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화 〉 소중한 친구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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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에 안겨 30분이 넘게 펑펑 울던 메피스토는, 정신을 차리자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은 듯 잔뜩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러니까..! 내가 꼭 친구가 되고 싶던 게 아니라 아르틴이 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그래, 알겠으니까 진정해 메피스토.”
메피스토 자신이 품위도 자존심도 전부 내던지고 매달려 본 경험은 처음이었겠지, 귀가 새빨개진 게 무척이나 귀여웠다.
“그보다, 인간계랑 연락할 방법은 없어? 하룻밤 머물고 가려면 연락은 해둬야 할 것 같은데.”
“응? 자, 자고 갈 거야? 바로 안 돌아가고?!”
“이 방도 날 위해 준비했다고 말했잖아? 하룻밤 자고 가겠다고 약속도 했는데 그걸 어길 수는 없지.”
친구 계약을 맺은 거랑 별개로 용건이 끝난 내가 바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한 걸까, 메피스토는 행복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거! 이 수정구만 있으면 바이올렛이나 토순이랑 대화할 수 있을거야! 나는 오늘 뭐하고 놀지 잔뜩 준비해둘게!”
“토순이? 아, 알‘미라즈...”
메피스토에게 알‘미라즈의 이름은 토순이로 기억되는 걸까, 나중에 알’미라즈에게 슬쩍 알려줘야지.
신난 발걸음으로 방을 나가는 메피스토의 뒷모습을 훈훈하게 바라보며, 나는 메피스토가 주고간 수정구를 만지작거렸다.
우웅! 마나를 천천히 불어넣자 수정구가 빛을 내뿜은 후 바이올렛의 모습을 비추기 시작했다. 수정구 속의 바이올렛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던 건지 머리가 헝클어진채 우울한 표정이었다.
‘나랑 약속한 걸 어겨서 마음이 아파서 그런 걸까. 이정도로 신경 쓸 필요는 없는데.’
상황이 좋게 끝났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나는 수정구 속의 바이올렛과 정신의 연결을 시도했다. 바이올렛은 내 시도를 알아챘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연결을 받아들였다.
[메피스토? 갑자기 무슨 일인가요?]
“안녕 바이올렛, 인간계는 별 일 없지?”
[......아르틴?]
“맞아, 나 아르틴이야, 지금 지옥인데 메피스토의 수정구로 연락하고 있어.”
내 차분한 설명에, 바이올렛은 자리에서 몸을 번쩍 일으키더니 잠시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다.
[꺄아아아아아악!!!]
경악한 표정으로 비명을 지르며 갑자기 날뛰기 시작했다.
*
“그렇게 돼서, 오늘 하루는 여기서 머무르다 갈 것 같아.”
[그, 그렇구나, 나는, 나는 정말 네게 무슨 큰 일이 생긴 줄 알고...]
날뛰는 바이올렛에게 최대한 차분히 설득을 시도한 결과, 10분이 지나고 나서야 바이올렛은 제정신을 차리고 내 설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마 정신파가 아니라 목소리로 대화했으면 목이 엄청 쉬어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비명을 질러댔는데 괜찮을지 모르겠네.
[그럼...메피스토랑 정식 계약은 안 맺은 거지?]
“응, 어쩔 수 없었어. 힘이 꼭 메피스토만 있는 것도 아니고, 친구를 이용하는 것 같아서 별로 기분도 안좋아서...”
[후후, 어쩔 수 없네. 솔직히 난 다행이라고 생각해. 또 아르틴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잖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니까 너도 참...다른 애들한테도 묵고 간다는 거 전해줘, 알았지?”
[저, 그런데 아르틴. 나 말고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지옥에 간 거야? 설마 알‘미라..]
바이올렛이 뭔가 곤란한 질문을 하기 전에 나는 황급히 수정구를 끊었다.
‘나 때문에 알‘미라즈가 혼나면 미안하니까...’
심증만 있는 것과 실증이 있는 것은 다르다. 바이올렛도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해주고 조용히 넘어가줬으면 좋겠는데..
“아르티인~? 연락 끝났어..?”
“연락은 끝났는...뭐야, 왜 이렇게 게임을 많이 가져왔어? 이걸 전부하게?”
메피스토는 하루가 아니라 3일 밤낮으로 놀 생각인 건지, 자신의 양 손 가득 장난감이나 보드게임을 둥둥 띄운 채 내게 다가왔다.
“아니! 이제 성에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어서 필요할 때마다 가지러 가야 하거든! 그래서 귀찮아서 전부 가져온 거야!”
“그렇구나...응? 아무도 없다고? 아까 그 염소머리 악마는?”
“사타나치아? 돌려보냈지! 우리끼리 오붓하게 노는데 누가 있으면 그렇잖아?”
“그으..런가?”
이 넓은 성에 사람이나 악마 몇 명 있다고 방해가 되진 않을 것 같은데. 본인의 영역이라서 신경이 쓰이나?
─달칵.
“응?”
그때, 문이 닫히며 동시에 뭔가 익숙한 금속음이 울렸다. 현실에서 많이 듣던 소리인데...?
“저기 메피스토, 혹시 지금 들린 소리가 문의 잠금장치 소리야?”
“응? 설마! 아르틴도 참, 어차피 성에 우리 둘 뿐인데 내가 문을 왜 잠그겠어?”
“...그렇긴 하지? 응. 내가 착각했나 보네.”
그 말을 하면서도, 내 직감은 어쩐지 내 이성에 경고를 하고 있었다. 마치 저 문의 잠금장치를 확인해 보라는 듯 말이다.
‘...에이, 친구인데 믿어야지. 나도 참 무슨 착각을.’
나는 머리를 휘적이며 헛된 생각을 지웠다. 친구가 되겠다고 계약해놓고 못 믿는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될 일이다.
“자, 밤새 재밌게 놀자..무척 재밌을 거야...그렇지 아르틴??”
어쩌진 메피스토의 웃음이 사악하게 느껴졌지만, 악마의 웃음이니 느껴지는 당연한 기분일 것이다.
응, 아마도 내 착각이겠지.
*
“아하하하! 하나 둘 셋 넷! 쥬만고! 내가 이겼다!”
“이 주사위 놀이는 몇 번을 해도 모르겠네. 왜 내가 추월당한거지?”
“히히, 아르틴은 아직도 악마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그런 거야! 한 판 더 할래?”
“그러자.”
그 후로, 저녁이 될 때 까지 우리는 다양한 게임을 하고 놀았다.
대부분 사람이 훨씬 많아야 즐거운 파티게임에 가까웠지만, 메피스토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지 게임을 하는 내내 행복해 보일 정도로 즐거운 표정이었다.
“이번에는 이거! 아니, 이거 하자! 너랑 이걸 하는 상상을 하면서 엄청 기대했거든!”
“그래? 나랑 놀 상상을 하면서 엄~청 기대했나보네, 메피스토?”
“노, 놀리지 마! 대악마의 위엄을 지켜줘! 아르틴은 나를 좀 더 두려워 할 필요가 있어!”
“정말?”
“...아니, 미안해애...”
친구 계약 때문 일까, 메피스토의 행동과 장난도 많이 유해졌다.
옛날 같았으면 자신의 두려움을 알려준다며 정신을 파괴하기 직전의 무서운 환각을 보여줬을 텐데.
“저녁은 아까 미처 못 먹은 만찬에 새로운 요리를 몇 가지 추가했어! 잔뜩 먹어도 좋아!”
“우와...아까보다 요리가 더 많은 것 같은데?”
계속 놀던 중, 저녁 시간이 된 건지 배고픔이 느껴지자 메피스토는 차원을 가르더니 그 틈에서 온갖 요리를 식탁 한 가득 차리기 시작했다.
요리의 양이 너무 많아 허공에 그릇들을 띄워야 할 정도였지만, 메피스토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르틴이 원한다면 매일 이런 요리를 먹여 줄 수 있어! 어때?”
“그러면 확실히 좋겠다. 이런 음식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면 무척 행복할 텐데.”
“...헤헤, 그렇지?”
“?”
뭔가 위화감이 들었지만, 별거 아니라며 식사를 권하는 메피스토에 떠밀려 나는 식사를 시작했다.
‘와, 역시 환상적으로 맛있다...’
만든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마법으로 보존처리를 한 건지 갓 만든 것처럼 육즙과 온기가 그대로다.
게다가 메피스토는 허공에 잔을 꺼내더니, 향기 좋은 포도주를 내 잔에 가득 따라주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에서는 술 마시기 눈치 보이지? 내 창고에 있는 인간이 마실 수 있는 술 중 가장 좋은 술이거든! 기분 좋게 쭉 들이켜!”
“와...정말 고마워 메피스토, 안 그래도 가끔 술 생각나서 미칠 것 같았는데.”
나는 기분 좋게 잔에 담긴 술을 쭉 들이켰다.
최고의 술이라는 메피스토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는지, 확실히 입 안에서 느껴지는 풍미가 평범한 와인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으로 풍부했다.
‘신은 인류에게 포도를 줬고 악마는 포도주를 담그는 법을 알려줬다는 말이 진짜인가..’
인간 세계에서 이만한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제국의 황제도 이런 호사는 누리지 못하고 천제에게나 진상 될 물건이 틀림없었다.
“후우, 정말 맛있다 메피스토. 너무 기분 좋아지는데. 이렇게 호화로운 대접을 받아도 될까?”
“헤헤헤, 내 유일한 친구에겐 얼마나 귀한 걸 줘도 아깝지 않은 걸? 더 마셔! 아니, 다 마셔도 되니까 마음껏 취해!”
“그래? 그럼 사양않고 계속 마셔볼까?”
내가 장난스럽게 생도복의 허리띠를 풀자, 메피스토도 즐겁게 웃으며 내 잔에 또 다시 한가득 최고의 명주를 따라줬다.
이 세계에 오고 나서 미식이 몇 안 되는 취미였던 나는, 덕분에 정말 기분 좋게 먹고, 마시고, 메피스토의 시중을 받고 또 마시고──
‘어, 천장이 뒤집힌다.’
기분 좋은 취기가 완전히 머리에 핑 돌자, 몸이 뒤로 고꾸라지는 것이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
“으...머리야...”
머리가 취기로 욱신거리는 감각에 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술을 잔뜩 마신 후유증인지 강력한 갈증이 잠드는 것도 방해하고 있었다.
“물, 물이라도 마셔야...”
덜컥. 몸을 일으키려던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움직이자 갑자기 내 등이 침대에 고정된 것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무엇보다, 이 전개 어딘가 낯이 만이 익다...?
“이런, 벌써 깬 거야 아르틴?”
“메피스토오? 이게 도대체 무스은....어?”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나는 이곳이 메피스토가 나를 위해 만든 침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나 이상한 것이 있다면, 전등이 아니라 은은한 촛불이 주변을 분위기있게 비추고 있따는 점일까.
메피스토는 그 촛불 하나하나에 정성스레 불을 붙이더니, 악마의 꼬리를 살랑이며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동시에, 체구에 걸맞지 않은 풍만한 몸매를 가리던 메피스토의 천옷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천쪼가리가 스르륵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르틴, 네가 살던 현실에서는 이런 귀여운 곳을...신혼집이라고 부른다면서?”
“메..피스토...?”
“양희민의 기억을 몇 번이나 돌려보면서, 나도 이 집이 참 마음에 들더라. 네가 이 집에서 뭘 하고 싶은지를 알았을 때는 더욱 마음에 들었고.”
좆됐다. 상황이 많이 이상했다. 뭐지? 내가 또 무슨 지뢰를 밟은 거지? 왜 이런 전개로 흘러가는 거지?
어떻게든 침대를 벗어나보려고 몸부림쳤지만, 내 몸은 침대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마치 마법으로 묶인 것처럼...?
“소용없어 아르틴. 아까 네가 말했잖아? 네 ‘모든’ 것을 내게 주겠다고, 당연히...네 영혼도 이제 내 소유인걸?”
“메피스토? 자, 장난이 조금 심한데?”
“흐흥..장난이라...”
메피스토는 허공에서 작은 무언가를 꺼내더니 마치 보물처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동시에, 분명 아무것도 없는 내 볼을 무언가가 쓰다듬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래, 좆됐다. 저건 분명 내 영혼이 틀림없다.
“이, 이런 장난은 재미없어, 이런 거 말고 다른 장난을...”
“아까 내가 한 말 기억나 아르틴? 내 유일한 친구에게는 어떤 소중한 것을 줘도 아깝지 않다는 말?”
메피스토가 히죽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전신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위험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전에 시온이 포식자의 눈빛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던 거 같지만, 내 헛소리였다. 저 이글거리는 열망이 담긴 대악마의 눈이야 말로 진정한 ‘포식자의 눈’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당장 눈앞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바라보는 눈.
“그래서, 나는 네게 가장 소중하고...세상에 둘 도 없는 것을 주기로 결심했어. 받아 줄 거지 친구?”
“..그, 그게 뭔데? 일단 뭔지 듣고 정하고 싶은 ㄷ...”
메피스토는 살랑살랑 골반을 움직이며 내게 천천히 걸어와, 침대에 올라타더니 일어나지 못한 채 누워있는 내 몸 위에 천천히 올라탔다.
지금 촛불에 비친 그 표정은 악마적이라는 표현 외에는 어울리는 표현을 찾기 힘들었다.
열망, 욕망, 사랑, 장난, 소유욕, 지배욕, 흥분, 그 모든 것이 뒤섞인 눈으로 메피스토는──
“내 처녀♡”
──진짜배기 악마라는 사실을,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것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