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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224화 (224/266)

〈 224화 〉 마왕군의 사정 #02

* * *

북쪽의 땅, 과거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던 이 동토에는 지금 단 하나의 이름이 붙어있을 뿐이다.

마왕의 땅.

300년 전 어느 인간들의 치명적인 실수로 마왕이 부활한 이후, 혹한의 대지가 된 이곳에는 사람이 살지 못한다.

이 땅에 어울리는 단어는 적막이다. 죽음은 언제나 영원한 적막을 의미하며, 이 땅에 마족과 마수 이외의 존재들은 전부 죽음을 기다리는 생명체뿐이기 때문이다.

그 적막의 땅에, 지금 평상시랑은 다른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인간의 땅을 향한 원정, 무려 권속과 군단장이 셋이나 참여하는 대전투가 예정된 원정이다.

수백 년간, 아니 수천 년 전부터 인류에 대한 살의를 키워온 마왕군에 있어서는, 오랫동안의 숙원을 풀어낼 최고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는 음욕의 권속이자, 지옥에서부터 마왕을 따르던 추종자인 릴리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마왕을 봉인하고 방해한 인류에게 본 때를 보여줄 절호의 기회다. 게다가 감히 자신에게 인간에게 패배한다는 수모를 겪게 만든 그 붉은 머리 꼬맹이에게는 더더욱!

[이번 원정 동안, 너는 이곳 마왕성을 지키도록 해라 릴리트.]

그렇기에, 지금 옥좌에 앉아 자신을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하몬에게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인간에게나 보일 법한 첨예한 살기가, 릴리트의 몸에서 천천히 피어올랐다.

“지금, 지금 뭐라고 했어 하몬?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너를 이곳에 유폐할 테니, 마왕성에서 얌전히 성을 지키라고 말했다. 릴리트.]

만약 눈앞에 있던 것이 군단장만 됐더라도, 그녀의 분노를 쉽사리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그녀의 눈앞에 있는 것은 리치 하몬이었다. 마왕군의 2인자. 현 마왕군 최강의 권속.

때문에 그의 공허한 안구에 비춘 안광은 무심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의 발언에 쐐기를 박았다.

“헛소리 하지 마! 왜 나를 집지키는 개처럼 써먹으려고 하는 건데!? 내가 우습게 보여? 고작 인간에게 장난 좀 쳤다고, 카르지오네처럼 날 병신 취급 하는 거야?!”

[품위가 없군 릴리트, 목소리를 낮춰라. 알현실에서 추태를 보이는 건가?]

“품위?! 품위가 중요해 지금!? 지금 나를 이번 원정에서 완전히 배제하겠다고 말해놓고 품위?!”

하몬의 압도적인 정신파에 릴리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소리를 질러야만 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지 않고서는 하몬의 존재감에 억눌려 목소리를 낮출지도 모른다. 그런 추태만큼은 보여서는 안 된다. 자신이 이미 한 번 인간에게 패배한 추태를 보인 직후라면 더더욱.

그런 그녀의 모습을 하몬은 귀찮다는 듯 바라봤다. 하지만 의견을 묵살할 수는 없었다. 지금 와서 마왕군 내에 자신에게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것은, 권속인 카르지오네와 릴리트 밖에 남지 않았다.

나머지 군단장들은 격이 떨어지는 필멸자 나부랭이에 불과하고, 심해의 제독 암모서스는 품행이 부족하다. 아마 마왕군이 정말 몰락할 위기가 된다면, 마왕군을 버리고 떠나도 이상하지 않은 악마.

결국 충신이라 불릴 수 있는 것, 마왕님이 부활했을 때 간부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이 셋이다. 그러니 아무리 경박하고 별 볼일 없는 릴리트라고 할지라도 하몬은 특별대우를 해야 한다.

[...좋다. 설명을 원하는 거겠지? 무슨 설명을 원하지?]

“그야, 왜 나를 원정대에 넣지 않는 지부터 듣고 싶거든? 아카데미에 가는 거잖아? 그럼 나야말로 최적의 인선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릴리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수백 년간 수많은 인간과 영웅을 타락시킨 공로에 기반한 확신.

“아카데미에서 머물고 있는 녀석들의 대부분은 낙오자에 불과하잖아. 전선에 설 수 없어 도망친 탈영병!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게 겁이나 아카데미에 남은 겁쟁이! 그런 녀석들이야 말로 내 전문 분야인 걸 하몬 자기도 모르진 않을 텐데?”

릴리트와 그녀의 권속들은 전투에 어울리지 않는다. 만약 렉스턴이 소환한 것이 릴리트가 아닌 다른 권속이나 군단장이었다면, 샤오메이가 합류하지 않는 이상은 1할의 승산도 꿈처럼 여겨졌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전쟁에서는 다르다, 사람을 홀려 정보를 빼내고 선동을 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얼마나 많은 영웅과 용사들은 그녀들의 손에 타락하거나 폐인이 되어 전장에서 물러나야 했는가.

아카데미의 원정은 그런 릴리트와 그녀의 권속들을 위한 전쟁과도 같을 것이 분명했다.

정신적으로 연약한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그녀가 직접 본신의 권능을 뿜어내는 순간 제정신을 잃고 그녀의 노예가 되기를 자처하거나 스스로 무너질 테니까.

[확실히, 네 권능은 이번 원정에서 큰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그래, 그러니까 나를 데려가! 뭐든 해보일 테니ㄲ...”

[하지만 너는 이번 원정에서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좀 더 확실하게 말해주지. 이번 원정에서 가장 큰 불안요소는 바로 너다, 릴리트.]

“...뭐?”

너무도 단호한 하몬의 독설에 릴리트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 릴리트를 보면서도, 하몬은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네 권능은 이미 한 번 실패했다. 그게 분명 본체의 힘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힘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을 현혹시키지 못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

“그건, 내가 본신이 아니어서...!”

[그 탓에 무리하게 힘을 소비해서 지금은 완전한 상태도 아니지, 네 얄팍한 자존심과 권위가 추락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만약 아르틴 루드비히를 조우하면, 네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다, 당연하지! 네가 고작 그딴 인간 따위에게!”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마라, 지금도 고작 인간에 대한 치욕을 갚기 위해, 감정적으로 내게 반항하고 있지 않은가?]

릴리트는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상태로 제 가슴을 손으로 가렸다. 너무나 날카로운 하몬의 말에, 스스로의 치부가 전부 드러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평정심을 유지해라 릴리트, 지금 우리가 여유가 넘쳐서 셋이나 되는 간부를 아카데미로 보내는 것 같나?]

“...”

[천만에, 우리는 가장 위태로운 상태다. 이미 3명의 권속을 잃었고 마족들의 수준도 예전 같지 않지, 여신은 용사와 성녀를 보냈고 그들을 보필할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반자를 탄생시켰다.]

“그, 그건...용사나 성녀 같은 건 예전에도 나왔잖아? 뭐가 대수라고...”

[지금 우리 마왕군의 수준에는 대수지. 대전쟁의 원수였던 지옥의 악마들과 손을 잡아야 할 정도로 몰린 상태의 우리라면 더더욱.]

“필요한 일이었어! 마왕님의 부활을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변수를 없애야 한다고 한 건 하몬 자기잖아!”

[과거의 마왕군이라면 그럴 필요조차 없었지. 인정해라. 지금의 우리는 나약하다 릴리트.]

릴리트는 머리를 직접 누군가 후려친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교만의 권속을 자청하는 하몬이, 마왕님 외에는 대적자가 없다고 전해지는 저 오만한 마법사가 그런 소리를 하다니.

[그러니 우리는 아카데미를 확실하게 잿더미로 만들어야한다. 아스모데우스의 악마들과의 동맹으로 세력을 조금이나마 복구한 지금이야 말로, 어리석은 필멸자 놈들이 감히 우리의 땅을 넘보지 못하도록 만들 유일한 기회니까.]

하몬의 육신이 옥좌에서 둥실 떠올라, 천천히 무릎을 꿇은 릴리트를 향해 다가갔다.

말라비틀어진 리치의 뼈마디 손가락이 릴리트의 이마에 선을 긋자, 그 선을 따라 릴리트의 피가 주르륵 흘러 그녀의 육신과 바닥을 적셨다.

[나는 기억한다. 우리가 겪었던 그 치욕스러운 수모를, 힘과 권능을 박탈당하고 인간계로 도망쳐야했던 굴욕을]

[이제는 불릴 이름조차 잃어버리신 우리의 주군이 느끼셨을 분노와 수치를]

하몬의 정신파가 가냘프게 떨렸다.

이것은 분노이자 두려움이고, 슬픔이자 부끄러움이다.

한 때 지옥의 가장 위대한 악마들 중 하나였던 하몬은 이제 스스로의 뼈가죽을 뒤집어쓴 산송장에 불과하다.

[나는 소망한다. 먼 과거, 내가 아몬Amon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무한한 영광과 위신을 누리던 순간을 되찾는 것을.]

과거 지옥을 상징하는 72명의 대악마 중 7번째 악마, 그 어떤 대악마보다도 가장 강대한 악마라 불렸던 대후작 아몬의 도래를 소망한다.

[그리고 나는 소망한다. 먼 과거, 우리의 마왕님께서 빛나는 자Lucifer라 불리며 온 지옥을 통치하던, 가장 영광스러운 시절을 되찾는 것을.]

최초의 타락천사이자 최초의 악마, 온 지옥을 평등하게 통치하던 정당한 마왕, 루시퍼의 이름을 되찾기를 소망한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느냐, 대탕녀 바빌론Babylon아?]

“...”

이미 릴리트의 눈에는 불만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주 먼 옛날 수치스럽게 잃어버린 주군과 자신들의 이름을 듣는 것으로, 처음으로 인간계에 떨어졌을 때 느꼈던 모멸감과 절망이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했으니까.

“...알았어, 내가 방해하지 않으면 마왕님을 확실히 부활시킬 수 있다는 말이지? 확실하지?”

[그렇게 될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되도록 만들 것이다. 내가 직접 나설 테니까.]

“...믿고 맡길 게, 복수심 같은 게 아니라, 우리의 대업을. 대업을 위한 모든 것을.”

[흠. 옛 기억이 떠올랐나 보군, 조금 품위를 되찾은 것을 보면 말야.]

평소라면 하몬이 드물게 웃음을 터트릴만한 일이었으나, 하몬은 웃지 않았다. 대신 광오하게 선언했다.

[그리해도 좋을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 나설 테니 말이야]

자신이 이 원정에 직접 참여하여, 자신들의 비원을 이루리라고 말이다.

[용사와 그의 동반자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성장 하더라도, 이번만큼은 어쩌지 못할 것이다.]

이는, 마왕군의 승리선언이나 다름없었다.

***

같은 시간, 아르틴은 자신의 방 한가운데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두 눈은 갈 곳을 잃고 헤매듯이 사방팔방을 향하며 움직였고, 양팔은 패기롭게 하늘을 향해 뻗어져 내려올 줄을 몰랐다.

“저...얘들아? 아직도 말할 생각이 없는 거야?”

“...”

“하아...”

“...후우.”

“내가 괜한 소리를 했다. 그치? 계속 손들고 있을게!”

주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신음과 한숨소리에, 아르틴은 재빨리 눈을 깔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최대한 반성하는 모습을 내보이고 있었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그리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차마 이 공기를 버틸 수 없었으니까.

‘...지옥에 다시 돌아가고 싶다.’

동시에 이런 불편한 상황에 도달하면, 한 번씩 정신도피를 하는 것이 아르틴의 특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르틴은 알고 있었다.

도망친 곳에는 낙원이 없다는 사실을, 애초에 지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알‘미라즈와 메피스토를 제외한 하렘의 모든 여인들에게 도망칠 곳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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