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화 〉 여러분 일단 진정해주세요. #04
* * *
방안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까전의 엄숙한 분위기도, 올가로 인해 열기가 차올랐던 분위기도, 그 이후에 벌어진 어수선한 분위기도 아니다.
“...”
“오랜만이구나, 아니, 오랜만입니다 라고 해야 할까요?”
힐끔, 힐끔.
주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에 내가 말이 없으니, 바이올렛이 타준 홍차를 조용히 음미하던 붉은 머리의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존대를 다 쓰고 그럽니까. 아무리 이복동생이라 해도 엄연히 누님이고 가문의 후계자 시잖아요?”
“겨우 두세 살 차이로 존대를 들을 수야 있겠습니까? 제국의 부마님이야 말로 이 왕국의 보잘 것 없는 하찮은 소귀족에게 존대를 받아 마땅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가족에게 일일이 존대를 들을 생각은 없으니까 편히 하세요.”
“그럴까? 그래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허락하기 무섭게 말을 편하게 놓는 여인의 행동에, 일부의 미간에 알기 어려울 정도로 찡그려졌다.
특히 마리안느 누님의 미간은 매우 선명하게 찡그러져,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도 제국의 황녀의 약혼자, 미래에 부마가 될 남자가 확실한 이에게 고작해야 왕국의 보잘 것 없는 남작가문의 후계자가 말을 놓는 것에 불만을 표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당연히 눈앞에 앉아있는 이사벨라가 나, 아르틴 루드비히의 이복누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게 분명하다.
‘게다가, 아그네스가 대신 맞이하겠다는 것을 만류하고 내가 직접 맞이했으니까 더더욱 그렇겠지.’
내가 가문의 사람들하고 사이가 안 좋은 것을 아그네스는 알고 있던 건지, 평소라면 그녀의 시녀도 만나기 힘들 하급 귀족과 직접 대면을 해주겠다고 권했다.
귀족 사회의 예절에서 상급귀족의 말은 어찌 보면 절대적, 나를 만나러 온 게 분명한 이사벨라가 곤란해 하는 것을 보고 내가 직접 맞이하겠다고 말하고 나서야 이런 자리가 만들어졌다.
‘...나랑 이사벨라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면담 말이지.’
대화를 하겠다고 들어갔던 샤오메이와 천마님, 아까 뺨을 맞아 기분이 최악처럼 보이던 올가, 심지어 사르디엘까지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와 인간으로 변신한 시르카랑 같이 이쪽을 구경하고 있다. 천사랑 마족이 저렇게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건가?
불편하다. 단순히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눈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홍차를 마시고 있는 이사벨라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이고 있으니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저 큼직한 가슴에 비해 담은 쥐꼬리만한 누님이 감히 황녀와 왕녀, 성녀와 천마가 지켜보는 이 자리를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래도 다행이네.”
“네?”
“아카데미에 와서 들리는 소문이 심상치 않아 걱정이 됐거든, 내가 알던 동생은 그런 막나가는 아이가 아니었으니 말이야.”
소문이라, 워낙 찔리는 곳이 많아 감이 잡히질 않는다. 아직도 붉은 광인 칭호가 남은 것을 보면 이상한 소문이 계속 돌고 있겠지.
“그런데 이렇게 다시 만나보니 어렸을 때 총명했던 아르틴의 모습 그대로라서 마음이 참 놓여. 처음 아카데미에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는 그냥 도망치려던 게 아닌가 걱정했거든.”
“...그렇게 걱정하신 것 치고는, 제가 방에 틀어박혔을 때는 찾아오지 않으신 것 같은데.”
“너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우리 아버님 눈치를 보는 지. 네가 틀어박힌 후에 그냥 내버려두라고 가문 전체에 명령하셨거든.”
“뭐, 그럴 것 같기는 했습니다.”
오랜 만난 것 치고는 시큰둥하고, 친밀하지도 않은 대화. 하지만 그 대화 내용을 주변 사람들은 하나하나 흥미 깊은 얼굴로 듣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한 번도 가문이나 가족에 대해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저 적당히 사이가 좋지 않다고 추측할 뿐이겠지.
다만 조르바와 샤오메이의 표정은 매우 복잡해 보였다. 두 사람은 내가 빙의하기 전 아르틴이 겪었던 수모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특히 샤오메이는 내가 1회차 때 겪었던 일을 곁에서 전부 지켜봤으니 표정이 곱진 않았다.
“그나저나 놀랐어, 설마 그 시온 이드리스경이 네 곁에 있을 줄은 몰랐거든. 렉스턴 도련님이 사고를 친 후에 행방이 묘연했다는 건 들었는데...”
그 말에 가뜩이나 안색이 나쁘던 시온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낯빛이 되었다.
조금 안타깝게 보이긴 했지만, 아르틴 루드비히의 어린 시절을 조진 장본인 중 하나 아닌가? 업보라고 생각해 적당히 모른 척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렉스턴 그 새끼가 사람을 쓰고 버리더라고, 안쓰럽길래 내가 주웠지. 이상한가?”
“대단하네, 나 같으면 절대로 용서 못할 것 같았거든. 시온경도 그렇고, 나도 말이야. 그래서 이렇게 만날 기회를 줘서 더욱 고마워.”
“...뮤리스 그 여자였으면 안 만났죠, 이사벨라 누님이니까 그나마 만나준 겁니다.”
“가해자만큼이나 미운 게 방관자라고 하잖아? 나는 늘 철저한 방관자였으니까 같이 미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내가 듣기로는 이사벨라는 어린 시절 대외적으로는 철저한 방관자의 입장을 취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라는 것도 조르바에게 일찍이 들은 바가 있다. 본래는 과도한 아버..루드비히 남작의 학대를 만류하려고 했지만, 결국 말리지 못하고 굴복했다고 하던가.
‘이해 못할 건 아니었지...고작해야 초등학생에서 중학생 되는 여자아이가 가장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니까.’
...뭐, 겨우 그 정도로 이사벨라를 용서한건 아니지만. 그걸 일부러 밝힐 필요는 없을 거다.
“가해자도 용서했는데 방관자는 용서 못할 게 뭐 있겠어요?”
“흐엑?!”
“...용건이 뭔지나 말해주세요. 잡담하기 좋은 분위기도 아니잖아요?”
“고마워, 그럼 미사어구는 생략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시온의 얄팍한 비명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이사벨라를 바라보자, 이사벨라는 최대한 의연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눈을 바라봤다.
“아버님이 내게 부탁하셨어, 너랑 직접 만날 자리를 만들어달라고.”
“그 영감이 누님에게 부탁을?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겠지. 아직도 그러고 살아요?”
“...아무튼, 렉스턴 백작님께서 아카데미에 오셨거든, 너랑 만나서 사과할 자리를 가지고 싶으신가봐. 그런데 어쩐지 뮤리스는 골드 기숙사의 출입을 거부당하고 있어서 대신 내게 부탁하셨고.”
그 말에 흘깃 아그네스를 바라보자, 아그네스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역시 우리 하렘 쪽에서 손을 쓴 건가?
‘저번에 기숙사 근처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이유가 그거였군.’
지난번 장미관 사태 이후로, 와이즈 백작가는 사태의 모든 책임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외동아들인 렉스턴에게 후계자의 자격을 박탈했다고 들었다.
그와 동시에 피해자들에게 가주인 백작이 직접 사과와 보상을 하겠다고 선언했다고는 들었는데, 그게 내 차례가 된 건가.
‘사과라...’
고민은 짧았다. 애초에 이건 고민할 사안도 아니었으니까.
“싫습니다. 애초에 용사의 대리인으로써 할 일도 바빠서 수련할 시간도 부족하거든요. 그렇죠 천마님?”
“응? 아아, 그렇지. 응.”
“애초에 사과나 받자고 격식 차려가며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아니고요. 나중에 오다가다 만날 일 있으면 그때 보자고 전해주세요 누님.”
나는 단호하게 거절을 밝혔다. 애초에 그런 영감탱이랑 백작 만날 시간 있으면 연인들하고 데이트를 가겠지.
..물론 누님의 입장이 곤란해 질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대화할 기회를 만들어준 것 만으로도 가족으로써 예는 갖췄다고 본다. 이 이상으로 내가 양보할 필요는...
“알았어. 그렇게 전할게.”
“...더 부탁은 안해요? 어쩌면 누님이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내가 무슨 염치로 그러겠어? 나도 그냥 아버님 부탁 받아서 온 거고, 네 얼굴이나 한 번 보는 게 목적이었거든. 나 같아도 만나기 싫을 텐데 어떻게 강요하겠니.”
그렇게 말하는 이사벨라의 표정은 어쩐지 후련하기까지 해보였다. 조금 전까지 왕녀나 황녀 같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떨림을 감추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도 힘들 정도로.
“다행이야. 아카데미에 오기 전이었으면 거절 못 했을 텐데. 역시 우리 가문은 네게 집이 되어주지 못했나 봐.”
“...”
“차는 잘 마셨어. 멀리서나마 용사님과 네 여정을 응원할게. 잘 지내, 아르틴.”
자리에서 일어난 이사벨라는 내게 작별인사를 고하며 밝게 웃었다. 그 모습이, 어째서 그녀의 마지막 모습과 겹쳐 보이는 걸까?
“도망가, 샤오메이랑 단 둘이 최대한 멀리 도망쳐. 너희 둘이라면 분명 마족에 잡히지 않을 거야.”
“나? 나는 가문을 지켜야지. 가주가 가문을 버리고 어딜 도망치겠니?”
...최후의 순간에 방관자로 남지 못하고, 내게 사과를 하던 누이의 표정은, 저렇게 후련해 보이진 않았지.
...에휴 시발.
“누님.”
“응? 왜?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문을 열고 나가는 이사벨라의 뒷모습을 불러 세우자, 이사벨라는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쳐다봤다.
정말로 아무런 미련이 없어 보이네, 괜히 불렀나?
“몇 주후...쯤에 시간이 좀 빌 것 같은데, 그 때도 아카데미에 있으면 한 번 보겠다고 전해주세요.”
“...아르틴?”
“마음이 바뀌었어요.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그따위냐고 따져줘야 성질이 풀릴 것 같거든요.”
너무 어색한 변명이었을 지도 모른다. 지금 나를 보고 있는 누님의 표정에 다시 미안함이 깃들고 있는 것을 보면 내 의도를 알아차린 걸 테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그러니까...”
“됐으니까 가서 전해요. 이렇게 말 안하면 그 망할 영감탱이, 기숙사 앞에서 잠복이라도 할 것 같던데 정말 만나면 얼굴에 주먹질 할지도 모르니까.”
이건 어느 정도 진심이었다. 그 집요하고 속 좁은 영감이 순순히 물러 날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나에 대한 이야기에 아버지를 두들겨 팬 패륜아라는 소문이 하나 덧붙여지겠지.
아그네스와 하렘의 연인들을 위해서도, 카르엔과 용사활동을 하기에도 썩 좋지는 않은 소문일 거다.
“...고마워. 그렇게 전할게.”
이사벨라는 내 말을 듣고 잠시 그 자리에서 서 있다가, 이내 내게 고개를 한번 숙인 후 문을 닫고 나갔다.
“이봐...괜찮겠어, 아르틴?”
“...에이 씨, 뭐 어때. 설마 백작 앞에서도 그 영감이 지랄하겠어 조르바?”
“혹시 모르잖냐. 그 괴팍한 남작이 무슨 기행을 부릴지. 애초에 자기 딸을 이렇게 보내는 걸 보면 정상은 아니잖아?”
“그러면 샤오메이 데려갈까? 그 영감, 샤오메이가 노려보면 맨날 기죽어서 말도 못했잖아?”
하하하,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주변을 둘러봤는데, 나를 따라 웃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꽤나 회심의 개그가 먹히지 않아 어쩐지 서운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여기서 이사벨라 누님에게 단호하게 선을 그으면 시온이 뭐가 되겠어? 나도 생각이 있어서 받아들인 거니까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
“도, 도련님...”
“됐으니까 다들 모인 김에 회의나 시작하자, 이번 이벤트에 대해서 대책 준비한 사람?”
분위기를 바꾸려는 내 모습에, 사람들은 한숨을 내쉬며 내 의도에 순순히 따라줬다.
아마 내가 쭉 숨겨왔던 가족사에 대해서 무어라 떠드는 게 부담스러웠던 걸 테지. 실제로 나도 내 친구나 사람들이 내 가족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는 걸 원치 않기도 하고.
그렇게 회의를 시작하려고 사람들이 자리를 고쳐 앉기 시작할 때, 마리안느 누님이 내게 다가와 귓속말을 걸어왔다.
“저기, 아르틴..”
“응? 무슨 일이야 누님? 갑자기 귓속말을 다하고?”
“그, 누님이라는 칭호는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도 쓰는 거야?”
“...네?”
“그게, 네 누님은 나잖아? 그런데 괜히 다른 사람에게 누님 거리는 걸 보니까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자신의 소박한 질투심을 드러낸 마리안느 누님은, 내 허망한 시선을 마주하며 발그레 볼을 물들였다.
“...그럼 이사벨라 보고는 이제 누나나 누이라고 부를게요. 누님은 마리안느 누님만 불러주고. 알겠죠?”
“..흥! 당연히 그래야지! 우린 피보다 진한 의남매잖아. 그렇지?”
“아니, 친동생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런 소리를 해요?”
어쩐지 오랜만에 만난 누님의 상태가 영 좋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아이고 골이야.
* * *