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화 〉 여러분 일단 진정해주세요.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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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틴은 터질 것 같은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는 릴리트의 꿈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수련의 결과물이었다. 과부하를 줘 심장을 터트려 꿈에서 깰 수 있다면, 그 반대도 가능한 법이니까.
하지만 심장이 진정될수록, 지금 이 상황이 깰 수 있는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냉정하게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조, 좆됐다...이번에는 진짜 좆됐다...’
4회차 시절, 마왕성에 돌격했다가 백도어에 실패한 뒤 잡힐 뻔 했을 때도 이렇게 떨리진 않았다. 하지만 아르틴에게는 마왕의 간부들이 자신을 둘러싼 그 때보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최악이라고 확신을 가졌다.
“설명을...들어야 할 것 같네요. 아르틴?”
표정이 굳는 게 눈에 보임에도, 자신을 믿어주기 위해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짓는 아그네스의 상냥한 말과 행동이, 독에 중독되어 죽던 것보다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아그네스뿐만이 아니다. 마리안느 누님이나 천마에 이르러서는 당장 기절하지 않는 것이 용할 정도로 놀랐고, 올가와 샤오메이는 당장에 자신의 멱살을 잡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게, 그러니까...”
애매하게 머리를 굴렸다가는 좆된다. 확신을 가진 아르틴은 얌전히 지옥에서 있었던 일을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
이 자리에 있던 여인들이 전부 모인 것은, 약 3시간 전이었다.
단순히 하렘의 멤버들과 올가 비르투스만 호출하는 게 아니라 아직 제대로 하렘에 합류하지 못한 마리안느와 천마, 그리고 수련을 받고 있던 카르엔과 조르바까지 전부를 호출했다.
아카데미의 학생회도 한 수 접어줘야할 이 굉장한 인물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던 이유는 모임의 주제가 아르틴 루드비히였고, 그들을 모은 이가 다름 아닌 제국의 황녀 아그네스라는 점이었다.
“다들, 이렇게 제 부름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학생회 일을 끝마치고 온 왕녀 마리안느가 도착하자, 낯선 얼굴들과 갑작스러운 호출에 조용히 상황을 살피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아그네스 에르멘가르트, 제국의 보석이라 불리는 위대한 황녀. 어지간한 기사들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공주기사.
그리고 현 아카데미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왕국의 비천한 남작가 출신 탕아 아르틴 루드비히의 약혼녀.
“뭐, 아그네스 네가 부르니까 오긴 왔는데..이게 다 무슨 일이야?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고?”
“그러게요, 만약 아르틴님에 관련된 이야기라고 듣지 않았다면 무례한 요청이라고 거절했을 지도 모른다고요?”
아그네스가 운을 띄우자마자 가장 먼저 의구심을 드러낸 것은 마리안느 왕녀와 성녀 올가.
스스로 하렘에 속할 것을 거부한 올가 비르투스와 아직 하렘에 제대로 합류하지 못한 마리안느는 현재 아르틴의 상황을 알지 못했기에 이 상황이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올가에 이르러선 불만까지 품고 있었는데, 고작해야 먼저 아르틴과 연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정실 노릇을 하며 자신을 오가게 만든 아그네스와 하렘에 대한 불만이었다.
“제가 이곳 아카데미에서 머물면서 카이엔님과 아르틴님을 보필하고 있는 것은 대외적으로 비밀이라고요, 그걸 아시고도 이렇게 저를 직접 오게 만드신 대단한 이유가 있으시겠죠?”
“물론입니다. 올가 비르투스 성녀님.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은 아르틴의 중요한 지인이며, 동료고, 친구이자 연인인 분들이잖아요?”
“...연인이라, 그걸 네가 말해도 되는 거야 아그네스? 제국은 첩실제도는 인정 안하잖아?”
연인이라는 말에는 마리안느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아르틴에게 공략될 때 한번 하렘이 있다는 것은 들었으나, 이야기로만 들었을 뿐 아르틴의 하렘원들과 제대로 대화나 소개를 받은 적도 없기에 조금 낯설었다.
아니, 애초에 아르틴 루드비히가 하렘을? 아그네스랑 그 사이좋은 사랑을 만들어가던 아르틴이? 처음 기억을 되찾았을 때는 도저히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게다가 마리안느가 봤을 때 지금 이 자리는 그런 이야기를 꺼내선 안 되는 자리였다. 각 세력의 수장이나 중요인사들이 대부분 참여한 자리가 아닌가?
“다들 아르틴의 지인인 것은 알겠는데, 이런 자리에서 공표할 이야기는 아니잖아. 안 그래? 만약 네가 제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면, 부마의 여성문제는 큰 약점이 될 수 있어. 제국의 귀족들이 네게 파혼을 요구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사실 다들 이미 연인이라는 말을 들은 만큼 늦은 조언일 수 있으나, 자신이 좋아하는 친한 동생 아그네스의 일인 만큼, 그리고 그 부마의 여성중 하나가 자신인 만큼 마리안느는 아그네스를 돕기로 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왕국의 차기 여왕이 그 문제를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녀를 도우려한다는 것을 알림으로써 말이다.
“걱정은 이해해요 마리안느 왕녀님, 하지만...그렇게 큰 걱정을 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응?”
“아르틴의 하렘에 속한 분들은, 전원 손을 들어주시겠어요?”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특히 천마와 마리안느에게는 매우 큰 충격이었는데, 단 세 사람을 제외한 이 자리의 전원이 그 말에 손을 드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유니콘에...성녀까지...? 저 여기사는 전에 아르틴에게 맞았던 사람 아니야..?”
“맞아요, 시온 이드리스도 저희 하렘의 일원이에요. 아르틴이 직접 받아들였답니다.”
“...왜 마족이 멀쩡히 이 자리에 섞여 있나 했더니, 저 마족도 아르틴의 여자 중 하나라고? 정말이느냐?”
“네 천마님, 그 외에도 악마도 한 명 있는데, 그 아이는 지금 아르틴을 데리러 지옥에 가서 참석을 하지 못했답니다. 세니아 선생님은 일부러 부르지 않았고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악마? 지옥..? 아르틴 그 녀석, 도대체 뭘 하고 다닌 거야...?”
가장 놀란 반응을 보인 것은 그녀들 둘이었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현재 상황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두통을 겪고 있었다.
그나마, 이 난장판 속에서 카르엔은 손을 들지 않았다는 사실에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 심지어 아그네스조차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정도로 말이다.
“...여기에 부르신 분들은, 전원 제가 신뢰를 드려도 된다고 생각해서 이 자리에 부른 겁니다.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르틴을 위해, 그러니 이제부터 설명할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정신을 차린 아그네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르틴이 믿음을 준 사람들, 구해준 사람들, 그리고 아르틴을 지탱해준 사람들.
만약 이 사람들을 고른 게 아그네스 자신이었다면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들을 곁에 두고 지키기로 결정한 것은, 아르틴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아르틴의 선택을 세상에서 누구보다 믿어줘야 하는 사람이다.
“아르틴이 혼자서 감내하고 겪어온 일들을 말이죠.”
아그네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구도 믿기 힘든 아르틴의 일들을.
더 이상 아르틴이 혼자 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아르틴 혼자 희생하지 않기 위해 말이다.
*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몇 번이고 자신의 생을 다시 시작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들은 앞서 나온 하렘이니 악마니 마족이니 하는 이야기를 기억 속에서 잊고 말았다.
이미 해당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그랬다.
아르틴이 결국 대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하기 위해 지옥을 향해 떠났다는 사실은, 회귀에 대해 알고 있던 조르바나 샤오메이에게도 큰 충격이었으니까.
“그, 그게 사실이라고요? 오, 오라버니가 결국 지옥에...?”
“네, 저와 바이올렛도 어제 저녁에 카이엔님에게 들어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알‘미라즈양은 그런 아르틴을 데려오기 위해 지옥으로 떠났고요.”
“그럼 당장이라도 아르틴을 구하러 가야지! 지옥이 어느 곳인데..!”
“진정하세요, 안 그래도 아침에 알‘미라즈양이 곧 돌아온다고 소식을 전했어요. 별 일 없을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아르틴 그 멍청한 녀석이...지옥이 어디라고 함부로...”
허망한 목소리로 독백하는 조르바의 말에, 다들 비슷한 감정을 느낀 것인지 고요한 침묵이 방안에 내려앉았다.
그 침묵은 너무 무거워 함부로 깨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으나,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평상시의 경망스러운 분위기를 벗어 던지고 진지한 눈이 된, 아르틴의 의형제를 자처하는 조르바 펠카스였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뭡니까? 아끼는 동생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하는데, 저라고 얌전히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네, 그런 대답을 원했으니까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은 겁니다. 이 세계의 운명을 단 한 남자에게 맡길 수는 없잖아요?”
“...”
아그네스의 시선이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카르엔 실버소드를 향했다.
지금은 여자의 모습으로 변했지만, 본래라면 혼자서 이 모든 무게를 짊어졌을 지도 모르는 용사. 저 남자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알 수 없었다. 아르틴에 대해서라면 무서울 정도로 맹목적으로 집착하면서도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던 저 남자도 지금은 눈을 감은 채 복잡한 심정을 표정으로 대신 내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틴이 돌아오면 최대한 기쁘고 반가운 표정으로 다 같이 아르틴을 맞이해주면 좋겠어요. 아르틴은 무겁거나 진지한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어하니까요.”
“...이런 이야기를 듣고 최대한 반갑게 맞이하라고?”
“그래야죠. 아르틴은 저희가 늘 행복하고 즐겁길 바랬어요, 마왕성으로 향하는 그 순간에도, 저희에게 웃는 얼굴로 배웅해달라며 부탁하던 사람이었거든요.”
아직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지금의 귀여운 면이 남아있는 얼굴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흉터투성이에 거친 얼굴이이었지만, 자신들을 달랠 때는 늘 예전의 모습처럼 밝게 웃어주던 아르틴의 웃음을.
“어쩔 수 없지, 저는 찬성입니다 여러분.”
가장 먼저 찬성을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조르바 펠카스였다.
“그 바보 녀석은 어릴 때부터 그랬습니다, 자기가 힘들어도 우리한테는 내색 한번 안하고 괜찮다고 웃던 녀석이었죠. 이제 와서 우리가 과하게 챙겨준다고 표정이 굳어지면 녀석도 웃지 못 할 겁니다. 생각보다 마음이 여린 녀석이니까요.”
“도련님...”
“하렘은 정말 상상도 못했지만, 저는 뭘 하더라도 그 녀석을 지지해주려고 합니다. 그 바보가 바보짓을 잔뜩 하긴 했어도, 나쁜 짓을 한 적은 없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왕국의 첩실 제도를 지지하기도 하고 말이죠.”
“...도련님?”
조르바의 마지막 말에 샤오메이의 눈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카르엔이 마찬가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도 찬성, 하렘은 용납 못하지만, 모든 걸 알고도 아르틴 혼자 고생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
“...저도 찬성이에요. 제게는 그깟 세계보다 아르틴, 아니 서방님이 훨씬 더 중요하니까요.”
“찬성해야지 뭐, 여태 누님소리 들어놓고, 이런 거에서 빠지면 의남매라고 할 수 있겠어?”
다들 순차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보면 세계를 구하기 위한 안건치고는 무척 가벼운 결심일 수도 있으나, 그들이 품은 마음은 행동보다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아 그 풍경을 바라본 것은 천마, 린 샹페이였다.
그녀에게는 지금 이 풍경이 옛날의 추억 속에 보았던 광경과 지독할 정도로 겹쳐보였기에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마왕군의 군단들이 인류를 무너트리기 위해 진격하던 100년 전, 자신과 쉔, 그리고 아카데미의 동기들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모두가 한 마음을 모았었다.
계급도, 직위도, 국가도, 종교도 초월하고 모였던 그들 중 이 세상에 남은 것은 우습게도 늘 가장 앞서서 전장에 뛰어들던 그녀라는 사실이, 결정을 더욱 무겁게 느끼게 만들었다.
‘...쉔,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아마 바로 도와주겠다고 했겠지? 당신 같은 바보를 닮은 저 바보 증손녀사위를 내버려 둘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어쩌면 집안의 내력일지도 모른다. 그런 바보 같은 남자에 푹 빠져버리고 마는 것은.
지금도 증손녀가 얼마나 결의에 찬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던가, 문뜩 자신을 만류하던 아버지의 표정이 떠올라 천마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구나, 증손녀가 과부노릇 하는 걸 보고 싶지도 않고, 그런 바보가 한 명 정도는 있어야 세상이 좀 더 살만해지지 않겠느냐?”
“그럼...?”
“못난 제자 녀석 뒷바라지는 해야지, 그게 스승의 의무니 말이다.”
천마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더 이상 앉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아르틴의 짐을 같이 짊어지기로 맹세한 것이다. 이 광경을 보고 아르틴은 무슨 표정을 지을까.
궁금하지만 괜찮았다. 곧 있으면 다들 그 반응을 직접 보게 될 테니까.
‘아르틴, 적어도...당신의 진심은 전해진 것 같아요.’
아그네스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참아야 했다. 아직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니까.
아르틴이 돌아왔을 때, 그 때 같이 울어도 늦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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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후, 아르틴을 맞이하던 아그네스는 우연찮게도 아르틴의 귀걸이를 건드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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