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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200화 (200/266)

〈 200화 〉 강해지는 법 #03

* * *

내 안의 바이올렛은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한 아이였다.

그래서일까, 지금 나를 매섭게 노려보는 바이올렛은 도저히 적응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 여기서 질문이다.

평상시에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던 사람이 화를 내면, 그건 누구 잘못일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 무조건 내 잘못이겠네.’

평소 행실이란 것이 이렇게 무섭다. 샤오메이나 유니코르가 갑자기 화를 낸다면 왜 이러는 지 의구심이 들겠지만, 아그네스나 바이올렛이 화를 내면 자연스럽게 몸이 반응해서 공손해진다.

“저기...일단은 내가 잘못 했어 바이올렛. 응? 화 풀어.”

“그래? 아르틴이 잘못했다고 말했다면 정말로 반성하고 있는 거겠지.”

“그래, 나 정말 반성하고 잇어, 그러니까...”

“그래서, 뭘 잘못했는데? 뭘 반성하고 있고?”

좆됐다. 내가 4p 난교 섹스를 했을 때도 달래주던 천사의 화신 같던 바이올렛이, 지금은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느껴진다.

“저, 저기 바이올렛님...?”

“알‘미라즈? 아르틴하고 대화 중이잖아?조용히 해줄래?”

“히익, 네, 네엣!”

옆을 슬쩍 보니, 정작 지옥에서 온 진짜배기 악마는 바이올렛의 매서운 눈초리를 피해 공손히 앉아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어쩜 저렇게 강약약강의 묘리를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지, 강자존인 지옥에 살면 보통 저렇게 되는 게 맞을까?

“아르틴, 대답은?”

“그, 그게. 메피스토랑 계약하겠다고 말한 거...? 그걸 잘못한 것 같아.”

“흥, 왜 잘못했는지는 알고?”

모르겠다.

그걸 모르겠으니 미치겠다. 바이올렛과 메피스토가 사이가 그렇게 나쁜 편이었나?

“..역시 모르나 보네. 그렇지?”

“저, 그게..”

“...하아, 아르틴은 그래서 문제야. 다른 사람은 열심히 챙기면서, 정작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 그게 옆에서 어떻게 보이는 지는 전혀 모른단 말야.”

바이올렛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고는 내 맞은편에 도로 앉았다.

그 모습은 훅 차오른 화가 다시 천천히 가라앉는 모양새였지만, 난생 처음 보는 바이올렛의 분노에 나는 여전히 긴장을 풀 수가 없어 입을 열지 못했다.

“아르틴, 내가 비록 2회차나 4회차때는 네게 큰 도움이 못 됐지만..그래도 내 나름대로는 떠오르는 기억이 많아.”

“으, 으응.”

“그리고 3회차는...말할 것도 없이, 네가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어. 나도 그래서 널..쯕 사랑하고 있고.”

“그, 그래? 그건 좀 쑥스럽네...”

사랑한다고 말할 때 얼굴이 살짝 붉어지는 바이올렛을 보면 역시 평상시의 바이올렛 같았다. 방금 전의 화난 바이올렛은 거짓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이지.

“..아무튼, 그래서 기억하고 있으니까 혹시나 해서 물을 게.”

허나 그 직후 바이올렛은,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내 눈을 마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3회차 때는 왜 검을 쓰지 않았어 아르틴?”

“...어?”

“그 뿐만 아니야. 왜 3회차 때는 몸 상태가 나빴는지, 왜 다른 회차에서는 없던 지병을 달고 살았는지 묻고 있는 거야.”

“...어어?”

“대답해줘.”

바이올렛의 입에서 나온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건...”

“회차가 달라졌으니 직업을 바꿨다는 소리는 하지 마, 지금도 무술가 한다면서 검이랑 마법이랑 쓸 건 다 쓰잖아?”

“그...”

어줍잖은 변명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그 즉시 바이올렛에게 막히니 나는 도저히 할 말이 없었다.

‘...설마, 그걸 알아차릴 줄은 몰랐는데.’

그건 아마 지금 바이올렛이 추측하고 있는 생각이 정답에 한 없이 가깝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3회차 당시 나는, 모든 마법의 지식이 담긴 지혜의 파편을 얻기 위해 메피스토에게 꽤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

아르틴은 바이올렛을 단순히 착한 아이라고 생각하지만, 성녀와의 머리싸움 당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바이올렛은 착하기만 한 아이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아르틴의 하렘 내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속이 깊고 생각이 많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아르틴에게는 다정한 모습만을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여인들에게 눈을 들이는 것? 충분히 참을 수 있다. 사실 바이올렛 자신도 아그네스와 아르틴의 연애관계를 비집고 들어가지 않았는가.

다른 연인들과 문란하게 관계를 맺는 것? 행복해하는 아르틴의 모습을 보면 참을 수 있었다. 그가 모두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느꼈는지 알고 있으니까.

바이올렛이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런 시시한 일들이 아니었다. 아니, 지난 생의 기억을 지닌 연인이라면 누구나 바이올렛과 같은 것만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건 바로 아르틴이 남들 몰래 보이곤 하는 희생정신이었다.

그나마 좋게 표현해 희생이지, 타인이 보기에는 자기파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 미친 행위들.

그건 집착이란 말도 어색했다. 차라리 집념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까?

매 회차, 자신의 몸과 정신과 혼을 깎아내면서 까지 카이엔을 지원하고 친구와 동료들의 버팀목을 자처하는 아르틴의 집념이란 옆에서 바라보기가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오라버니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이상한 사명감을 품는 것보다, 훈련과 데이트만으로도 벅차서 다른 것에 시선이 가지 못할 정도로 바쁜 게 오라버니를 위한 길이에요.”­

그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봤던 샤오메이가 아르틴의 하렘에 전했던 말이며, 3회차의 아르틴밖에 겪지 못했던 하렘과는 사이가 안 좋은 올가 조차 그 말에 동의 한 이야기다.

그래서 바이올렛은 중간고사 내내 눈물을 머금고 아르틴과의 교류를 멈췄다. 지금의 자신은 3회차 당신의 능력을 되찾아, 아르틴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오늘, 아르틴은 별일 아니라는 듯 또 다시 메피스토와의 계약을 입에 담았다.

‘...안 돼, 또 다시 그런 막대한 부담을 아르틴에게 지게 할 수는 없어.’

──악마와의 계약

수많은 인류가 고대부터 시도했던 최악의 힘 중 하나였다. 악마들은 계약을 토대로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끄는 것을 좋아하는 미친 예술가와도 같은 존재들.

그런 존재들에게는 아무리 막대한 부와 끝없는 힘을 받아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찰나는 순식간이 될 것이고 파멸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니까.

오로지 마녀들만이 악마와의 계약을 허락받은 그에서 비롯된다.

마녀들은 최초의 마녀이자, 계약의 성좌인 솔로몬의 아내인 시바에 의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와 계약을 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 어떤 존재도 마녀와의 계약을 어기거나 왜곡할 수 없다.

상인의 말장난, 악마의 왜곡조차 마녀들의 계약에는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 위험한 힘을 감당할 수 있는 것 오로지 마녀뿐인 것이다.

설령 마왕조차 계약을 성립시킬 수만 있다면 그 힘을 다룰 수 있으리라고 전해지는, 유일한 존재들.

그런 유일한 존재들에서도 가장 특별한 바이올렛이었다. 대마녀의 손녀? 시바 여왕의 후예? 그런 건 바이올렛의 특별함의 한줌도 되지 않는 가치다.

지옥의 대군주인 메피스토펠레스와의 계약, 고대부터 지금까지 존재했던 수많은 마녀들이 그것을 시도했지만, 정말로 성공한 것은 오로지 바이올렛 퍼플크로우 하나였다.

비록 메피스토의 모든 힘을 통제 하에 두지 못했지만, 누가 그것을 비난하겠는가? 계약이 성립됐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모든 이들보다 뛰어난 마녀임을 증명 한 것을.

허나, 3회차 당시의 인류는 알지 못했다. 진정으로 메피스토를 자신의 권속으로 삼아 계약으로 얻은 힘을 제대로 다룬 것은 바이올렛이 아니라는 것을.

──아르틴 루드비히, 보잘 것 없는 마법의 재능으로도 리치 하몬과 대적할 수 있었던 몇 없는 존재. 대마법사가 아님에도 대마법사라 불렸던 가장 숭고한 희생자.

‘바보 같아, 내 힘이 부족해서, 아르틴의 입에서 또 그 말이 나오게 하다니.’

누군가는 그 막대한 힘을 보고 부러워했을 지도 모르지만, 바이올렛은 안다. 아르틴이 그 힘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었는지.

건강, 신체 장기 대부분의 약화, 영혼의 반절, 태양빛 아래에서는 뱀파이어처럼 고통을 느끼며 하루의 생을 연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영약과 물약을 몸에 투여했던가.

그러고도 모자라 천사박사 토마스와 성녀인 올가가 그 몸을 돌보고, 용사 카이엔이 여신의 힘으로 보듬고 나서야 아르틴은 마왕과의 결전 직전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3회차 당시에는 그저 아르틴의 육체가 아픈 탓도 있다고 생각했다. 허나 2회차와 4회차의 기억 속의 아르틴은 너무도 건강한 모습이 아니던가.

“우리를 기만할 생각은 하지 마 아르틴. 네가 하려는 짓이 무엇인지 정도는 우리도 알고 있어.”

“...우리도 라면.”

“아그네스 황녀님, 샤오메이, 올가랑 카이엔 까지 전부.”

“...”

“왜? 지금은 굳이 그런 힘에 손대지 않아도 충분히 강하잖아. 그런데 어째서 메피스토하고 계약을 하려는 거야?”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은 고작해야 1학년 1학기, 여태까지의 기억을 전부 되짚어도 지금 시점에서 그 만한 힘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맞아, 바이올렛 네 말대로 지금은 고작해야 중간고사가 끝난 시점이지.”

“그러니까, 지금은 우리랑 같이 힘을 합쳐서 천천히 강해지면──!”

“그런데 벌써 마왕군의 하수인과 마왕군의 군단장이 나타났어. 고작해야 중간고사가 시작하기도 전부터.”

“...”

“너무 높아, 이벤트의 난이도가 이전과 비교해도 말이 안 될 정도로 높다고.”

아르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지난 2번의 사건을 만약 2회차 때 겪었으면 어땠을까?

“권능도둑이 새벽에 나를 노리지 않았다면 아마 수많은 학생들이 죽었을 거야. 거기서 권능도둑에게 붙잡힌 게 카이엔이 아니라 아그네스나 너였다면 목숨을 잃었을 지도 모르지.”

“...”

“장미관? 그렇게 대비하고 움직였는데도, 메피스토가 강림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누군가 죽었을 지도 몰라. 릴리트 본인은커녕 시르카 선에서 나랑 유니코르가 목숨을 잃었겠지. 릴리트는 아카데미에 강림했을 거고.”

실제로 본래라면 장미관 이벤트와 같은 이벤트는 아무리 빨라도 2학년 2학기부터 시작되는 것이 보통이었고, 권능 도둑은 1학년 2학기에, 샤오메이와 주력 멤버를 동원해야지 피해가 없이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고작 중간고사가 지났을 뿐인데, 지금 세계는 명확히 난이도가 이상한 이벤트를 우리에게 내보내고 있어. 마치 여태까지의 일들이 튜토리얼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말야.”

아르틴은 유니코르와의 계승 특성이 연결되던 순간, 튜토리얼이 완료됐다는 상태창의 말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떠한 예외도 없이, 매 회차마다 중간고사가 끝난 직후부터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사건들이 벌어졌지.”

“그건...”

“던전 실습은 고작해야 상급 마족이 지휘하는 침략인데도 불구하고 나랑 카이엔은 매번 사람들이 죽는 것을 막지 못했어. 매번 우리의 경험을 웃도는 적들이 나타났으니까.”

그러니 부족했다.

유니코르의 힘으로는 부족했다. 고작해야 1학년의 황태자를 뛰어넘은 것 정도로는 부족했다.

천사의 힘을 얻어도 부족했다. 초인의 영역인 샤오메이조차 사람이 죽는 것을 다 막지 못했는데, 아직 초인이 되지 못한 이 힘은 압도적으로 부족하다.

허나, 그런 아르틴의 담담한 말이 더욱 바이올렛의 속을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희생할 사람이 굳이 네가 될 필요는 없잖아! 나도, 카이엔도! 다른 동료들도 많은 데!”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메피스토와 계약을 한다면 바이올렛 자신이 하는 것이 맞을 것이며, 강해진다면 샤오메이와 카이엔, 권력을 쓴다면 황녀 아그네스와 성녀 올가의 힘을 더하면 될 일이다.

아니, 최소한 연인이 된 마리안느나 스승인 천마에게 도움을 청하기만 해도 충분할 것인데, 굳이, 굳이 왜 아르틴이 희생을 해야 한단 말인가?

“후회하기 싫으니까.”

그 이유를 바이올렛이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유는 아르틴 본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맞아, 네 말대로 지금 시점에서 굳이 메피스토와 계약을 할 필요는 없겠지.”

“어쩌면 별일 없이 던전 실습을 끝낼 수 있을 지도 몰라, 지금이라면 상급 마족 따위는 적수라고 부르기도 애매하니까.”

“상상치도 못한 고난이 닥쳐와도, 천마나 누님, 올가의 도움까지 전부 받아서 누구도 죽거나 다치지 않고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담담한 말 속에서, 바이올렛은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바이올렛 본인의 슬픔이 아니라, 아르틴의 속에 깊이 숨겨뒀던, 허나 지금 이 순간 참지 못하고 새어나오는 슬픔을.

“그렇지만, 누군가 다치면? 만약 누군가 죽게 된다면?”

“...”

“지금 내게, 너희들은 내 목숨보다도 소중해. 그런데 너희들 중 하나라도 잃게 된다면, 내가 그 때도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을까?”

“...그건.”

“후회하겠지. 왜 최선을 다해 준비하지 않았을까 하고.”

이것만큼은 아르틴 스스로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은 그 슬픔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것이 분명했다.

“왜 악마와 계약하지 않았을까, 왜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 기연들을 모으지 못했을까.”

“왜 시간을 헛되이 썼을까. 그 때 놀지 않았다면, 그 때 쉬지 않았다면, 그 때 위험을 감수했다면. 수없이 이번 생을 복기하면서 미친 듯이 후회하겠지.”

“아르틴...”

“그러다 마침내, 너희와 웃고 행복해하던 시간마저 후회할지도 모르고.”

그건 아르틴에게 있어서 죽음보다도 무서운 일이었다.

무너진 자신을 돌아보며 연인들과의 행복마저 후회하고, 그 감정을 죽이가며 다시 쌓아올린 자신은 무슨 괴물이 되어있을까.

“난 알아버렸어, 회귀를 한다고 해도 그 세계는 사라지지 않아. 내 죽음 뒤에도 남아, 종말을 보고 나서야 그 세계는 끝을 맞이하는 거야.”

“그렇지만 내가 4회차 당시처럼 회귀를 수단으로 택해버린다면...아니, 완벽한 한 번을 위해 수많은 너희와의 시간을 도구로써 써버린다면...”

“마지막의 나는, 분명 나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붕괴해버리고 말 거야.”

그 말에 바이올렛은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아르틴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더라도, 지금은 그 모습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아.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나는 욕심쟁이거든.”

하지만 물기가 담긴 아르틴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쩐지 그 표정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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