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 천마 린 샹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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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활기를 찾았던 달맞이관, 하지만 아르틴과 카이엔 두 사람이 물러나자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녀석들, 한숨 자고 가도 된다고 했는데도 사양하다니, 스승님의 말은 하늘이거늘...”
그렇게 말했지만 천마도 가겠다는 두 사람을 강하게 붙잡지는 않았다.
자신이 이곳에 있으면 늘 사고가 터져서 심심할 날이 없던 즐거운 시절이 떠오르지만, 두 사람에게 이곳은 그저 인기척 없는 으스스한 건물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정말 늙은이가 다 된 것 같네.”
자신의 이야기는 이미 반쯤 전설이 되어서 구전되어서 내려오고, 자신과 동시대를 살아가던 이들은 남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정말 당연한 일이지만, 이렇게 대면하니 그 외로움의 무게는 어린 시절 자신을 짓누르던 하늘같은 한계보다도 무겁게 느껴졌다.
천에게 외로움이 느껴질 때면 늘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서랍장에 쟁여놓은 술을 꺼내 혼자서 홀짝이는 것이다.
“후후, 내 남은 친구는 역시 너희들 뿐이구나.”
본래라면 육신에 감도는 정순한 내공 덕에 취할 수도 없는 몸이지만, 아주 독한 술을 마시면 마기에 의해 해독작용이 느려져 꽤 오랫동안 취할 수 있다.
덕분에 학창시절 가벼운 술을 숨겨두던 천마의 찬장에는, 드워프도 한 병을 버티지 못할 오래된 독주로 가득 차 있었다.
“마기에 지아비를 잃었는데, 마기 때문에 술에 취해서 버티는 나날이라. 내가 생각해도 웃기구나.”
들어줄 사람은 없지만 그리 독백했다. 이 방에서 그리 독백하면, 언제라도 쉔이 갑자기 튀어나와 자신이 술을 마시는 것을 말려줄 것 같았으니까.
늘 술버릇이 고약한 자신을 위해 같이 잔을 꺾으며 친구가 되어주던 남편, 늘 몰래 자위를 하다 걸릴 때면 잡지를 보는 척 했지만, 자신의 이름을 몰래 부르던 남편.
언제나 주변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면서도, 밝게 웃으며 이끌던 멋진 쉔. 천마 샹페이는 쉔이 너무 그리웠다.
“...아르틴, 그 녀석은 참 신기하단 말야?”
남편에 대해 떠올리며 잔을 홀짝이던 중, 천마는 자신도 모르게 제자 녀석이 챙겨온 양갱에 시선이 돌아갔다.
그렇게 자신이 괴롭히고 떼를 부렸는데도, 울먹..이지는 않았지만 힘들어 보인다는 이유로 먼저 손을 뻗어온 아주 오랜만에 키우는 제자 녀석.
“이상하지, 얼굴도 별로 닮지 않고 체격도 자그마한데, 왜 녀석을 보고 있으면 그리도 쉔이 떠오르는 지.”
아르틴이라는 이름 자체를 안 것은 꽤 오래됐다. 샤오메이가 어릴 적부터 그리 노래를 부르던 이름이 바로 아르틴이었으니까.
허나, 가까운 사람을 잃는 고통을 거부해오던 천마는 증손녀가 사모하는 남자아이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이번에 찾아온 것도 손자 녀석이 하도 부탁을 하기에 찾아온 것 뿐.
처음에는 강제로 끌고 갈 생각도 없었다. 변변찮은 놈이라면, 그저 증손녀의 외모만 보고 반한 녀석이라면 제 나름대로 손을 봐줄 용의까지 있었다.
...하지만 아르틴이라는 녀석은, 요 몇 십년간 만나온 말만 번지르르한 녀석들에 비하면 훨씬 나아보이는 녀석이었다.
“수십 년 만이지? 내 일격을 피하지 않고 막아내려고 한 녀석은.”
첫 날, 자신이 테스트를 하기 위해 내지른 주먹에 카이엔과 아르틴이 보여준 대처는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동반자인 아르틴을 전력으로 보호하려고 한 카이엔, 그리고 주변에 혹시나 여파가 갈까봐 최대한 자신들에게 힘을 집중 시킨 후 막아낸 아르틴.
녀석들이 성녀의 치료를 받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냥 공격을 흘려냈다면 다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우직하게도 자신들이 그 부담을 감당한 것이다.
“샤오메이가 외모만 나를 닮은 줄 알았는데, 남자를 보는 눈도 꽤 괜찮은 걸.”
피식 웃으며 천마는 독한 술을 한 잔 쭉 들이켰다. 불같이 타오르는 목덜미의 감각. 늘 쓰게만 느껴지는 그 감각이 오늘은 썩 나쁘지가 않았다.
기분 좋게 취하고 싶은 날, 그런 날이 있다면 바로 오늘이 아닐까.
“좋아, 내일 부터는 방해말고 제대로 가르쳐 볼까...? 그런 좋은 남자를 증손녀가 놓치게 할 수는 없으니.”
그렇게 말하며 먹다 남긴 파란색 양갱을 하나 입으로 가져가 우물거렸다. 음, 이 싸~한 맛이 나쁘지 않다니까.
─드르륵!
그때였다. 천마 자신이 머물고 있는 방문이 벌컥 열린 것은.
당황했다. 감히 누가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에 올지 몰랐고, 오로지 술에 취하기 위해 기감을 꺼놓은 상태였으니까.
“...카, 카이엔? 다시 어쩐 일로 돌아왔느냐?”
거기에 다급하게 방문을 연 것은, 놀랍게도 아까 돌아간 용사 카이엔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엄청난 미남자, 허나 샤오메이의 편지에 적히기를 아르틴을 호시탐탐 노리는 동성애자, 혹은 양성애자라고 했던가?
당대의 용사를 평하기엔 참으로 우스운 말이지만, 훈련할 때의 눈빛과 숨소리, 반응을 보면 그 평가는 무척이나 정확한 것이었다.
“천마님, 아니, 스승님. 이 못난 제자가 스승님께 가르침을 청하고 싶습니다.”
“..가, 갑자기 말이더냐? 이 시간에? 게다가 아르틴도 없이 너 혼자 무슨 일이느냐?”
크흠, 헛기침과 함께 있어 보이는 말투로 돌아간 천마가 술잔을 기울이는 척 카이엔의 기색을 살폈다.
‘..뭐지? 이 간절한 눈빛은? 정말로...무언가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구나!’
카이엔의 눈빛을 본 천마는 꽤나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훈련 때도, 자신의 일격을 막을 때도 언제나 곁에 있는 아르틴에게 신경이 쏠려있던 카이엔이, 자신에게 마치 목숨이 담긴 일을 부탁하듯이 간절한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저도 제자로 들여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꼭, 꼭 배우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무엇이 너를 그리도 간절하게 만들었느냐. 용사 카이엔?”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으며 간청하는 카이엔의 태도를 본 천마는, 술잔을 내려놓고 자세를 바로 앉았다.
이리도 진심으로 자신에게 요구해오는 남자를, 천마는 단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으니까.
“...배우고 싶습니다. 스승님이 이룬 위대한 업적을!”
“호오, 과연. 마왕군의 수뇌부를 네 손으로 토벌하고 싶단 것이냐? 내가 보기에 너는 이미 검술과 마법으로 잔뼈가 굵은 것 같다만...”
천마가 봤을 때, 샤오메이에게 기초라도 배운 아르틴과는 다르게 카이엔은 이미 그 성장방향이 완전히 잡힌 몸이었다. 아마 지금 그대로만 가도 크게 대성하여, 시간만 있다면 전성기의 자신 정도로는 강해질 수 있을 터.
허나 어리고 미숙하며 성급한 용사를 빠르게 키워내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제대로 가르침만 받는 다면, 카이엔을 전성기의 자신 이상으로 강한 무술가로 키워낼 자신이 있었다.
“그리 간절하다면, 좋다. 본래는 아르틴을 중심으로 가르치려고 했지만, 네게 천마신공과 태산의 모든 오의를 전수하여 최강의 무술가로 키워주마!”
광오하게 웃으며, 천마는 당당하게 선언했다. 지난 50년 간 제대로 제자를 가르친 적이 없던 천마로써는 드문 일이지만, 눈앞의 소년은 그럴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닙니다. 저는 천마님에게 무술 같은 것을 배우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뭐? 무술 같은 것? 지금 천마신공을 무술 같은 것이라고 했느냐...?”
“제가 배우고 싶은 것은, 천마님의 그 대단한...! 연애능력입니다! 수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정실 같은 사도가 아닌, 당당한 순애로 승리하신 위대한 연애능력 말입니다!”
“지, 지금 뭐라고 하는 소리인지는 아느냐..?”
어이가 없었다. 땅거미가 울고 있는 시간에 찾아와 한다는 소리가 연애를 가르쳐 달라니...?
천마가 백 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연애를 가르쳐달라고 말한 녀석은 없었다.
자신의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린 녀석들 때문에 스토커 취급을 받아 온 것도 있지만, 감히 누가 무술의 지존인 천마에게 무술도 아니고 연애를 가르쳐달라고 한단 말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거라면 돌아가라. 내가 너를 잘 못 봤구나.”
“제발, 부탁입니다! 그 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이기실 수 있던 건, 단순히 천마님의 그 아름다운 외모나 멋진 매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분명, 천마님만의 위대한 방법들이 있으신 게 아닙니까? 저는 그게 꼭 배우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외모..매력...크흠, 그래 뭐, 내가 한 아름다움은 하지. 샤오메이 녀석은 수인의 피가 섞여서 과하게 커지긴 했지만, 진정한 몸매의 밸런스는 본녀에게 있지 않겠느냐?”
허나 한 가지 사실,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천마는...칭찬에 약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약했다.
무너지는 천마의 태도를 본 카이엔은 고개를 들어올리며, 아주 간절한 눈으로 천마를 바라봤다.
“...저도, 제 사랑을 이루고 싶습니다. 허나 제 능력만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더러운 녀석들에게서 지켜내는 것은커녕, 저를 보게 만드는 것조차 힘듭니다..! 부디, 제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스승님! 아니, 연애의 신! 천마님!”
아주 대놓고 입에 발린 아부가 담긴 소리, 평상시의 천마라면 이 정도로 목적이 다분한 아부라면 아무리 칭찬에 목이 말랐다고 한들, 눈길조차 주지 않고 카이엔에게 딱밤이라도 먹여줬을 것이다.
하지만 천마는 방금까지 80도가 넘는다는 희대의 독주, ‘드래곤의 숨결’을 연거푸 5잔이나 마시며 꽤나 기분좋게 알딸딸해진 상태였다.
“...네 모습을 보아하니, 어쩐지 젊었을 적의 본녀가 생각나는구나. 약혼자가 눈을 크게 뜨고 살아있는 데도, 옆에 다가와서 끼를부리며 쉔을 홀리려던 그 여우같은 년들에 전전긍긍하던 나를 말이다.”
“...천마님!”
“좋다! 이 연애박사. 연애의 대가. 연애의 천재! 연애의 신! 천마, 린 샹페이가 네 연애를 돕도록 하마! 내게 무술을 배운 이는 있어도 연애를 배운 이는 처음이니, 너를 내 수제자로 삼아주마!”
“감사합니다! 천마님! 정말 감사합니다!”
“일단 앉아서 술을 따라 보거라! 우선 본녀가 어떤 아수라장을 거쳐서 유일한 승리자가 되었는지 말해주마!”
“네! 모든 가르침을 새겨듣겠습니다!”
그 간절함이 닿자, 카이엔은 환한 웃음을 터트리며 천마의 맞은 편에 앉았다.
이리도 자신을 깍듯이 모시며 서글서글한 제자는 얼마 만이던가, 천마는 힘껏 흥에 취해, 과거의 이야기를 내뱉으며 카이엔에게 가르침을 하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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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쳤구나, 정말 미쳤어.”
그리고 다음 날, 침대에서 눈을 뜬 천마는 전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리도 독주를 마셨는데, 정순한 내공은 전날의 기억을 드문드문 되살리게 했다. 숙취 또한 없이 생생한 탓에, 자신이 한 짓을 몇 번이고 곱씹을 수 있었다.
“그 카이엔이란 녀석이 노리는 것은 아무리 봐도 아르틴이잖아..! 증손녀의 라이벌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냐...!”
아니, 라이벌이라는 표현이 웃길 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몇 번이고 한 말은 확실히 기억이 난다.
“걱정 말거라! 아르틴? 아르틴이 아니라 아르틴 할아버지라고 해도 네게 반할 수 있게, 나 린 샹페이가 전력을 다해 도와주마!”
늘 자신이 한 말은 절대 지켜오던 천마는, 과거의 자신에게 천마신공의 오의를 먹여주고 싶은 욕구가 차올랐다.
‘어떻게 남자가 남자에게 반하게 만들겠다는 거냐! 그것도 내 증손녀가 오랫동안 마음에 품다가 드디어 약혼을 한 녀석에게...!!’
상대는 아무리 반응을 생각해도 명백히 이성애자였다.
아주 가끔 자신의 몸을 훑는 시선까지도 알고 있지만, 그게 자신을 향한 음욕으로 이어지지 않길래 무어라 혼내지 않았을 뿐, 건전한 성적 취향을 가진 것은 분명했다.
한편 카이엔은 어떤가. 자신이 보기에도 아주 놀랄 정도로 미려한 미색을 지니고 있으나, 동시에 그 얼굴에는 남성미가 물씬 느껴지기도 한...명백한 남자다.
게다가 훈련할 때를 보아라, 아르틴을 그 감정을 알고 있는 지 접촉하는 것조차 그리도 싫어했는데, 좋아하게 만든다...?
“...어쩌면 좋겠느냐, 쉔? 내가 또 사고를 친 것 같아...”
늘 쉔이 자신에게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샹페이, 너는 술버릇이 많이 안 좋으니까...제발 적당히 마셔. 기분 좋다고 막 들이키면 안 돼.”
책상 위의 쉔의 그림이 다시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아, 천마는 절망감에 빠져 침대에 드러누웠다.
“좆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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