지 않아 방치된 건물 중 하나고, 가끔 귀신 따위가 나오는 게 전부인 장소. 장미관과 다른 점이라면 바다가 아닌 산에 위치한 것 정도다.
‘..천마가 굳이 버려진 건물에? 그 과시욕 강한 사람이?’
하지만 요 근래 보여줬던 모습을 생각하면, 역시 왜 거기서 머무는 건지 모르겠다. 천마를 제대로 만나 본 게 애초에 이번이 처음이니까.
역시, 이 세계에는 내가 아직 모르는 기연과 이벤트가 남아있는 건가.
“그런데 증조모님이 사는 곳은 왜요? 볼 일이라도?”
“어..그냥, 숙제를 하나 내주셨는데 숙소 위치도 안 알려주시고 검사를 맡으라고 하시더라고.”
샤오메이의 질문에, 나는 적당한 이유를 둘러대며 대답했다.
방금 전까지 천마님 때문에 우울해하던 샤오메이에게 달래주러 간다고 말하기도 그렇고..천마님이 울었다는 걸 괜히 알렸다가 들키면 또 꼬투리 잡을 것 같았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 카이엔하고 숙제 검사 받기로 했거든.”
“네에...잘 다녀오세요, 오라버니♡”
쪽, 부드러운 입맞춤으로 배웅을 받으며, 나는 골드 클래스 기숙사를 빠져나왔다.
‘..시간이 좀 늦긴 했는데, 괜찮겠지?’
시간 자체는 괜찮다. 1시간이 조금 넘게 지났으니까 한 숨 자느라 몰랐다고 대충 둘러대면 그만이고.
하지만 친구도 없는 카이엔이, 내가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을 때 약속장소에 적당한 시간에 딱 맞춰 나오려고 할까?
‘..역시나.’
발걸음을 빨리 옮기자, 카이엔은 약속장소인 시계탑 근처 벤치에서 앉아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미안, 조금 눈을 붙이느라 늦었네, 오래 기다렸어?”
“흐앗! 파, 파트너 왔구나! 별로 안 기다렸으니 걱정 마!”
미안한 마음에 조금 반갑게 인사해줬더니, 카이엔은 화들짝 놀라서 얼굴을 붉혔다.
뭐지? 저 기분 나쁜 반응은? 평상시의 무표정이 아니라 정말 깜짝 놀라서 더 기분 나쁜데.
“...지금 뭐하고 있었어? 갑자기 왜 그렇게 놀라?”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천마님의 거처는 알아냈어?”
“..샤오메이에게 듣긴 했어. 산 근처에 있는 달맞이 관에 머물고 있다고 하더라.”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아마 내가 관련된 뭔가를 한 게 분명했지만, 증거가 없으니 나는 결국 화제를 전환하기로 했다.
애초에 이 녀석의 변태 같은 행동이 하루 이틀인가.
“바로 갈까, 양갱은 사놨어?”
“응, 펠카스 상단에 말하니까 최고급으로 전부 나눠 주더라. 무슨 맛을 좋아하는 지 몰라서 일단 전부 가져 왔는데..”
카이엔은은 옆에 놓여져 있던 가방에서 10가지가 넘는 종류의 양갱을 꺼내들었다.
“양갱이라는게 이렇게 종류가 많은 간식이었나..?”
단팥양갱이나 밤양갱, 고구마양갱부터 녹차양갱, 호두양갱, 감양갱..심지어 홍삼양갱이나 재료를 알기도 힘든 파란 양갱도 있었다.
“..이 파란 양갱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많으면 만족하시겠지. 출발할까?”
“응! 파트너!”
카이엔의 씩씩한 대답과 함께, 우리는 천마님이 묵고 있는 기숙사를 향해 출발했다.
“이렇게 걸으니까 꼭...피크닉 같다. 그렇지?”
...저 기분 나쁜 소리만 없었다면 더 좋았을 출발이 됐을 텐데.
“재수 없는 소리 한번만 더하면 그냥 마법으로 날아간다.”
“...미안.”
카이엔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며 조금 기분이 좋아진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기숙사를 향했다.
*
나와 카이엔은 별 일 없이 달맞이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가 진짜 달맞이관이 맞아?”
“여기 적혀있는 표지판을 보면 그런데..”
그런데, 관리가 되지 않고 방치되어 있어야 할 달맞이관의 상태가 많이 이상했다.
아니, 이상하다는 표현은 좀 틀린 표현일지도 모른다.
“..수십 년간 버려진 건물 치고는 우리가 머무는 실버 기숙사보다 훨씬 더 좋아 보이는데?”
달맞이관의 정원에는 꽃과 식물이 만개해있고, 건물의 외벽은 당장 지은 새 건물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각 방에는 마치 사람이 있는 것처럼 등불들이 켜져 있기 까지 한 모습은, 마치 지금도 운영 중인 기숙사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들어갈까?”
“그래야겠지?”
...도대체 왜? 라는 의문은 풀리지 않았지만, 적어도 여기에 천마가 머물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건물 안에서 느껴지는 절대적인 존재감, 그건 분명 천마가 지닌 강자의 격이었으니까.
─스륵.
“..와, 끼익 소리도 안나, 진짜 뭐야 이거? 새로 지은 건가?”
나랑 카이엔은 새 것 같은 철문을 열고, 왁스칠이 되어 있는 로비를 걸으며 주변을 두리번 살폈다.
“트로피랑 상장..같은 건 엄청 낡았네. 이건 여기 있던 그대로 인 것 같은데.”
“..옛날에 여기에 머물렀던 학생들의 것을 전시해 놨나봐.”
모든 게 새것 같은 달맞이관의 로비였지만, 한 쪽 벽을 채운 상장과 트로피, 그리고 학생들의 초상화들은 정작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맞은 듯 매우 허름하거나 녹슨 상태 그대로였다.
“...왜 이것만 그대로 뒀을까?”
“그야, 그것까지 건드리면 내 기억 속의 달맞이관이 아니게 되니 내버려뒀다.”
벽에 전시된 물건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우리를 향해, 천마가 자연스럽게 말을 걸며 계단을 걸으며 내려왔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아마 우리가 이 건물이 보이던 순간부터 천마는 우리가 다가오고 있던 걸 눈치 챘겠지.
“아까 울면서 달려가던 것 치고는 상태가 괜찮아 보이시네요. 게다가 그 복장은 뭐에요?”
“흥, 앉아서 운기조식을 하기 위해 편한 복장을 입었을 뿐이다. 그리고 운적은 없다!”
천마는 평상시 입는 차이나 드레스 대신 웬 트레이닝 복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이곳의 트레이닝복은 아카데미 생도복하고 비슷한 느낌의 체육복에 가깝지만.
“그나저나 여기는 무슨 일이냐? 수업 일찍 끝나서 아주 좋아 죽을 것 같더니.”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툴툴거리는 천마, 역시 예상대로 삐진 게 분명했다.
“그냥, 속상해 보이길래 제자들이 찾아왔죠.”
“흥! 내가 어린애인줄 아느냐! 그리고 운적 없다고 하지 않느냐!”
“됐고, 이거나 받으세요!”
“...그게 무엇이냐?”
계속 울지 않았다고 버럭버럭 우기는 천마를 향해, 나는 카이엔이 들고 왔던 가방을 천마에게 넘겼다.
“오늘치 양갱 못 드셔서 슬프다면서요? 기분 좀 푸시라고 가져왔죠.”
“..야, 양갱? 이게 도대체 몇 개나 되는 건지..! 게다가 이건 구하기도 힘든 최고급 양갱이 아니더냐!”
가방을 열어본 천마는 마치 아이처럼 눈이 휘동그레 지더니 기쁜 표정을 지었다.
펠카스 상단 사람들, 도대체 얼마나 좋은 양갱을 우리에게 챙겨준 거지?
‘..조르바에게 칼빵 맞는 거 귀띔 정도는 해줘야 겠네.’
아마 자기 도련님 좀 잘 챙겨달라는 말과도 같겠지. 조르바에게 친구 포인트 1점을 속으로 적립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사이 초콜릿을 받은 요정처럼 기뻐서 양갱을 세던 천마는, 우리 앞인 걸 다시 알아차렸는지 헛기침을 하며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보였다.
“흥! 나는 운적도 삐진 적도 없다만, 찾아온 성의를 봐서 차는 대접해주마, 따라 오거라.”
“..삐졌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
“조용히 하고 따라 오거라! 아니면 오늘 보충 수업이라도 듣고 싶은 게냐!”
“스승님께서 차를 대접해주신다고 하니 기쁜 마음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깍듯이 인사하며 2층으로 다시 올라가는 천마를 따라갔다. 카이엔은 그런 나를 따라 뒤에서 걷기 시작했고 말이다.
“그런데, 간이 식당은 1층 아닌가요? 왜 2층으로?”
“내가 머물고 있는 방이 2층에 있는데, 굳이 1층의 식당을 쓸 필요가 있겠느냐?”
“..여기 전체를 다 쓰시는 건 아닌가 봐요?”
“아니다. 그렇게 많은 방은 별로 필요도 없고...즐겁지도 않으니.”
...즐겁지도 않다니?
그게 무슨 의미인가 이해하기 힘들었던 나는, 2층에 들어서자마자 그 말의 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1층의 로비처럼 완전 새로 지은 것 같은 2층 복도. 허나 1층과 다른 점이 있다면..
마치 사람이 살고 있는 것처럼 꾸며져 있다는 것이었다.
복도에 걸린 방호술식은 이제 와서는 낡은 고전적인 마법 술식들로 이루어져있었고, 문 옆의 안내판에는 그 방에 사람이 머물고 있는 것처럼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여기다, 208호, 내가 머물고 있는 방이지.”
“...”
208호의 안내판에도 이름이 똑똑히 적혀있었다.
태산 도장의 린 샹페이,
그리고 마찬가지로 태산 도장의 쉔 즈웨이.
“파트너, 이건..”
“..쉿.”
나는 카이엔이 뭐라 질문할지 알 것 같았으나, 얌전히 천마를 따라 방에 들어갔다.
“자, 편한 곳에 앉아도 좋다. 곧 다과를 내올 테니.”
“아, 감사합니다. 스승님.”
천마가 차를 끓이러 방을 떠나자, 우리는 자리에 앉아 방안을 둘러봤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이 방안도 아주 생생하게 꾸며져 있었다.
중화연방의 ‘천마‘가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학생 ’린 샹페이‘가 머무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책상에 놓여진 초상화. 처음 보는 남자의 초상화였지만, 나는 그게 어떤 인물인지 맞춰야 한다면 100% 확신할 수 있었다.
“..파트너, 여기는 역시..”
“아마 네 예상이 맞을 거야. 카이엔.”
버려진 기숙사, 그리고 마치 버려지지 않은 것처럼 꾸며진 공간. 답은 누가 봐도 명료했다.
‘..천마 샹페이가 아카데미에 다녔을 때 머물던 곳이겠지.‘
그제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천마가 굳이 샤오메이와 같이 지내지 않고 이런 외진 기숙사에 혼자 지내려고 했는지.
‘...4회차 때의 나도, 마왕의 땅을 돌아다닐 때는 너무 힘드니까 기숙사 생활이 생각났었지.’
조금 이해는 됐다. 과거의 공간에서 머물면, 행복한 기억들이 떠오르기 마련일 테니까.
“저기, 아르틴..”
“천마님도 이곳에 추억이 많으셨나봐. 초상화까지 장식해가면서 기억 속의 공간을 만들 줄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아마, 로비의 벽에 장식된 것들도 옛날 동창생들이나 선후배들이 남기고 간 것을 보존하고 싶었던 거겠지? 천마님도 꽤나 로망이..”
“아르틴! 그 보다 저거..!”
“..왜 자꾸 불러?! 감수성에 좀 젖겠다는데!”
나는 자꾸 나를 톡톡 건드리는 카이엔을 향해 신경질을 내자, 카이엔은 손 끝으로 어느 곳을 가리켰다.
“저, 저거..그거 아니야?”
“저건 뭐고, 그게 뭔데? 왜 그렇게 호들갑을...”
카이엔이 가리킨 곳을 바라본 나는, 그만 말을 잊고 말았다.
카이엔이 가리킨 2층 침대의 밑. 그곳에는 무언가 책이 살짝 삐져나와 있었다.
허나, 그 책의 테두리가 무척 낯이 익어, 쓰윽 책을 당기자...
“...이거 야한 책이잖아? 그것도...거유 이종족 전문..?”
나는 침대 밑에 숨겨져 있던 10권 이상의 야한 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주 익숙한 책이었다.
이 책들은 내가 이 세계에 온 직후, 가장 열심히 모았던 야한 책의 시리즈. 『다양한 가슴들』이었으니까!
“이건 오크 특집, 이건 수인 특집, 이건...환상의 드워프 특집? 이런 귀한 책 왜 이곳에?”
“...아르틴?”
“...크흠! 왜 이런 이상한 책이 여기에?”
이런, 실수했다. 컬렉터의 본능이 튀어나와 나도 모르게 반응을 해버리고 말았다.
슬쩍 카이엔을 바라보자, 카이엔은 무척이나 나를 경멸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카이엔의 경멸에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야, 그런 눈으로 보지마! 나 정말 이런 취향 아니야!”
“...”
“진짜라고! 그냥 신기해서 몇 권 모았을 뿐이야! 엘프나 뱀파이어 같은 거..!”
“.....”
내가 정상적인 성적취향을 열심히 어필해봤지만, 카이엔의 눈은 더더욱 짜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너무 억울하다. 나는 그냥 이세계의 야한 책이 궁금해서 모으기 시작했을 뿐인데..!
“파트너, 너 지금 파트너를 못 믿는 거야?”
“....믿어 줄게. 파트너.”
결국 파트너를 꺼내고 나서야,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짜게 식은 눈빛을 내게서 거뒀다.
다행히도 진심은 통한 건지 납득해준 것 같다!
“...유니코르를 보면 아닌 것 같은데.”
“...방금 뭐라고 했어 카이엔?”
“아무것도.”
시발, 안 믿잖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