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207화 (207/266)

〈 207화 〉 기둥서방이 되지 않는 법 #04

* * *

‘이 사람, 지금 뭐라고 하는 겁니까?’

방금 들은 이야기를 알‘미라즈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웃는 카르엔을 보니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 농담이라고 해도 웃음도 안 나오는 허접한 농담이다. 도대체 이런 제안을 왜 한단 말인가?

“일단..카이엔 실버소드, 우선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마음껏 물어봐, 뭐든지 대답해 줄게.”

“당신, 저랑 아는 사이입니까? 왜 친한 사이처럼 구는 겁니까?”

“...시작부터 좀 아픈 질문이네.”

누가 보면 단순한 인신공격 같겠지만, 알‘미라즈에게는 무척 합당한 질문이었다.

실제로 알‘미라즈는 카르엔과 같은 자리에서 몇 번 본 게 전부며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는 단순한 의견 교류나, 인사를 나눈 적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찾아와 말을 거니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당신은 제 친구도 아니고, 지인도 아니고, 계약자도 아니고, 심지어 같은 하렘의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제가 당신을 도와줘야 한다는 겁니까?”

“간단하지, 내가 아르틴의 친구고, 동료고, 이 계약은 아르틴을 위한 것이니까.”

“...스승님을 위해서,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시긴 했습니다.”

하지만 아르틴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알‘미라즈도 이 제안을 미친 스토커의 헛소리로 취급할 수가 없었다. 특히나 지금 같은 상황일 때면 더더욱 말이다.

“너도 알고 있잖아? 메피스토와의 계약의 대가는 가볍지 않을 거라는 걸, 하지만 아르틴은 분명 메피스토와 계약하려고 할 거야.”

“왜 그렇게 확신하시는 겁니까? 아니, 만약 스승님께서 하려고 한다고 해도 누군가 말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래도 아르틴은 할 거야, 아르틴은 그런 아이니까.”

“...”

떠보기에 가까웠다. 실제로 알‘미라즈는 아르틴이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계약하려는 모습을 봤으니까.

허나 그걸 카이엔이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도 스승님은 다른 연인들에게 감시당하며 기숙사에 갇혀 있을게 분명한데.

‘어떻게 저렇게 확신할 수 있는 거지, 이 여자, 아니 남자는?’

하지만 카이엔의 눈에는 확신이 있었다. 그것도 광기에 가까운 확신이.

아르틴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아나 아르틴은 이렇게 행동 할 거야 같은 뒤틀린 신뢰감에, 알‘미라즈는 난색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그게 당신을 도와줘야 한다는 이야기는 되지 않습니다. 애초에 당신은 용사, 그리고 저는 악마입니다. 마녀도 아닌 자가 악마와 함부로 계약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실 텐데요?”

그 말의 의미는 무겁다. 여신이 임명한 용사가 악마와 계약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단순한 소란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번에는 당신이 악마숭배자로 몰려 처형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건 성녀에게 부탁해서 막으면 돼. 현재 올가 비르투스는 북부교단의 수장, 그 정도는 커버해줄 수 있겠지.”

“당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용사를 타락시켰다는 말을 들으면 어쩌려고요!”

“괜찮아, 아르틴을 위한 일이니까 모두가 이해해 줄 거야. 애초에 나는 주변 사람이 많지도 않기도 하고.”

“...그걸 감안해도, 지옥에는 엄격한 규율이 있습니다! 메피스토님의 친구도 아닌 당신을 절차도 밟지 않고 계약을 추진시키는 건, 저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부탁하는 거야. 아르틴이 아픈 것 보단 내가 아픈 게 너희 하렘 얘들 한테도 좋은 일이니까.”

“...”

말이 턱 막힌다. 아르틴을 위한 일이라는 치트키를 사용하는데 자신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저는 기억이 없으니 모르지만, 듣기로는 저번 계약은 메피스토님이 스승님을 위해 대가를 아주 조금만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계약은 그렇지 않겠죠.”

미치광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이토록 확신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걸까?

말려야 한다. 비록 스승님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남자지만, 그래도 스승님은 저 남자를 계속 파트너라고 부르며 친구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대악마와의 계약은 무겁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지옥의 군주인 메피스토님과의 계약이라면 아무리 용사의 목숨을 대가로 내놔도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죽는 것 보다 끔찍한 고통을 겪으면서 평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요?”

“그렇게 들으니 더욱 내가 해야겠네, 아르틴에게만 그런 무거운 짐을 맡길 수는 없으니까.”

“당신...!”

“그리고 괜찮아. 죽음만 아니라면, 그 어떤 고통도 내겐 가벼운 시련에 불과하니까.”

담담한 말투, 그렇지만 그 말에 무게가 자신의 생각보다 너무 무거운 탓에 알‘미라즈는 더 이상 반론을 내밀 수 없었다.

‘...미쳤어. 저 말은 진심이야. 스승님의 생각보다도 이 남자는 미쳤다고!’

알‘미라즈의 확신대로, 카르엔의 말은 진심이었다. 죽음보다 더한 패널티를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그것을 자신이 감내할 자신이 있었다.

‘아르틴은 분명 또 자신의 몸을 희생하려고 할 거야,’

그런 남자니까, 자신이 반한 남자니까, 아르틴은 또 전부를 짊어지려고 할 것이다.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표정을 지으며 고통을 숨긴 채 말이다.

‘그런 모습을 두 번 볼 수는 없어. 이번만큼은 내가 짊어져야 해.’

자신에게는 상태창이 있다. 아르틴의 것과는 다르게, 철저히 자신이 강해질 수 있도록 만드는 상태창, 그것만 있다면 대악마의 패널티조차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아르틴에게 전부 맡길 수는 없었다. 용사는 카르엔 자신이지 아르틴이 아니니까. 자신은 지켜지는 사람이 아니라, 아르틴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니까.

“...좋습니다.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 저도 계약을 막을 수는 없겠군요. 저는 계약의 악마 알‘미라즈니까요.”

“고마워, 알‘미라즈. 역시 넌 대화가 통할 줄 알았어.”

“아뇨, 어쩌면 이 모든 게 메피스토님의 안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메피스토님의 명령 때문에 이렇게 카페에서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냈을 뿐이니까요.”

그래, 자신의 충언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메피스토님도 실은 아르틴님을 위해 다른 계약자를 고르신 게 틀림없다. 자신의 충언이 먹힌 것이다!

“바로 계약을 위한 의식을 치르러 가실까요? 메피스토님과 대화하는 부담은 특별히 제 쪽에서──”

“메피스토가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다고? 그 말 사실이야?”

다급한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던 알‘미라즈가 고개를 돌리자, 카르엔은 창백해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더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그러시는 겁니까?”

“젠장! 빨리 움직여야 해! 그 악마가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 리가 없어. 그 미친 악마가 원하는 건 오직──”

“뭐야? 웬일로 두 사람이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있어? 둘이 친한 사이였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카르엔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한 발 늦었다는 사실이 괴롭게 마음에 차올랐으니까.

카르엔이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에는 자신이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남자가 의외라는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스승님..? 어떻게 기숙사 밖으로 나오신 거죠? 분명 샤오메이님이랑 유니코르가 감시하고 계셨을 텐데?”

“뭐, 사르디엘의 도움을 조금 받았지, 맞다 그보다 내가 부탁할 일이 하나 있는데.”

“잠깐만 아르틴, 기다려봐.”

아르틴이 말을 꺼내는 순간, 카르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알‘미라즈와 아르틴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 표정은 더없이 애처로워, 왜 말을 막냐고 따지려던 아르틴도 멈칫 할 수 밖에 없을 정도였다.

“이미 대화는 끝냈어 아르틴, 메피스토와의 계약은 내가 할 거야. 너는 천사하고도 계약 했잖아? 그러니까 이번 기연은 내가 받을 거라고.”

“네? 기연이라니, 당신...”

알‘미라즈의 눈썹이 치켜떠졌다. 이 남자, 스승님을 위한다는 말을 늘어 놓았지만 사실은 사리사욕을 위한 거였나?

“카이엔.”

허나 카르엔의 말을 들은 아르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했다는 듯, 잔잔한 목소리로 카르엔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며

“알잖아. 내가 무슨 선택을 할지.”

“....그래도 이번만큼은...”

“네가 내 고집을 한 번이라고 꺾은 적이 있던가, 카이엔?”

“으읏...그래도! 이번만큼은 양보할 수 있잖아! 너를 위해서라도! 나를 위해서라도!”

“미안해.”

미안해라는 짧은 한마디, 그 말을 들은 순간 카르엔은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다정하게 말하고 있지만, 저 말은 설득이 아닌 통보나 다름없다.

늘 자신에게 휘둘리는 것처럼 보이는 아르틴이지만, 사실 자신은 이런 상황에서 단 한 번도 아르틴을 설득시켜 본 적이 없었으니까.

“미안해 카이엔, 하지만 이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야.”

“...바보, 얼간이, 매번 다정하게 말하면 내가 좋아서 넘어가는 줄 알아? 안 들어먹으니까 넘어가는 거라고!”

다른 사람들은 카르엔 자신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취급하지만, 카르엔이 생각하기에 자신과 아르틴의 관계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다름 아닌 아르틴이었다.

자신의 행동원리는 아주 간단하고 명확하다. 사랑.

사랑하니까 집착하고, 원하고, 주변을 맴돌며 지켜주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르틴은 다르다.

‘왜, 왜 그렇게...’

아르틴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싫어한다.

부담스러워하고 늘 거리를 두려고 하며 자신의 사랑을 조금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는 주제에 자신을 배척하지 않는다. 늘 좋은 것은 자신에게 양보하려하고, 힘든 것은 스스로 떠맡으려고 한다. 마치 연인처럼.

이해할 수 없다.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모순적인 남자. 그럼에도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그리고 남녀관계에 있어서, 손해를 보는 것은 언제나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다.

“...좋아, 대신 할 수는 없겠지. 포기할게.”

“고마워 카이엔. 이해해줘서.”

“대신 같이 할 거야. 이건 양보할 수 없어. 너 혼자 전부 짊어지게 할 수는 없다고.”

“...메피스토가 널 받아준다는 확신도 없는데? 아니, 분명 안 받아줄걸?”

“내가 그런다고 포기하는 사람 같아? 그랬으면 진작 널 포기했지.”

“은근슬쩍 선 넘지 마라. 내가 모를 줄 알았지?”

“..쳇.”

아르틴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카르엔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만약 그녀의 말대로 두 사람 다 강해질 수 있다면 그 쪽이 더 좋은 일인 것은 확실했으니까.

‘이 멍청이가 고집을 꺾을 리도 없으니까. 천사는 그렇게 싫다고 징징 거리더니.’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짜증났지만 그러려니 했다.

자신도 카르엔도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무엇을 타협하지 않는 지는 잘 알지 않은가.

유니코르를 살리기 위해 세계수의 잎사귀를 구하러 갔을 때도, 자신은 결국 카르엔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같이 가야만 했다.

‘진짜 미친 여자야. 왜 이렇게 나한테 집착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역시 아르틴이 생각하기에는 카르엔이야 말로 가장 비정상인 녀석이다. 아마 평생 이해할 수 없지 않을까.

‘뭐, 성별만 바뀌고 행동은 한결 같아서 보기 좋긴 하네.‘

그래도 어쩐지 안심이 됐다. 사실 카르엔으로 바뀐 이후 자신이 알던 카이엔과 달라진 건지 걱정했는데, 이 순간 카이엔과 카르엔은 동일 인물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좋아! 좋아!! 역시 아르틴을 돕길 잘했어! 오늘 계탔네!! 이런 모습을 직관할 수 있을 줄이야! 미카엘 오빠! 사랑해! 이젠 죽어도 좋아! 아니, 죽을 수는 없어! 이런 모습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가야지!’

그리고 옆에서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사르디엘은 이 전개를 보며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녀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이 세계에서 제일가는 아르틴X카르엔 커플링의 지지자였으니까.

“왜 다들 절 빼두고 이야기를 진행하는 거죠...? 왜 갑자기 말하고 갑자기 납득하는 건가요?”

오로지 알‘미라즈 만이 갑작스러운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