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화 〉 악마와의 신혼 생활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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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간에 걸친 마라톤 회의 끝에, 드디어 어전회의에서 벗어난 나는 메피스토의 신혼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진짜 죽을 것 같다...피곤해...”
“괜찮으세요 스승님? 제가 어깨라도 주물러 드릴까요?”
내가 의자에 축 늘어져 정신이 나간 표정을 짓자, 알‘미라즈가 부드러운 손길로 전신에 안마를 해주며 기운을 복 돋아줬다.
그럼에도 회의의 여독은 영 풀리지 않았다. 그 정신 나간 회의 내용 탓에 그렇겠지.
‘도대체 뭐였을까. 그 회의는...’
“그럼 해당 안건에 대해서는 이렇게 처리를...”
“과연!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아르틴 루드비히 공작님! 공작님의 무한한 지혜 덕에 이 나라를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을 겁니다!”
“아하하, 역시 사타나치아, 짐의 마음에 쏙 드는 말만 하는구나! 우리 아르틴은 최고의 남자라고!”
처음부터 내 말이면 뭐든 좋다고 맞장구를 치던 메피스토는 이해의 범주였다.
그런데, 처음에는 나에게 회의의 안건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아주 신중하게 고를 수 있도록 온갖 미사어구를 붙여가며 설명하던 산양머리의 악마가 점점 맛이 가기 시작하자 어전회의도 점점 맛이 가기 시작했다.
그 폭주의 절정은 중간에 회의의 방향키를 잡아보려던 까마귀 머리 악마가 아무런 말도 못하게 된 이후였다. 아마 높으신 귀족 같던 그 악마도 발언권을 잃자, 아무도 이 회의에 토를 달지 못했다.
먼 옛날 나라를 망친 미녀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는 최대한 합리적으로 판단을 하고 행동해도, 주변이 미쳐 돌아가는 광기가 가득한 상황.
“그건 아마, 사타나치아님도 스승님에게 반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뭐?”
어전회의에서 나와 같이 그나마 이성을 붙잡던 알‘미라즈가, 갑자기 정신이 나간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알‘미라즈, 그런 농담 재미없어. 애초에 그 악마, 여자가 맞는 거야? 내가 보기엔 노련한 늙은 정치꾼처럼 보였는데?”
“그게 무슨 불경한 소리인가요 스승님! 사타나치아님은 저희 메피스토군에서 메피스토펠레스님 다음가는 여걸! 수천 년간 묵묵히 메피스토님을 보필하며 나라를 이끌어온 철혈의 재상이라 불리던 분이라고요!”
철혈의 재상이라니, 내가 봤을 때는 반쯤 광신도에 가까운 모습이던데. 애초에 염소잖아.
“그렇게 치면 유니코르님이나 제가 본모습으로 돌아가면, 스승님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마 못 알아보실 것 같은데?”
“어...? 그, 그렇게 되나?”
“종족의 차이란 그런 거라고요. 보통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이상 다른 종족의 성별을 구분하는 건 무척 어렵다고요. 사타나치아님도 인간으로 변신하시면 스승님이 반할 정도로 미인일지도 몰라요!”
그 말을 들으니 내 정신이 좀 더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여태까지 너무 무분별하게 다른 종족의 여자들을 건드려 버렸나?
“아, 이참에 사타나치아님도 하렘으로 끌어들이는 게 어때요? 그렇게 되면 분명 큰 조력자도 될 거고, 스승님에게 큰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고요! 마침 사타나치아님도 300년 전쯤 남편을 잃었으니 짝이 없을 테니까요!”
“...뭐라고?”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원래 있던 결혼은 정략결혼이었을 테니, 진짜 첫사랑은 아마 스승님일 테니까요? 분명 사타나치아님의 자식들도 두 분의 결혼을 축복해주실 테니까요!”
나는 더 이상의 광기어린 헛소리를 참지 못하고, 알‘미라즈의 말랑한 볼을 쭈욱 잡아당겼다.
“아파! 아파요! 왜 괴롭히는 거에요 스승님!? 역시 처녀가 아니라 문제인가요?! 스승님은 역시 유니콘 같은 면이 있어서 처녀가 아닌 여자는 건드리시지도 않으니까...!”
“제발 헛소리 좀 그만해! 네가 안 그래도 머리 어지러워서 죽겠으니까!”
“히힛, 알았어요. 확실히 스승님이 괴롭히는 맛이 있는 거 아세요? 악마에게는 그것도 매력 포인트인데.”
내가 두통을 호소하자, 알‘미라즈는 앞서 한 말들이 전부 장난이었는지 내 옆에 털썩 앉아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런 알‘미라즈에게 꿀밤이라도 먹였겠지만, 연인들에게 상냥하게 대해주겠다는 맹세를 떠올린 나는 꿀밤 대신 머리를 쓰다듬으며 알’미라즈와 꽁냥 거리기로 했다.
분주하게 주방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메피스토를 느긋하게 구경하며 말이다.
“저기 메피스토, 내가 뭐 도와줄 일 있을까?”
“아니야 아르틴! 내가 전부 다 할테니 아르틴은 거기서 얌전히 기다려! 알겠지?!”
“아, 알았어.”
메피스토가 너무 바빠 보여 뭐라도 도와줄까 말을 꺼냈지만, 단호한 메피스토의 말에 나는 조용히 앉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메피스토의 요리를 말이다.
‘또, 그 요리를 먹게 되다니..’
어전회의가 끝난 직후, 생각보다 길어진 어전회의 탓에 바로 인간계에 돌아가려고 했던 나는 울먹이며 나를 붙잡는 메피스토를 보고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바, 바로 돌아가려고? 밥이라도 먹고 가지 않을래? 응? 아르틴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만들어 줄게! 제발...”
간절한 메피스토의 목소리는 나를 붙잡기 충분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내 버킷리스트를 위해 이토록 헌신하는 메피스토를 보고 어떻게 딱 잘라 안 된다고 말할 수 있겠어.
“그런데, 메피스토님은 도대체 뭘 만드시는 걸까요?”
“글쎄, 나도 그냥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준다고만 들어서...”
솔직히 말해, 아까 그 괴물체 같은 음식을 생각하면 큰 기대는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저렇게 바쁘게 정성껏 요리를 하고 있는 메피스토를 보면, 그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전부 먹어치워야 할 것이다.
그게 바로 친구이자 애인 되는 사람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마음을 불태워라, 각오를 다져 한계를 넘는 거다. 아르틴!‘
나 자신에게 강력한 자기최면을 거는 것이 끝난 직후, 메피스토는 드디어 분주한 움직임을 끝내고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자! 완성이야! 한 번 먹어봐 아르틴!”
“...이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요리를 내려놓은 메피스토, 아침식사 때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던 표정이기에 불안감을 느끼던 그릇의 내용물을 보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샌드...위치잖아?”
“후후후, 어때? 내 회심의 역작이야! 잘 만들었지?”
확실히 놀라웠다. 아까의 요리라고 부를 수 없는 무언가랑은 다르게, 눈앞의 샌드위치는 비명을 지르지도 꿈틀거리지도 나를 공격하지도 않았다.
아주 평범한, 햄과 야채와 계란과 케첩소스가 들어간 샌드위치.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게다가 맛있어. 정말로 평범하게 맛있잖아?”
“헤헤...최고지? 맛있지? 또 나한테 반할 것 같지? 응?”
메피스토의 재촉에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감이 넘칠 만한 요리임은 틀림 없었으니까, 한 가지만 빼고.
‘왜 샌드위치지...?’
나는 샌드위치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따지고 보면 싫어한다.
전에 아그네스가 만들어 준 샌드위치도 잘 먹어 놓고 무슨 헛소리냐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현실에서 살 때부터 샌드위치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따지자면 샌드위치 사먹을 돈이면 조금 보태서 든든한 국밥을 사먹거나, 편의점에서 가볍게 컵라면으로 때우는 걸 선호하는 편이었지. 빵이 무슨 식사가 된단 말인가.
게다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샌드위치는 묘하게 서글픈 느낌이 드는 음식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기피했던 것이 컸다.
‘저번에 아그네스의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는 걸 보고 만들어주고 싶었나...?’
메피스토라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어쩐지 단번에 납득이 됐다. 확실히 그때는 샌드위치를 무척 맛있게 먹었으니까.
“자, 이것도 열어봐 아르틴! 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야!”
“응? 갑자기 선물?”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고 있으니, 메피스토는 내게 작은 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상자는 메피스토가 직접 포장한 건지 뭔가 어설프게 리본이 묶여있었는데, 이 세계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선물상자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포장이었다.
“뭐야 이건? 오늘 무슨 날이야?”
“흐흥, 바로 풀어보면 알 수 있겠지? 지금 당장 풀어서 확인해줘!”
내가 선물상자를 들고 의아한 표정을 짓자, 메피스토는 해맑게 웃으며 식탁에 턱을 괴고 내가 선물을 열어보길 기다렸다.
‘아, 예전에 했던 깜짝 상자 같은 건가? 상자를 열면 안에서 마법 같은 게 터지는?’
3회차 때 메피스토는 내게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것을 좋아했다.
가끔 바이올렛의 이름으로 내게 깜짝 상자를 선물인 것처럼 보내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며 숨이 넘어갈 듯이 웃기도 했지.
‘음, 샌드위치도 맛있게 만들어 줬으니 여기서는 한번 당해주는 게 좋겠지?’
메피스토의 즐거움을 위해, 나는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해 하는 척 연기를 하며 천천히 선물의 포장을 뜯었다.
‘자, 여기서 리본을 풀고 여는 순간, 또 이상한 마법이...!’
“...?”
마법에 대비해서 긴장하던 나는, 상자 안의 내용물을 보자 긴장감이 제로가 되어버렸다.
“귀걸이...?”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은 작은 귀걸이였다.
그것도 장인이 만든 것처럼 아름다운 귀걸이가 아니라, 메피스토가 직접 만든 건지 풋풋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엉성한 귀걸이.
그 귀걸이를 꺼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메피스토는 이런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크게 벌렸다.
“조금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아르틴! 선물은 내가 직접 만든 귀걸이야! 어때? 기쁘지!?”
“...어?”
갑작스러운 축하에 나는 벙찐 표정으로 메피스토를 바라봤다.
나와 메피스토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알‘미라즈도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스, 스승님? 스승님의 생일은 겨울의 축일 아니었나요?! 갑자기 생일 이라니, 제가 잘못 알고 있던 건가요?!”
아니다. 분명 ‘내’ 생일은 겨울, 그것도 북부교단에서 축일이라 불리는 기념일이다.
하지만 사실 그건 정확히 말하자면, ‘아르틴 루드비히’의 생일이다. 이 세계의 ‘나’의 탄생일.
...‘양희민’의 생일은 봄이 만개한 4월의 중순이었다. 처음으로 내가 고아원에 도착한 날이기도 한 4월 20일. 이곳의 시간으로는 몇 주 지나지 않은 날.
“예전부터 늘 생일을 축하받고 싶었잖아? 그래서 내가 꼭 처음으로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마음에 들어?”
나조차도 잊고 신경 쓰지 않던 ‘내’ 생일을, 메피스토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던 거겠지. 그리고 나를 위해서 뒤늦게나마 소소한 생일파티를 준비한 걸 테고.
“...스승님? 지금 우, 우시는 건가요?!”
“으응, 너무 기뻐서 그래 알‘미라즈. 너무 기뻐서...”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통제할 수 없어, 내 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야 기쁠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축하받는 생일이란 게 이런 게 기쁜 것인지 몰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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