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196화 (196/266)

〈 196화 〉 위대한 대천사 사르디엘

* * *

드디어 찾아낸 천사, 사르디엘은 우리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이상하다. 배를 벅벅 긁으면서 만사가 귀찮다는 저 표정과 행동거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유니코르?’

그래, 2회차 때 철들기 전 유니코르의 모습이 눈앞의 사르디엘과 꼭 빼닮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만화책들, 침대 옆에 우겨넣은 과자봉지, 사람이 눈앞에 있는 데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배를 까대는 모습까지...

요즘은 유니코르가 철이 들어서 그런지 그런 나태한 모습은 자주 보여주지 않아. 이제는 추억 속에서나 떠올릴 법한 모습이긴 했지만 말이다.

“정말, 이 사람이 천사 사르디엘이 맞는 거야?”

“솔직히 그냥 봐서는 주말에 도련님 없을 때 유니코르 같은 데요?”

“...어? 유니코르 요즘도 저래?”

“네, 자주는 아니고 가끔, 도련님 없을 때 가끔.”

아...요즘도 그러는 구나...

어쩐지 자리 비우고 올 때마다 유니코르의 냄새가 침대랑 이불에 흠뻑 배어있더라니...

“흐아암, 유니코르라니,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야? 너희들의 눈앞에 있는 건 천상에서 내려온 대천사라고.”

“앗, 죄송합니...어라, 유니코르를 아세요?”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사르디엘은 나긋한 눈웃음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전부 다 알지. 너에 대한 건 전부. 아르틴 루드비히. 그리고 시온 이드리스와 우리 용사양에 대한 것 까지.”

“...애는 원래 남자인데요?”

“아차, 실수. 지금 생긴 게 너무 예뻐서 착각했네?”

내 말에 천사는 뭔가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카르엔 쪽을 바라봤다. 아니 그래도 착각할 게 따로 있지.

“안 그래 ㅋ...너 표정이 왜 그래?”

“응?!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내 상상 속의 천사랑 이미지가 달라서!”

“음...확실히 그렇긴 한데...”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확실히 내가 기대하던, 그리고 기억하던 천사의 모습과는 너무 많이 엇나간 느낌이다.

지난번 용사 임명식에서 봤을 때만 해도 분명히 좀 더 신성하고, 신비하고 아름다운 느낌이었는데...역시 진짜 타락천사 아닌가?

“네 눈에 의심이 가득한 것 같네, 그렇지 아르틴 루드비히?”

“그야, 천사라는 분이 머리가 헝클어진 채로 나태한 백수처럼 굴고 있으니까요?”

“아하하, 확실히 그렇네. 그러면 이렇게 하면 믿을 수 있을까?”

따악, 사르디엘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나와 두 사람의 몸의 주변에 반짝이는 불꽃이 가볍게 타올랐다. 누가 봤다면 1써클 마법사가 소마법으로 장난이나 친 줄 알 것 같은 이펙트였지만...

“어라? 어쩐지 몸에 활력이 가득 차오르는 것 같은...?”

시온은 처음 느껴지는 엄청난 활력에 당황하는 표정을 했지만, 이 활력이 어떤 주문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있는 나와 카르엔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 수밖에 없었다.

“...‘천상의 선율’, 이 고위 성법을 이렇게 가볍게 행사한다고?”

“교단에서도 성가대를 불러와야 가능한 축복을 이렇게 단숨에...”

천상의 선율, 듣는 이로 하여금 삼일 밤낮을 싸워도 지치게 하지 않는 최고위 버프 중 하나이다. 게다가 단순히 성법에 재능이 있다고 사용 가능한 버프가 아니다.

이 버프에 선율이라는 표현이 이름에 붙은 이유는, 지상에서 천상의 선율을 재현해야지만 가동이 가능한 가장 위대한 축복중 하나라서 그렇기도 하다.

때문에 성법에 있어서는 최고의 재능을 가진 천사박사 토마스나, 여신의 화신인 올가도 같은 수준의 성법이야 쓸 수 있겠지만, 천상의 선율 자체를 혼자서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내가 비록 지금은 날개를 4장 밖에 허락받지 못했지만~옛날에 천상의 대전쟁 당시에는 악기를 연주하며 앞장서던 선율의 천사기도 했거든? 이 정도면 믿을 수 있겠어?”

천사 사르디엘은 우리의 표정을 보며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자신이 인간과 천사 사이의 격차를 확실히 보여줬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아뇨, 천사인건 진작 믿었어요. 상태창에서도 당신을 천사라고 했었고.”

“...어라? 그래?”

“그런데 되먹은 천사인지가 의심스럽다는 거예요.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천사 같지 않으니까요.”

“..에에엥? 내가? 내가 왜?! 이 고고한 자태! 아름다운 외모! 누가 봐도 위대한 대천사잖아? 지난번에 눈웃음으로 인사도 해줬는데!”

아, 역시 그거 일부러 날 보고 인사를 한 게 맞았구나.

“정상적인 천사는 하계에 강림해놓고 남자들끼리 사랑을 나누는 이상한 만화를 제작하는 데 도움을 주진 않죠.”

“...”

“아니, 평범한 BL물도 아니고 그 짧은 시간 사이에 TS에 이종족에, 온갖 걸 다 만들어 놓고 멀쩡한 천사라고 주장하면 어떻게 믿어요?”

“그건...”

내 말에 천사가 열심히 도르륵 눈동자를 굴려대기 시작했다. 내 오랜 경험상 저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치고 정상인은 없었는데.

“하하하, 인간 아르틴. 천상의 위대한 뜻을 인간의 눈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겠지.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너를 위해 한 일이란다?”

“...제가 오크한테 깔려서 앙앙대는 만화를 그리는 게?”

“물론, 전부 너를 위한 일이었지. 무엇 하나 너를 위하지 않은 일이 없단다.”

그 말을 한 천사 사르디엘의 목소리에 갑자기 에코가 깔리더니, 등 뒤로 4장의 날개가 화려하게 펼쳐졌다. 그 광경을 눈앞에서 목도한 나는 그 순간 빈정거리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보석도, 저 여인의 날개보다 아름답게 반짝이지는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동안 멀리서, 혹은 아주 잠깐 천사를 목격한 적은 있었으나, 이토록 가까이서 확실하게 천사의 신성한 자태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믿겠느냐, 인간 아르틴 루드비히? 아니면, 양희민이라고 불러줘야 좋을까?]

[...뭐, 뭐라고요?]

설마, 내 현실 시절의 이름을 여기서 듣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마 지금 내 표정은 완전히 경악에 물들지 않았을까?

[걱정하지 말거라 아해야, 나는 진심으로 너를 아끼고 사랑하는 수호천사. 그렇기에 너에게 도움이 되고자 이 땅에 친히 강림한 것이니까.]

[...]

[두려워하지 말거라, 무지는 언제나 두려운 것이나, 나는 온전히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땅에 내려왔느니라]

어느 순간 나는 그녀의 기세에 짓눌리는 감각마저 느끼고 있었다. 이 압도적인 존재감은 단순히 4장의 날개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에서 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 느낌은 다르지만 메피스토가 인계에 강림할 때 느꼈던 그 위압감. 상대방을 찍어 누르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포옹하는 성질을 지녔고 격도 다르지만, 본질은 메피스토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는 생각이 없었다.

[이리 오거라, 이리 와서 나에게 안겨 보거라, 나는 그 동안 너의 고통과 고난, 슬픔과 두려움, 분노와 증오를 같이 함께 했느니라.]

“아, 아아...”

부들부들 발이 떨렸다. 그 자애롭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어쩐지 울컥하는 감정이 내 가슴에 차올랐다.

그건 어쩌면 내 연인들이 회귀 전 기억을 찾았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수십 년간 반복하던 고통을, 누군가 알아줬을 때의 그 기쁨. 환희, 행복.

풀썩,

어느새 내 몸은 사르디엘의 앞에 서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사르디엘은 그런 내 몸을 일으켜 세워주마, 따뜻한 빛과 함께 두 팔로 감싸 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알고 있단다. 많이 힘들었겠지.”

“...”

“몇 번이나 실패했다고 자책했겠지, 그럼에도 아무도 네 마음을 모르고, 언제나 처음으로 돌아가 새로 시작하는 일이 어찌 힘들지 않겠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를 달래는 이 여인은 정말로 내 모든 고통과 슬픔을 지켜보며 진심으로 바라보던 이라는 사실을.

“걱정 말거라, 너의 고난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며, 언젠가 그 결실을 맺을 테니까.”

“...끄윽...”

“그러니, 지금은 그저 내 품에 안겨 울 거라, 그래도 좋다. 너는 그럴 자격이 있는 아이니까.”

서러움이 가슴에서 터져 나왔다. 만약 세니아 선생님이 없었다면, 아무도 기억을 찾지 못했다면 이 자리에서 탈진할 때 까지 울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4번이나 죽어야 했다. 그 세계에서들은 아무것도 구하지 못했다. 그리고 눈을 뜨면 새로운 세계가 시작됐지만, 그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정말 내가 알던 진짜 친구들일지, 동료일지 언제나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멍청하게 매번, 매번 진심을 다해 사람들을 갈구했고 애정을 갈구했다.

이 세계가 누군가가 창조한 거짓세계라고 할지라도, 내게는 현실보다 더 진짜 같고 낙원 같은 세계였으니까.

가끔은 생각했다. 나는 사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소설 속에 빙의한 것이고, 모든 게 가짜라면, 그렇다면 그냥 전부 다 박살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진심으로 사람을 대할 필요 없이, 효율에 따라 사람을 베어 죽이고, 기분에 따라 구하지 않아도, 모든게 가짜라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게 아닐까? 하고.

...허나, 그 아이들이 기억을 되찾기 시작했을 때, 모두가 없이 혼자 남은 방에서 서글프게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이 세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모든 게 가짜가 아니라고, 나는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믿을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나를 다정하게 끌어안은 천사는 내게 그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흐아아악! 흐윽, 흐아아악!!!”

“전부 토해내도 좋단다. 나는 너의 곁에 있기 위해 이 땅을 택한 것이니까.”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내 진심은, 내 행동들은 이 세계에 남아 흔적을 남기고 있던 것이다.

*

“파트너...”

카르엔이 아르틴의 곁에 다가가 어깨를 토닥였지만, 아르틴은 계속해서 어린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그 사실이 카르엔에게는 너무 가슴 아픈 일이었다.

허나 아르틴을 탓할 수 없었다. 자신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런 사실을 알려 준 아르틴에게 얼마나 고마운 감정을 느꼈던가.

아무리 강철과 같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경험하는 건 익숙치않은 일이다.

하물며 아르틴은 얼마나 가시밭길을 스스로 감내하며 달려온 것인지, 옆에서 쭉 지켜봤던 카르엔은 알고 있었다.

“저...”

그때, 뒤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대성통곡 하는 아르틴을 제외한 두 여인의 시선이 시온에게로 향했다.

당황한 듯한 시온의 표정, 허나 두 여인은 시온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아르틴의 고난을 옆에서 지켜본 자들만이 이해해줄 수 있는 감각이니까.

이번 생애야 처음으로 아르틴의 곁에 선 시온으로써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감각이리라. 그녀들이 마음 넓게 이해해줘야 할 입장이었다.

“시온, 상황이 이해할 수 없는 건 이해해, 하지만 지금은 아르틴이 울 수 있게 내버려두자.”

“맞습니다, 아르틴은 그저 지친 것 뿐이니까요. 여기서 기운을 얻으면 다시 당신이 알던 아르틴으로 돌아올 겁니다. 그러니...”

“아니, 저 그게 아니라...”

시온은 두 사람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분명 회귀를 같이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었고, 때문에 지금의 상황을 공감하진 못해도 이해는 할 수 있었으니까.

시온이 그녀들과 아르틴을 부른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만화책 사이에 놓여있던 서류 뭉치들을 천천히 주워들곤, 내용을 살피며 아연실색한 표정이 되었다.

“그게 아니라, 이 이상한 만화책들...아카데미 밖으로 수출까지 하셨어요?”

“...”

그 말에 사르디엘의 몸이 아주 크게 떨렸다. 자세히 보니, 시온이 들고 있던 것은 이전에 사르디엘이 검수했던 만화책의 수출 보고서가 틀림없었다.

‘저게...왜...저기에...?’

“공화 연방으로 40부, 제국으로 100부, 왕국에 50부씩, 게다가 각 교단이랑 언더시티에...드래곤 로드에게는 도대체 왜 보낸 거예요? 게다가 1권당..이게 도대체 얼마야?”

“...”

천사는 이물질을 생성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사르디엘은 자신의 등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올가 비르투스님한테는 전권 세트 모음집으로...예? 이게 무슨?”

“그, 그만! 그것도 전부 천상의 큰 뜻이니라! 어서 그 서류를 내게 줘!”

다급하게 외치던 사르디엘은, 문뜩 어느 순간부터 아르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아하하, 작은 오해가 있구나. 허나 의심하지 말거라, 나는 너를 위해곁에 왔단다.”

“...”

“...아르틴? 무슨 말이라도 해보거라. 응? 그렇게 입 다물지 말고. 으응?”

자신의 가슴 품에 안겨, 일말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아르틴의 시선을 버티지 못한 사르디엘은 말투와 표정이 점점 무너졌다.

허나, 아르틴의 그 차가운 눈빛은 사르디엘을 향해 고정된 상태로 쭉 계속됐다. 이제는 사르디엘이 아르틴 대신 대성통곡을 하고 싶은 마음이 슬슬 생겨나기 시작했다.

띠링!

─────────────────

제가 대신하여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

아르틴의 눈앞에, 평소랑은 다르게 공손한 말투로 상태창의 사과가 떠올랐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