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화 〉 기둥서방이 되지 않는 법 #03
* * *
나는 사르디엘의 가슴에서 뛰어내려 원래의 크기로 돌아온 후 몸 상태를 살폈다.
소형화 마법은 숙련도가 딸리거나 실수하면 돌아올 때 뼈가 어긋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음, 아무 문제없네. 역시 원래 모습이 최고야.”
“방금 전까지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어놓고 그런 말 하면 조금 섭섭할 것 같은데?”
“제가 사심을 가졌다가 타락하면 어쩌려고요?”
“후후, 만약 타락하면 숫사자 아르틴이 책임질 텐데 뭐 하러 걱정을 해?”
“아.”
어떠한 공격에도 능글맞은 사르디엘의 태도를 보고 있으면, 내가 저 천사를 말싸움으로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일부러 조금 창피해하는 얼굴이라도 보려고 타락을 주제로 꺼냈는데, 이렇게 정통으로 역습을 당하게 될 줄이야.
‘아니, 그보다 숫사자 타령하는 걸 들었다고...? 정말로?’
당황하지 않는 것이 더 힘들었다.
언제나 스스로를 숫사자라고 말하며 자신감을 얻기는 했지만, 그건 사실 하렘을 책임지기 위한 자기세뇌에 가까웠다.
입 밖으로는 내기 힘든 흑역사. 늘 생각에만 머물러야 할 그 헛소리를...누가 들었다고?
“사르디엘.”
“응? 왜? 부탁할 거 있어?”
“저 좀 이 자리에서 고통없이 죽여주실래요?”
“어라?! 왜?!”
죽고 싶어졌다. 첫 회귀 이후에 샤오메이에게 대딸 받던 장면을 바이올렛과 사감아저씨에게 들켰던 것보다 더 창피..
“저기, 사르디엘.”
“ㅇ,왜? 갑자기 죽고 싶다고 하고, 내가 너무 놀려서 그래? 미안해. 조금 자제할 테니까...”
“혹시 제가 샤오메이에게 붙잡혀서 야한 짓 당하던 것도 봤어요?”
“...”
그 순간 사르디엘이 말없이 내 시선을 피했다. 한 순간 진심으로 다음 회차로 넘어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달콤한 유혹이 느껴졌다.
“후우...비밀로...비밀로 해주실 거죠? 샤오메이 말고도, 제 창피한 이야기나 흑역사들?”
“무, 물론이지! 내가 장난은 쳐도 선은 잘 안 넘는 걸? 나만 믿어!”
“절대가 아니라 잘 안 넘는 다는 시점에서 믿음직하진 않네요.”
“그런데 있잖아, 바이올렛을 만나서 도움을 청하려던 것 아니였어? 그런데 왜 굳이 기숙사 밖으로 나온 거야?”
“이제는 대놓고 말을 돌리시네. 정말 비밀로 해주기에요?”
확실히 대답하지 않는 사르디엘을 보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허나 동시에 내적친밀감이 쌓이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우울해 하니까 어떻게든 달래주려고 하는 저 모습을 보고도, 어떻게 적이라고 의심할 수 있을까. 무언가 사정이 있어서 정체를 숨기는 게 분명하겠지.
‘그래, 내가 흑역사 쌓은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이런 사소한 일로 우울해 할 수는 없지.’
우울 모드를 끝낸 나는 정신을 차린 후 사르디엘에게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는 바이올렛에게 부탁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바이올렛을 위해서라도 말이죠.”
“바이올렛을 위해서라니?”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잘 설득해도 제가 계약의 대가로 골골대는 모습을 보면, 바이올렛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아..!! 확실히.”
바이올렛은 무척 여린 아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책임감도 큰 어른스러운 연인이기도 하다.
그런 바이올렛이 연인들에게 나와의 대화를 알렸다는 건, 그녀로써는 버티기 힘들 정도로 큰 책임감을 느끼는 사안이라는 소리일 터.
‘안 그래도 요즘 바이올렛이 자신감을 되찾아서 보기 좋은데, 괜히 마음의 짐을 더해줄 수는 없지.’
이번 회차 초반에도 내가 화형당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끝없이 자책하던 바이올렛이 아니던가, 나는 바이올렛이 우울해하기 보단 그저 밝게 웃는 모습만 보여줬으면 좋겠다.
‘그걸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고생해도 상관없지.’
“그럼 어떻게 하게? 직접 메피스토를 소환하려고?”
“아뇨, 바이올렛 말고 한 명 더 있잖아요? 메피스토와 저를 직접 대면시켜 줄 수 있는 신부가.”
“...알‘미라즈? 그 노란 토끼 악마? 너보고 변태라고 소리 질렀던 아이?”
“아니, 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표현을 순화해주시면 안 돼요?”
“흥, 천사가 악마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아르틴도 참.”
그 말에 나는 사르디엘을 빤히 쳐다봤다. 분명 며칠 전에 시르카랑 알‘미라즈가 만들어 준 음식들은 잘 먹지 않았나?
“그건 먹을 거잖아! 악마나 마족이 싫은 거지 음식에는 죄가 없단다!”
“아니, 정말로 독심술 쓰는 거예요?”
아무튼 나는 알‘미라즈에게 메피스토와의 계약을 주선해달라고 요청할 생각이었다.
저번에 바이올렛이 내 품에 안겨 울 때도 곤란한 표정을 짓던 알’미라즈는 무척 곤란해 보이기도 했다. 자신의 주군을 비하할 수는 없었겠지.
“아티팩트의 위치를 추적해보니, 알‘미라즈는 아카데미 내부의 카페 쪽에 있더라고요? 그래서 밖으로 나오자고 한 거였죠.”
“위치추적을 하는 거야 너? 좀 음습하다 얘...”
“...귀걸이 만들어 줄 때 상호 동의 간에 설치한 기능이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출발이나 하죠.”
“더 놀리고 싶지만..줄이겠다고 했으니까 어쩔 수 없네.”
나는 진심으로 아쉬운 표정을 하는 사르디엘을 뒤로 한 채 정원을 걸어 나왔다.
“...뭐야. 저 인간들이 왜 저기 있어?”
“왜? 또 무슨 일이야?”
문제는 카페로 향하려고 하던 길 쪽에 너무 익숙한, 그래서 더 짜증나는 얼굴들이 있었다.
“네 아버지랑 누나네?”
“그런 호칭으로 부르지 마요! 기분 나쁘게...군단장보다 보기 싫은 얼굴을 봐버렸네.”
나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혐오감을 참지 않고 표정에 담아 두 사람을 노려봤다. 아니, 정확히는 남자 쪽을 노려봤다.
‘루드비히 남작, 아니, 길버트 루드비히..그리고 뮤리스.’
까놓고 말해서, 나는 누군가를 죽었으면 할 정도로 증오한 적은 없었다.
아니 1명 있다, 내 돈 떼먹고 해외로 튀었던 승후새끼 정도, 그나마도 정신건강을 위해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지, 평생을 곱씹지는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방어기제였다. 나를 싫어하고,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미워하거나 증오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미워하기에는 내 삶에는 적이 너무 많았다. 평생을 증오와 질투로 살 수는 없으니 달관해야만 했지.
하지만 길버트 루드비히는 달랐다. 내가 살면서 군대선임이나 승후새끼보다 싫은 사람을 딱 1명만 꼽으라면, 렉스턴도 아닌 길버트를 당당히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인데, 그렇게 살기를 담아 노려보는 건...”
“저 새끼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저한테도, 진짜 아르틴한테도.”
1회차 때, 이 세계에 표류하다시피 떨어졌던 나는 루드비히 가문으로 도망쳤다.
당연한 결정이다. 방에 틀어박히다시피 살아온 비루한 아르틴의 몸으로 사람은커녕 고라니도 죽여본 적 없는 내가, 어떻게 마족과 싸우며 구르겠는가.
심지어 있는 거라고는 조잡한 마법의 재능인데, 그나마도 마법은커녕 마나를 다루는 법도 몰랐던 내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다행히 내 상태가 더 심각해졌다고 생각한 샤오메이와 원래 친절한 세니아 선생님 덕에 아카데미 퇴학 절차를 밞은 후 안전히 가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일단 가문에서 퀘스트를 깨면서 내 몸을 간수하자. 나중에 치트 능력이라도 얻으면 그 때 카이엔을 도우러 가자고 결심했었지.’
동시에 작은 기대도 했다. 늘 누군가의 이방인으로 살아왔던 내게, 샤오메이와 조르바는 진심으로 친구로 여기며 자신의 곁에 뒀다.
그렇다면 루드비히 가문은?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가족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솔직히 조금 크게 기대를 품은건 사실이었다.
전부 박살났지만.
“저 새끼가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메이스로 머리를 후려쳐 죽여도 사이다라고 인정받을 텐데...”
“주, 죽이다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안 돼!”
“알아요, 그냥 생각만 하는 거죠.”
선명하게 생각난다. 아카데미에서 돌아온 나를 밥벌레, 쓸모없는 쓰레기, 버러지새끼, 고블린 보다 못한 녀석이라고 매도하던 길버트의 목소리가.
심지어는 나보고 어미를 죽인 자식이라면서 교단의 고아원에 맡겨야 한다고 하기도 했었다. 사실은 진짜 고아인 내게 말이지.
그런 주제에 욕심은 많아서, 샤오메이를 억지로라도 덮쳐서 약혼을 맺으라고 으름장을 놓았을 때는, 진짜 죽여 버리고 튈까 하는 고민도 엄청 했었다.
3년차에 마족의 습격에 맞서기 위해 와이즈 가문에 종군했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얼마나 기뻤던지.
‘내가 어렴풋이 품고 있던 가족에 대한 환상을 반쯤 짓 밞아준 장본인이지.’
어릴 때는 차라리 없는 게 나은 부모도 있다는 말을 공감할 수 없었는데, 고아 양희민에게 새로운 개념을 한 번에 주입시킨 1타 강사라고 할 수 있다.
...뮤리스? 저 안경잡이 의붓 누나는 차라리 귀여운 편이다. 길버트의 영향인지 성격이 나쁠 뿐이지, 뭔가 나서서 주도하진 못하는 소악당에 불과하니까. 가슴은 꽤 크고.
아무튼 어릴 때부터 길버트에게 손찌검을 당하며 유약하게 자란 뮤리스는 결국 아버지의 명에 따라 20살 많은 졸부에게 시집을 가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었다. 2년도 못가서 마족 때문에 다 죽었지만.
‘장녀인 이사벨라 말고는 사람새끼가 없었지, 그 망할 가문은.’
불쾌하다. 저 얼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나쁜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나는 고개를 돌려 빙 돌아가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디 가 아르틴?길은 저쪽이잖아?”
“브론즈인 뮤리스랑 영지에 있어야 할 길버트가 왜 여기 있겠어요? 뭐가 됐어도 나랑 연관 있는 일이 분명한데 저 얼굴들을 마주보고 싶진 않네요.”
“가, 같이 가!”
두 사람이 용건이 뭐가 됐든 간에 나는 조금도 어울려 줄 생각이 없어, 최대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내 뒤를 사르디엘이 다급하게 뛰어 따라왔지만, 난 일부러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출렁이는 사르디엘의 가슴을 보고 있으면 방금 전까지 머리를 가득 채웠던 불쾌함이 잊혀지는 것 같았으니까.
“사르디엘, 차라리 카페까지 뛰어갈까요?”
“뛰어?! 그냥 텔레포트 하면 안 될까?”
어림도 없지, 나는 그 즉시 카페를 향해 조깅을 하듯이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사르디엘이 열심히 따라올 수 있을 정도로.
‘확실히 가슴이 저렇게 크면 달리기가 힘들긴 하구나...’
후회는 없는 선택이었다.
*
“하아...”
카페에 용건도 없이 2시간 째 앉아있던 알‘미라즈는 힐끗 시계를 바라봤다.
“아직 저녁이 되려면 한창 멀었군요...”
테이블 위에 놓여진 4번째 주문한 음료수는 아카데미의 열대성 기후로 인해 이미 냉기를 잃은 상태였다.
사실 그냥 기숙사로 돌아가 아르틴에게 애교라도 부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럴 수도 없어서 한숨만 다시 푹 내쉴 따름이었다.
“메피스토님도 이상하네요, 인간의 카페에서 해가 질 때 까지 계속 기다리라니.”
평소라면 바이올렛의 마법을 돕거나, 스스로 마법을 연습했을 알‘미라즈가 카페에 멍하니 앉아있는 것은 다름 아닌 메피스토님의 명령 때문이었다.
‘메피스토님은 혹시,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골탕을 먹이려고 여기에 보낸 것은 아니실까?’
어제 밤, 지옥에 돌아간 알‘미라즈는 제 딴에 열심히 메피스토를 설득해보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자신이 가문의 재보를 바쳐서라도 대가를 줄이겠다는, 아버지인 지니가 들었다면 대성통곡했을 제안까지 메피스토님에게 내밀었지만...
“그보다 작은 토끼야, 너에게 시킬 일이 있단다.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니 제대로 해줬으면 좋겠구나?”
메피스토님은 자신의 충심에서 나온 간언을 무시하고, 오히려 이상한 명령을 내렸다.
내일 아침 해가 뜨면 기숙사를 나가, 아카데미 어디라도 좋으니 저녁이 될 때 까지 기다리라고 말이다.
“하아, 바이올렛 양이 상태가 안 좋아서 방에 틀어박혀 계시니 다행이지...”
안 그래도 어제 지옥에 다녀온 후로 하렘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자신에게 딱히 설명은 없었지만, 그게 메피스토님 때문이라는 것쯤은 알‘미라즈도 눈치 챌 수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기숙사에서 나가 있어야 할 것 같다고 하니, 좋아하는 기색을 보이던 샤오메이와 유니코르의 태도는 노골적이기까지 했으니까.
“저라고 스승님을 돕고 싶지 않은 건 아닌데 말이죠...”
이미 100번도 넘게 한숨을 내쉰 알‘미라즈는 미지근해진 망고주스를 쪼옥 들이켰다.
“밍밍해, 맛없어, 지옥에서 쉬고 싶어. 하지만 스승님을 도와야 해...”
하지만 이깟 싸구려 과일 주스로는 알‘미라즈의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없었다.
“휴, 간신히 찾았네. 왜 여기에 있어?”
“...어라?”
그때, 누군가 알‘미라즈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른 누군가가 봤다면 가슴이 쿵하고 울릴만한 미소였지만, 정작 그 미소를 바라본 알‘미라즈는 한쪽 눈썹을 치켜뜰 뿐이었다.
“여기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주시겠어요? 얼음 넣어서요.”
“아니, 당신이 왜 여기에 있습니까? 그보다, 절 찾았다고요?”
자연스럽게 종업원에게 주문을 하는 모습을 보고 알‘미라즈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런 알‘미라즈의 태도에, 카르엔은 평소의 냉소적인 표정이 아닌 빈약한 친화력을 있는 힘껏 긁어모아 지은 어색한 미소를 유지할 뿐이었다.
“미안, 친하지도 않은 데 말을 걸어서 놀랐지? 아르틴이 이런 점을 고치라고 했는데...잘 안 되네.”
“..네, 뭐. 당신과 이렇게 이야기 나누는 건 처음이니까요. 사실 사람들이 있어도 눈도 안 마주치던 사이 아닙니까?”
“맞는 말이야. 하지만 네가 아니면 이런 부탁을 할 사람이 없어서.”
“...부탁?”
“응, 아르틴을 위한 일이거든, 꼭 들어줬으면 좋겠어.”
스승님의 이름이 거론되자, 알‘미라즈는 낯선 카르엔에 대한 경계심을 억누르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스승님을 위해 도와줄 것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카르엔의 말은 악마의 유혹보다도 관심을 끌기 좋은 주제였으니까.
허나 이어서 나온 말에 알‘미라즈는 스스로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알‘미라즈. 내가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을래? 아르틴을 대신해서 내가 계약하고 싶어.”
“...네? 누가요? 당신이? 누구랑?”
“내가, 용사 카이엔이, 메피스토펠레스, 지옥의 대군주랑 계약하고 싶다고.”
그 말도 안 되는 제안에 알‘미라즈의 눈이 커졌지만, 카르엔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알’미라즈를 고혹적인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도와줄 거지? 알‘미라즈?”
“당신, 미쳤습니까?”
스승님의 말이 맞았다. 이 여자, 아니 이 남자는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이 틀림없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