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화 〉 지옥의 대군주 메피스토펠레스 #03
* * *
갑작스러운 메피스토의 말에 내가 멍하니 당황하고 있자 메피스토는 다시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오랜만이라 짐의 감정이 좀 과했나 보구나, 신경 쓰지 말거라 아르틴.”
“... 메피스토, 그건.”
“계약을 하고 싶다고 했지? 좋아. 대신 여기는 마땅한 장소가 아니니 따라 오거라, 너를 위해 준비한 짐의 선물을 먼저 보여주고 싶구나.”
내가 뭐라 입을 열려고 하자, 메피스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끌고 어디론가 데려가기 시작했다.
“잠깐, 계약을 하려면 카이엔도 같이...”
“그 여자는 방금 인간계로 돌려보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원래 있던 자리 그대로 돌려보내 줬노라.”
“뭐? 카이엔을 인간계로 돌려보냈다고? 왜?”
“당연하지 않느냐? 짐을 두려워하는 자가 짐과 대등한 계약을 맺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그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복도에서 했던 대화를 전부 듣고 있었나?
허나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위대한 대악마가 자신의 성에서 나누는 말을 못 들을 리가 없지.
‘...과하게 들떠 보이던 것도, 계속 무엇을 하고 지낼지 묻던 것도 몰라서 그런게 아니었겠네.’
아마 메피스토는 다 알고 있었음에도 모른채 하고 있떤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나를 보며 아직 우리가 친구라고 확신하고 싶었을 지도 모르지.
지금도 내 손을 잡은 메피스토의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는 게 느껴졌기에 조용히 녀석을 따라 걷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메피스토를 따라 걷다보면, 나는 마치 성안에 지어진 성문처럼 거대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어느 문앞에 서게 되었다.
“여기다, 아르틴 루드비히. 이 방이 그대를 위한 짐의 선물이니라.”
“..이 방이? 아니, 방보다는 알현실 아니야? 안에 뭐가 들어 있길래? 창고라도 돼?”
“직접 열어 보거라. 그대라면 분명 기뻐할 테니까.”
묘했다. 지금 내게 단호하게 대답하는 메피스토의 표정은 방금 전 나를 향해 울먹이던 모습은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즐거워 보였으니까.
나를 위해 준비했다니, 도대체 뭘 준비한 거지?
“알았어, 그럼 열어본다?”
여전히 내 오른손목을 꼭 잡고 있는 메피스토 탓에, 나는 왼손을 내밀어 그 거대한 문을 살짝 밀어보았다.
──쿠르르릉!!
나를 위해 준비한 방이라는 말은 진심인 듯, 문은 내 가벼운 손짓에 마치 나라는 존재를 인식한 듯 좌우로 천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어두운 방안에 촛불들이 켜지며 방 내부의 모습을 비추자 내 당혹감은 더욱 커졌다.
“어떠냐? 짐이 준비한 선물이, 그대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이 아니더냐?”
“메, 메피스토. 이건...”
환각이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든 나는 천천히 발을 내딛으며 방안을 살폈다.
그 거대한 문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로 작았지만, 사람이 머물기에는 충분히 커다란 방은 마치 하나의 집과도 같았다.
허나 이 세계에 이런 형식의 집은 존재치 않는다. 이 형식과 구조는 분명....
“..아파트, 그것도 티비로만 보던 고급 아파트 같은 구조잖아? 이걸 어떻게?”
“놀랄 것이 그것뿐이더냐? 아르틴 루드비히?”
당연히 아니었다. 이 방을 가득 채운 하트와 분홍색, 그리고 하얀색의 가구들. 전부 2인용으로 맞춰진 장식들까지.
“전부...내가 현실에서 꿈꾸던 이상적인 집이잖아.”
이건 인간 양희민이 꿈꾸던 러브하우스 그 자체였다.
어두운 반지하의 단칸방에서 먹다 남은 찌개에 소주를 마시던 내가 늘 상상으로 그리던 이상적인 집.
그 습기와 곰팡이로 가득한 방에서, 늘 우울한 취기를 만끽하며 다음날 출근을 걱정하던 양희민의 작은 바램.
‘이런 집에서,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사람과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지.’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램이었다. 돈도 연인도 미래도 없는 나는 현재를 제외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으니까.
당장 다음 달에 나갈 월세와 생활비만으로 빠듯했던 현실의 낙오자에겐 과분할 정도의 환상이니까.
“마음에 든 것 같아 짐도 기쁘구나, 그대를 위해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신경써서 만든 것이다.”
“...메피스토 너.”
“후후, 고마워하지 않아도 좋다. 대신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지 않겠느냐? 짐도 그대와 같이 자기 위해 이곳을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기대 크구…”
“얼마나 내 기억을 반복해서 본 거야?”
“...”
내 말에 자랑스럽게 말하던 메피스토의 말이 멈췄다. 그러나 여전히 그 얼굴에는 미소가 만개해 있었다.
이 위대한 죄악의 군주는 아까 나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대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수에 하나를 더한 만큼.”
그저, 내게 호의가 가득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지옥의 대군주, 계약의 대악마. 가장 강력한 초월자.
메피스토펠레스를 나타내는 그 모든 수식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메피스토와 만난 순간 깨닫고 말았다.
“언제까지 짐을 기다리게 할 셈이지, 아르틴 루드비히?”
그 강대한 기운에 억눌려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있던 나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내 이름을 듣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지식의 파편, 지혜의 열매의 조각을 요구한 그 기개는 짐의 권태를 순간 잊게 만들 정도로 유쾌한 발언이었다.”
“...”
“허나, 발언에는 무게가 있어야 하는 법. 짐과 대등한 거래를 하려는 것도 모자라, 짐의 아끼는 보물 중 하나를 당당하게 요구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할 텐데?”
목소리에 담긴 위압감은 감히 필멸자 나부랭이인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허나, 나는 입술이 찢어질 정도로 꽉 깨물며 정신을 유지해야만 했다.
‘정신 차려 양희민...여기서 기절하려고 바이올렛에게 무리한 부탁을 한 게 아니잖아?’
이 어두운 공간에서 메피스토펠레스와 단 둘이 대면하고 싶다고 부탁한 것은 내 무리한 요구였다. 하지만 바이올렛은 그런 내 요구를 최선을 다해 도와줬고, 마침내 기회를 잡았다.
모든 것은 나를 위해, 친구들을 위해, 그리고 모두를 위한 결정이었다.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대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힘이 분명히 필요하다. 모든 기연을 용사 카이엔에게 몰아주기 위해서는 더더욱.
“지루하구나, 나는 벙어리가 아니라 재밌어 보이는 주제도 모르는 필멸자를 만나고 싶었던 것인데. 이제 됐다. 이 대화의 대가로 그대의 목숨을...”
“...두 가지, 이 계약의 조건으로 드릴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그리고 맹세컨대, 지금 제가 드리는 것은 메피스토펠레스님께서 단 한 번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호오, 지옥의 대군주인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고작 필멸자 따위가 줄 수 있다?”
“네, 그렇습니다.”
말 한 마디를 내뱉을 때 마다, 영혼을 칼로 도려내고 용기와 의지가 박살날 것 같았다.
그야 소설에서도 묘사되기를 마왕보다 강대한 영혼을 지닌 초월자. 고작해야 각성도 못한 떨거지인 양희민이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기적이겠지.
하지만 해야만 했다.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으니까.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태양을 마주한 것처럼 바짝 타버린 입술로 간신히 마른 침을 삼키며, 나는 흥미를 보이는 메피스토페렐스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따.
“...제가 메피스토님에게 드릴 것은. 인간 양희민의 기억과 정체성, 그리고──”
내 말을 들은 메피스토펠레스는, 잠시 벙찐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푸흐! 푸하하하! 꺄하하하핫!!”
전력을 다한 내 말투와 몸짓이 유쾌한 농담이라도 되는 것처럼 처음으로 광소를 터트리며 크게 웃었다.
“재밌구나! 재밌어! 확실히 그 누구도 내게 주지 못한 것이 확실하구나. 특히 뒤에 말한 것은 상상도 못하던 것이라 더더욱 말야.”
눈물까지 흘리며 웃던 메피스토펠레스는, 나를 마음에 든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어진 작은 손짓으로 내 주변을 짓누르던 위압감을 단번에 흩어내 숨을 쉬는 것을 윤허하였다.
“좋아, 그 계약을 받아주마. 물론 나약한 필멸자의 몸으로 감당할 수 없는 권능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만──그대는 이 대가를 어떻게 이겨낼지 궁금하니까 말야.”
메피스토펠레스의 날카로운 손톱이 허공을 일자로 쭈윽 긋자, 공간이 마치 얇은 종이처럼 잘려나갔다.
그 안에 손을 집어넣은 메피스토펠레스는 녹색으로 빛나는 작은 구체를 꺼내, 나를 향해 천천히 허공에 띄워 보냈다.
“받아라, 그토록 원하던 지혜의 파편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대와 짐의 계약은 성립하는 것이다.”
그 신비로운 녹색의 광채를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 악마가 계약으로 나를 속이려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계약에 응하려 한다는 사실을.
──확신이 있다면 해야 할 것은 명확했다.
덥썩, 나는 그 열매를 손에 쥐었다.
동시에 머리의 모든 것이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서 양희민이라는 존재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
“정말 짓궂은 계약이 아닐 수 없지, 설마 시간을 되돌려 계약을 무효로 할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냐?”
“...”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대가 ‘빌려준‘ 기억과 삶은 짐의 권태를 잊게 만들 정도로 재밌었으니까.”
“그랬다면...다행이네.”
나는 회귀가 끝난 후, 양희민의 정체성과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다.
물론 내 정신에는 이미 아르틴 루드비히의 정체성이 내 안에 깊게 자리 잡은 뒤였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애초에 인간 양희민의 존재에 가치를 두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역시 그대는 짓궂구나. 짐에게 줬던 모든 것을 짐에게서 빼앗아 갔으니까.”
“그건...”
“할 말이 있느냐?”
메피스토는 장난스럽게 나를 바라봤지만, 그 속에 담긴 원망에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내가 메피스토에게 계약의 대가로 준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인간 양희민의 기억과 정체성, 그리고 두 번째는...
“처음으로 가진 대등한 친구가 그렇게 가치 없게 죽을 줄이야. 재밌지 않느냐?”
“메피스토...”
“괜찮다. 그래도 이렇게 뒤늦게나마 다시 짐의 곁으로 돌아왔으니, 너그러운 이해심으로 그대의 계약위반은 용서해주도록 하마.”
변명은 듣지 않겠다는 듯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한 메피스토는, 내게 다가와 내 품을 꼭 끌어안았다. 이 온기를 놓치지 않고 싶다는 듯.
“좋다. 아르틴, 계약이라면 해주마, 유일한 친구를 위해서라면 짐은 모든 것을 해줄 수 있으니 말이다.”
“짐의 모든 보물을 달라고 말하면 그리 하마, 불로불사의 영원함을 줄 수도 있다. 얼마든지, 짐은 그대를 위해 줄 수 있다.”
“그대가 단 한 가지만 약속해준다면, 그 모든 것을 그대에게 조건 없이 내어줄 수 있다.”
메피스토는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당장이라고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짐의 모든 것을, 그대의 평생과 맞바꾸지 않겠느냐?”
마치, 그 외의 표정은 내게 보여주기 싫다는 듯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