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화 〉 기둥서방이 되지 않는 법
* * *
“오라버니, 물 온도는 괜찮으셨나요?”
“어, 음. 확실히 좋더라. 입욕제까지 넣어주고.”
“반려여! 식사가 나올 때 까지 내 무릎에 누워도 좋다! 뭔가 먹고 싶은 것은 없느냐? 과일? 케이크? 파르페?”
“아니, 괜찮아! 식사 전에 단걸 너무 먹으면 배가 가득 찰 테니까...”
“좀 가득 차면 어떠느냐! 배가 꺼질 때 까지 푹 쉬면되지 않겠느냐?”
부담스럽다. 아침부터 샤오메이와 유니코르가 내 시중을 직접 들어주는 게 너무 부담스럽다.
“저기, 얘들아? 이런 건 고용인이나 시온을 시키는 게...”
“무슨 소리를! 저희가 오라버니의 아내인데, 이 정도 내조는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자! 오늘은 느긋하게 방에서 푹 쉬세요!”
“...아니, 오늘 수업도 나가야 하니까. 방에서만 있을 수는...”
“...오라버니가 언제부터 수업에 그렇게 열심히 들었다고요? 얌전히 쉬세요.”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샤오메이의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워,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이게,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분명 전날 바이올렛에게 그런 대화를 했을 때는, 나도 내 진심을 조금은 보여줘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다.
단순히 동료들이 아니다. 나와 이후 평생을 함께할 연인들이 아닌가? 그런 연인들에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걱정만 끼치는 건 남편으로써 행실부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 거기까지는 분명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 이후 벌어진 상황들은 내 예상을 조금, 아니 좀 많이 빗나갔다.
“오라버니, 저 내일부터 증조모님에게 특별 훈련을 받으려고요”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숫사자는 평상시에는 기둥서방! 반려가 숫사자가 되고 싶어 하니 본좌가 기둥서방이 되게 해주마!”
오늘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며 바이올렛과 헤어지길 1시간 후, 갑자기 유니코르와 샤오메이가 방에 들이닥쳐 나를 보살피기 시작했다.
3시간 후에는 내 기숙사가 골드로 바뀌었고, 6시간 후에는 아그네스와 올가까지 방에 들려 내 손을 꼭 잡으며 다정한 말을 들려줬다.
그리고 오늘 아침이 되니까 내 연인들이 나를 귀빈처럼 받들어 모시는 이 상황. 내가 도대체 뭐라고 이해하면 좋을까.
“저기, 나 오늘 천마님하고 수련도 있는데..?”
“하루 수련 빠진다고 죽지 않아요 오라버니. 그냥 얌전히 계세요. 제가 증조모님을 만나서 사정을 설명할게요.”
“아니, 그래도 카이엔도 날 기다릴 거고, 누님이나 선생님도 만나야...”
기분이 나쁜 건 아니지만, 익숙하지도 않았고 이럴 때도 아니었다. 당장 던전 실습이 일주일 좀 남은 상태에서 나태하게 쉬는 것은 내 천성에는 어울리지 않단 말이다.
“오라버니?”
“응?”
“그거 중독이에요 중독. 심각한 훈련 중독!”
“...어? 아니 중독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지금 오라버니 정도면 어지간한 마족은 떡을 치고도 남을 텐데! 뭐가 그리 걱정이라서 안달인 건가요! 시르카에게 들었어요! 중간고사 끝나고도 꿈에서 수련 했다면서요!”
아니, 시르카 그 녀석, 비밀이라고 했는데 그걸 홀라당 말해 버려?
“오라버니는 푹 쉬어야 해요! 사람은 금속이 아니라고요! 담금질만 계속해선 박살나버리고 말아요!”
“그래, 본좌와 다른 하렘의 여인들도 동의 했다 아르틴. 세니아 선생님과 왕녀에게도 아그네스가 대신 전해주겠다고 말했으니 걱정 말고 푹 쉬어라.”
“아니, 그...”
쿵!
무어라 반박을 하려고 했지만, 두 사람 뿐만 아리나 식사를 준비하던 시온도 나를 노려보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도마에 박힌 저 서늘한 식칼을 봐라, 저게 어딜 봐서 상냥한 대우인가? 더 서글픈 건, 시온을 그렇게 싫어하는 샤오메이도 시온이 아닌 나를 노려보고 있다는 것이다.
*
“후후, 그래서 이렇게 침대에 누워있는 거고?”
“...”
결국 하루 종일 침대에서 노닥거리는 사르디엘의 바로 옆에 누워서 강제로 푹 쉬게 되었다.
그나마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짓는 게 내 유일한 반항이었다.
“너무 화내지 마, 저 아이들도 네가 걱정 돼서 그런 거 아니겠니?”
“화가 난 건 아니에요. 그냥, 답답해서 그렇지.”
이러는 의도를 모르는 건 아니다.
내가 무리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최소한 며칠이라도 편하게 푹 쉬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챙겨주는 거겠지.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느긋하게 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그렇긴 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잖아? 더 강해지고 싶겠지?”
“맞아요, 최대한 빠르게 4회차 시절의 강함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래 그래, 조급하겠지. 그래도 일단 천천히 릴렉스 해볼까?”
“후우...”
부드럽게 속삭이는 달콤한 미색의 목소리에, 나는 전신의 긴장이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기분 좋은 무력감이 밀려와, 나는 사르디엘의 품에 안겨 그 달콤한 체취를 만끽하며 눈을...
“...사르디엘, 왜 내가 너한테 존댓말을 쓰고 있지? 또 언제부터 네 품안에 안겨 있었고?”
“어머, 이렇게 빨리 깨어날 줄은 몰랐는데?”
나는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천사 복장으로 환복한 사르디엘의 품안에 아이처럼 안겨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게다가 얼굴을 감싼 풍만한 가슴의 감촉이 너무나도 부드러워 잠들 뻔 하다니, 만약 이대로 잠들었다면 오후 늦게까지 쭉 잠들지 않았을까?
“사르디엘, 당신 설마 다른 여인들에게 매수당한...?”
“아하하, 들켰네! 협조하지 않으면 내 간식비랑 용돈을 줄이겠다고 엄포를 놓길래 어쩔 수 없었거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사르디엘은 나를 놓지 않으려는 듯 조금 전보다 더욱 꽉 끌어안았다.
“잠깐, 사르디엘?! 이렇게 붙어 있다가 퀘스트 때문에 타락하면 어쩌려고요?!”
“후후후, 그럼 벗어나면 되잖아? 지금 내 힘이 너보다 강하진 않을 것 같은데?”
확실히, 사르디엘의 말대로 내가 전력을 내면 못 떨쳐낼 수준은 아니었다. 사르디엘도 썩 진심으로 나를 붙잡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걸 테지.
하지만 내가 한두 번 속나. 이런 일에 전력을 다하면 매번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우연히 사르디엘의 옷이 벗겨진다거나, 내 손이 이상한 곳에 가있다거나 같은.
그러니까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거다. 절대로 이 푹신한 감촉에 매료된 게 아니란 말씀.
“애써 야한 쪽으로 생각을 돌리려 하지만, 괜히 여인들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 일부러 붙잡혀 있는 거잖아?”
“...들켰어요?”
“말했잖아. 나는 네 수호천사라고? 여태까지 네 모든 모험을 쭉~지켜봤는걸. 이 소심하고 마음씨 착한 거짓말쟁이 같으니.”
사르디엘의 파란 눈이 나를 바라보자, 나는 어쩐지 내 속마음이 전부 들킨 것 같아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 펑펑 울던 바이올렛을 보고 머뭇거리는 거잖아? 평상시처럼 혼자 움직였다가 또 연인들에게 걱정을 끼칠 까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치 본 것처럼 말하네요? 어떻게 알아요?”
“아르틴, 너는 네가 스스로 복잡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너는 생각보다 단순한 사람이거든. 그냥 척하면 척하고 나온단다.”
...어쩐지 사르디엘과 있으면, 계속 주도권을 이 천사에게 뺏기는 것 같다.
묘하게 어른의 분위기를 풍기면서 능숙하게 분위기를 주도한단 말이지.
“그런 네게 필요한 건...등을 떠밀어줄 무언가겠네.”
“...등을 떠밀어 줄 거요?”
“그래! 동기, 연인들을 납득시키고 스스로도 납득시킬 만한 동기.”
힐끔, 사르디엘의 눈이 순간 내가 아닌 허공을 향했다.
“예를 들어...퀘스트 라던가?”
“...?”
“아하하, 예시야 예시. ‘패널티’가 있지만 ‘보상’이 큰 ‘퀘스트’를 받으면 아르틴도 어쩔 수 없이 움직일 수밖에 없잖아? 그래서 한번 이야기 해봤지.”
“마치 퀘스트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퀘스트에 대해서는 아르틴 네가 직접 설명해 줬잖아? 그리고 천상에서 너를 지켜줄 때도 혼잣말을 잔뜩 들었거든. 예를 들어 샤오메이나 아그네스 가슴 만지고 싶다고 혼잣말을 한 게 천 번이 넘는─읍”
“믿을 게요. 혼잣말 전부 들은 거 믿겠습니다.”
나는 다급하게 사르디엘의 입을 틀어막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설마 내가 동정일 때 혼자 가슴만지고 싶다고 중얼 거리던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정말 수호천사였군요. 사실 저를 괴롭히기 위해 내려온 타락 천사가 아닐까 하고 계속 의심했는데.”
“어머? 타락천사였으면 얼마나 격렬하게 혼내주려고 그런 나쁜 망상을? 싫다! 사르디엘은 야한 거 무리라고!”
사르디엘은 나를 놔주며 장난스럽게 가슴을 끌어안았지만, 진심으로 나를 경계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나를 대하는 모든 게 장난과 진심이 섞인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묘하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녀의 태도의 근간은 나에 대한 호의로 이루어 졌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으니까.
‘있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친한 사촌 누나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르겠네.’
평상시에는 전혀 믿음직스럽지는 않지만, 같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존댓말을 하게 되고 의지하게 되는 느낌이다.
“뭐, 정말로 퀘스트라도 내려오면 움직이긴 하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하루 정도는 얘들을 위해서라도 쉬려고요. 저도 괜히 걱정 끼치는 것도 싫으니까──”
─띠링.
그 때였다. 익숙한 알림음이 들려온 것은.
“...어라?”
“어머, 왜 그래? 뭐라도 왔니? 혹시...퀘스트?”
사르디엘의 말에, 나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상태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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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단련은 스스로를 위한 것!
당신은 얼마 뒤에 일어날 마족의 습격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용사의 동료라면 최대한 많은 사람을 구해내는 것이 의무!
숫사자는 무리를 지키기 위해 강해지는 것이 의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 최대한 강해져 봅시다!
퀘스트 조건 : 다음 메인 시나리오 전까지 강해지세요! 방법은 뭐든 좋습니다!
퀘스트 보상 :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강해진 만큼 비례하여 보상.
퀘스트 실패 패널티 : 잠재능력 1단계 하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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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퀘스트가 왔잖아?’
심지어 퀘스트의 내용도 지금 내게 적절한 퀘스트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 강해지는 거라면 내 전문 분야니까.
예를 들어 당장 메피스토와 계약한다면,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해질 수 있지 않겠는가?
분명 호재와 같은 소식이었지만, 역시 기쁨보다는 당혹감이 앞설 수 밖에 없었다.
“...그, 퀘스트가 도착할 걸 알고 있었어요?”
“에이 설마,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갑자기 허공을 보고 놀라니까 한번 찍어 맞춘 거지!”
사르디엘은 내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고도 시치미를 떼듯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저 표정을 믿어야 할지 의심해야 할지, 나는 깊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사르디엘, 당신 정말로 누구야?’
나는 저 미소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