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화 〉 소중한 친구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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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세계에서 돌아온 이후로, 메피스토는 성에 틀어박혔다.
본래도 외부 활동을 하지 않던 메피스토였지만, 아르틴의 죽음 이후로는 모든 외부 활동을 거부하고 침실에 누워 수정구를 들여다 볼 뿐이었다.
그 수정구 안에 담겨있던 건, 아르틴 루드비히가 계약의 대가로 남긴 ‘현실세계의 양희민’의 기억과 3회차의 아르틴의 행적을 담은 기록이었다.
한 순간도 자지 않고, 식음도 전폐한 채 메피스토는 침대에 누워 아르틴의 남은 흔적을 계속해서 돌려봤다. 수정구 안의 아르틴은 당장이라도 자신을 보며 다정하게 웃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 같았다.
수정구의 기록을 너무 돌려본 나머지 수정구에 담긴 기록들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상관없었다. 보물고에 있는 물건 중 일부를 계약의 성좌와 거래해 기록을 복원시켰다. 그깟 고물들 따위 보다 아르틴과의 기억이 더욱 가치 있는 소중한 보물이니까.
아르틴이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여자 취향, 좋아하는 옷, 좋아하는 가구, 하고 싶은 일, 가지고 싶던 것, 먹고 싶던 것, 아르틴이 살아 있을 때는 알지 못했던 것들을 늦게나마 알아가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메피스토펠레스님! 멈추셔야 합니다! 창고에 있던 유물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래서는, 전쟁이 나면 사용할 유물이 하나도 남지...!”
바보 같은 소리로 시끄럽게 구는 사타나치아를 소멸시켰다. 거기에 이름도 기억도 안 나는 부하를 2명 정도 추가로 본보기로 소멸시키자 더 이상 시끄럽게 구는 권속은 없었다.
아니, 사실 그녀에게 실망한 대부분의 권속이 다른 대군주의 휘하로 들어가 충언을 바칠 신하가 남지 않았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메피스토는 그것에 만족하며, 시간의 개념도 잊고 기록을 돌려볼 뿐이었다.
이 시점에서 메피스토는 오직 아르틴과 관련된 것들에만 관심을 주고 모든 것에 무감각해지고 말았다. 허나 상관없었다. 이거면 충분했으니까. 두 번 다시 이보다 소중한 건 가지지 못할 테니까.
──라고 생각했던 메피스토는 어느 날 이상한 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아, 아르틴의 기억이...기록이 없어...?”
수정구에 담겨 있던 기억과 기록이 사라졌다. 그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장 소중한 보물 중 하나인, 아르틴이 직접 만들어준 우정 팔찌도 사라지고 말았다.
“누구냐!! 감히 짐의 보물을 훔쳐간 겁 없는 버러지는!!”
패닉에 빠져있던 메피스토는 생각했다. 이런 짓을 할 놈은 자신의 부하를 자처하던 권속들 밖에 없으리라고, 분명 귀찮게 굴지 못하게 겁을 줬음에도 누군가 자신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물건을 손 댄 것이 틀림없다.
분노한 메피스토는 아주 오랜만에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며 침실의 밖으로 뛰쳐나왔다. 감히 자신의 보물을 건드린 건방진 녀석을 흔적도 없이 소멸시키리라고 맹세하며 말이다.
“메, 메피스토펠레스님? 무슨 일이십니까? 갑자기 보물이라니요?”
“...사타나치아? 왜 아직 살아있어?”
“네? 그게 무슨...”
메피스토는 당황했다. 방에서 나와 분노한 자신을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다름 아닌 제 손으로 직접 소멸시켰던 사타나치아였으니까.
“차, 창고에 있는 보물들은 전부 제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메피스토펠레스님. 아니면 뭔가 사라진 물건이 있기라도 한 겁니까?”
“...이게 왜 제 자리에 있지?”
게다가 자신이 계약의 제물로 바쳤을 창고의 유물들이 전부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아르틴을 떠올리며 마셨던 술도, 아르틴이 계약의 대가로 가져갔던 지혜의 열매도 그대로였다.
그게 전부 꿈이었을까. 당혹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메피스토는 사타나치아에게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전부 설명했다.
평소처럼 권위 있는 말투를 유지하는 것도 잊은 채, 백일몽에 홀려 부모에게 설명하는 아이처럼 말하는 메피스토를 본 사타나치아는 당황하면서도 자신의 주군이 미치지는 않은 것인지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메피스토님. 확인해보니 아르틴이라는 인간은 살아있습니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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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모르지만 시간이 과거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아르틴이 살아있다. 메피스토는 환희와 기쁨에 전율했다.
사타나치아는 아스모데우스의 간교한 계략일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지만, 메피스토는 아무래도 좋았다. 아르틴이 살아 있을 수 있다면 그 누구의 힘이라고 한들 어떤가.
‘이번에는, 이번에는 아르틴을 좀 더 확실하게 지켜줄 거야!’
그리고 아르틴이 살아있다면, 이번에는 아르틴의 운명을 자신이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작 지혜의 열매 같은 저급한 보물이 아니라,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귀하고 좋은 것들을 준다면 아르틴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 때 까지만 기다리자. 아르틴이 다시 계약을 하러 올 때 까지만!”
다행히 기다리는 것은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수정구로 아르틴을 관찰할 수 있었고, 고작해야 몇 년은 악마에게 있어 긴 기다림도 되지 않을 것이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메피스토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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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 지났다. 아르틴은 자신을 찾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 검을 휘두르며 강해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르틴은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상냥했다. 그런 모습에 인간 계집이 아르틴에게 호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쩐지 가슴 한 켠이 시큰거렸다.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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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이 지났다. 여전히 아르틴은 자신을 찾지 않는다. 용사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는 대신 자신이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
아주 가끔 자신의 이름이 아르틴의 입에서 나올 때 마다 마음이 설레였지만, 자신을 찾아오지 않고 떠올리는 데 그치자 매번 큰 실망감을 느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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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이 지났다. 아르틴은 동료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홀로 마왕의 땅을 향해 떠났다.
홀로 마왕의 영역을 떠돌며 가끔씩 혼잣말로 과거의 기억이 남은 듯한 말을 했지만, 여전히 자신을 찾지 않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아르틴이 절망과 우울증에 시달릴 때면 자신과 있던 기억을 행복했던 시절로 떠올려 주는 것이 고마웠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메피스토도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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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이 지났다. 아르틴이 마왕성에 도착했다. 마왕과 만나기 전날 밤, 마왕을 해치우고 난다면 모든 것을 바로 잡겠다고 스스로 속삭였다. 몇몇 처음 듣는 이름 사이에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기뻤다. 아르틴은 여전히 자신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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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틴이 또 다시 죽었다. 하지만 메피스토는 죽기 직전 아르틴이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마지막 말을.
다음번. 그리고 분명 시간이 되돌려졌음에도 자신과의 기억을 회상하던 아르틴의 모습. 메피스토는 확신했다. 아르틴이 현실에서 읽던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아르틴은 같은 시간을 반복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언젠가 자신에게 기회가 올 것 이다.
아르틴을 다시 만날 기회가
아르틴을 지켜줄 기회가.
아르틴을 붙잡을 기회가.
다시 돌아가는 시간 속에서, 메피스토는 다짐했다. 만약 그 기회가 다시 온다면, 그 때는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
메피스토의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을 할 수 없는 걸까. 나도 스스로에 확신할 수 없어 입을 열 수 없었다.
“왜...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거냐 아르틴...?”
그런 침묵에 메피스토는 불안함을 느낀 걸까, 어쩌면 내가 거절할 지도 모르는 생각을 한 건지 내 옷깃을 작은 손으로 꼭 움켜쥐었다.
지옥의 누구보다 강한 대악마의 손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눈에 불안감이 가득한데도, 나를 위해 장난기 어린 미소를 힘겹게 짓고 있었다.
“그, 그렇지 참. 악마인 짐이 말로 떠들어 봤자 믿기 힘들겠지? 정식 계약을 하자구나! 그럼 믿을 수 있겠지?”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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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위대한 계약의 군주 메피스토펠레스가 당신에게 계약을 신청합니다!
계약의 조건 : ‘당신‘
계약의 대가 : ‘지옥의 대군주 메피스토펠레스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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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피스토가 허공에 악마문자를 그려넣자, 계약의 술식이 우리의 주변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내 눈앞에 익숙한 상태창이 떠올랐다.
메피스토가 말한 그 대로의 내용이 적힌 한치의 거짓도 없는 계약의 내용. 고작해야 필멸자 하나의 모든 것을 걸고 지옥의 대군주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불공정 계약.
이 거래를 받아들이면, 내가 메피스토에 얻고자 했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메피스토가 어떤 사기를 끼어 넣어도, 내가 손해를 볼 수 없는 계약이다.
“지옥에 있으면 마왕이 부활해도 죽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다!”
“...”
“네가 원하는 건 모두 구해 주마! 산해진미? 여자? 이런 작은 방 말고 성을 새로 지어주길 바라느냐? 응?”
“....”
“왜, 왜 그러느냐...? 왜 말이 없는 게냐? 짐이 줄 수 있는 것들이 별로라서...?”
허나 계속해서 내가 대답이 없자. 메피스토는 이제 불안증에 시달리는 환자처럼 땀을 흘리며 내 눈을 향해 간절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 알겠구나. 네 여인들이 걱정 돼서 그런 거지? 좋다. 네 여인들도 전부 지옥에 데려오자구나! 응! 저번에 싸운 재수 없는 유니콘도, 이번에 계약한 천사도 전부 데려와도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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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위대한 계약의 군주 메피스토펠레스가 계약을 수정합니다!
계약의 조건 : ‘당신‘
계약의 대가 : ‘지옥의 대군주 메피스토펠레스의 모든 것‘, 히로인들의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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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피스토는 황급히 계약의 내용을 수정하며 내 안색을 살폈다. 나는 여전히 그런 메피스토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부, 부족하느냐...?아, 아하! 친구! 친구들과 동료들을 잊을 뻔 했구나! 아르틴 너는 무척 상냥한 성격이니까 어쩔 수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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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위대한 계약의 군주 메피스토펠레스가 계약을 수정합니다!
계약의 조건 : ‘당신‘
계약의 대가 : ‘지옥의 대군주 메피스토펠레스의 모든 것‘, 주변인들의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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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아직도 부족하느냐...? 그, 그렇구나. 짐이 언제 질려서 마음이 변할지 모르니 걱정이 되는 것이겠지? 걱정 말거라! 그대의 말이라면 전부 들어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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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위대한 계약의 군주 메피스토펠레스가 계약을 수정합니다!
계약의 조건 : ‘당신‘
계약의 대가 : ‘지옥의 대군주 메피스토펠레스의 모든 것‘, 주변인들의 보호, 메피스토펠레스에 대한 명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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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 마음에 들지 않느냐...?무엇을...무엇을 더 원하는 것이냐...? 말만 하거라..짐이, 짐이 전부 들어줄 테니까...제발...”
어느덧 메피스토는 억지로 짓던 미소도 무너진 상태였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얼굴로, 울먹이는 목소리를 간신히 억누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내 입에서 계약을 하겠다는 대답이 나올 수만 있다면, 무릎을 꿇으며 자신의 영혼까지도 전부 내어주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모든 것에 이미 속해있을 지도 모르지.
그런 그녀의 모습에는, 내가 기억하던 메피스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짓궂은 장난으로 나를 골탕 먹여 곤란하게 하면서도, 행복한 미소를 짓던 그 당당한 대악마 메피스토의 모습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아. 그렇구나.’
그런 메피스토의 모습을 보며, 어째서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는지 깨달았다.
“메피스토.”
“으, 으응?! 뭐냐? 계약을 할 생각이 들었느냐? 아니면 원하는 조건이라도 떠올랐느냐? 뭐든 말해 보거라, 전부 들어줄….”
“...미안해.”
다급하게 팔을 휘젓던 메피스토의 몸이 우뚝 멈췄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을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우두커니 나를 바라봤다.
“아르틴...? 뭐, 뭐가 미안하다는 것이냐? 이상한 말을….”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이런 계약은 받아들일 수 없어.”
메피스토의 떨리는 몸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하지만 나는 그렇기에, 더더욱 단호하게 말하며 계약의 술식을 파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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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계약을 거절하여, 계약의 술식이 파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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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창이 떠오름과 함께, 우리의 주변을 감싸던 술식이 연기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어...째서...?”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꽉 깨문채 나를 바라보는 메피스토에게.
“...자격이 없으니까.”
나는 착잡한 심정을 담아 대답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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