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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212화 (212/266)

〈 212화 〉 소중한 친구

* * *

“역시 인간은 시시하구나.”

직전에 인간세계에서 돌아온 메피스토펠레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자신의 옥좌에 올라 몸을 기댔다.

5년간 완전히 잊고 지냈던 권태라는 감각이 스멀스멀 몸을 잠식했지만, 위대한 대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퉁명스러운 말투로 중얼 거렸다.

“이번 여흥은 좀 오래 갈 줄 알았더니, 그렇게 재미없게 결말이 날 줄이야.”

확실히 지루하지 않은 5년이었다. 아르틴 루드비히라는 인간을 만나고 나서부터 메피스토펠레스는 처음으로 대등한 친구라는 ‘놀이’에 심취해보았다.

그러고도 지루할 때면, 인간이 건넨 전생의 기억을 드라마처럼 되감아 보곤 했다. 웃기는 세계긴 했다.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가 사실 팔리지도 못한 삼류 소설인 세계라니?

더욱 웃긴 것은, 자신을 양희민이자 아르틴 루드비히라고 생각하는 그 인간이었다. 그런 망상에 가까운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무려 대악마인 자신에게 거래를 요청하다니,

광인의 광대짓이나 다름없는 짓이긴 했다. 전생의 기억과 인격 전부와 혓바닥놀림 만으로 자신에게 무언가를 받아간 녀석은 그 인간이 처음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 녀석도 고작해야 인간이었다는 거겠지. 한심한 필멸자 같으니.”

아르틴 루드비히는 죽었다. 그것도 자신이 지키려고 했던 인간들에 의해. 전신이 갈가리 찢겨나가는 고통을 참던 인간은 끝내 화형대에 올라 전신이 불타는 고통을 느끼며 죽고 만 것이다.

사실 웃음조차 나오지 않은 비루한 최후였다. 고작해야 자신의 수많은 보물 중 하나를 얻기 위해 그 광대짓을 하고도, 격에 맞지 않은 힘 때문에 빌빌거리던 벌레 같은 인간이 아니던가?

게다가 죽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악마와의 계약의 흔적을 발견해서 악마숭배자로 몰렸다던가.

..아르틴은 자신의 숭배자는 아니긴 했지만, 고작해야 벌레 같은 인간들에겐 충분히 그렇게 보이겠지, 제대로 자신을 감추지 못한 멍청이 아르틴의 탓이다. 동료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약점을 보이다니, 악마들은 이해할 수 없는 병신짓이야.

“됐다, 이제는 그 바보 같은 친구놀이도 끝났으니 인간 세계에 간섭할 이유도 없겠구나.”

아르틴 루드비히는 죽었고, 자신의 계약자였던 미숙한 반푼이 바이올렛 퍼플크로우는 고작 해야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했다. 방금 전 자신의 손을 빌려 아르틴을 죽게 만든 모든 인간을 무저갱의 영원한 화염에 쳐박고도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미쳐버리고 말았으니.

아무튼 이제 자신을 인간세계로 불러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아니, 있다고 해도 곧 있으면 마왕을 자칭하는 패배자에 의해 인류는 멸망할 것이 분명하다.

용사를 자칭하던 기분 나쁜 녀석도, 용사를 지탱하던 현자도, 여신의 신탁을 전하던 성녀도 잃은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 죽는 순간 까지 몸부림치는 것 밖에 없겠지.

“그래도, 죽는 순간 까지는 짐의 친구였던 아르틴을 위해 마지막 건배정도는 해줄까?”

이것도 유희의 연장이다. 그렇게 생각한 메피스토펠레스는 손톱으로 차원을 찢은 뒤 자신의 보물고를 향해 손을 뻗어 적당히 잡히는 술을 꺼내 들었다.

“멍청한 아르틴, 그 옹이눈 때문에 진짜 보물들은 고르지도 못하고, 그깟 열매 조각 따위에 병신이 되기를 자처하다니.”

적당히 고른 술이었지만, 이 술은 인간들은 신의 음료라고 부르는 물건이었다. 마시는 것으로 불로를 주고 바르는 것으로 무적이 될 수 있는 기적의 술, 대전쟁 당시에 여신의 창고를 약탈해 가져온 이 보물은 아르틴이 원했던 그깟 열매조각보다 더 귀중한 물건이었다.

신의 음료만이 아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창고에는 인간은 상상도 못할 귀중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그에 비하면 아르틴이 모든 것을 가져가려고 했던 완전체도 아닌 지혜의 열매는 하등품. 제 나름대로는 계약의 악마와 정당한 거래를 했다고 생각한 아르틴을 생각하니 실소가 나왔다.

“아니, 그게 딱 어울릴 지도 모르지, 그 이상의 보물을 필멸자가 탐했어봐야 받아들이지 못하고 돼지처럼 터져 죽었을 테니 말야.”

아르틴 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등신 같이 굴다가 죽은 셈이구나, 역시 그 아이는 광대다. 모든 행동이 바보 같아서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광대.

그렇게 생각하며 메피스토펠레스는 자신의 입가에 신의 음료를 가져다 댔다. 이제 이 술을 마시고 나면 그 인간에 대한 기억도 잊혀질 것이다. 자신을 한 순간 즐겁게 했던 다른 것들이 그랬듯이 말야.

쭈욱, 술병을 들이켰다. 달콤한 힘의 원천이 온몸에 스며들며, 동시에 초월자도 취하게 만드는 강력한 독기가 찾아왔다. 오랜만에 느끼는 취기에 메피스토펠레스의 눈썹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즐겁다. 이 취기는 즐거워. 자신의 몸을 가득 채운 권태마저 잊게 만드는 이 달콤한 감각이 너무도 즐겁다.

“...어라?”

취기에 취해있던 메피스토는 문뜩, 자신의 볼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액체에 당혹감을 느꼈다.

자신의 주사가 취하면 우는 것일까? 수천 년간 살면서 처음 알게 된 술버릇에 당황하면서도 메피스토는 눈을 비비며 눈물을 닦아냈다.

“너무 오래 유희를 해서 그런가, 인간의 감정에 물들기라도 한 건지. 음, 고작해야 유희일 뿐인데...”

유희일 뿐이다. 그렇게 되뇌이던 메피스토는 문뜩 자신의 눈물을 닦던 손목의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조잡한 공예실력에 하찮은 금속인 은 따위로 만들어진 팔찌. 위대한 지옥의 대군주인 자신이 차기에는 너무도 가치 없는 물건이다. 그럼에도 메피스토가 이 팔찌를 차고 있던 것은 인간 아르틴 때문이다.

­“이건, 너와 내가 진짜 친구라는 증거야. 마음에 들어? 지난번에 바이올렛에게 선물한 목걸이 보고 심통이 났다고 해서 준비해봤지.”­

­“멍, 멍청이! 누가 그딴 허접한 쓰레기를 보고 질투했다는 거야?”­

­“어라, 나는 질투했다고는 말한 적 없는데? 진짜 삐지긴 했었나봐?­

­“뭐라는 거냐! 이 벌레 같은 인간이! 감히 지옥의 대군주를 놀리다니!”­

“어라? 어어? 이상하다. 아직 한 모금밖에 안 마셨는데 왜 자꾸 눈물이 나지?”

스윽 스윽, 자신의 눈에서 계속 눈물이 흐르자 메피스토는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 까지 손으로 눈을 비볐다. 혹시라도 녀석에게 들키면 큰일이다. 위대한 지옥의 대군주인 자신이 고작해야 인간 따위 때문에 울었다는 것을 알면..!

“...아, 이제는 들킬 일이 없지. 아르틴은 죽었으니까.”

머리를 후려치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그래. 아르틴은 죽었다. 분명 머리로는 알고 있었을 텐데 이런 바보 같은 착각을 하다니, 녀석과 오래 지내면서 광대짓이 옮기라도 한 걸까.

“안 돼, 이렇게 바보 같이 굴 다간 아스모데우스에게 속을 지도 몰라. 그래. 고작해야 인간 때문에 내가 울리가 없잖아?”

이건 그러니까, 술 때문이다.

그래, 자신의 주사가 바보 같게도 우는 주사여서 그럴 뿐이다. 인간은 관계 없다.

수천 년 만에 처음 알게 된 자신의 주사를 되새기며, 메피스토는 술병을 쭉 들이켰다.

달콤해야 할 술이 어쩐지 너무 쓰게 느껴졌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술을 들이켰다. 술이 부족해서, 창고에 있던 다른 술을 꺼내 들이켰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건 그냥 술에 취해서 주사를 부리는 거니까. 응, 아무리 초월자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바보 같은 메피스토.

“더 좋은 걸 줄걸 그랬나봐.”

자신의 힘을 직접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고작해야 보물고에서도 가장 하찮은 보물 중 하나를 요구한 거였다. 좀 더 대단한 물건을 줬으면 유희를 좀 더 오래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고작해야 보물 하나였는데, 고작해야 물건 하나였는데.

“...아니지! 내가 진짜 계약을 맺지 않겠냐고 했는데 거절한 건 그 멍청한 인간이야!”

문뜩 화가 났다. 자신이 유희에 ‘조금’ 더 심취하고자 직접 계약을 맺는 게 어떠냐고 물었을 때, 그 인간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던가.

*

“인간이...말대꾸?!”

메피스토는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설마 자신의 제안을 인간 나부랭이가 거절하다니?

“미안해 메피스토. 지금 내 몸이 너랑 계약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아.”

“내, 내가 큰 대가를 바라는 게 아니잖아! 그냥 좀 더 같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건데! 그것도 안 된 다는 거야?!”

“미안. 대신 몸이 건강해지면 잔뜩 놀아 줄...쿨럭! 쿨럭!”

“괘, 괜찮아 아르틴?! 여기 물 있어! 천천히 마셔!”

“고마워...메피스토.”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낸 아르틴은 입가를 닦아내며 자신이 건낸 물을 천천히 들이켰다. 지혜의 열매를 섭취한 이후 꾸준히 나빠진 아르틴의 몸은 5년이 지나자 불치병에 걸린 환자와 같은 몰골이 되고 말았다.

당연한 대가이긴 했다. 마법에 대한 재능이 바닥에 가까운 아르틴 루드비히다. 그런 주제에 매번 위험할 때 마다 지혜의 열매의 힘을 빌려 상위마법을 쏟아내니 그 육체가 버티기 힘든 것이다.

중간에 적당한 기연들을 챙겨 스스로도 강해졌다면, 잠재능력을 각성시키기만 했어도 이 정도로 몸이 나빠지진 않았을 텐데, 이 미련한 남자는 용사 카이엔을 위해 모든 힘을 양보하며 성녀와 천사박사의 치료로 버텨온 것이다.

아마 지금 메피스토와 계약해도 스스로의 수명을 더욱 깎아 먹을 뿐이다. 그 사실을 메피스토나 아르틴이나 서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허나 메피스토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같이 놀자고 투정부리지 않을게. 그 대신 저번에 약속했던 대로 우리 성에 놀러가자. 응? 분명 즐거울 거야. 분명! 잔뜩 재밌을 테니까!”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최대한 억누르며 메피스토는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에 아르틴을 위해 만든 특제 마법진이라면, 아르틴의 허약해진 몸으로도 아무런 부담 없이 지옥에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성에는 아르틴을 위해 서프라이즈로 준비한 아르틴을 낫게 해줄 수많은 보물과 약이 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몸을 낫게 해줄 테니 성으로 오라고 조르고 싶었다. 아니, 강제로 끌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처음 아르틴에게 놀러오라는 제안을 했을 때, 아르틴을 위해 무엇을 준비했는지 비밀이라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놀리는 아르틴이 괘씸해 계약의 맹세까지 치른 탓에, 자신이 준비한 것이 무엇인지 아르틴에게 밝힐 수 없는 지금 상황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랬지. 메피스토의 성에 놀러가기로 약속했지 참.”

“그래! 계약의 악마와의 약속이잖아! 설마 어길 생각은 아니지? 만약 어기면 영혼을 뺏어 버릴 테니까...!”

“하하하, 너무 겁주는 거 아니야 메피스토?”

쓰윽 쓰윽, 아르틴의 빼빼마른 손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자, 메피스토는 서글픔이 밀려왔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이를 악 물며 고개를 돌리자 아르틴은 자신이 삐진 줄 안건지 더욱 다정하게 자신을 달래준다.

“그럼 약속할 게 메피스토. 이번에 마왕의 부활을 늦추는 의식이 성공하면 충분한 시간이 있을 거야. 그 때는 정말 지옥에 놀러갈 게.”

“...정말?”

“응, 정말이고 말고. 다른 친구들도 불러서 다 같이 신나게 놀자. 알았지?”

“약속, 약속이다?! 이번엔 절대로 어기면 안 돼?! 나도 준비 잔뜩 할 테니까!”

“하하, 고마워. 가면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고 싶네. 요즘은 위가 아파서 뭘 제대로 먹질 못했으니까.”

“...응, 꼭 놀러오는 거야?”

메피스토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아르틴은 희미하게 웃으며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내걸었다. 아르틴이 직접 가르쳐준 친구 간에 절대 어겨선 안 될 약속의 증표. 그제서야 메피스토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제 소중한 친구를 살릴 수 있어! 건강해진 모습을 보고 잔뜩 놀라겠지? 어쩌면 너무 좋아서 헹가래도 해줄지 몰라! 계약을 하면 더 잔뜩 같이 놀아야지! 다른 선물들도 보면 무척 기뻐할 거야. 마왕? 계약만 하면 내가 물리쳐줄게!

그러니까, 더 이상 그렇게 슬픈 표정 짓지마. 알았지 아르틴?

**

3주 후, 아르틴 루드비히의 화형식이 집행되었다. 죄목은 악마와의 계약이었다.

**

“끄읍...크흐아앙...아르티인...아르티이인....”

메피스토의 울음소리가 악마성에 서글프게 울려 퍼졌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술병들이 산더미 같음에도 메피스토는 취할 수 없었다. 아르틴이라는 인간을 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유일한 친구를.

수천 년간 이어졌던 고통스러운 권태에 마침표를 찍어준, 자신의 심장을 뛰게 했던 유일한 남자를.

“다음에느은...다음에는 더 잘해줄 테니까아...장난도 안 치고오...어리광도 그만 피울테니까아아...”

그 영혼이라도 찾고자 했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마치 죽은 그 순간 누군가 직접 거둬간 것처럼, 아르틴 루드비히라는 사람의 영혼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겁이 났다. 정말로 다른 세계로 가버린 것이라면, 양희민의 세계로 돌아버린 것이라면 자신은 영영 아르틴을 보지 못할 테니까.

“다음에는 더 좋은 걸...더 소중한 걸 줄게...내가 아끼는 모든 걸 줄게...”

다음에 네가 나를 찾아온다면, 내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줄게.

그 어떤 것도 너보다 가치 있을 리가 없잖아?

너는 바보 같아서, 그렇게 귀중한 것들을 받으면 너무 고마워서 내 곁을 떠나지 못할 거야.

위대한 메피스토펠레스는 필요 없어, 그냥 너의 메피스토가 되고 싶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돌아와 아르틴....”

서글픈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메아리처럼 끝없이 울려 퍼졌지만, 그 울음소리를 달래줄 따뜻한 온기는 이제 이 세상에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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