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화 〉 악마와의 신혼 생활 #03
* * *
‘양희민’의 삶은 꽤나 불우한 삶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인생에서 겪을 수 있는 불행들을 하나로 넣어 포장한 불행종합선물 세트 같은 삶이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양희민’으로 살던 시절의 나는 동경하는 것들이 많았다,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았다.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족, 혹은 친구랑 가보기.
인터넷으로 조사한 데이트 명소에 연인과 같이 가보기.
그 외에도 많았지만, 가장 깊이 망상하며 심취했던 버킷리스트는 다름이 아닌 ‘결혼’이었다.
신혼, 모든 연애의 가장 달콤한 종착지면서 가족이 없던 내가 꿈꿀 수 있던 가장 행복한 결말이 아닌가?
드라마나 영화, 소설로 늘 간접 체험만 했던 만큼, 가장 간절히 소망하기도 했었다.
이 좁고 지저분한, 텁텁한 곰팡이 냄새나는 반지하를 벗어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보금자리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말이다.
하지만 내가 상상하던 신혼생활이 이런 건 아니었다.
이런 형태로 이루어지길 바란 건 더더욱 아니었고.
“그러니까 지금...나보고 지옥을 지배하는 공작이 되라고?”
갑자기 들려 온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나는 현실을 부정하고자 하는 간절함을 담아 메피스토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당연히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메피스토가 정신이 나간 게 아니고 서야 진지하게 저런 걸 말할 리가...
“응! 맞아! 제대로 들었어! 아르틴이 나를 대신해 통치자가 되어줬으면 좋겠어!”
있었다. 인정하자. 메피스토는 정신이 나간 것이 틀림없었다.
친구라면서 강제로 침대 위에 묶어 두고 몸으로 유혹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정신이 나가다니, 아르틴도 참! 다른 악마였으면 당장 손가락을 튕겨서 소멸시켜버렸을 텐데♡”
“그게 애교 부리듯이 하트 띄우면서 할 소리야 메피스토? 그리고 내가 정신 그만 읽으랬지!”
“아파! 때렸어! 짐의 작은 토끼야! 아르틴이 짐을 때렸어!”
“...맞을 만 했죠, 뭐...”
그래도 자신의 주군이라는 걸까, 알‘미라즈도 나처럼 이 말도 안 되는 전개에 불만이 있는 건 확실해 보였지만, 차마 제대로 된 반항이나 불만은 표시하지 못하고 말 꼬리를 흐렸다.
그게 불만인지 메피스토가 꿀밤을 맞은 곳을 쓰다듬으며 알‘미라즈를 매섭게 노려보자, 나는 꿀밤을 한 대 더 때리며 알’미라즈를 보호했다.
“또, 또 때렸어..! 대전쟁 이후로 누구 한테도 맞아본 적 없는데...!”
“미안해 메피스토, 나도 손찌검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아. 그렇지만 너희를 사랑하니까 해야 하는 일이야. 이해해 줄래?”
“응♡ 사랑하면 어쩔 수 없지!”
쉽다. 놀라울 정도로 쉽다. 이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물렁한 점이 지금은 가장 큰 문제였기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메피스토, 네가 내 버킷리스트를 이루어주고 싶은 건 알겠어. 그리고 정말 고맙기도 하고.”
“히히, 나도 아르틴이 좋아할 줄 알고 있었어!”
“하지만 이건 아니야. 내가 지옥에 대해 뭘 안다고 공작을 하겠어? 그것도 그냥 출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이유로 떠맡기에는 너무 무거운 자리라고.”
나는 들뜬 메피스토의 기분에 물을 끼얹을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옥에 대해 내가 뭘 알아야 뭘 해보던가 하지..!’
이 세계에서 구른 지 어언 21년이지만, 나는 아직 이 세계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
여신에 대해서도 모르고, 상태창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당연히 악마나 지옥에 대해서도 단편적인 지식 밖에 없다.
그런 내가 지옥의 공작이자 메피스토의 2인자라는 책무를 맡는다? 아마 제대로 된 보좌는 절대 무리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점심시간에 가기로 했잖아? 너무 오래 걸리는 버킷리스트를 할 바에는, 좀 더 가벼운 버킷리스트를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전에 여친하고 노래방 가는 것도 버킷리스트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나는 낙하산 공작의 오명을 피하고자, 방금 꿀밤을 때린 정수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며 메피스토를 달래기 시작했다.
솔직히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통치하겠다고 골머리를 앓는 건 내가 사양이니까.
“후후후, 아르틴, 나도 아르틴이 무슨 걱정을 하는 지는 전부 알고 있다고?”
“그래? 그럼...”
“너무 걱정 하지 마! 네가 대충 명령해도 밑에 얘들이 알아서 잘 해줄 거야! 너는 그냥 명령만 하면 돼!”
저 말과 동시에 알‘미라즈가 이마를 탁 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평상시 메피스토 휘하 악마들의 고충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내가 조금 절망한 표정을 짓자, 메피스토는 내 품에 다정하게 안기며 내 등을 토닥여줬다.
“아르틴, 나는 계약을 대가로 소원을 들어주는 계약의 대군주, 메피스토펠레스야. 그 어떤 불가능한 계약도 대가만 지불한다면 이루어 주는 것이 나의 의무이고.”
메피스토는 방금 전까지 꿀밤에 아파하던 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어르듯이 속삭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네게 너무 많은 대가를 받았어, 너는 내게 사랑을, 우정을, 행복함을 알려준 유일한 친구이자 연인인걸?”
“메피스토...”
“그러니까 나는 네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루어주기 위해 노력할 거야. 네가 이루고 싶던 순서대로 소원을 이루어줄 거라고. 알겠어?”
이렇게 나오니 할 말이 궁색했다. 나는 이미 반쯤 잊은 버킷리스트를 메피스토는 자신의 소원인 것처럼 기억하며, 들어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 마음이 어찌 고맙지 않을 수 있을까. 메피스토의 나를 향한 배려와 사랑이 확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그럼 차라리 청소부나 정원관리인처럼 하기 쉬운 건 안 될까...?”
“안 돼! 그런 건 멋이 없잖아! 짐의 부군은 가장 멋있는 일만 해야 해! 알겠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묘한 고집은 사심이 있는 게 분명했다. 나랑 같이 옥좌에 앉아 지옥을 통치하는 게 메피스토의 버킷리스트인 걸까?
“알‘미라즈.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이대로 가다가는 진짜 내가 섭정이 되고 말 거야!”
“...통치라면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릴게요. 저도 말리는 건 무리에요....”
이럴 수가. 마지막으로 믿었던 알‘미라즈가 내 시선을 피했다.
그 대신 메피스토의 부담스러운 눈빛이 내 심장을 쿡쿡 찔러대고 있었다.
*
“하하하...”
왜 나는 연인들의 어리광에 약한 걸까? 하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연인들이 아니라 그냥 다른 사람에 너무 약한 게 탈이다. 때로는 엄격하게 나설 줄도 알아야 하는데.
“자! 어서 집무를 시작 하거라! 늘 짐에게 일이 많다고 약한 소리를 하지 않았느냐, 사타나치아?”
“그, 그게. 그러니까, 하아..”
만약 현실에 등장하기만 해도 마왕이 없는 마왕군 정도는 단신으로 전멸 시킬 대단한 악마가, 메피스토의 눈치를 보더니 답답한 듯 울먹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분은 메피스토님의 실질적인 2인자인 사타나치아님이세요. 사실상 메피스토 군의 모든 중요한 업무를 맡아서 처리하시는 분이랍니다.”
아, 메피스토 돌보미였구나. 측은지심이 느껴졌다.
“...그럼, 첫 번째 안건입니다. 대군주님의 부군이자 위대한 지옥의 공작, 아르틴...루드비히.”
찌릿, 메피스토가 말을 뭉개는 사타나치아를 노려봤다.
“...루드비히‘님’.”
빵끗, 메피스토가 다시 즐거운 표정으로 돌아와 내 손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우선 루드비히님이 가장 처음으로 처리하실 안건은, 용암대장군 아즈구단의 후임을 정하시는 일입니다.”
사타나치아가 손가락을 튕기자, 내 눈앞에 관련 서류들이 마치 상태창처럼 펼쳐졌다.
“용암대장군 아즈구단의 영지는 일찍이 다른 지옥의 지배자들의 영지와 맞닿은 국경에 해당하는 중요한 영지였습니다. 문제는 지난번 메피스토님이 아즈구단을 숙청시킨 후로, 아즈구단의 가문에서 제대로 된 후계자를 내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숙청이요?”
“그게, 메피스토님의 심기를 거스르고 말대꾸를 해서 그만..”
알‘미라즈는 최대한 나만 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하고자 귓속말로 속삭였지만, 사타나치아라는 염소머리 악마는 2인자 답게 귀도 좋은 건지 그 말을 들은 듯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원래 용암대장군의 가문은 난폭한 성정으로 유명했습니다. 제대로 된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가주를 잃은 용암대장군의 영지는 현재 내전상태에 돌입했습니다. 그 틈을 노려서 다른 대군주들이 세작을 보내며 저희 영토를 노리는 상황. 최대한 빨리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흠, 위급한 일이긴 하네요. 조금 고민할 필요가 있겠는데, 얼마나 빨리 처리해야 하는 사안인가요?”
“지금 바로 당장입니다.”
“네? 제가 알기로 열두 가문은 메피스토의 최측근에 해당하는 간부들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후계자를 정하는 일을 그렇게 급히 정할 필요가 있습니까?”
나는 적당히 회의로 돌려서 시간 좀 벌다가, 다른 사람한테 선택을 맡기고 인간계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메피스토님께서 아르틴 루드비히..님을 위한 선물을 준비한다고 공무를 내팽겨 치신지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애초에 용암대장군이 죽은 지 벌써 1달이 넘었는데 아직까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셈이죠.”
“...1달이요?”
“정확히는 1달이 더 지났습니다. 메피스토님이 더 ’흥미롭다’며 인간계에 강림하시기 전에 벌어진 일이니까요.”
메피스토의 강림? 그 말은, 장미관 사건 때 이전에 벌어진 일이라는 건데, 이걸 아직도 방치하고 있었다고?
내가 어이가 없어서 메피스토를 바라보자, 메피스토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귀찮지 않느냐. 그냥 자기들끼리 정해서 권속으로 임명해 달라고 하면 될 것이지.”
“...”
“애초에 짐이 통치하기 귀찮아서 신하를 두는 것인데, 왜 짐이 신하들의 일까지 관심을 줘야 하느냐? 그 시간에 아르틴의 자는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말지.”
조금 상황의 심각함이 인지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건..
‘왕이 남색에 빠져서 국정도 나 몰라라 내팽겨 쳐놓고 궁전에 틀어박힌 건가?’
그리고 그 남색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하니, 메피스토의 부하 악마들에게 더욱 미안함이 느껴졌다. 내가 그러려던 게 아닌데.
‘..내가 뒷처리를 좀 해주고 가는 게 맞겠지? 골치 아프네 이거.’
결국 메피스토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내 탓이니 만큼, 내가 뭔가를 해줘야겠다고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뿌득 뿌득, 사타나치아는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그것을 내색할 수 없었다.
주군을 망친 저 증오스러운 인간이 눈앞에 있었지만, 인간의 바로 옆에서 자신의 주군인 메피스토가 눈총을 계속 보내고 있는 탓이었다.
‘원래 권태로운 성격이시긴 했어도, 필요한 일 만큼은 부탁하면 처리해주시던 메피스토님이, 저, 저 인간 따위에게 홀려서...!’
문뜩 자신이 진정한 충신이라면 저 인간을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이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충동마저 들었지만, 그런 속마음마저 꿰뚫는 듯한 메피스토의 눈빛에 사타나치아는 고개를 조아리며 분노를 참아야 했다.
“그러니까...흠...이 영지가...장남이”
“확실히...바위산...아스모데우스가...”
더욱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것은, 인간 따위가 뭘 안다고 그의 옆에 서있는 알‘미라즈에게 귓속말을 받으면서 서류를 들여다 보는 것이었다.
‘애송이랑 인간 따위가 진지하게 지옥의 복잡한 서열과 이권관계, 그리고 정치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악마들이란 끝없는 쾌락의 탐구와 욕망의 실현에 이끌려 행동하는 존재들, 그들의 원한관계와 이권다툼은 자신조차 진절머리가 날 정도다.
그런 것들을 최대한 정리한 것이 지금 들여다보고 있는 서류긴 했지만, 글로 정치를 할 수 있다면 도대체 누가 골머리를 앓겠는가?
사타나치아는 스스로의 안목도 확신하지 않았다. 자신 또한 스스로의 이익을 탐하는 악마의 본능을 가진 존재이기에 스스로의 탐욕을 담아 다루기 좋은 후보를 고르려고 할지도 몰랐으니까.
그런데 고작 이제 100살도 되지 않은 악마의 조언을 받아 결정을 한다고? 지니 녀석의 딸이라 직접 비난은 못하겠지만, 모두에게 이롭기 보단 제 가문을 위해 이기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메피스토님의 객관적인 눈이 필요한 것인데...!’
오로지 모든 것에 무관심한 메피스토펠레스님만이 이런 중대한 사안에서, 어떠한 욕망도 담기지 않은 냉철한 판단을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 만약 저 토끼 애송이나 인간의 사적인 욕심을 담아 지옥을 좌지우지 하려고 한다면..지금 내 손으로 저 들을 죽이는 수밖에!’
뿌득, 제 손아귀에 힘을 주며 사타나치아가 그리 결심한 순간이었다.
“사타나치아씨라고 했죠? 사타나치아님은 누가 후보로 적합하다고 생각하신가요?”
“...지금, 제 의견을 물으시는 겁니까?”
“네, 메피스토의 곁에서 대부분의 중대사를 맡으신 분이라고 들었으니까요.”
뭐지. 지금 자신을 시험하는 건가? 사타나치아는 혼란과 분노에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자신을 비꼬려는 건지도 모른다. 2인자라고 불린 주제에, 지금 어디서 굴러들어 온 인간에 밀려난 것이 자신의 처지가 아니던가.
뿌득, 또 다시 이를 갈면서도, 천천히 화를 억누르며 사타나치아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제깟 게 뭐라고 의견을 물으시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고하자면 저는 아즈구단의 남동생인 불의 군주 라그로크가 용암대장군의 자리를 계승하기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불의 군주 라그로크, 대부분의 지옥의 귀족들은 꺼려하는 자였다.
이유는 너무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형인 아즈구단과 함께 대전쟁 당시 최전선을 누볐던 그는 이미 그의 영토를 지닌 군벌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힘과 지위를 지니고 있다.
‘만약 그가 후계자가 된다면, 어지러운 용암대장군의 영토를 수습하는 데 가장 좋겠지만...’
그 경우 오히려 용암대장군 가문의 입김이 이전보다 더욱 커질 것이다.
사타나치아 자신이라면 그런 라그로크를 통제할 자신도 있엇지만, 다른 귀족들은 강대해진 용암대장군 가문에 부담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보다는 장남인 아르구탄이나 차남인 모르고트를 골라 영향력을 깎으려 할 것이다. 그 쪽이 후에 고삐를 쥐기도 좋을 테니까.
‘계약의 악마 가문도 비슷하지. 지니라면 틀림없이 차남인 모르고트를 골라 그를 지원해 용암대장군 가문의 내정 간섭을 하려고 들것이다. 딸인 알’미라즈도 다를 것이...‘
“그럼 라그로크로 합시다. 확실히 괜찮은 선택인 것 같네요. 그렇지 알‘미라즈?”
...음? 사타나치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지금 뭐라고 했지?
“네, 확실히 사타나치아님의 안목이 돋보이는 선택인 것 같습니다. 지금 다른 세력의 견제를 받는 상황에서 영역을 수습하려면, 노련한 상급악마가 자리를 잡는 게 더 좋을테니까요.”
“그렇지, 변경백이라는 자리는 중앙에 위협이 되지 않는 선에서는 힘을 실어주는 게 맞아. 확실히 라그로크라는 악마는 다른 세력과의 분쟁에 강경하게 대처 할 능력도 충분한 것 같고.”
“아즈구단의 두 아들이 반발은 좀 하겠지만 라그로크님이라면 어린 악마 정도는 충분히 자신의 영향력으로 통제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좋습니다. 사타나치아님의 말대로 라그로크라는 악마를 후계자로 정하겠습니다. 이의 없으시죠?”
“어..? 어...?”
사타나치아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전개가 벌어졌다.
어째서 합리적인 고민과 의논을 나눈 끝에 자신의 조언을 받아 결정하는 거지?
“어라, 뭔가 이의가 있으신가요? 아니면 염두해야할 다른 문제라도?”
“아, 아뇨! 아닙니다! 저는 그저 메피스토님의 의견을 듣지 않아도 괜찮을까 싶어서!”
“그렇다는데, 내가 정한 대로 해도 괜찮지 메피스토?”
“응♡ 아르틴이 원하면 임프를 후계자로 임명해도 괜찮은 걸?”
“메피스토도 별 이견은 없는 것 같네요. 다음 안건을 가져와 주세요.”
사타나치아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던 어전회의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원래라면 메피스토가 무관심한 눈으로 자신들의 보고서를 살펴보고는, 그날 기분에 따라 좋을 대로 결정을 했다. 허나 결정권자는 메피스토가 아니었다.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게 귀찮다는 이유였다.
때문에 늘 자신이 총대를 매고 열두 가신의 더러운 이권 다툼 속에서 정책을 결정하고, 이끌고, 온갖 비난과 악명을 감수하고, 끝없는 과로에 시달리는 것이 비로소 메피스토군의 어전회의였다.
특히 이런 중대한 안건이라면, 장장 일주일에 걸친 논의 끝에 그 리스크를 대비한 후 실행되어야 할 텐데...?
“저기, 그럼 그...해당 안건의 결정권자는 아르틴님으로...?”
“음. 제가 하면 뒷수습이 귀찮을 것 같으니, 메피스토가 직접 결정한 걸로 하죠. 그 쪽이 더 편하잖아요?”
“아, 예. 맞습니다. 그 쪽이 처리에도 큰 힘이 될 겁니다! 하하, 메피스토님의 이름으로 안건이 처리 된 건 너무 오랜만이라...!”
“그럴 수 있죠. 그럼 다음 안건 가져와 주실래요? 제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
“아! 예! 알겠습니다! 다음 안건은 바알제불 군과의 국경마찰에 관한 문제인데...!”
그 말에 사타나치아는 고개를 황급히 끄덕이며, 손가락을 튕겨 새로운 서류를 허공에 띄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본래라면 1달은 더 있어야 처리됐을 5개의 안건이 1시간도 안 되는 시간에 처리되자, 사타나치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을 가슴에 품기 시작했다.
‘뭐지...? 이 심장을 간지럽히는 행복한 감정은...?’
그건 바로 사랑이었다.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준 사람에 대해 품을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호의.
사타나치아는 아르틴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