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209화 (209/266)

〈 209화 〉 지옥의 대군주 메피스토펠레스

* * *

지옥은 현재 3명의 대악마에 의해 3개의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리고 각 영역은 통치하고 있는 군주가 누구냐에 따라 성격이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예를 들어 최초의 악마 루시퍼의 군단장이었던 바알제불의 영토는 엄격한 위계질서와 군율에 따른 전제국가와 같고, 간교한 계략의 방탕한 군주 아스모데우스의 영토는 휘하의 악마들조차 서로를 믿지 못하는 모략과 암살로 이루어진 쾌락의 지옥이다.

그에 반면 메피스토의 영토는 누군가 처음 본다면 지옥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평화롭다.

하루에 죽어나가는 악마의 숫자가 다섯 자리도 되지 않는 지옥이라니, 지옥에서 이 정도면 천국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그긋...그으읏...!! 또, 또 국경을 침범하다니! 이번엔 어느 놈들인가!”

“예, 바알제불의 영토에서 이쪽을 정찰하기 위해 보낸 정찰대인 것 같습니다 사타나치아님. 생포를 거부하고 자결을 택하는 미치광이들은 그놈들 밖에 없으니까요.”

“젠장! 이놈이고 저놈이고 우리가 우습다 이거지!”

허나 그 천국 같은 지옥이 누군가에게는 다른 어느 곳보다 지옥이었다.

메피스토의 열두 가신 중 하나이자 위대한 산양의 왕, 대악마 사타나치아에게 그러했다.

“북서쪽 국경은 바알제불이 호시탐탐 노리는 곳이니까 조심하라고 했거늘! 도대체 어느 정신나간 녀석이 임무를 실패한 거냐!”

“북서쪽은...용암대장군님의 영토였습니다. 사타나치아님.”

“이런 젠장! 아직도 후임자가 나오지 않은 거냐!”

“2인자와 3인자의 내전으로 인해 국경을 돌보기는커녕, 영토가 박살날 판이라고...”

“으아아악! 젠장! 이곳에서 진심으로 일하는 건 나밖에 없는 거냐?! 다들 임프보다 못한 병신들이냐고!”

산양머리에 달린 양 뿔에 불이 피어오르자, 사타나치아를 보좌하던 악마는 겁에 질린 듯 안색이 창백해졌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악마는 단순한 대악마, 열두 가신이 아니라 메피스토 군의 비공식 2인자나 다름없는 자였기 때문이다.

메피스토의 영토는 평화롭다. 하지만 이 지옥에서 평화롭다는 것은 좋은 의미가 아니다. 특히나 메피스토의 영토가 지옥에서 가장 풍요롭고 입지가 좋은 위치에 있다면, 다른 악마들의 노골적인 욕망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메피스토의 영토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메피스토가 3명의 군주 중 가장 강력한 군주라는 것을 모두가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나태에 빠져 성에서 나오지 않고 있지만, 지난 대전쟁에서 루시퍼의 목을 제 손으로 박살내며 힘을 증명한 대군주에게 감히 맞설 겁 없는 악마는 많지 않았다.

문제는 메피스토의 권태다. 자신의 영토를 세운 메피스토는 자신의 군주로써의 모든 권한을 열두 가신의 가문에 나눠줬다. 그리고 그들에게 명령했다.

­“짐은 이제 좀 쉬어야겠으니 나머지는 너희가 알아서 하거라. 귀찮게 굴지만 말도록.”­

몇몇 멍청한 놈들이 내전을 일으켰다 목이 날아간 이후로, 열두 가문은 자신들이 할 일을 깨달았다. 메피스토가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게만 하면, 자신들의 영토에서 왕처럼 살면 되는 것이다.

허나 그중에서도 누군가는 지휘봉을 잡아 큰 그림을 그려야하기 마련, 열두 가신의 수장 중 하나였던 산양의 왕 사타나치아는 나태에 빠진 메피스토를 대신해 그녀의 영토 전체를 전두지휘를 맡은, 책사이자 범관이며 행정가이고 통치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좋았다. 메피스토의 눈에만 거스르지 않는다면 무려 지옥의 1/3을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고작해야 심부름이랑 비위 맞추기 몇 번으로 지옥의 실질적인 지배자 자리를 얻어낼 수 있다면 제 영혼마저 저울에 얹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몇 백년간의 끝없는 초과업무와 과로는 그런 사타나치아의 생각을 바꾸기 충분했다.

끝없이 메피스토의 영토를 노리는 두 악마의 협잡질과 내부문제를 홀로 처리하고 있자면 늘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두통에 시달려야만 했으니까.

“오늘도 메피스토님은 그 시덥잖은 구슬만 들여다보고 계시느냐? 용암대장군의 후임을 정해달라는 내 요청은?”

“...오히려 성을 지키던 근위대나 시종들도 물리셨다고 합니다. 업무 서류에는 눈길도 주시지 않으신다고.”

“뭐? 근위대랑 시종들을? 그럼 도대체 누가 궁궐을 지킨단 말이냐!”

“그, 그게. 친구가 올 테니 직접 맞이하고 싶다며 전부 나가라고 명령하셨다고...”

“친구?! 메피스토님에게 도대체 친구가 어디 있다고! 내가 평생을 살면서 천사 같은 악마는 봤어도 메피스토님의 친구는 본적이 없거늘!”

“그걸 저에게 말해도...”

곤란해하는 비서의 표정을 보며 속이 타들어간 사타나치아는 옆에 놓인 액체로 된 두통약을 술처럼 벌컥벌컥 들이켰다.

‘젠장, 그때 내가 아니라 지니 녀석에게 이 직위를 떠넘겼어야 했는데..!’

이제는 누군가에게 이 직위를 떠넘기고 싶었지만, 그의 고행을 옆에서 지켜본 탓에 아무도 이 자리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그도 알고 있다. 이제 자신이 과업무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메피스토가 권태에서 벗어나는 것뿐이지만,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기적에 가깝다는 것을.

“사타나치아님! 사타나치아님!”

그때, 한 전령의 악마가 사타나치아의 집무실의 창문을 두들기며 다급하게 불렀다.

“뭐냐! 또 누가 국경을 침범하기라도 했느냐?”

“그게 아닙니다! 메피스토펠레스님께서 사타나치아님을 부르셨습니다! 지금 당장 궁전으로 급히 오시라는 명령입니다!”

“...메, 메피스토님이?”

사타나치아는 자신의 눈동자가 원형에서 직사각형으로 바뀔 정도로 깜짝 놀랐다. 메피스토가 자신을 직접 찾은 것은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직위를 하사 받은 이후로 처음이었으니까.

“그 말이 사실이냐?! 바알제불의 군대와 전면전 직전까지 갔을 때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던 메피스토님이 나를 찾으셨다고?”

“예! 저도 귀를 의심했습니다만 사실입니다! 메피스토펠레스님에게 직접 명령을 받았으니까요!”

“이, 이런! 당장 마차를, 아니! 마차는 필요 없다! 내가 직접 궁궐로 순간이동하겠다!”

사타나치아는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오랜만에 피가 들끓는 기쁨에 전율하고 있었다.

드디어! 메피스토님이 나태에서 벗어난 것이 틀림없다!

‘내 간청을 드디어 들어주신 거야! 이제 군대의 지휘봉을 잡고 다른 군주들에게 그 힘을 직접 보이시려는 거지!’

전력을 내보일 필요도 없다, 메피스토님이 엉덩이를 움직였다는 그 행동만으로도 다른 지옥은 감히 이 땅을 넘보지 못할 터.

사타나치아는 감히 불경하게도 여신의 이름까지 부르짖으며 누군가가 벌인 이 기적에 감사인사를 올렸다.

사타나치아는 2인자의 자리를 받은 이후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행복이란 감정을 떠올렸다.

*

“지금...뭐라고 하셨습니까? 메피스토님?”

그리고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신기루와 같은 허상처럼 맥없이 흩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못 들었느냐? 지금 짐의 친구를 대접해야 하니 최고의 진미를 대령하거라! 음악대와 무희를 각각 100명씩 부르고!”

“아니, 음악이랑 무희는 필요 없어. 식사하면서 시끄러운 건 질색이거든.”

“그래? 알았어! 들었느냐? 음악대와 무희는 필요 없다고 하니 최고의 진미만 빨리 가져오거라!”

사타나치아가 처음 맛본 감정은 분노였다. 저런 하찮을 일을 명령하기 위해 설치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쓰이지 않은 핫라인을 통해 자신을 불렀단 말인가?

“그, 그런 건 제가 아니라 다른 시종을 불러도 되지 않았습니까...?”

“짐의 권속 중 가장 유능하지 않느냐! 짐의 친구를 대접하는데 무능한 이의 손을 탈 수는 없는 법이니라.”

유능하다, 그 말에 스스로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사타나치아는 이내 분노 다음으로 수치와 경악을 되씹을 수밖에 없었다.

“친구라면...지금 불경하게도 감히 메피스토님의 옥좌에 앉아있는 그 인간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메피스토님?”

“...역시 여기 앉는 건 뭔가 이상했지? 내가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았어.”

“무례하고 불경하구나! 짐의 유일한 친구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네가 오랫동안 보인 충성심이 아니었다면 그 목을 성문 앞에 걸었을 것이다 사타나치아!”

평상시라면 저 말에 겁에 질렸을지도 모른다. 위대한 지옥의 대군주가 옥좌에 앉은 인간의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해력이 상황을 따라가지 못했다.

갑자기 나타난 저 인간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왜 자신에게는 근엄한 말투를 쓰면서 인간에게는 반말을 쓰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옆에서 뻘쭘한 표정으로 서있는 저 인간 여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이, 일단 식사는 준비시키겠습니다. 허나 메피스토님, 제 부족한 식견으로는 지금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따라가질 않습니다만...저 자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말하지 않았느냐! 이 아이는 짐의 친구 아르틴 루드비히다.”

“아니, 이름이 아니라 도대체 어디서 왜 이곳을 찾아 왔는지...”

“짐이 직접 초대했노라, 짐의 친구를 짐의 궁전에 초대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느냐?”

당연히 필요했다. 감히 어느 겁 없는 존재가 메피스토의 궁전에 함부로 발을 들인 것도 모자라, 오로지 이 땅의 지엄한 지배자만이 앉을 수 있는 옥좌에 앉을 수 있단 말인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확실히 말해주마, 아르틴 루드비히는 짐의 친구이자 귀중한 손님, 짐의 모든 권속들은 아르틴을 짐과 같이 대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메, 메피스토님과 같이 말입니까...?”

“그래, 아르틴의 말이 곧 짐의 말이고 아르틴의 뜻이 곧 짐의 뜻이니라.”

사타나치아는 이 순간 최초로 고혈압으로 죽은 악마가 될 뻔했다. 저 말의 의미는 단순히 저 인간이 귀빈이라는 뜻이 아니니까.

‘지금 저 말은 저 인간을 우리 메피스토군의 2인자로 인정하겠다는 말과 마찬가지 아닌가? 수백 년간 충성을 다한 나를 제쳐두고 저딴 인간을...?’

뿌득, 이를 갈았다. 이래서는 안 됐다. 용암대장군을 변덕으로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자신의 권위조차 뺏겨야 한다고? 그것도 인간 따위에게?

“빨리 식사를 가져 오거라, 네 능력을 전부 발휘해서 대접해야 할 것이다 사타나치아!”

“...예. 메피스토님.”

허나 여기서 반발했다가는 용암대장군처럼 죽을 것이 분명했다.

간신히 제 감정을 억누른 사타나치아는 고개를 숙이며 파르르 떨며 물러나야 했다.

지켜만 봤을 뿐인데도 그 분노를 생생하게 느낀 아르틴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품에 안긴 메피스토를 바라봤다.

“헤헤, 아르틴! 이 다음에는 뭐하고 싶어? 금은보화의 호수에서 헤엄치기? 주지육림누리기? 아니면 인간 세계에서는 상상도 못할 쾌락을 누리고 싶어?”

“..음, 그냥 평범하게 대화나 나누면 어때?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옛날이야기도 하고, 계약에 대해 이야기도...”

“알았어! 널 위해 준비해둔 침실이 있거든? 분명 네 마음에 쏙 들거야! 자고 갈 거지? 그렇지?”

“...그, 그럼.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하룻밤 정도는 묵고 갈 수 있지.”

메피스토의 활기찬 목소리에 아르틴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그녀의 말에 따랐다. 그런 아르틴을 향해 카르엔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봤지만 별 도리가 있겠는가.

‘계약 전까지는 메피스토의 기분을 최대한 맞춰줘야지. 괜히 거절했다가 호감을 잃으면 큰일이니까.’

아르틴이 계약을 위해 준비한 전략은, 다름 아닌 최대한 메피스토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는 거였다.

사실 과거에는 이 정도로 어리광을 부리는 성격은 아니였기에, 적당히 장난 몇 개를 당해주고 나면 기분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이건 호의가 너무 과한게 아닌가 싶긴 한데...’

사실 호의라는 말이 무색했다. 메피스토는 명백하게 자신을 좋아하는 모양새가 아닌가? 지금도 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가슴을 짓누르며, 자신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

“자고 갈 거면 대욕탕에서 씻는 것도 좋아! 원래는 유황으로 펄펄 끓이는데 아르틴을 위해 특별히 인간이 들어갈 수 있도록 물로 바꿔놨거든! 같이 씻자, 알았지?”

“...으, 으응. 그래.”

일이 잘 풀려도 너무 잘 풀렸다. 아직 메피스토에게 제대로 된 계약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내지 못했다는 것만 빼면.

“분명 마음에 들 거야 아르틴, 지옥의 음식을 먹으면 인간 세상에 돌아가기 싫을 정도로 맛있다는 말도 있거든!”

“그거, 내가 기억하기로는 지옥의 악마에게 강제로 시집간 처녀의 이야기 아니야? 돌아가기 싫은 게 아니라 못 돌아갔다고...”

“먹을 거잖아. 그렇지?”

“...당연히 먹어야지! 응! 기대된다. 메피스토가 준비한 만찬이잖아?”

“헤헤! 그렇지? 기대해도 좋아!”

허나 함부로 주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자기가 떠들고 싶은 화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하거나, 빨리 계약을 하자고 의사를 보일 때면 메피스토의 눈이 싸늘하게 식는 게 실시간으로 보였으니까.

‘...이러다가 나중에는 같이 자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이유모를 불안감이 느껴졌지만, 아르틴은 애써 메피스토의 풍만한 가슴의 촉감을 느끼며 불안감을 떨쳐냈다. 아직 준비한 선물과 플랜이 있으니 걱정할 것은 없으리라.

...아마도.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