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180화 (180/266)

〈 180화 〉 Tag : gender bender

* * *

“야, 정신 차려봐 카이엔. 괜찮아?”

“…”

나는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카이엔에게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지만, 카이엔 녀석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답답하게 굴지 말라고 한 소리라도 해줬을 테지만, 지금의 카이엔에게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게, 지금 카이엔은 남자가 아닌, 명백한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발, 갑자기 난데없이 TS라니...?’

─────────────────

이전의 오류에 대한 추가 보상을 지금 지급합니다!

상태창의 사용자가 기뻐할만한 이벤트가 일어납니다!

─────────────────

방금 전 눈앞에 나타난 상태창의 메시지에 어리둥절했던 나는, 내 몸에 닿는 부드러운 촉감에 카이엔을 바라봤다.

그 자리에는, 내가 기억하고 있던 카이엔은 없었다.

정확히는, 서구식 미청년의 외모를 하고 있던 카이엔이 없었다.

그 대신, 내가 언젠가 본 것 같던 동양풍 미인이 내 눈앞에 서있었을 뿐이었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당황하던 내 모습을 바라보던 카이엔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지 알자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울며불며 괴성을 지르는 카이엔 녀석을 붙잡고 달랜 게 벌써 5분전, 지금은 조용해 졌지만, 멘탈이 나가서 조용해 졌다고 보는게 맞을 것 같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더냐...?”

그 모습을 옆에서 직관하던 천마님도,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는 지 내게 물었지만 나는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여성용 수영복을 입고 나한테 달려들던 게이 스토커가 갑자기 여자가 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상황을 객관적으로 나열하기만 했는데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이 완성됐다. 머리가 어지럽다.

진정하자.

일단 상태창이 무슨 짓을 벌인 것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 서야 갑자기 카이엔이 여자로 변할 일은 없었으니까.

‘...내가 좋아할만한 이벤트? 카이엔이 TS되는 게 내가 좋아할 이벤트라고?’

문뜩 소름끼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 상태창 새끼들, 내가 여자라면 누구든지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카이엔도 여자로 만들어 버린 건가?

남자가 여성용 수영복을 입고 오면 싫어하겠지만, 그 남자가 여자가 된다면 좋아할 거라고??

‘개 씨발. 이 소설은 정체가 뭐 길래, 몬무스에 수인에 이제는 주인공을 TS 시킨다고?’

이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혹시 작가가 쓰고 싶던 글은 본편의 그 전개가 아니라 이 미친 전개가 아니었을까?

‘진정, 진정하자...카이엔도 멘탈이 나갔는데 나까지 멘탈이 나가면 안 돼.’

나는 다시 힐끔 카이엔을 바라봤다.

아까 까지만 해도 자기 모습을 보지 말라고, 이러다 다 죽는다며 이상한 말을 외치던 녀석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며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마 갑작스러운 상황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정신착락을 일으킨 거겠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서 조금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정말 쓸 때 없이 예쁘네...본판이 꽃미남이라서 그런가.’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있다가 변한 탓에, 나는 카이엔의 변한 육체를 온전히 관찰할 수 있었다.

올가처럼 찰랑이는 긴 생머리, 길고 가느다란 속눈썹으로 감싸인 보석 같은 눈동자.

퇴폐적인 어두운 분위기와 청초한 동양풍의 이목구비는 또 어떻고, 이런 미녀는 난생 처음...

‘..어라? 이 생각 어디서 한 것 같은데?’

자연스럽게 그 동양풍 외모와 조금 어울리지 않는 언밸런스한 가슴으로 시선이 향하던 중,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자각했다.

방금 한 생각. 어디서 한 것 같은데?

‘...카르엔?’

그래, 분명 꿈속에서 봤던 카르엔! 교단에서 지낼 때, 내가 꿨던 음몽에서 나왔던 카이엔의 여자 버전하고 똑같이 생겼다!

어쩐지 가슴의 감촉이 익숙하더라니, 신체의 부드러움 조차 내가 기억하던 꿈속의 카르엔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저번에 꿈에서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가슴 말고 골반 라인도 꽤 괜찮네?’

카이엔의 여체화라는 것을 증명하듯, 인형같이 잘록한 허리와 저 탐스러운 골반라인은 내 연인들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정도다.

저런 골반이라면 자식들로 축구단 1개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 씨발, 내가 지금 뭐라는 거야!’

야릇한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다급하게 정신을 차렸다.

내가 방금 카이엔 녀석을 두고 무슨 생각을 한 거지?

고작 녀석이 여자의 모습으로 변했다고, 지금 녀석과 축구단을 만드는 상상을 하며 꼬추를 세우려고 한 건가?

‘정신 차리자 아르틴, 상대방은 방금 전까지 근육질의 모습으로 나를 덮치려고 했던 카이엔이다.’

나는 더 이상 꼬추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하며, 카이엔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

“입어. 언제까지 그 차림으로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을 거야?”

내가 생도복을 꺼내 어깨에 덮어주자, 카이엔은 자신을 향해 호의를 베푸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

평상시와는 다른 경계심 어린 눈빛. 왜 내게 이렇게 잘 대해 주냐는 말을 눈빛으로 대신 하는 것 같았다.

“천마님, 일단 이 녀석 좀 진정시키고 올게요. 잠깐만 훈련 쉬어도 괜찮죠?”

“응? 무, 물론이지. 어서 다녀 오거라!”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천마에게 허락을 받은 후 카이엔 녀석을 팔을 붙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꺄, 꺄악?!”

“뭘 꺄악이야! 기분 나쁘니까 그냥 얌전히 따라와.”

일단 상태창에 떠오른 메시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해, 나는 카이엔을 데리고 가까운 건물로 향했다.

“아, 아르틴?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그냥 따라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안에 사람들이 있는지 인기척이 느껴지는 건물 안.

누군가 상태창의 이야기를 듣기라도 하면 큰일인 만큼 나는 최대한 인기척이 없는 곳으로 카이엔을 데려갔다.

“좋아, 여기 정도면 누가 올 일은 없겠지?”

다행히 7층의 외진 곳에 텅 빈 사무실을 발견해, 나는 마법으로 잠금쇠를 풀고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 구석진 곳이라 그런 지 지금은 쓰이지 않는 것 같았다.

“아, 아르틴...?”

“잠깐만 기다려봐, 혹시 누가 올지 모르니까 인식 저해 마법이랑 방음 마법도 걸어놔야 하니까.”

그래도 혹여나 하는 사태에 대비해, 나는 이곳에 누가 다가올 경우 알아차릴 수 있게 알람 마법까지 총 삼중결계까지 쳐가며 단단히 경계했다.

“좋아, 이 정도면 될 것 같다. 이제 이야기를 좀 하자면...”

그제서야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아, 아르틴. 나는 준비됐어. 이런 못난 몸이라도 네가 원한다면...!”

“야, 너,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이 새끼야!”

몸을 돌리자, 그 곳에는 카이엔이 부끄러움이 가득 찬 얼굴로, 뭔가를 결심한 표정을 지으며 생도복 상의를 벗은 후 비키니의 끈을 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내가 녀석의 팔로 붙잡으며 막자, 녀석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것이 아닌가.

“나, 나랑 야한 짓을 하려고 이런 은밀한 곳에 데려온 거 아니야...?”

“아니야! 그냥 상태창 관련으로 설명해 줄게 있어서 데려온 거야! 내가 너를 갑자기 왜 덮쳐!”

“그, 그렇지만, 이런 몸으로는 마왕 토벌에도 도움이 되지 못하니까, 대신 아르틴을 위해 몸으로라도 봉사라도 하려고...”

“으아아악!!”

몸으로 봉사라니, TS가 된 직후 암컷 타락한 녀석을 보고 나는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았다.

맞아, 이 녀석은 분명 장미관에서도 내게 암컷 타락하는 것을 바라던 녀석이었지..!

“야한 짓 안 해! 제발 그런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하지만...이런 거라도 하지 않으면 지금의 나는 용사 카이엔도 아닌 쓸모없는 암퇘지잖아...?”

“아니야, 제발. 내가 전부 설명할 테니 5분만 이상한 짓 좀 하지 말아줘. 알겠어?”

내가 몇 번이나 좋은 소리로 타이르고 나서야, 카이엔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무슨 일이냐면...”

나는 간신히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방금 상황에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조금 발기한 자지를 가라앉히며 말이다.

*

잠시 후, 내 설명을 들은 카이엔의 표정은 방금 전 보다 훨씬 밝아졌다.

“그럼, 나는 쓸모없는 암퇘지가 아니라 여전히 용사 카이엔인 거네?”

“...그렇지. 그보다 왜 여자로 변했다는 이유로 용사가 아니게 됐다고 생각한 거야?”

“그, 그러게! 나도 참, 무슨 바보 같은 착각을 한 거람!”

나는 조금 어이없는 눈으로 카이엔을 바라봤다.

녀석이 여자로 변해도 카이엔은 여전히 여신의 축복을 받은 용사일 터, 꼬추가 사라졌다고 여신의 축복까지 사라지진 않을 것 아닌가?

“아무튼, 내 상태창 때문에 일시적으로 변한 것 같으니까. 아마 별다른 일이 없으면 여체화를 풀 방법을 찾을 수 있을거야.”

“으응, 그렇구나. 상태창 때문에 여자로 변신이라니...”

카이엔은 여전히 믿기 힘들다는 목소리로 자신의 몸을 훑어봤다.

나도 이런 직접적이고 커다란 변화는 처음이었기에, 조금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상태창이 이런 일도 할 수 있었나...? 아니, 인벤토리나 상점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나.’

이미 희귀한 재료를 포인트 같은 걸로 펑펑 살 수 있는 시점에서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그 말은, 퀘스트를 깨다 보면 이런 커다란 변화가 있는 보상도 얻을 수 있다는 뜻 아닐까?

“저기, 아르틴...?”

“응? 무슨 일이야? 몸에 무슨 이상이라도 있어?”

“아니,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데...”

갑자기 나를 부른 카이엔은, 뭔가 히죽거리는 표정으로 나를 계속 힐끔힐끔 바라봤다.

뭐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을상이던 녀석이 히죽거리면서 웃다니?

“상태창에 나온 메시지 내용 말인데... 상태창의 사용자가 기뻐할만한 이벤트라고 했잖아?”

“아니, 그건...”

내가 아니라고 부정하려는 순간, 카이엔이 발그레 붉어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럼, 아르틴은 내가 이런 모습으로 변한 게 기쁜 일이라는 거네?”

툭. 하고 다시 내가 입혀 준 생도복의 재킷이 바닥에 떨어졌다.

“카이엔? 생도복을 갑자기 왜 벗어?”

“...후후.”

내 질문에, 카이엔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웃기 시작했다.

마치 먹잇감을 찾은 사냥꾼처럼, 소름이 돋는 웃음소리였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