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 천사를 찾아라! #06
* * *
사각 사각 사각.
건조한 스케치 소리가 계속해서 방안을 울려 퍼졌다.
허나 그 건조한 소리와는 다르게, 힐끔 바라 본 바실리사 영애의 표정은 열정과 더러운 욕망이 뒤섞인 광기로 가득했다.
‘망할, 이거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벌써 2시간이 훌쩍 넘었다. 몇 번이고 자세를 바꿔가며 포즈를 잡는 모델일을 2시간이 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괜찮아 파트너? 표정이 안 좋은데 어디 불편해? 자세를 좀 바꿔줄까?”
사실 힘든 자세는 카르엔이 다 맡아서 하고 있어서 내 몸이 지칠 일은 없었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정신적으로 무척이나 힘들다.
특히, 지금처럼 벽쾅 자세로 몸을 밀착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상태에서 나를 보며 열띈 숨을 내쉬는 카르엔의 얼굴을 계속해서 마주 보고 있으면 정신력이 깎여나가는 기분이다.
‘당연히 불편하지, 네가 고의로 몸을 밀착 시키면서 안 불편하냐고 묻냐?’
지금도 그렇다, 평범한 벽쾅 자세면 그냥 얼굴만 아슬아슬하게 밀착한 자세면 될 것을, 이 녀석은 내 허리를 끌어안아 자신의 볼륨감 있는 육체에 완전히 안긴 자세로 만들었다.
“저기, 바실리사? 이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요?”
“가만히 계세요! 지금이 정말 딱 좋다고요! 이 디테일! 이 끈적한 욕망의 디테일! 상상으로는 이런 디테일의 가미가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문제는 이런 카르엔의 개수작을 저 영애는 디테일이라면서 좋아한단 말이지. 덕분에 나와 구경하고 있는 시온의 표정만 실시간으로 썩어들어 가고 있는 셈이다.
홧김에 뒤집어엎을 까도 생각했지만, 저 미친년에게 그게 먹힐 것 같지 않았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또 이상한 포즈 취해달라고 하면 그만 둘 거예요?”
내 말에 바실리사 영애는 말없이 고개만 열정적으로 끄덕이고는 다시 그림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내가 뭐라고, 카르엔이 뭐라고 이런 걸 대가로 요구하는 걸까?
‘아니, 애초에 천사는 왜 이런 일에 협력하는 거지?’
지상에 떨어진 것은 알겠다. 그런데 떨어졌으면 용사인 카르엔이나 나를 찾아와야지, 왜 나를 주인공으로 한 동인지 제작에 열을 올린단 말인가?
‘만화부 애들한테 체력의 축복과 불면의 축복을 걸어줘서 24시간 만화를 그리게 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졸도할 뻔 했지...’
아니, 중간고사가 며칠 전이었는데, 공부는 안 하고 왜 동인지나 그리고 있어? 왜 그렇게 남의 동인지에 진심이야?
모르겠다, 저 뒤틀린 열정들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나마 카이엔이 여자로 변했으니까 다행이지, 남자인 카이엔하고 이런 자세를 취했으면...’
지금 자세를 봐라, 서로의 허벅지가 맞닿아있고, 내가 조금이라도 흥분하면 카르엔의 중요부위에 닿을 것만 같다.
내 가슴에는 이미 카르엔의 커다란 가슴이 짓누르고 있고 내 입술은 자꾸 카르엔의 숨결이 간지럽히고 있다. 민트향이 코끝을 부드럽게 자극하기 까지.
그런데 내 눈앞에 있는 게 카르엔이 아니라 카이엔이었다면 나는 이 자세를 1분도 견디지 못했을 거다. 그래, 다행...
‘...어라? 여자로 변해서 다행이라고?’
설마, 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래도 이건 너무 과한 생각이겠지?
카르엔으로 변한 카이엔, 어쩐지 변신 이후로 사라진 거부감, 내가 좋아할 만한 이벤트라는 알림...?
“자! 다 끝났어요! 완벽해요! 이 스케치! 차기작의 영감이 마구 떠올라요!”
내 의혹이 어딘가 중요한 부분에 닿으려는 찰나, 커다란 바실리사 영애의 목소리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불편하신 곳은? 이 암컷 타락남이 기분 나쁘진 않으셨나요? 달래드릴까요?”
“아니, 괜찮으니까 호들갑 떨지 마.”
시온이 그 외침과 함께 내게서 아쉬운 표정의 카르엔을 떼어내며 내 몸에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것처럼 손으로 옷을 털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중요한 건 카르엔이 아니라 천사 사르디엘의 정보를 얻는 거니까.
“저...”
“설마 본인의 협조로 이렇게 좋은 작품을 얻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너무 좋아요! 아르틴 루드비히님! 고마워요!”
내가 사르디엘에 대해 묻기 위해 다가가자, 바실리사는 내 손을 꼭 부여잡으며 감사인사를 하더니 갑자기 내 팔을 와락 끌어안았다.
뭉클! 뭉클!
그 커다란 가슴의 감촉이 옷 너머로 생생하게 전해졌다. 역시 뱀파이어라 그런가, 이 부드러운 감각은 엘프인 세니아 선생님에게 뒤지지 않는 자애로운 감촉이었다.
“어때요? 나중에 좀 더 저를 도와주실 의향이 있다면 저도 아르틴님을 ‘개인적’으로 ‘도와’드릴 의향이...”
“아뇨, 사양합니다. 그 보다 사르디엘에 관한 정보나 주세요.”
퇴폐미가 가득한 눈웃음과 간들거리는 목소리로 나를 유혹하는 바실리사.
허나 나는 가슴골에서 황급히 팔을 떼어내며 그녀에게 완전히 선을 그으며 여자 가발을 벗어 던졌다.
‘내가 미쳤다고 이런 지뢰를 또 밞아? 게다가 저 여자의 미친 취향에 어울려 주는 건 절대 사양이지.’
아무리 강하고 아름답고 영향력이 있으면 뭐하나, 이 여자까지 내 하렘으로 들였다가 벌어질 영향들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저 반짝이는 적발! 저 붉은 눈! 저 커다란 젖가슴! 저것에 홀렸다가는 남자로서의 아르틴마저 잃어버릴게 분명했다.
만약 동정 아르틴이었다면 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침실로 갔을지도 모르지만...지금의 나는 다르다. 당당한 하렘의 주인 아르틴 루드비히라고!
“..아르틴이 가슴의 유혹을 이겨내다니?”
“세상에, 도련님이 정말로 정신적으로 성장하셨나봐요..!”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다 들렸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정신을 차렸으면 저 두 녀석을 하렘에 들이거나 파트너로 삼을 일도 없었을 텐데. 내가 미쳤지 진짜.
“아쉽네요...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사르디엘님이 계신 만화부의 비밀 아지트를 알려드릴게요.”
바실리사는 그런 말을 하더니, 갑자기 가슴 골 안에 손을 넣고는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뭐지? 또 유혹하는 건가?
“자, 이게 사르디엘님이 있는 상점가의 비밀 아지트로 가는 약도에요. 암호까지 적혀있답니다.”
“...이게 왜 가슴골에서 튀어나옵니까?”
그 가슴골에서 튀어나온 종이에는 확실히 제대로 된 위치와 암구호들까지 세세하게 적혀있었다. 아마 간부급들에게만 배포하는 중요 서류인 것 같은데.
“그야, 이런 곳에 숨기면 학생회에서 저를 찾아와도 못 찾을 것 아니에요? 아무리 몸 수색을 해도 설마 가슴골까지 뒤져보겠어요?”
“...”
이 여자, 역시 제정신이 아니다. 방금 유혹을 떨쳐내길 잘했다고 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나저나, 아무리 모델을 해줬다지만 이런 중요한 걸 저한테 함부로 넘겨도 됩니까? 학생회에 알릴 지도 모르는데?”
“어머, 그래봤자 라고요? 저희 만화부는 수십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동아리. 그 뿌리는 학생회 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의 깊은 곳에도 파고들어 있답니다...흐흐...”
“...”
그 말에 소름이 쫙 돋았다. 학사처라면 교수나 직원 중에도 만화부와 협력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 아닌가? 이 뒤틀린 취향의 귀족들이 도대체 어디까지 손을 뻗은 거지?
“게다가, 미리 언질을 받은 게 있거든요.”
“...네? 언질이요?”
“네, 아르틴 루드비히님이 오면, 자신이 있는 위치를 알려줘도 좋다고 모든 간부들이 언질을 받았거든요.”
그 말은, 사르디엘은 내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소리였다는 거잖아?
‘아니, 그보다 잠깐...’
그 사교계의 비밀스러운 영애가, 시온에게 하루만에 뒤를 잡혀 교섭을 한게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일부러 시온을 유도해서, 교섭을 내민 겁니까?”
“후후, 본인에게 만화의 모델을 해달라고 할 기회가 자주 오진 않을 테니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어쩐지 당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 이런 여자였지. 카이엔의 곁에서 더러운 일을 도맡아서 처리하는 무시무시한 암투의 여귀족.
“그보다, 남자로 돌아오시면 다음에는 카이엔님을 모델로 만화를 그려보고 싶은데 어떤가요 카이엔님? 사실 전부터 카이엔님을 쭉~모델로 지켜보고 있었...”
“빠, 빨리 가자 아르틴! 시간이 없잖아!”
“어? 응.”
바실리사의 타겟이 자신으로 변하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 좋게 웃던 카르엔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리며 다급하게 외쳤다.
‘저것도 순애라면 순애겠지?’
회차가 변했는데도 처음 마주치자마자 저렇게 카이엔을 향해 눈을 번뜩이다니. 저것이 찐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나중에 카이엔의 방의 위치를 알려줘야겠다고 다짐하며, 방에서 빠져나온 우리는 마차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
똑똑똑.
“오늘은 손님 안 받습니다.”
“손님이 아니라 귀인이 왔습니다.”
“...용건은?”
“흰 백합과 검은 장미.”
끼이익!
암구호를 외자, 평범한 여관의 뒷문이 천천히 열렸다.
“어서오십시오, 사르디엘님의 손님분들, 안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나를 보며 태연하게 비밀아지트로 안내하려는 여관주인을 보며, 어쩐지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제국의 정보부가 협력자랑 접촉할 때랑 방식이 똑같네요...?”
“언더시티에서 밀수꾼들 창고 들어갈 때도 이거랑 비슷했는데...”
“나도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려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만화 제작이 뭐라고, 시내에 있는 여관 하나를 통째로 대여해서 비밀 아지트로 개조한단 말인가?
‘그것도 상단 출신 회원들이 돈을 모아서 10년간 대여했다고 했던가?’
말이 안 되는 규모다. 이 정도면 버려진 장미관에서 꼼지락 거리던 육망성 놈들보다 체계적인 비밀조직이 아닐까?
“이쪽입니다. 따라오십시오.”
끼익, 여관주인이 창고 아래에 있던 비밀문을 열고 내려가는 것을 따라가자. 곧 이어 비밀 아지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
“톤 업무 맡을 사람!”
“여기, 먹칠 담당 로즈마리 먹칠 끝났습니다!”
“좋아! 아직 먹칠할 페이지가 20페이지나 남았어! 다음 콘티가 나오기 전에 서둘러!”
아지트 내부는 완전 전쟁터와 같은 분위기였다. 학생, 직원, 하인, 심지어 호위로 보이는 이들 까지 전부 자리에 앉아 붓과 펜을 끄적이며 만화를 그리는 모습은 장광에 가까웠다.
“30명? 아니, 40명은 훌쩍 넘을 것 같은데?”
“도대체 여관 아래를 얼마나 개조했으면 이 정도 공간이 나오는 거지?”
“...이 재능을 만화에만 쏟는 게 차라리 다행이네요.”
시온의 말에 나는 조용히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재능을 마약제조 같은 나쁜 일에 썼다면 어지간한 빌런 조직보다 무서운 일이 될 것 같았...
“어? 저거 실버 기숙사 사감 누님 아니야?”
“...”
내가 가리킨 곳에는, 요즘 잘 안보이던 실버 기숙사의 사감을 맡고 있는 20대의 누님이 눈을 비비며 만화를 그리는 장면이었다.
“...저 누님은 어째서? 원래는 만화부가 아닐 텐데?”
“요즘 브론즈 기숙사 사감 아저씨가 연애하고 나서부터 표정이 안좋더라니...”
“어? 연애를 한다고? 그 사감 아저씨가?”
“몰랐어? 바이올렛이 소개시켜준 마녀랑 사이가 좋다고 깨가 쏟아지던데.”
“바이올렛이 소개를? 왜? 나는 처음 듣는데?”
“네가 시온하고 싸웠던 그 날, 네 방문을 열어주는 댓가로 바이올렛이 소개팅을 해주겠다고 했던 게 잘 됐다나봐.”
“...”
그 말에 나는 침음성을 삼켰다. 내가 멀쩡한 누님 하나의 짝사랑을 망가트리고 부녀자로 만들었구나.
“...들어가죠 도련님.”
“그래.”
대회를 언급하자 표정이 살짝 굳어진 시온이 재촉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관주인을 따라 더 깊은 방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 방 안에, 사르디엘님이 계십니다. 그럼 이만.”
“아, 감사합니다...”
분명 평범한 여관주인 같은 남자는, 마치 중후한 조직의 수장과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천천히 물러났다. 도대체 뭘까 저 사람은?
“모르겠다. 그보다 천사 사르디엘이 이 안에 있단 말이지...”
나는 쉼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천사. 강대한 기연, 큰 가슴. 섹시한 조력자! 동료!
‘천사라면 분명 현명하고 자애로운 그런 느낌이겠지! 분명 마왕을 물리치는데 큰 도움이 될 거야!’
조금 마구니가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뒤로하고, 나는 기대감에 부푼 채로 사르디엘의 방문을 활짝 열었다.
“계십니까, 천사 사르디엘님! 아르틴과 용사 카이엔이 찾으러 왔습니다!”
“드르렁...피유! 드르렁...”
방문을 열자...내가 기대한 것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 벌어져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책들과 옷가지, 심지어 구석에는 여성 속옷이 한 무더기가 쌓여 언덕이 만들어져있었다.
그 방의 한켠에 놓여진 침대에는 한 여인이 코를 골며 늘어져라 자고 있었다. 원피스형 잠옷을 배까지 까뒤집고 하얀색 팬티를 드러낸 채 배를 긁적이는 그 모습은, 내 상상 속의 천사와는 조금 많이 달랐다.
“저게 천사라고요? 저게?”
“...상상과는 많이 다른데.”
“저기, 사르디..엘님?”
“..흐어, 응? 머야? 밥시간이야? 밥?”
설마, 하는 마음으로 다시 이름을 부르자, 파란머리의 여인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천천히 고개를 들며 일어났다.
에이, 설마. 저게 천사라고? 아니겠지.
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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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완료!
축하합니다! 당신은 노력 끝에 천사 사르디엘을 찾아냏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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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 생각을 비웃듯이, 한 템포 느리게 상태창이 내 눈앞에 울리며 못을 박았다.
이야, 요즘은 상태창이 오타도 나는 구나?
“저 사람이 천사 맞다네 애들아.”
“...정말요? 저게?”
“...타락천사가 아니라?”
여전히 비몽사몽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밥을 찾는 천사를 보며, 우리의 눈이 차게 식었다.
정상이 없네, 정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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