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02
* * *
상황을 정리해보자.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누님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내 소문이 퍼졌고, 누님이 그 중에서도 이상한 소문을 접한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 서야 또 여자를 들였다는 소문이 돌리가...
‘...어라? 왜 이렇게 찔리는 구석이 많지?’
아니, 정신을 차려야지, 그걸 감안해도 갑자기 누님의 귀에 그런 소문이 들 리가 없지 않은가.
당장 카이엔의 여자 모습을 보고 오해하는 것만 봐도 누구라고 대상을 지정해서 소문이 퍼진 게 아닌 것 같으니, 오늘 아침부터 퍼진게 원흉이 분명하다.
...아마도.
아무튼, 지금 당장 나를 두들겨 패서라도 교화시킬 것 같은 누님을 진정시키는 게 급선무다.
“누님, 일단 진정하고 제 이야기 좀 들어보세요.”
“이야기? 무슨 이야기..? 왜 처음 보는 여자랑 반나체 상태로 있는 지 같은 거...?”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상황을 보면 충분히 오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데...!”
그런데 잠깐, 뭐라고 해명해야 하지?
‘그 소문은 가짜고 저는 오직 아그네스랑 누님만을 좋아해요? 그렇게 해명하면 나중에 뒷감당을 어떻게 하지?’
지금도 연인이 10명이 됐는데, 저런 해명을 하면 나중에 오히려 배신감이 크지 않을까?
물론 나중에 아는 것도 배신감이 있겠지만, 그래도 거짓말로 상처를 주고 싶진 않다.
“오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이, 일단 애는 진짜 아니에요. 애는 진짜 여자도 아니라고요! 네가 뭐라고 말 좀 해봐!”
“으, 으응? 그, 그건...”
내가 다급하게 카이엔을 바라보자, 카이엔은 딱 대답을 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건가? 방금 전까지 나를 유혹하던 걸 생각하면 가능성 있다.
“진짜 여자가 아니라니? 아르틴, 너 나를 바보로 알고 있는 거야? 애는 어딜 봐도 여자잖아!”
“그러니까, 사실 애는 남자라고요! 카이엔! 카이엔 실버소드에요!”
“...뭐?”
누님은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듯 나랑 카이엔을 번갈아가면서 보자, 나는 카이엔의 어개를 잡고 꾸욱 힘을 줬다.
“...쳇, 맞아요. 전 카이엔이에요. 사정이 있어서 여자로 변해있는 거고요.”
“네, 지금도 애랑 실험하려고 가운만 입고 있는 거지, 곧 있으면 세니아 선생님도 오실 거라고요. 정말이라니까요?”
“....애가? 그 카이엔 실버소드라고? 그 허우대 멀쩡하게 생겨서 친구 없는?”
“치, 친구 없는...”
마리안느 누님의 말에, 카이엔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확실히 요즘 클레어도 조르바 따라다니느라 바빠서 친구가 없어 보이긴 하는데...
저렇게 어깨가 떨리는 모습을 보니, 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 다들 나눠준 종이에 자기소개 적어라, 부모님 무슨 일 하시는지 모르는 불효자면 적당히 아무거나 적고. 뭐? 친구 3명을 다른 학교 애들로 적어도 되냐고? 너네 친구 없어? 어지간하면 같은 학교 애들로 적어 녀석들아”
...도저히 남 일 같지 않았다. 가족관계랑 친구 칸을 매번 공백으로 적어내야 했던 양희민의 삶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애가 친구가 아예 없진 않죠. 적어도 제가 있잖아요?”
“아, 아르틴...! 아니, 파트너...!”
내가 손에 힘을 풀고 카이엔의 어깨를 가볍게 주무르며 녀석의 편을 들자, 카이엔은 감동을 받은 듯 떨리는 눈망울로 나를 바라봤다.
평상시라면 좀 역겨웠을지도 모르는데, 여자로 변해서 그런지 감동받은 표정도 썩 봐줄만 해서 그냥 별 말 안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카이엔 녀석 여자로 변하니까 살결이 엄청 부드럽네. 어깨만 가볍게 주물렀는데도 이 감촉 좀 봐라.
“확실히, 너를 보고 파트너라고 하면서 음침하게 반응하는 걸 보면 카이엔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누님, 카이엔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어요?”
누님은 내 질문에 묘하게 시선을 피했다. 역시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래 좋아, 애가 카이엔이라는 건 믿어 줄게, 터무니 없는 말이긴 한데, 아르틴 네가 이런 허접한 거짓말로 날 속이려 들지는 않을 것 같고.”
“누님, 믿어주는군요!”
“그래서, 일단 애는 아니라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설명을 듣고 싶은데?”
“....어─그건──”
좆됐다. 그냥 적당히 넘어간 줄 알았는데, 제대로 들으셨구나...!
“...반응을 보아하니, 역시 완전히 헛소문은 아닌 것 같네? 아르틴?”
“그, 그게 누님. 제가 속이려고 한 건 아니고...”
내가 안색이 안 좋아진 것을 보고 눈치라도 챈 걸까, 누님은 한숨을 내쉬면서 꽉 움켜쥐었던 주먹을 천천히 풀고 내게 다가왔다.
툭툭
‘?’
솔직히 한 대 맞을 것도 각오했는데, 누님은 내 어깨를 천천히 두드리며 다정한 눈빛으로 내 눈을 마주봤다.
“그래, 나도 네 숫사자 같이 멋진 남성적인 면을 보고 반했는데, 무릇 남자라면 여자 둘 셋 정도는 만드는 게 왕국의 남자긴 하지.”
“...누님?”
“전에 천마 할망구가 증손녀 사위라고 하던 거, 못 들은 게 아니야. 샤오메이라는 아이가 네 여인 중 하나인 거지?”
깜짝 놀랐다. 천마가 언제 그런 말을 했었지? 아니, 양호실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한데. 그 말을 듣고 여태까지 기억하고 있었다니.
역시 제왕학을 익힌 왕국의 제1 후계자구나, 라는 생각과 동시에. 역시 조금 비틀린 왕국의 결혼관을 접할 수 있었다.
“능력 있는 사람이 아내나 남편을 여럿 들이는 게 흉은 아니지. 뭐, 괜찮아. 아르틴 너한테 먼저 반해서 유혹한 것도 나였고 말야.”
“누, 누님...”
“고작해야 셋이잖아? 우리 할아버지는 다섯 명이나 들였는데, 셋이면 평균이지. 안 그래?”
“...”
누님의 말에 나는 표정이 조금 굳고 말았다. 내 표정을 확인한 누님의 미소짓던 입꼬리도 나를 따라 굳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나를 포함해서 셋...이 넘는 구나? 뭐, 괜찮아. 넷도. 응, 아르틴 너는 군단장도 해치우는 영웅호걸이잖아? 그 정도야 뭐──”
“...”
“...혹시, 넷이 넘는 거야?”
나는 슬그머니 누님의 시선을 피해, 카이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카이엔 이 녀석, 나를 바라보며 재밌다는 듯 눈웃음을 짓다가 나한테 걸리자 언제 웃었냐는 듯 안 웃은 척 한다.
이 새끼, 방금 내가 친구라고 했다고 감동받아 놓고 뒤통수를 쳐...?
“그래, 뭐 다섯. 다섯 명이면 욕은 좀 먹어도 뭐라 못 할 거야! 마왕군의 간부 하나만 죽여도 누가 대놓고 뭐라 하겠어?”
“...”
“설마 여섯명? 아니지? 여섯명...이 맞구나? 그래도 그 이상은 아니지?”
“...”
“일곱? 설마 일곱이 넘어? 너,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거야?”
실시간으로 분노>수긍>어이없음>경악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누님의 반응을 보며, 나는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분명 2달 전만 해도 동정의 로맨티스트였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누님도 그런 나를 어떻게든 이해하려는 것인지, 자신의 미간을 움켜쥐고 제자리를 빙빙 돌며 고민하는 게 눈에 보였다.
“...좋아, 숫자에 연연하지 않을게. 아그네스도 알고 허락했다는 소리일 것 아냐? 그렇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누님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상상을 하고 있던 걸까?
“그래도 다행이네, 소문 중에는 네가 동물이나 수인, 이종족이나 심지어 유부녀나 악마까지 건드렸다고 하더라고! 그런 건 아닐 거 아냐? 학생이면 연애를 하다가 헤어질 수도 있고.”
“...”
“아르틴?”
“그, 일단 수인은...샤오메이도 어떤 면에서 보면 수인이 아닐까요?”
“아르틴??”
“유, 유부녀는 건드린 적 없어요! 정말로요!”
“유부녀가 저 중에서 가장 약한 거잖아! 나머지는 맞다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제대로 설명해!”
누님이 다급하게 내 어깨를 잡으며 설명을 요구했는데, 내 어깨를 움켜쥔 손아귀의 힘이 예사롭지 않았따.
‘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지? 악마랑 마족이랑 유니코르를 건들인 걸 누님한테 설명해야 한다고...?’
그랬다가는 정말로 누님의 손에 강제로 회귀당할 것 만 같은 분위기라, 나는 섣부르게 입을 열 수도 없었다.
내가 묵묵부답을 유지하자, 누님은 더욱 강렬하게 내 어깨를 잡고 몸을 흔들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아르틴?! 너, 너 그렇게 문란한 색남이었어?! 사실 카이엔하고도 갈 때 까지 간 거 아니야!?”
“카, 카이엔하고는 정말 아무것도 한 적 없어요! 그렇지! 카이엔!?”
이것만큼은 정말 억울해서, 나는 다급하게 카이엔을 바라보며 지원을 요청했다.
하늘에 맹세코! 나는 카이엔 하고는 아무런 스킨쉽도 한 적이 없는 걸!
“아, 아무것도 안...했지...아마도...어쩌면 했을지도...”
ㅁ그런데, 카이엔은 그런 내 기대를 배신하고 얼굴을 붉히며 손을 꼼지락 거렸다. 내 억장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너, 너 설마 카이엔 하고도 이미...?”
“아니에요! 정말로! 야 카이엔! 내 눈 똑바로 봐! 내가 언제 너랑 그런 짓을 했어!”
“....”
내가 대답을 요구하자, 카이엔은 더욱 눈을 못 마주치고 얼굴을 발그레 붉혔다.
마치 비밀연애를 들킨 여학생 같은 모습에, 누님과 나는 동시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아, 아르틴 너...도대체 수비범위가 얼마나 넓은 거야? 동물에, 악마에, 마족에, 남자까지...?”
“오해라고요 누님, 저는 올바른 성적취향을 가진 남자입니다...!”
일단 카이엔을 나중에 족치더라도, 나는 이 상황을 모면해야 했다.
누님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썩어가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지? 이 상황만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 할 텐데...!
[그 소원, 이루어주마.]
그 때였다. 어디선가 내 머릿속을 갉아먹는 텔레파시가 들려온 것은.
“...?”
[뭐든 하겠다는 그 약속, 확실히 기억해둘 테니까!]
[잠깐, 너 누구야. 알‘미라즈? 시르카? 유니코르?! 그보다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
다급하게 고개를 두리번거린 나는 그 순간 볼 수 있었다.
복도의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 채로 검지를 겨누기 시작한 시르카의 모습을.
[하렘을 관리하려면, 역시 남자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게 최고잖아요. 주인님?]
“아니야! 그만 둬!”
“아르틴? 갑자기 무슨─”
내가 다급하게 시르카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내 눈앞에 분홍색 섬광이 번쩍였다.
[몽마섹스빔~♡]
─지잉!
아, 젠장 늦었다. 뒤늦게 내가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던 누님도 분홍색 섬광에 꿰뚫리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내 이성이 조금씩 몽마의 마기에 침식되는 것이 느껴졌다.
마기로 잠식된 이성이 속삭인다. 이렇게 된 이상 누님을 암컷 대 수컷으로 설득해 보라고.
“파트너? 방금 그거...무슨 빛이야?”
“아, 잠깐만.”
그 순간, 나는 내 등 뒤에 누가 있었는 지 잠시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지금은 누님을 설득할 때가 아니었다.
내 정조가 위험하다. 이성애자로써의 정조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