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화 〉 위대한 대천사 사르디엘 #02
* * *
“하아.”
어쩐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 마음이 마음 같지가 않아서 그런가, 아무리 참아보려고 해도 이 부글부글 끓는 속을 따라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아르틴, 이제 그만 화 풀어, 응?”
어쩌겠는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눈치를 살피며, 교태가 살짝 섞인 목소리로 아양을 떨고 있는 자칭 대천사를 보고 있으면 이놈의 울화통이 계속해서 터질 것 같은데.
“아잉, 그러지 말고. 내가 책으로 번 돈도 너한테 다 줬잖아?”
“당연히 줘야지. 남의 초상권을 싸그리 무시한 채 만든 동인지로 번 돈인데, 그 돈으로 호의호식 하려고 했습니까?”
“그, 그래도...수고비 정도는 조금 챙겨줘도 되잖아...응?”
수고비, 수고비란다. 도대체 뭘 잘했다고 수고비를 달라고 하는 걸까?
“시온, 저 여자 손 내려가지 못하게 제대로 감시 잘 해. 이러다가 또 대성통곡 할 것 같으니까.”
“네, 도련님! 1cm도 못 내리도록 똑바로 감시할게요!”
시온이 눈을 희번덕이며 대답하자, 사르디엘은 시온의 기세에 겁을 먹은 것인지 울먹이면서도 들고 있던 양손을 더 높이 들어올렸다.
옆에 서서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카르엔은 한숨을 쉬며 떨리는 내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아르틴, 화가 나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천사인데 저렇게 대해도 될까?”
“무슨 소리야 파트너. 천사니까 살려뒀지.”
“...”
“저게 그냥 평범한 빌런이었으면 진짜로 때려 죽였어.”
내 말에 카르엔은 뭐라 말을 하려다가도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그야 조금 전 사르디엘의 뻔뻔한 모습을 두 눈으로 본 사람이라면, 이게 심하다는 말은 절대 하지 못할 것이다.
나도, 나도 처음에는 그래도 믿었다. 무슨 큰 뜻이 있을 거라고!
“왜 이런 짓을 했냐고? 정말 사실대로 말해달라고?”
“그야...재밌으니까?”
장담컨대, 나는 소설 속에 빙의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착하거나 고구마일게 분명했다. 저런 것도 천사라고 살려두고 있으니 말야.
“히잉..그,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줘...나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벌인 일이라니까? 재미 때문이라는 건 농담이라고!”
“하하, 2회차 때 유니코르도 그런 개소리를 하면서 내 탈모를 놀려대곤 했는데, 천사님이라고 다를 것 같지는 않은 걸요?”
참아야지, 모발 건강에 안 좋다. 요즘 관리 잘해서 장발로 길러도 되지 않을까 싶은 데 굳이 스트레스를 사서 받을 필요는 없으니까.
“후우우우...그래서, 정말로 타락천사도 아니고 악마가 변장한 것도 아니고, 진짜 대천사라고요?”
“그렇다니까? 자칭 대천사가 아니라 전 대천사! 물론 얼마 전 까지는 중급 천사였지만...! 내가 그래도 대천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만점인 천사 중의 천사였다고?”
“그렇게 인기 많고 대단한 천사가, 왜 대천사에서 중급천사가 됐습니까?”
“그게! 정말 억울한 일이거든?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천사님, 손은 자연스럽게 드세요. 도련님이 내리라는 말 안했잖아요?”
은근슬쩍 손을 내리고 내 곁에 와 앉으려던 사르디엘은 다시 한 번 눈을 희번덕이며 레이피어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시온의 기세에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무튼, 정말 억울하거든! 내가 장난은 좀 치긴 했어도 사고는 안 쳤단 말이지?”
“.......예 뭐, 이건 사고로 안칩시다. 그래서?”
“그래도 여신님은 단 한 번도 내 장난에 화를 내시지 않으셨단 말야! 나는 그게 고마워서 진심으로 여신님에게 선물을 드렸거든! 그랬더니 노발대발해서는 30년 간 중급 천사나 하라지 뭐니!?”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저 짧은 말 속에서 주변 천사들이 얼마나 골치를 앓아왔을지 짐작이 되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으면 미친 듯이 피곤해지는 스타일이구나.
“여신...여신님을 만난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무슨 선물을 했길래 그렇게 화를 냈습니까?”
“아니, 나는 그냥 여신님이 드실 빵을 좀 더 맛있는 빵으로 바꿔드렸을 뿐이거든! 그것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빵으로!”
“...빵? 고작 빵 때문에 천사 계위를 강등 했다고요?”
“그래! 건포도가 들어있는 빵이 얼마나 맛있는 데!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마음을 담아서 잔뜩 넣어서 직접 구웠단 말야!”
사르디엘의 열띈 외침에, 나는 내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건포도? 건포도가 들어간 빵?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
건포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르디엘은 방금 이 짧은 대화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안하무인이며 방약무인한 사람인지 확실히 어필을 해낸 것이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확실하게.
“파트너, 이거 당장 천계로 반품하는 게 좋지 않을까?”
“...진정해 아르틴, 실망하는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정말 대천사잖아? 우리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될 거야.”
“그건...그렇지만...”
한숨이 나왔다. 실제로 저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지금 이 타이밍에 나타난 천사는, 전에도 말했지만 억만금을 줘도 모실 수 없는 귀중한 기연이었으니까.
유니코르를 강제로 떠맡았을 때와 비슷했다.
그 천방지축이 연인이 되기 전에 내쫓지 않은 건 아웃사이더만 보면 차오르는 내 동정심도 있지만 녀석이 내게 있어서 엄청난 도움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각성의 초입에서 벗어날 최고의 기회니까, 평소라면 내가 사르디엘의 펫을 자처해서라도 모셔오는 게 맞는데 말야...’
아르틴 루드비히의 몸은 재능이 없다. 역설적이게도 이 몸으로 군단장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 본 나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남들이 보면 무슨 개소리냐고 하겠지만, 4회차 당시의 나는 그 3년 간 내가 이전 회차에서 쌓아왔던 모든 경험을 동원하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기연을 혼자 독식해서 강해지고 나서야 그런 압도적인 강함을 쌓을 수 있었다.
장담하건데, 내 주변에 있는 인물들 중에서 그만큼 기연을 쳐먹고도 육체적으로 4회차의 나보다 약할 녀석은 단 한명도 없다.
물론 기연을 얻는 과정의 고통과 고난을 버틸 수 있냐는 다른 문제긴 하지만, 만약 얻었다면 조르바나 시온, 하다못해 클레어를 데려다 놔도 그때 나보다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 3회차 당시에 어설프게나마 기연을 다 몰아줬던 카르엔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생각해보면...’
그 교단 놈들만 나대지 않았다면, 3회차 당시에 진짜 마왕을 잡았을 지도 모른다. 리처드 황태자나 카르엔은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진짜 천재들이니까.
‘이번에 중간고사 준비하면서 뼈저리게 느꼈지, 내가 쌓은 경험들은 하드웨어가 딸리면 제대로 써먹질 못하는 소프트웨어에 불과해.’
카르엔이나 리처드 황태자는 검술이나 마법에 있어서도 그 천재성에 기반한 자신만의 독보적인 체계를 쌓았다. 단순히 육체적인 재능이 아니라, 무언가를 배우고 익힘에 있어서 범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기민함을 보인다.
그에 반해 인간 양희민은 속이 쓰릴 정도로 범재다. 그런 내가 익힐 수 있던 건, 어떤 상황에도 100%의 재능을 낼 수 있는 천재들의 영역이 아니다.
검은 헬릭 교수님의 방식을 따라 최대한 올바른 방식을 우직하게!
전투는 마리안느 누님의 방식을 따라 최대한 가진 힘과 기교를 살리는 방식으로!
마법? 마법은 3회차 때 메피스토와의 계약으로 얻었던 지식을 곰탕마냥 우려먹는 것에 불과하다.
‘피지컬만 만들어지면 두 사람에도 절대 뒤지지 않을 것 같지만...문제는 이제 중간고사가 끝났다는 거지.’
아주 먼 옛날 말했던 것 같지만 이 세계는 중간고사가 끝나기 전까지는 밝은 분위기의 먼치킨 아카데미물을 표방한다.
문제는 던전 실습 이후, 이 세계는 자신의 숨겨진 송곳니를 여과 없이 드러내며 목숨을 몇 번이고 걸어야 하는 하드 난이도의 다크 판타지로 변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시간이 압도적으로 부족하다. 나는 천재인 두 사람과는 다르게 시간이 있어야 강해지는 데, 이 세계는 당장 천재들이나 해결할 수 있는 일을 해결하라고 나를 재촉한다.
넘쳐나는 빌런들과 계속해서 터지는 사건사고들, 그것들을 전부 처리하면서 순수하게 훈련으로만 강해지려고 하면 뱁새가 가랑이가 찢어지는 수준이 아니다. 사지가 찢어져서 오체분시 당하는 수준이다.
“생각해봐 아르틴, 지금 천사랑 계약하면 너한테 득이 됐지 해가 되진 안잖아. 이건 고민할 문제가 아니야.”
“그건, 그건 그렇긴 하지...”
현재의 내 몸의 잠재능력은 각성의 초입.
범인, 개화, 각성, 초인, 초월, 승천으로 나뉘어지는 잠재능력으로 따지면 겨우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게 된 정도다.
그런데 이것도 순수하게 강해진 게 아니다. 물론 그 좋은 영약들을 만들어서 몸에 꾸준히 부어댄 덕도 있지만, 잠재능력이 강해진 1등 공신은 다름 아닌 유니코르와의 계약 덕이다.
녀석의 힘과 권능이 내 신체에 깃들어, 잠재능력이 강제로 성장하고 신성력을 다루는 힘을 얻게 된 것이지, 근본적으로는 이 모든 것은 내 힘이 아니라 유니코르의 힘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계약은 어디서 없는 힘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서로가 가진 힘과 권능을 주고받는 과정이다.
내게 그렇게 힘과 권능을 퍼준 만큼 당연히 유니코르는 약해지기 마련이다. 만약 유니코르가 계약을 안했다면 권능도둑 정도는 짓눌러 밟아 죽일 정도의 힘은 남아있었겠지.
요즘은 내게 힘을 보태겠다고 유니코르 스스로 이런저런 수련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유니코르의 힘과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유니코르에게 칭찬을 좀 해줘야겠네. 오늘 돌아갈 때 당근 케이크 사가야 겠다.’
아무튼, 신수인 유니코르보다 더 강하고 신성력도 강한 천사와 계약한다면, 나 자신이 강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유니코르도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받아야 하는데. 하는데..!
“파트너, 네가 계약해서 강해지면 안 돼? 나는 저 사람 감당하기가 벅찰 것 같아.”
“...”
분명 가슴도 크고 아름답고 큰 도움이 될 건 확실해 보이지만...내 본능이 고하고 있다.
‘이거 받으면, 2회차 당시 유니코르하고는 비교도 안 될 고통의 시작이라고.’
“..아르틴.”
“너도 강해지면 좋잖아? 아니지, 네가 강해져서 혹시 나타날 빌런들을 전부 해치우면, 그 동안 내가 다른 존재들하고 계약도 맺고, 훈련도 천천히 하면 되니까...”
“...나도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
말이 목에 걸렸다. 카르엔이 이렇게 솔직하게 말할 줄은 몰랐는데. 적어도 좀 돌려서 거절할 거라고 생각한 내 기대를 확실하게 부쉈다.
“나도, 나도 저런 미녀를 네 곁에 두고 싶지 않아, 내가 강해져서 너를 지켜주고 싶은 것도 사실인데...미안해, 나는 저런 사람을 데리고 다닐 자신이 없어.”
“...”
“파트너는, 그래도 유니코르나 메피스토로 단련이 됐으니까...응? 게다가 파트너가 약하면 나도 걱정이 크고...내 마음 알지?”
“그래, 아주 뼈저리게 잘 알 것 같네.”
그래, 클레어도 제대로 감당 못하는 카르엔이 저 여자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사람 대하는 게 미친 듯이 서툰 저 녀석이 배려심 없는 천사와 계약은 무리겠지.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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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 천사 사르디엘과 계약시, 좋은 칭호도 추가 보상으로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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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내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의 알림, 좋은 칭호라. 유니코르의 경우를 생각하면 절대 손해는 아닐 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까 사과 이후로는 한 마디도 안하다가, 계약할 것 같으니까 다시 알림이 오네?”
...
다시 상태창이 고요해졌다. 말을 참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상태창 본인도 부끄러움을 알아서 할 말이 없는 건가?
‘애초에 왜 이렇게 상태창이 저 천사를 챙기는 지도 의문이지만...’
“사르디엘.”
“응! 이제 팔 내려도 되니?!”
“아니요, 그거 말고. 계약하면 제 말 잘 듣고 얌전히 있을 자신 있어요?”
“으응?! 물론이지! 내가 얼마나 얌전한데! 내가 중급 천사로 근신당한 후로는 너무 얌전히 지내서 다들 걱정할 정도였다니까?”
“아무리 들어도 개소리 같은데...”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손을 내밀어, 계약을 위한 마법의 문양을 허공에 천천히 허공에 띄어 올렸다.
그래, 수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긴 하다.
왜 상태창이 이토록 저 여자를 내게 붙이려고 했는 지.
어떻게 천사가 현실 시절의 내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지.
저 생각 없어 보이는 천사가 어쩌다 인간 세계에 내려 온건 지. 아는 건 하나도 없다.
‘그래도, 악의는 없어 보이니까.’
“정말? 정말 계약 하는 거지?! 그럼 팔 내려도 되는 거 맞지?!”
당장 눈앞에서 팔을 내려도 된다는 사실에 기뻐서 나를 향해 쪼르르 달려오는 사르디엘의 모습을 보면, 내게 큰 악의를 가진 존재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아까 나를 달래줄 때의 목소리와 태도를 떠올리면, 내게 이유 모를 커다란 호의를 가진 것은 진짜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내게 순수한 호의를 지닌 사람들을 내치는 것에는 젬병이다. 이 답답한 성격 탓에 온갖 미친년들이 주변에 꼬이기는 하지만...
“나, 아르틴 루드비히는 계약의 성좌 솔로몬의 술식에 따라, 천사 사르디엘과의 계약을 위한 의식의 집행을 시작한다!”
일단 정한 이상 망설이지는 않았다. 내가 계약의 술식을 외우며 계약의식을 시작하자, 이 지하 건물 안에 영롱한 푸른 별빛이 떠올라 나와 사르디엘의 주변을 감싸 안았다.
“와아! 와아아! 정말로 내가 아르틴과 계약을 하다니!”
푸른 별빛들은 다시 술식의 기호가 되었고, 술식의 기호들은 나와 사르디엘의 영혼을 하나로 연결한다. 내 힘이 그녀의 것이 되고, 그녀의 힘이 내 몸에 깃든다.
동시에,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힘과 활력이 내 몸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여전히 4회차에 비하면 눈물나게 약하지만, 2회차 당시의 나를 꽤 열심히 따라잡은 게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힘.
힘들이 느껴진 순간 나는 확신했다. 이 힘만 있다면, 이 계약을 한 일에 대해 절대 후회는 없을 것 같다고.
‘그래, 힘이 약해서 느꼈던 절망에 비하면 뭐가 중요할까! 나는 강해진다! 강해져서, 이번에는 꼭 내 연인들과 친구들을 지킨다!’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이토록 쉽게 얻을 수 있다면 그깟 마음 고생 정도는 얼마든지 해주겠다고!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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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했습니다! 이미 개봉하신 상품은 절대 반품 불가능입니다!
당신이 택한 계약! 당신이 택한 천사! 절대 돌이킬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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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조금 후회해야 하나?‘
그런 나도,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상태창하고 저 천사하고 무슨 관계인거야?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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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에 의거하여, 당신의 신체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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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 의문을 뒤로 한 채, 다시 울린 상태창의 알림과 함께 내 몸이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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