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205화 (205/266)

〈 205화 〉 기둥서방이 되지 않는 법 #02

* * *

나는 사르디엘을 추궁하는 것을 그만 두기로 했다.

추궁에 쓸 시간도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 저 표정을 보고 있으면 확신이 들었다.

‘한창 회귀할 때 다른 애들이 나를 보면서 이런 기분을 느꼈겠지?’

나랑 형태는 다르지만, 저건 알고 있음에도 말을 할 수 없는 부류에 가깝다.

내가 회귀자인걸 숨기고 다른 아이들을 도왔던 것처럼, 사르디엘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정을 숨기고 나를 돕겠다는 걸 테지.

“...후우, 좋아요, 믿을게요. 저한테 나쁜 짓을 하려면 진작 했을 테니까.”

“역시! 우리 아르틴은 사람을 보는 눈이 있다니까! 나만한 조력자가 없다니까?

“애초에 나를 방해하려고 했으면 동인지나 만들면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더 커다란 짓거리를 벌였겠죠. 안 그래요?”

“...어, 그렇긴 하지. 그런데 그거 아직 마음에 두고 있었니?”

“당연하죠, 한 번만 더 비슷한 일을 벌이면 본 때를 보여줄 겁니다.”

사르디엘을 있는 힘껏 째려본 나는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봤다.

‘그럼, 이제 해야 할 일은 여기를 빠져나가서 강해지는 건데...’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2가지다.

첫 번째는 연인들을 모아서 내가 받은 퀘스트를 공유하고 설득하는 것.

아마 확실한 방법이긴 하다. 잠재능력의 한 단계 하락은 내 연인들도 무시하기 힘든 패널티, 결국 내가 설득에 나서면 분명 내 이야기를 들어주겠지.

‘문제는 어디 까지 타협을 해야 할 지가 문제네.’

퀘스트에는 분명 지금보다 강해지기만 하면 된다고 적혀있다.

즉, 굳이 무리하게 메피스토와 계약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는 소리기도 하다.

아니, 아마 분명히 막겠지. 지금 나와 관계를 맺은 대부분의 연인들은 3회차의 기억이 분명히 남아있을 거고, 내가 비실거리던 모습 또한 뇌리에 확실히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부분은 타협하기 힘든데...”

“지금 시점에서 네가 강해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메피스토랑 계약하는 거니까?”

“...혹시 독심술도 쓸 줄 알아요?”

“누누이 말하지만, 아르틴 넌 속을 읽는 게 어렵지 않은 타입인걸? 회귀자인 걸 안다면 더더욱 알기 쉽고.”

“윽...”

속내를 들킨 나는 정곡을 찔린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지금 시점에서, 아니 그냥 어지간한 이벤트를 전부 따져도, 메피스토와 직접 계약하는 것 이상의 효율을 지닌 강해지는 법은 존재치 않는다.

리스크는 있지만, 그 이상으로 리턴이 너무 달콤하다.

4회차 때는 리스크를 생각해서 계약 안 했다가 스스로 얼마나 후회하며 피눈물을 흘렸던가.

‘그 때 메피스토랑 계약했으면, 어쩌면 후퇴해서 한 번 더 기회를 노릴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지금 내가 다루는 마법 전반의 능력은, 전부 메피스토와의 계약으로 얻은 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에도 네가 노리는 건, 지혜의 파편이겠지 아르틴?”

“...진짜 귀신이네. 맞아요. 정확히는 전보다 더 많은 파편을 얻어 보려고요.”

이 세계에는 지혜의 파편이라는 강력한 아티팩트이자 열매가 존재한다.

모티브는 현실의 선악과 같은 과일인데, 이 세계에서는 지금은 사라진 세피로트의 나무라는 세계수에서 열리는 황금빛의 과일이다.

한 입을 베어 먹기만 해도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깨닫고, 두 입을 먹으면 초월자의 정신을 얻으며, 과일 하나를 전부 먹으면 신과 같은 힘을 낼 수 있다는 열매.

3회차의 나는 계악 과정에서 메피스토에게 조금 억지를 부렸고, 그 덕에 메피스토의 보물고에서 지혜의 파편 한 조각을 대가로 받았다.

“괜찮겠어? 이번 리스크는 심상치 않을 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그걸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건 마법의 차원이 달라요. 나중에 리치 하몬을 쓰러트리기 위해서라도 그 열매는 무조건 있어야 된다고요.”

그 감각을 비유하자면, 한 마디로 초고사양 컴퓨터와 초고성능 인공지능이 동시네 내 머릿속에 탑재된다고 보면 된다.

어떤 마법을 어느 식으로 파훼해야 할지, 어떤 대상을 어느 방법으로 제압해야 할지 상황에 따라 ‘목소리’가 내게 속삭인다.

3회차 때는 이 ‘목소리’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까놓고 말해서 처음 마법을 배워 본 내가 어떻게 대마법사와 동급의 마법사로 인정받을 수 있었겠는가.

물론 대가가 뼈아프긴 할 테지만, 그걸 감수하더라도 충분히 손에 넣을 가치가 있는 물건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당연히 다들 막으려고 하겠지? 바이올렛이나 알‘미라즈랑 접촉하는 것도 최대한 막을 테고.”

“...그렇죠. 제가 계약하는 걸 알면 더더욱.”

결국 첫 번째 방법인 설득으로는 메피스토와의 계약은 무리다.

그럼 두 번째 방법 밖에 남지 않았다는 건데...

“이 방법은 쓰기 싫었는데...어쩔 수 없네.”

“방법이라니? 뭘 하려고?”

사르디엘의 의아한 표정에,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감 있게 외쳤다.

“작전이 있죠. 이름 하여 용서가 허락보다 쉽다 작전!”

“그냥 메피스토랑 무지성으로 계약부터 하고 뒷일은 생각 안하겠다는 뜻 아니야?”

“윽.”

또 다시 정곡을 찔리고 말았다. 허나 이 작전은 뻔뻔함이 생명인 작전, 나는 가슴을 피고 당당히 사르디엘을 설득했다.

“생각해봐요, 모든 하렘의 여인들을 먼저 설득하는 것 보다는 알‘미라즈나 바이올렛 둘 중 한 명만 설득하는 게 쉽고 빠르잖아요? 환불도 불가능 하니까, 100% 성공하는 작전이라고 할 수 있죠.”

“확실히...설득력이 있어!”

“일단 여기를 몰래 빠져나가기만 하면 작전은 99%나 성공한 거나 다름없죠. 둘 중 한 사람을 구워삶는 건 일도 아니니까.”

내 확신에 찬 당당한 모습에 사르디엘이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원래 상황이 복잡할 때는 단순하게 돌파하는 것이 가장 쉽고 빠른 법.

“문제는 어떻게 여기를 샤오메이나 다른 애들이 모르게 빠져 나가냐는 건데...”

공간 이동은 벗어날 수는 있지만 바로 들켜서 쫓길 테니 패스, 잠행술이나 투명화는 샤오메이와 유니코르에게 감지당할 게 분명하다.

‘작은 동물로 변신해? 아니, 그 정도는 예측하고 있을 거야. 그럼 액체로 변해서 하수구를 통과해서 나가볼까?’

내가 골똘히 방법을 고민하고 있던 그 때였다.

“후후, 내가 너를 여기서 아무도 눈치 못 채도록 내보낼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사르디엘님이? 어떻게요?”

“어때? 나를 한 번 믿어볼래? 나도 네 그 근거 없는 자신감에 배팅하고 싶어졌거든!”

사르디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손을 얹고는, 자신만만하게 그 커다란 가슴을 내게 쭉 내밀며 확신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나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사르디엘을 바라봤다.

“그거, 혹시 또 여장 같은 건 아니죠?”

“...물론 여장 말고도 다른 방법이 있지! 플랜B라고 해야 할까?”

“플랜A는 여장이 맞았고? 제 정신입니까? 방에서 갑자기 처음 보는 여자가 나오는 걸 보고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요?”

“농담이야 농담! 당연히 여장은 플랜에 없었지! 진짜는 따로 있다니까? 일단 들어 봐!”

역시 이 여자는 그냥 내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즐기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샘솟기 시작했다.

하지만 뭐, 듣기만 하는 건 손해는 없으니 한번 들어나 볼까?

*

끼익. 방문이 열리자 거실의 바닥에 앉아 차분히 명상을 하던 샤오메이의 고개가 문 쪽으로 향했다.

“어라, 사르디엘님? 무슨 일로 나오셨어요?”

“응? 별 일은 아니고 나가서 간식이나 사올까 해서, 방 안에 있으니까 심심하기만 하고.”

“...그런가요? 나가시는 건 상관없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샤오메이가, 사르디엘을 향해 향수를 하나 꺼내 뿌리기 시작했다.

“에? 뭐야? 향수? 냄새는 안 나는데?”

“...아뇨, 이건 오라버니가 만든 폴리모프 해제 물약인데, 오라버니가 변한 건 아닌 것 같네요?”

“어머, 설마 나를 아르틴이 변신한 거라고 착각한 거야? 너희도 참 열심히다 얘.”

“어쩔 수 없죠. 오라버니는 제 몸을 깎아서라도 저희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니까요.”

샤오메이는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감지 영역을 넓혀 오라버니가 잠든 방 안을 살폈다.

‘오라버니는 여전히 주무시고 계신가 보네. 괜히 깨우지 말고 내버려 둬야지.’

지난 몇 주간 단 한 번도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고 들은 바가 있기에, 샤오메이는 방문을 열어 확인하는 대신 아르틴이 조금이라도 더 깊이 잠들 수 있도록 배려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나는 가볼게! 나간 김에 산책도 하고 만화책도 사고 할 테니까 조금 늦을거야~”

“...속 편하시네요 정말. 다녀오세요 사르디엘.”

태평한 표정으로 사르디엘이 간식 타령이나 하자, 샤오메이는 뭐 이런 천사가 있나 싶은 표정으로 사르디엘을 봤지만 더 붙잡지는 않았다. 그녀도 칭호에 대해 들은 바가 있으니까.

“...후후, 그럼 다녀올게.”

샤오메이가 의심하는 기색이 없자, 사르디엘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고리를 잡았다.

“...잠깐만요.”

“응? 왜? 갑자기? 무슨 일이야?”

그 순간, 샤오메이가 날카로운 눈매로 자신을 노려보자, 사르디엘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동시에 등 뒤가 식은땀으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설마? 들킨 건가? 계획은 완벽했는데?’

샤오메이가 지금 자신을 붙잡는 순간, 이 탈출 계획은 무너지고 말터, 허나 조급함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무언가 있어 보이는 표정을 연기하는 것은 사르디엘의 장기 중 하나, 사르디엘은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여유 있는 천사의 모습을 연기를 하며 손에 땀을 쥐었다.

“당신...”

“응! 나 왜?”

“지금 혹시, 또 그 이상한 만화부로 가는 건 아니겠죠?”

“...만화부? 아, 아아! 동인지 제작 말이구나!”

“동인지인지 뭔지는 모르겠고, 오라버니를 주인공으로 그린 그 이상한 만화! 그게 얼마나 질 나쁜 장난인지 알고 계시는 건가요?”

샤오메이는 헛다리를 짚었다. 그 사실에 사르디엘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요. 오라버니랑 카이엔? 오라버니랑 조르바 도련님? 정상적인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추잡한 만화는 손도 대지 않을 텐데, 당신은 천사면서...!”

“아, 그럼 다음에는 아르틴x샤오메이 순애 동인지는 어때? 그것도 1회차 당시를 배경으로.”

우뚝, 사르디엘을 향해 날카롭게 쏘아대던 샤오메이의 잔소리가 멈췄다.

“...순애 동인지? 그런 것도 있나요?”

“물론 있지! 내가 말만 하면 얼마든지 그릴 수 있는 걸? 보고 싶지 않아? 1회차 당시, 아무도 아르틴의 가치를 모를 때 유일하게 곁을 지켰던 네가 아르틴과 러브러브한 사랑을 이루는 이야기.”

“...러브러브...순애...? 그, 그건 확실히...크흠!”

이 순간, 사르디엘의 수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했다.

애초에 샤오메이는 아르틴을 독차지하기 위해 강제로 덮치려고 했을 정도로 독점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지금은 그 욕망을 다른 여인들과 아르틴을 위해 억누르고 있을 뿐.

그 모습을 천상에서 지켜본 사르디엘이기에 내놓을 수 있는 회심의 한수, 그 한수에 샤오메이의 의심과 적대심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음, 나쁘지 않네요. 그렇죠! 순애야 말로 정상적이고 건전한 연애관을 지닌 사람들이 추구하는 사랑 아니겠어요?”

“후후, 그럼 그럼! 내가 천국에 있을 때 별명이 사랑의 천사였다고? 그런 네 욕망..아니, 순수한 연애관을 충족해 줄 만화는 얼마든지 제작해 줄 수 있어!”

“..당신, 생각보다 괜찮은 천사였슴다!”

한순간이었다. 하렘에서 가장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깊은 샤오메이의 경계심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이제 샤오메이의 심상세계 안에서 사르디엘은, 그녀가 이루지 못한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동료가 되고 만 것이다.

그 증거로, 한 동안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내고 싶어서 자중하던 샤오메이의 슴다체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고 있지 않은가.

“그럼 다녀올게! 간식 사는 김에 동인지 이야기도 만화부에 귀띔 해주고!”

“다녀오십쇼! 좋은 이야기 기다리겠슴다!”

그렇게 사르디엘은 감시자인 샤오메이에게 오히려 배웅을 받으며 방을 나오게 되었다.

허나 샤오메이의 기감은 단순히 방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기에, 사르디엘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느긋한 걸음을 유지하며 골드 클래스 기숙사를 빠져나왔다.

그러고도 100m를 더 걷고 나서야, 사르디엘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안도의 한숨을 마음껏 내뱉을 수 있었다.

“휴우! 정말 들키는 줄 알고 깜짝 놀랐네! 내 천재적인 연기 실력이 아니었다면 큰일이었겠는 걸!”

[...이제 좀 꺼내줄래?]

“어머, 좀 더 느긋하게 있는 게 좋지 않아? 이런 거 좋아하잖니?”

[됐으니까, 얼른!]

“나 참, 성격도 급하기는, 기다려보렴! 저기 나무 뒤에서 꺼내 줄게!”

골드 기숙사 근처에 세워진 커다란 관상용 고목의 뒤로 호다닥 숨은 사르디엘은 혹시라도 누가 훔쳐볼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은 마치 신성한 아우라만 없다면 좀도둑처럼 수상 했다.

“아무도 없네! 자! 나와도 좋아!”

사르디엘의 말에, 검지 정도로 작아진 아르틴이 사르디엘의 풍만한 가슴골 사이에서 천천히 기어 나오며 밀린 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우! 압사당해 죽는 줄 알았네! 이게 정말 최선의 방법이었어요?”

“어머, 그렇게 말하기에는 성공 했잖아? 게다가 너는 오히려 행복한 경험이었을 텐데!”

“...행복은 모르겠고 축축하긴 하던데요.”

한창 식은땀을 흘린 데다 워낙 더운 아카데미 탓에 가슴골에 땀이 가득 차는 것은 당연지사,그 덕에 가슴골을 기어 나온 아르틴은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그렇지만, 퉁명스러운 말과는 다르게 이건 아르틴의 거짓말이었다.

‘행복하긴 했지...가슴이 이렇게 부드러운 곳인 줄 전신으로 느길 수 있을 줄이야...’

아직도 전신을 완전히 감싸던 기분 좋은 유압이 잊혀지질 않았다. 허나 티를 내서는 사르디엘이 빌미 삼아 놀릴지도 몰라, 아르틴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해야만 했다.

“소형화 마법도 마법이지만, 숨 쉴 수 있도록 공기를 유지하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 줄 알아요? 그런데 행복할 리가 없잖아요?”

“아르틴, 그런 말을 할 거라면 입꼬리는 내리고 해야지, 말에 진실성이 없잖아.”

“...티 나요? 헤헤.”

티 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인정할 건 인정하며 아르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천사, 성격은 뒤틀렸고 믿기 힘들지만 가슴은 정말 최고였다.

아르틴 자신도 모르게 타락천사 사르디엘 루트의 유혹을 느끼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한 번 말이라도 꺼내볼까? 역시 혼나겠지?'

아르틴은 나중에 시르카에게 시켜볼 플레이가 늘어난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