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화 〉 강해지는 법 #02
* * *
“파트너...너, 너무 아파...♡”
“너 내가 시발 말 끝 뒤에 하트 붙이지 말랬지!”
나를 잡아먹으려던 카르엔의 난은, 단호한 꿀밤 삼연타로 인해 쉽게 제압되었다.
물론 카르엔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게 꽉 안기며 버티려고 했지만, 지금의 나는 카르엔에 비해 신체능력이 꿇리지 않는 편이라 제압은 쉽다.
“크응...아르틴에게 또 맞았어...”
“또 헛짓거리 하면 그때는 배에다가 주먹 꽂을 테니까, 선 좀 넘지마.”
카르엔은 눈물을 글썽이며 내게 동정이라도 사려는 듯 보였지만....
애초에 방금 전까지 나를 보면서 입맛을 다시던 녀석에게 품을 동정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 괘씸함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나는 네가 같이 강해지고 싶다고 말해서 왕이랑 계약할 때 같이 데려가줬는데, 너는 그 힘으로 나를 덮치려고 해? 이 배은망덕한 놈이...”
“내, 내가 언제 덮치려고 했다고 그래?! 그냥 천사 때문에 지친 것 같으니까 쉬다 가라고...”
점점 말을 얼버무리는 카르엔을 보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금 여자의 모습이니까 참아주지, 남자의 모습으로 이랬으면 꿀밤이 아니라 인중에 주먹을 꽂아줬을 텐데.
“제발 정신 좀 차리자, 안 그래도 초원의 왕한테 갈 때 너 같이 데려갔다고 유니코르가 요즘 나 수상하게 보거든? 제발 잘 하자.”
“...미안해 파트너. 욕심 안 부릴게...”
카르엔의 의기소침한 대답을 듣고 나서야 나는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이건 갑질이 아니라 정말 정당한 분노다
‘정말로 요즘 애들이 날 보는 눈이 점점 의혹이 담기기 시작한단 말야..’
사르디엘하고 계약한 이후, 나는 강해지기 위해 우선 아카데미 내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시도해보기 시작했다.
상태창 상점에서 플렉스 해서 최고급 영약을 만들어 먹기도 했고,
아카데미에 숨겨진 파워업 이벤트 중 빨리 끝나는 것들을 모조리 쓸어 담기도 했다.
하지만 부족했다. 영약은 꾸준히 먹어야 효과가 있는 만큼 지금으로는 상승폭이 미미했고, 천사와의 계약으로 강해진 육체에 아카데미 내부의 파워업 이벤트는 효과가 너무 적었다.
게다가 그 미미한 걸 카르엔 녀석하고 나눠먹으려니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혼자서 강해져서는 무리라는 걸 4회차 때 제대로 배웠는데.
아무튼, 그렇게 미미한 소득만을 얻는 후 이제는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야 할 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아르틴, 왜 가장 좋은 방법들은 내버려두고 이런 자잘한 것들만 챙기는 거야?”
카르엔은 내가 잊고 있던 2가지 파워업 이벤트를 떠올리게 해줬다. 그리고 오늘, 그 이벤트를 챙겨먹은 후 천마님에게 찾아가서 얼마나 강해졌는지 직접 확인해본 결과.
‘역시 초원의 왕이야. 초월자답게 성능 하나는 확실한걸.’
[아르틴 루드비히? 갑자기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냐?]
“무슨 일이기는, 이자 받으러 왔습니다. 장인어르신.“
그 날 나는 곧바로 유니코르와 카르엔을 데리고 초원의 왕의 영토로 찾아가, 초원의 왕에게 강제로 계약을 걸어 힘을 뜯어냈다.
[뭐, 뭘 하는 것이냐?! 짐은 초원의 왕 카토블레파스. 짐의 축복은 발굽 달린 것들만이 받을 수 있거늘!]
“제가 뭐 저 달라고 했습니까? 우리 유니코르랑 여신의 축복을 받은 용사한테 힘 좀 나눠달라니까요?”
“맞아요! 아르틴이 얼마나 허약한데! 왕께서 본좌를 챙겨주시면 아르틴도 챙겨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나랑 유니코르가 당당하게 따지며 요구하자, 처음에는 거부하던 초원의 왕도 결국 당근 케이크 100상자를 받는 조건으로 유니코르와 카르엔에게 힘을 나눠줬다.
그 효과는 확실했다. 사르디엘과의 계약에 초원의 왕의 힘이 더해지자, 각성 초입 언저리에 지나지 않던 나와 카르엔은 초인의 영역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강해질 수 있었다.
보통 카르엔이 초인의 경지를 찍는 데 몇 년이 걸리는 걸 생각하면, 놀랄만한 성장은 확실하다.
문제는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는 법.
며칠 동안 카르엔을 데리고 다니며 챙긴 것도 모자라, 초월자가 주는 버프도 나누자 나를 보는 여인들의 눈이 슬슬 이상해졌다.
“...아니겠죠? 아무리 그래도 오라버니가 TS 취향은...”
“수인 악마랑 서큐버스랑 유니콘을 건드렸는데, TS정도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화, 확실히...”
저 이야기를 몰래 엿 들었을 때는 너무 슬펐다.
나에 대한 연인들의 평가가 이렇게 바닥을 치는 구나. 이번에는 정말 조금도 안 건드렸는데, 순수한 선의인데.
“저기, 아르틴...?”
“잠깐만, 나 슬픔을 곱씹고 있잖아. 헛소리 할 거면 나중에 말해줘.”
“아니 그게 아니라, 이제 다른 계약은 어떻게 할 건지 궁금해서...일주일 후면 던전 실습이잖아?”
아. 카르엔의 이야기를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부분은 최대한 뒤로 미루고 싶었는데.
“...지금도 이미 초인 직전인데, 이 정도면 충분히 사람들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샤오메이는 이미 초인의 영역인데도 실패했잖아? 어중간하게 강해서는 별 도움이 안 될 거라고 생각해.”
“그으건...그렇긴 한데...”
망설여졌다. 그야,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떠올리면 당연히 망설여질 수밖에 없다.
이건 카르엔의 침실에서 무방비하게 잠들기, 사르디엘에게 케이크 맡기기, 시온에게 SM플레이를 부탁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그 만큼 위험하고 멍청한 짓이라는 소리지.
“인정해야해, 지금 상황에서 만전의 준비를 하려면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하는 수밖에 없어.”
“하아..시발...역시 그렇지? 할 수밖에 없겠지?”
초원의 왕 카토블레파스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력한 초월자. 그리고 동시에 나에게 명백히 호의를 보이고 있는 녀석. 그리고 엮이면 다른 녀석들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날 피곤하게 만드는 녀석.
지옥의 군주 메피스토와의 계약이 아직 남아있었다.
“...네가 하면 안 되겠지..?”
“너도 알잖아 아르틴, 메피스토와 계약할 수 있던 사람은 모든 회차를 통틀어서 너랑 바이올렛 뿐 인걸.
“맞는 말이야...이 까다로운 꼬맹이...”
어쩌겠는가, 그 괴팍한 대악마의 취향이 글러먹은 것을. 그나마 장미관이나 3회차 때 모습을 보면 나에게 호의가 있는 건 확실하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이번에도 부탁 한다면 온갖 이상한 조건을 내밀겠지만, 결국에는 내 부탁대로 힘을 나눠줄 것이 분명했다.
“시도는 해볼게, 알‘미라즈랑 바이올렛에게 가서 부탁하면 도와줄 테니까.”
“..내가 도와줄 일이 있을까? 파트너?”
“됐어, 괜히 또 너 데리고 갔다가 이상한 눈으로 오해받기 싫거든. 마음만 받을게.”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카르엔을 보고 있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귀찮고 짜증나는 녀석이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나를 도와주려는 모습을 볼 때 마다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다. 역시 검은 머리 짐승도 거두고 볼 일 이라니까?
“쳇, 그걸 노린 거였는데.”
“...”
아니, 검은 머리 짐승은 역시 거두는 게 아닌 것 같다.
이 배은망덕한 성욕의 짐승에게 꿀밤을 한 대 더 먹여준 후, 카르엔과 헤어져 골드 기숙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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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본가에서 할머니가 보내준 최고급 홍차거든? 향이 무척이나 좋아! 게다가 쿠키도 직접 구웠거든! 아르틴이 단 맛을 좋아해서 설탕을 잔뜩 넣었어!”
“이건 제가 스승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케이크입니다! 마계에서도 희귀한 과일인 악몽수의 과일을 써서 정말 달고 맛있다고요?”
“하하, 둘 다 고마워. 확실히 음미하면서 전부 먹을게.”
아주 오랜만에 바이올렛의 방에 찾아온 나는, 바이올렛과 알‘미라즈에게 티타임을 대접받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래, 이게 하렘이지, 이게 행복한 삶이라고. 미친년은 없는 행복한 하렘!’
생각해보면 요즘에는 계속해서 시온과 카르엔에게 시달리고, 사르디엘에게 시달리고, 시르카에게 몽마섹스빔이나 맞고, 온갖 괴짜들에게 시달리기만 했다.
그게 비정상이다. 생각해봐라, 맨 처음, 샤오메이가 가장 괴짜고 사나운 아이 취급이었던 3인의 하렘을, 그때 당시의 나는 순애보를 추구하는 평범한 상식인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유니코르가 들어오더니, 시온이 들어오고, 시르카가 날뛰고, 올가는 흑화하고 카르엔은...
‘...잠깐, 이거 이렇게 보니 내 주변에 이상한 여자들이 쌓일수록 내 상태가 이상해지는 것 같은데?’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게 이렇게 효과적이라니, 그래 생각해보면 요즘 여성관계에서 벌어진 일의 절반은 시르카 탓이 아니던가.
그래! 나는 분명 순애보를 꿈꾸는 로맨티스트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하렘 순애 같은 괴상망측한 가치를 추구하며 여자라면 눈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지? 내가 이렇게 된──
“아르틴? 왜 그래? 표정이 무척 안 좋아 보이는데?”
“응?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오늘 수련이 좀 힘들어서.”
“네?! 안색이 방금 점점 검게 변했는데 그 정도로 힘드셨어요?! 안 되죠 스승님! 자! 어서 제 무릎에 누우세요! 여기 온 김에 푹 쉬다 가시는 거예요!”
“그,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그러지 말고 푹 쉬어! 내가 피로회복에 좋은 물약이랑 아로마도 가져올게! 잠시만 기다려!”
“아니..뭐..헤헤..그럼 조금만 쉴까?”
황급히 내 옆으로 온 알‘미라즈가 허벅지를 팡팡 두드리자, 나는 못이기는 척 알’미라즈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우며 소파에 다리를 쭉 뻗었다.
‘편하다. 이렇게 편하게 쉬어본 게 얼마만이지? 매번 피곤에 쩌들어서 잠들었던 것 같은데.’
시험기간에는 내내 꿈에서도 수련을 하느라 정신적으로 지쳤고, 시험이 끝난 후에는 밀린 애정행각을 처리해주느라 하루에 3시간이나 자면 잘 자는 삶을 살았다.
그 이후에는 밤에는 사르디엘의 시중을 들고, 낮에는 이벤트 줍고 훈련하고, 푹 쉰다는 개념을 잊은 것처럼 너무 치열하게 살았다.
“어때요 스승님? 푹 쉴 수 있어요? 다리가 소파에서 넘치는데, 더 쉬기 편하게 소파 길이를 침대처럼 늘려줄까요?”
“아, 으응. 부탁할게.”
요즘 키가 커서 그런지 내 발이 소파를 벗어나 대롱거리자, 알‘미라즈가 손가락을 튕겨 소파의 길이를 편안하게 누울 수 있을 정도로 길게 늘려주었다.
“하핫, 고마워 알‘미라즈. 편안하니 좋네...”
“자! 아르틴을 위해 만들어뒀던 포션들을 다 가져왔어! 피로회복에 좋은 포션이랑, 원기회복에 좋은 포션이랑, 이건 수면 부족을 해소해주는 포션...”
곧 이어 포션을 한가득 가져와 내 앞에 내려다놓는 바이올렛, 시험기간 동안 자주 만나지 못했더니, 그 사이에 나를 위해 이런 것들을 직접 만들고 있었나 보다.
“두 사람...”
코끝이 찡해왔다.
너무 행복해서 이 순간이 마치 시르카가 꾸게 한 거짓된 환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내가 바랜 하렘은 이런 거였는데...아니, 하렘이 아니라도 이런 순간을 누릴 수 있으면 충분했는데...
“후후, 아르틴이 기뻐하는 걸 보니 나도 행복해서 보기 좋아.”
내 방에 자리 잡고 있는 나태한 파란 머리가 천사가 아니었다.
내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심으로 행복한 듯 활짝 웃는 바이올렛의 표정은, 꽃처럼 화사하게 느껴져서 불만으로 가득했던 내 마음이 사르륵 녹는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래, 바이올렛이야 말로 진짜 나만의 천사다. 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내가 기뻐하면 함께 기뻐해주고, 내가 위험할 때는 멋지게 나타나서 도와주기까지 하는 멋진 천사.
“행복하다..”
이 시간이 계속되면 좋겠다. 시간이 이대로 멈춘다면,
분명 나는 무척이나 행복한 남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행복을 만끽 하는 내 입에 케이크 위에 있던 체리를 먹여주던 바이올렛은, 문뜩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아르틴, 무슨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찾아오지 않았어?”
“아, 다른 게 아니고, 너랑 알‘미라즈 두 사람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부탁? 무슨 부탁이요? 아니, 뭐든 말만 하세요! 스승님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줘야죠! 저는 이래 뵈도 소원을 들어주는 계약의 악마라고요!”
자신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퉁퉁 두드리는 알‘미라즈.
분명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겠지만 허벅지에 누워있다 보니 얼굴은 안보이고 출렁이는 가슴만 눈에 들어왔다.
하하, 그야말로 절경이네.
“그래, 부담 없이 말해봐. 아르틴 네 부탁이라면 내가 뭔들 못 해주겠어?”
“아하하, 둘 다 고마워. 별건 아니고, 메피스토랑 다시 계약을 하려고 하는데 두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까 해서...어?”
...? 뭐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쩐지 오싹한 기운이 느껴졌다.
“..메피스토랑? 계약을 하겠다고?”
“어? 응, 그야 힘이 필요하니까...또 누가 빌런으로 나올지도 모르고.”
“꼭, 메피스토랑, 계약을, 해야겠다고?”
“..어..음..바이올렛? 무슨 문제라도 있ㅇ...”
묘하게 차가워진 바이올렛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더니, 그곳에는 평상시의 바이올렛은 내게 한 번도 보여주지 않던 차가움이 풍기고 있었다.
뭐지? 내가 무슨 못할 말이라도 했나? 라고 생각한 순간, 바이올렛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기어코, 메피스토랑 꼭 계약을 해야겠다고 말하는 거지 아르틴?”
“무, 무섭게 왜 그래 바이올렛? 왜 갑자기 화를 내고...”
“내가 언제 화를 냈어? 나 평상시랑 똑같은 거 안보여?”
“...”
여심에 대해서 여전히 모든 걸 안다고 자부할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화났구나.’
난생 처음 보는 바이올렛이 화를 내는 모습에, 나는 어느새 바른 자세로 앉아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바이올렛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수.를 써.서.라.도 메피스토랑 계약을 하겠다고?”
“...”
아니, 왜 그러는데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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