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 천마와 달맞이관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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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 책을 발견한 이후, 나와 카이엔 사이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카이엔, 정말로 그런 용도로 모으던 게 아니라니까?”
“...알고 있어, 아르틴. 믿어줄게.”
“아니 그런데 왜 눈을 못 마주치냐고! 평소에는 끈덕지게 눈을 마주치던 녀석이!”
“..나는 그런 적 없어.”
물론 어색해진 이유는 전부 카이엔의 오해 때문이다.
야한 책에 관심을 보였다고, 무슨 시리즈인지 좀 알아본다고 저렇게 시선을 돌리다니.
게다가 이 새끼, 나를 부르는 호칭이 파트너 대신 아르틴이라고 바뀌었다..!
‘이 나쁜 새끼, 내가 얼마나 챙겨 줬는데 야한 책 좀 봤다고 사람을 저렇게 멸시하다니..!!’
정말 억울했다. 내가 『다양한 가슴들』을 모았던 건 정말 불순한 의도가 아니었으니까. 내가 오크나 드워프 여자에 꼴릴 리도 없잖아.
...물론 처음 봤던 엘프편 같은 건 그런 목적으로 찾았던 게 맞긴 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 책을 철저히 수집 목적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일단 첫 번째 이유는, 내가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사서 모으기 시작한 책 시리즈라는 기념비적 의미이자, 30가지가 넘는 다양한 판본에, 매번 출판된 숫자가 달라서 어느 특집은 매우 희귀해 구하기도 힘들어 수집가 정신을 들끓게 만든다.
생각해 봐라, 누구나 매우 재밌게 읽은 작가의 전작들은 다 찾아서 보지 않는가? 그런 이유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훨씬 현실적인데, 방금 발견한 드워프편 같은 희귀한 특집들은 콜렉터들 사이서 아주 고가로 거래되기도 하고, 선물로써 큰 가치를 받기도 한다..!
실제로 2회차 당시 제국에 부패한 귀족한테 드래곤편을 구해다 준 덕에 카이엔에게 부족한 물자도 구해다 줄 수 있었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억울하네, 내가 뭐가 나쁜 거지? 애초에 정말 그런 목적이어도 남자가 야한 것 좀 볼 수 있는 거 아닌가!
“아, 아르틴? 뭐 하는 거야?”
“왜, 찾은 김에 좀 보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빡친 나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나도 못 구했던 환상의 책 중 하나인 드워프 편이 눈앞에 있는데, 한 번 봐도 되는 거 아닌가?
힐끔 옆을 보자, 내 모습을 본 카이엔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쌤통이다.
“뭐가 문제인지 정말 모르는 게냐??”
“왜! 나는 이런 거 보면 안 돼?!”
“당연히 안 되지! 스승의 방에서 뭘 하는 거냐 요 녀석아!”
갑자기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충격과 함께 내 눈앞이 순간 하얗게 변했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차가 담긴 쟁반을 들고 온 천마가 나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처, 천마님, 이건..”
“잘하는 짓이구나, 스승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제자라는 녀석이 스승의 방을 뒤지기나 하고. 남자들은 어떻게 100년이 지나도 변하지를 않느냐?”
“..바, 발견은 카이엔이 했어요!”
“변명하지 말거라! 보던 건 네가 아니더냐!”
카이엔을 밀고한 나는 무척 억울하게도 뒤통수를 한 대 더 맞으며 야한 책을 뺏기고 말았다.
“도대체 이런 게 뭐가 좋다고 그리도 야단인지..고작 지방덩어리가 종이쪼가리에 그려진 게 전부인데 말야. 샤오메이도 그래서 좋아 하느냐?”
“아니 그건...샤오메이가 가진 매력의 일부일 뿐이니까...”
“쯧쯧, 가슴이 좋다는 것은 부정도 못하는 거구나? 이 호색한 같으니라고.”
아까 전 카이엔에 이어서 천마님도 나를 매도하는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 눈빛에 뭐라 반항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천천히 생각해보면 혼나는 게 맞는 상황인 거 같긴 하고.
“...아니 그 보다, 천마님이 그런 책은 왜 침대 밑에 숨겨놓고 있는 건가요?”
“숨겨놓은 게 아니라, 장식해 둔 것이다. 설마 내가 이런 것을 보면서 자기위로라도 할 줄 알았느냐?”
그 말에 나는 순간 천마님이 야한 책을 보며 자위하는 상상이 스쳐지나 갔다.
여성의 커다란 가슴들이 나오는 책을 보면서 혼자 자위하는 여자라니...
“그, 그러진 않을 것 같네요.”
“...이상한 상상을 한 것 같아 한 대 때려주고 싶지만, 방금은 내가 질문을 잘못한 거 같으니 봐주도록 하마.”
천마는 한숨을 쉬며, 야한 책을 정리해 침대에 우겨넣었다. 아까 전처럼 ‘살짝’ 보이도록 말이다.
“여기에 야한 책을 둔건..내가 아니라 내 서방님이다.”
그 말에 나와 카이엔은 순간 숨이 막히는 기분으로 천마를 바라보자, 천마는 그럴 줄 알았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쟁반을 내려놨다.
“흥, 학생 때는 어렸으니 말이다. 약혼한 나를 두고도 야한 책을 보다가 침대 밑에 숨긴 것을 걸려서 내게 된통 혼났었지.”
“...샤오메이에게 듣기로는 10년 간 쫓아 다녀서 결혼을 받아냈다고 들었는데요?”
“그건 증손녀랑 손주 녀석의 오해다! 나랑 쉔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거늘! 요즘 말로 하면 순애물 그 자체 였도다!”
“아...그렇군요..”
“왜 안 믿느냐! 감히 스승의 말을 개소리로 듣는 것이냐!”
“에이, 설마요.”
천마가 도저히 믿기 힘든 소리를 내자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지만, 너무 격렬히 부정하는 천마를 보고 있자니 또 말로 하긴 힘들어서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런 내 모습을 천마가 보고 삿대질까지 하며 씩씩거렸지만, 어쩌겠는가 믿기 힘든...데...?
‘어라? 이거 익숙한 반응인데?’
이거 씨발 방금 카이엔이 나한테 했던 반응 아닌가..?
“..왜 그런 지고지순한 사랑이 천마님의 스토킹으로 전해진 건가요?”
“좋은 질문이구나 카이엔, 그건 쉔에게 반했던 여자가 너무 많아서, 약혼녀인 나를 두고 자리를 차지하려던 걸레 같은 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본처는 자신이 차지할 거라고 했던가?”
“커흑!”
갑자기 천마님의 입에서 나온 가슴이 찔리는 말에, 나는 녹차를 마시다가 사례에 들리고 말았다. 본처를 노리는 하렘이라니..? 그건 마치..
“왕국의 공주에 제국의 황녀, 보건 선생이나 뱀파이어 여교수, 심지어 드워프 기술장의 딸년이나 오크 대족장의 후계자년 까지, 얼마나 많은 경쟁자가 있었는 지 너희는 모를 것이다. 심지어 공화연방에는 남궁가의 딸년이나 당가의 독쟁이 계집까지...”
“쿨럭! 쿨럭!”
“..아르틴 너는 왜 자꾸 기침을 하는 게냐?, 차가 몸에 안 받느냐? 좋은 백년 하오수를 달아 만든 차인데 말이다.”
“아뇨..차는 무척 좋은 차인 것 같습니다..”
나는 입가에 줄줄 흐르는 차를 손수건을 닦아내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물론 전부 본녀가 싸워서 승리하고, 나는 쉔을 홀로 차지하여 결혼식을 올리고 가정을 이루는 쾌거를 거두고 말았지만 말이다. 천마는 사랑에도 타협이 없는 법이 아니겠느냐?”
“..그, 그거 대단하시군요.”
어쩐지 백년도 전에 죽은 천마님의 남편에게 동질감이 들기 시작했다. 듣기만 해서는 쉔님도 나처럼..아니, 회귀도 없었을 테니 나보다 더 심한 여색의 난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인 것 같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게 무색하게도, 쉔은 너무도 일찍 가버리고 말았구나. 덕분에 쓸 때 없이 환골탈태와 반로환동을 겪고도 이리도 독수공방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천마가 쓰게 웃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와 카이엔도 어쩐지 마시던 차가 씁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쉔의 이야기를 하면서 무척이나 즐거워 보이던 천마님의 표정에 아련함이 깃드는 것을 보자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 마왕군이 더 활개를 치던 시기였고, 쉔은 무척 정의롭고 불의를 참지 못했으니까.”
“허나 쉔은..자신의 정의감만큼 강하지는 못했지, 그래서 늘 본녀가 곁에 있어줘야 했지만..그 날, 쉔을 잃던 날에는 그러지 못했다.”
“당시 식탐의 권속인 탐식자 오르코프의 습격을 격퇴했던 나는 도시에서 아이들을 구하다 죽은 쉔의 시체를 보며 삼일 밤낮을 울었다.”
“그리고, 그를 마음에 품었던 이들과 함께 오르코프를 한 달 내내 쫓아 마침내 그 목을 따서 복수를 했지.”
어느새 찻잔은 비었지만, 나도 모르게 천마님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들은 정말로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내 여인들은 내가 죽었을 때,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살아갔을까.
“복수는 했지만, 이미 뚫린 가슴이 채워지진 않더구나. 내게 남은 것은 남편의 시신과 이제 막 5살이 된 아들과 2살 난 딸뿐이었지.”
“...천마님은, 그 텅 빈 가슴을 어떻게 메꾸셨나요?”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카이엔이 묻자, 천마님은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의 빈 잔을 보고 잔을 채워주었다.
“메꿔진 것으로 보이느냐?”
“...”
“탓 하려는 게 아니란다. 그렇게 보인다면 천마인 나도 평범한 사람들처럼 시간의 망각마저 이겨내진 못했다는 뜻이니깐 말이다.”
천마님은 가방에서 양갱을 하나 꺼내 잘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하나를 집어 입에 오물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텅 빈 상처는 100년이 지나도 그대로라는 것을 말이다.
“내가 너희를 강하게 만들려는 것은 그런 이유기도 하다. 나는 마왕군의 군단장도, 당시 6대 권속 중 하나도 해치웠지만...결국 마왕에게 닿지 못했다. 아니, 그전에 마기로 이미 내부가 썩기 시작해서, 더 이상 강력한 마기가 깃든 땅에서 견딜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지.”
“...그래서, 오신장을 은퇴하고 은거를?”
천마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또 다시 양갱을 하나 집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용사인 카이엔과, 그 동반자인 아르틴 너라면...나보다 훨씬 위험한 일을 많이 겪겠지, 적은 단순히 마족에만 있는 것도 아니니 어디에서도 편히 쉴 수는 없을 것이다.”
“...”
“그러니, 너희들에게는 압도적인 힘이 필요하다. 적어도 전성기의 나를 박살낼 정도로 강함을 말이다.”
천마의 이야기가 끝나자, 나는 왜 천마가 그리도 나를 공화연방으로 데려가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마왕의 봉인 해제가 초읽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용사의 탄생은 곧 군단장과 간부들에게 전해질 것이고, 그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방해하기 위해 부하를 보내거나, 아니면 장미관 사건처럼 본인이 나타나 우리를 해치우려고 할 테지.
거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아카데미는 내부의 첩자들도 몰리기 마련, 독살을 당했던 2회차와 불타죽은 3회차를 생각해보면 사람이야 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적들 중 하나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본녀의 곁에 있는 다면, 적어도 나와 손주 녀석이 지켜줄 수 있지 않겠느냐? 손주 녀석도 전성기의 나만큼은 아니지만, 군단장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는 강하니까 말이다.”
천마는 그런 위험에서 우리를 지켜주고자 했던 것이다. 자신의 증손녀인 샤오메이가 자신과 같은 슬픔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에도, 아직도 공화연방에 같이 갈 생각이 없느냐?”
“...네. 그 뜻은 이해하지만, 아쉽게도 이곳에 이미 소중한 사람들이 많이 남았습니다.”
“그렇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내기에 이겨서 데려갈 수밖에.”
내 단호하지만 의지가 담긴 대답에, 천마는 크게 나무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다음에는 힘으로라도 데려가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말이죠.”
“네 눈은 뜻을 정한 이들이 보이는 눈이거든, 강한 힘이나 죽음 같은 걸로도 꺾을 수 없는 의지라는 것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눈을 가지곤 하지.”
“천마님의 배우자인 쉔님처럼 말인가요?”
“이해가 빠른 제자는 싫어하지 않단다.”
작게 웃은 천마는 다시 양갱을 하나 입에 넣었다. 좀 전까지 느껴지던 슬픔도 마음 한 곳에 다시 잘 정리한 듯, 상쾌한 표정이었다.
“그럼 좋다. 최대한 너를 강하게 단련시켜 줄 테니까 단단히 각오하도록 하거라. 오늘 겪은 훈련은 몸풀기로 느껴질 정도로 험하게 굴려주도록 하마.”
“..최대한 노력해서 따라가보겠습니다.”
“호오, 또 틱틱거리면서 반항할 줄 알았는데 말야?”
“저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보고 경의를 표하는 법은 알고 있거든요.”
“흥, 사람이 되먹지는 않은 것 같구나.”
나도 그런 천마를 향해 씨익 웃어줬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사람일지도.
“그런데 스승님.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냐? 어떻게 군단장을 해치웠는지 라도 듣고 싶나? 아니면 연애담?”
“..그 양갱, 도대체 무슨 맛인가요?”
나는 손을 들어, 천마가 입으로 가져가던 파란색 양갱을 가리켰다.
저 입맛 떨어지는 외형에, 나와 카이엔은 양갱을 손 댈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이 양갱? 시원하고 단 것이 입안을 상쾌하게 해주는 뒷맛이 있어 좋구나, 같이 먹지 그러냐?”
“...아뇨, 됐습니다. 곧 밥 먹을 시간인데 단 건 안 땡기네요.”
“그러냐? 아쉽구나, 꽤 맛있는 양갱인데 말이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나는 식전 에피타이저로 초코 케이크를 먹고 식후에 초코라떼를 마시는 단것에 미친 사람이니까.
그냥 저 양갱의 묘사를 들으니 민트초코처럼 느껴져서... 입에 대지 않고 차나 홀짝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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